제 1205화
지구의 연합이라 하면 UN을 꼽을 수 있지만, 각성자와 흉신이 나타난 이후 지구의 흐름양 상은 조금 여러 면에서 바뀌었다.
한국의 대통령은 오랜만에 소집된 국제회의에 직접 참석한 뒤로 표정이 어두웠다.
“각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어두운 표정을 하고 돌아온 대통령을 맞이하던 신임 비서실장이 조심스레 묻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비서실장.”
“예. 각하.”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쟁을 치렀습니다. 맞습니까?”
“예.”
“전쟁이란 참 참혹하지요.”
한때 한국의 대부분이 날아갔고 밀릴 대로 밀린 상황에서 겨우 수복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여러 국가에서 흉신이라는 괴물로 인해 점점 밀리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야 그런 것들이 다 해결되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하건만.
“각하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선전포고라도 받으신 것 같습니다.”
비서실장의 질문에 현 대통령은 고개를 들었다.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들은 군인이 아니었을까요.”
“무슨…….”
“타세계에서 넘어온 자들이 명백한 교란과 혼란을 목적으로 군사도발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들이 넘어올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에 비해 반대로 저희가 그들을 추적할 수단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위치.
아무리 전력의 차이만 놓고 보면 화기까지 발달한 지구가 우세하지만 이런 식으로 게릴라성 공격을 당하면 극심한 소모전으로 이어질 뿐이었다.
“설마 티오니스에서…….”
“그렇지않아도 그런 이야기는 나돌고 있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떨 거 같습니까.”
“제가 들은 티오니스 성자의 성정을 생각하면 전쟁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누군가의 목숨을 팔진 않겠지요.”
굳이 그럴 필요 있나.
“그냥 지구로 넘어와서 하나하나 직접 다 때려 부술 겁니다. 그는 그런 힘이 있는 존재니까요.”
그만한 힘을 지닌 존재가 어떻게 저렇게 소박한 삶을 사는지는 잘 모를 일이지만 그게 된다면 그가 계속 그래 주길 바랄 뿐이었다.
* * *
분쟁지역은 분쟁이 자주 벌어지는 장소인 만큼 본래라면 절대 진입하는 게 불가능하다.
“여긴 출입금지 구역이다. 누구지?”
“제국 수도에서 왔습니다. 감사관 슈네리아 레켄이라고 해요.”
“슈네리아 레켄? 아…….”
간혹 타국에서 망명한 귀족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병사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탐탁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따로 명령 받은 건 없지만. 일단 들어오시오. 그래도 꼴에 감사관이라고, 쯧.”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문이 열린다.
“당신이라면 들어가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겠죠.”
“그 외에도 어려울 건 없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어요. 비록 조롱당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들이 대놓고 저 업무를 무시하진 못해요.”
나차 제국의 일반 귀족보다 더 낮은 취급을 받는 것이 이들이다.
특히 레켄 공작가는 과거 한때 저항군에게 지원을 한 전례가 있어서 그 대우가 극도로 나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의 부대를 관리하는 대장에게 감사관의 명목으로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어볼게요. 당신은…… 곁에서 기다려 줄 수 있나요?”
그녀의 말에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미묘하게 밸런스가 어긋나 있는 건 사실 핑계에 불과했다. 레이나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 현 내 상태를 최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그저 자중하고 있는 것일 뿐.
마음만 먹는다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괜히 복잡하게 갈 거 없어요. 바로 그곳으로 가서 정보만 얻어오면 되니까요.”
어떤 면에선 저항 없이 입장하는 것이니 오히려 슈네리아의 제안도 나쁘진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자고.”
그 외에도 그녀가 마음에 들어서 지지해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레이나는 대체 어디까지 도망치려는 것일까.
평소처럼 그녀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애석하게도 불가능했다.
레켄 가문의 아가씨에 대한 소문은 여기저기 퍼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슈네리아의 부친은 과거 제국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지만 그녀 본인은 동생들을 살리기 위해 부모를 부정하고 뇌물을 바쳐 살아남았다.
잦은 전투로 스트레스가 상당해 보이는 병영을 지나 부대장이 있는 막사로 향한 그녀는 이내 그 안에서 여인 둘을 끼고 술을 마시고 있는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어엉? 뭐야. 내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코가 벌게질 정도로 취한 그는 양손에 낀 여인들을 손사래 쳐 내보낸 뒤 인상을 찡그렸다.
“제국 감사관 슈네리아 레켄입니다. 조사할 일이 있어서 직접 왔어요.”
그 말에 레켄이라는 이름을 입안에 이리저리 굴린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기억은 났군.”
겉으로도 슈네리아의 직급이 그보다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슈네리아의 몸을 스윽 훑었다.
예쁜 외모와 남자의 시선을 끄는 몸매 때문일까. 그의 얼굴에 음심이 순간 일었다.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훑어대는 사내의 행동에도 슈네리아는 익숙한 듯 그저 침묵했다.
“호오. 그래. 잘나신 아가씨께서 이런 외곽엔 무슨 일이실까? 설마 나와 질펀하게 놀려고 오신 건가?”
술병을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난 그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곳에 어떤 인물이 왔었던 거로 알고 있습니다.”
“자자. 그런 자잘한 건 내버려 두고 이리와. 이리와.”
그리 말하며 슈네리아의 등을 떠민 그는 자리에 앉은 채 자신의 다리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명백한 무시였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그만…… 두세요.”
대놓고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고 다리에 손을 뻗는 그 행동에도 그녀는 분함을 애써 삼킬 뿐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계속 이러시면 제국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낄낄. 제국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 창녀 주제에 기만 살아선…….”
모멸과 멸시.
망국의 귀족이 받는 취급이야 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내게 눈치를 보내어 절대 움직이지 말라 말했다.
“우선 대답부터 해주세요. 한 여인이 왔을 거예요.”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레이나에 대한 생김새에 대해 읊었다.
그러자 대장의 손이 순간 멈칫하더니 뭔가 떠오른 듯 인상을 찡그렸다.
알고 있구나.
“흐음……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는 짐짓 모른 척 너스레를 떨었다.
“알고 계시잖아요. 빨리 말씀해주세요. 그녀를 찾아야 합니다. 명령이에요.”
“그놈의 명령…… 명령…….”
그렇게 말하던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강하게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꺅!”
가녀린 그녀는 그대로 그에게 끌려들어 갔다.
“글쎄, 난 모르겠는데.”
“거짓말하지 마세요!”
분명히 알고 있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녀의 외침에 그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고. 아가씨. 어차피 살아남기 위해 이 귀족 저 귀족에게 아양을 부려댔겠지? 이번에도 그렇게 하는 거야. 나와 하룻밤을 보내면 내가 그 여자의 소재에 대해 알려주지.”
“그건?!”
“알고 있지? 여기 부하들은 전부 내 부하야. 네년 같은 존재가 백날 위협해봐야 그놈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면 그쪽도 위험하잖아. 안 그래?”
고귀한 귀족가의 아가씨가 창녀 취급을 당한다는 게 엄청난 모멸임을 알면서도 그녀는 애써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니까…… 오늘은 얌전히 내게 안기면…….”
그렇게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던 순간.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기왕이면 호위는 내보내지 그러나? 젊은 놈과 단둘이 온 거 같은데. 뭐, 둘이 사이가 그렇고 그런 건가?”
비웃음이 담긴 질문을 내게 던져왔다.
이에 슈네리아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끼고 내게 절대 나서지 말라 눈치를 보냈지만…….
그럴수록 부대장의 행동은 더욱 악랄해져 갔다.
이윽고 내가 보고 있는 와중에도 그가 슈네리아에게 마수를 뻗으려던 그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목적을 위해 수치와 모멸을 감당하려는 멍청한 소녀의 행동거지를 말이다.
성녀라고 리나 성녀처럼 모두가 이타적이진 않지만, 이 성녀 후보께서는 조금 멍청하고 순진해 빠진 구석이 있었다.
내가 한발 나서자 그녀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 맡겨달라는 시선. 다만, 믿고 맡긴 결과가 이래서야 이쪽도 화가 날 수밖에.
따악!!
손가락이 허공에 튕겨진다.
터엉!!!
동시에 그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의 벽에 튕긴 것처럼 튕겨 나갔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커헉…… 끄흑…….”
“슈네리아.”
내 부름에 그대로 경직된 듯 서 있던 슈네리아가 주저앉아버렸다.
매몰찬 멸시와 거친 처우, 알면서도 공포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일을 겪은 탓에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그런 그녀를 한심하게 보며 내가 말했다.
"이게 네 계획이냐? 이런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도 못 하는 주제에?"
내 타박에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수치심에 고개를 숙였다.
결과적으로 이곳까지 아무런 저항 없이 금방 들어왔다. 다만 협조하지 않는 놈에게 숙여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죽일까? 죽이자. 그래 봐야 별거 없는 인간이잖아.
고작해야 외곽 차원의 생명체잖아.
문제 될 건 없어.
마치 충동처럼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허우적거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거기에 휩쓸릴 정도로 나약했던 적은 없다.
포식의 권능이 폭주했을 때도 어느 정도 제어했던 내가 고작 충동하나를 제어하지 못할까.
나는 천천히 다가가 쓰러져서 기침을 하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네…… 네놈! 감히 내가 누군지 알…… 커헉?!”
자신이 갑자기 공격당했다는 사실에 격분한 그가 내게 소리치려 했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내 손에 틀어 쥐어진 후였다.
“커헉…… 큭?!”
“복잡하게 가지 말자고.”
내 눈동자를 본 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공포가 서린다.
결계가 처지고 그를 향해 억누르고 있는 힘의 일부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끔찍하게 짓누르는 그 모습에 그는 당장이라도 정신을 놓을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여자. 어디로 갔지?”
담담한 내 질문에 그는 바들바들 떨었다.
[경고하는데.]
싸늘한 용언이 흘러나온다. 직접적으로 그에게 닿는 용언의 본래 주인은 고대룡 이클립스. 그녀의 용언은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
[구라치다 걸리면 죽지도 살지도 못해. 무슨 뜻인지 이해했나?]
내 물음에 그가 미친 듯이 떨었다.
슈네리아가 보지 못하게, 느끼지 못하게 펼쳐진 힘이 그를 잠식했고, 그는 마치 공포스러운 무언가를 본 듯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저…… 저기요!”
부대장의 막사를 떠나온 나는 나를 뒤따라오는 슈네리아의 외침을 들었다.
“왜.”
아직 어린 소녀가 그런 모멸을 당한 것만으로도 충격이 클 텐데.
그녀는 애써 나를 따라오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저 아직 남자와 자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 그냥 그렇다고요! 괜히 오해하지 마시라고…….”
“뭘 바라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만 오해할 생각도 없고, 할 건덕지도 없어.”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어째서인지 그녀에게선 에반젤린과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귀여운 딸아이를 보는 느낌인데, 마냥 그렇냐 하면 다른 느낌.
그래. 이건 윈리나 에오니샤를 볼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이건 예상치 못했네요.”
레이나의 소재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애초에 그녀를 누군가가 손을 댈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으니까.
끔찍한 시체가 널브러진 평야. 저항군과 제국군의 시체가 공평하게 널브러진 이 죽음의 평야 한 중앙에 검은 옷에 검은 머리카락을 한 여인이 홀로 멍하니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게 보였다.
“레이나…….”
“세상에…….”
처음 봤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는 그 모습에 슈네리아는 눈물을 훔쳤다.
상태가 안 좋다고 하더니. 생각 이상으로 상태가 좋지 않다.
게다가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힘은 프리아 여신의 신성력이 아니었다.
“……이 여신이 진짜…….”
대체 언제부터일까.
레이나는 프리아 여신에게 종속된 여신의 천족이 아니라…….
아무래도 내게 종속된 존재가 된 모양이었다.
내 변화로 생긴 이질감이 그녀에게서 짙게 느껴진다.
고요히 서 있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이미 누군가의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이곳에 있던 수많은 인간들을 죽인 건 아무래도 그녀인 듯 보였다.
“제발…… 오지마…….”
처절할 정도로 슬픈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늦어서. 내가 나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해서.
그녀가 저렇게 되었다.
그 책임감이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레이나.”
내 부름과 동시에 흠칫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든다.
검붉은 색으로 변질된 그녀의 눈동자가 온전히 나를 담았다.
동시에 그녀의 의사를 벗어나듯 바닥에 숨어있던 수백 자루의 기검들이 마치 하늘을 수놓듯 부드럽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돌아가세요! 지금 나를 제어할 수가 없어!”
그녀의 필사적인 외침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단 도망쳐요!”
주변을 짓누르는 그 힘을 눈으로 보는 게 있는 탓일까.
슈네리아가 사색이 된 얼굴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일단 물러나야 할 거 같아요! 심상치 않은 기류가 보여요!”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허공에 주먹을 뻗어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콰직!!
주먹에 부딪힌 허공이 깨지면서 검 한 자루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청적색의 장검.
초단이였다.
그녀가 저렇게 된 게 나 때문이라면.
적어도 끝은 내가 해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