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06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시체만이 가득한 장소.
그 시체의 산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이는 레이나는 극도로 불안정해 보였다.
“돌아가요! 성력이…… 제어가 안 돼요!”
“그거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는 잘 알지?”
“알아요! 잘 아는데! 그…… 으으윽!!”
무언가 급히 말하려던 그녀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필사적으로 억누르려 하지만 그녀가 가진 힘은 흉포하게 변했고, 그녀를 위협할 모든 수단을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그게 설사 그녀가 종속된 존재라 할지라도 말이다.
스릉…… 슈슈슈슉!!
그녀의 주변으로 떠오른 수십 자루의 검붉은 기검들이 일제히 날아들며 나를 노려왔다.
하나하나가 오러 블레이드가 담긴 위협적인 공격은 이내 사방에서 나를 포위하듯 나와 슈네리아 둘 모두를 무자비하게 노렸다.
[자아 신검류]
[별 무리 칼춤.]
그녀가 내게 배운 이기어검술을 사용한 검기.
마치 별이 춤추는 것처럼 번뜩이는 검을 보며 슈네리아는 그대로 주저앉듯 눈을 감고 비명을 질렀다.
“꺅!”
본능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낀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레이나의 검은 기검들을 봤을 테니 그 두려움이 더할 수밖에.
나는 방해가 되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하루 정도 여유를 둔 덕분에 상당히 많이 진정된 힘이다.
전이 정도야 어려울 것도 없었다.
“먼저 돌아가. 레이나를 데리고 돌아갈 테니.”
“그게 무슨?!”
날아드는 검을 보며 그녀가 급히 소리치려 했지만, 그녀의 육신은 이미 빛과 함께 사라진 후였다.
스릉…….
터엉!!
발끝을 지축 삼아 몸을 빠르게 회전하듯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장소에 검이 날아드는 그 순간 나는 움직인 발을 강하게 내리구른 뒤 주변 영역을 모조리 장악했다.
[마령검]
[필사즉생 생즉필사]
강화된 청단이의 검은 일대 영역을 모두 포함한다.
초단이가 못할 리가 없는 능력이었다.
스캉!!!!
금속이 베어지는 맹렬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공격이 일순간 봉인된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검이 사라져 버렸으나 초단이의 영역 효과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다시금 검이 떠올랐다.
그녀는 검을 쥐지 않지만, 검에 대한 재능만큼은 경이적인 수준이었다.
그녀의 본래 존재가 일리나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나는…… 당신을 공격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그냥 여기 있겠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페르세르크 언니와도 떨어졌어요.”
“페르는 프리아 여신이 돌려보냈어. 여기 있는 건 나와 너뿐이야.”
담담하게 말하며 그녀의 공격들을 하나하나 쳐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왜 내가 이런 일을…….”
“미안하다.”
거기에 대해선 할말이 없었다.
나는 어느 정도 스스로를 제어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 영향을 받는 레이나는 전혀 그렇지 않은 듯 보였다.
“이미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요.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그녀가 나와 연결된 모든 것을 끊은 것이다.
“감사하고 싶다더라.”
“뭐…… 뭐라고요?”
“아까 데려온 그 꼬맹이.”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지 않지만 무슨 상관이랴.
“그녀는 분명…….”
“그래. 네가 변하기 시작했을 때 네가 구했던 사람이지? 네 흔적을 찾아왔는데, 널 찾고 있더라.”
내 말에 그녀는 잠시 공격을 멈춘 채 자신의 양팔을 감싸 안았다.
“나는 또다시 더럽혀졌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를 죽이라고 머릿속에서 자꾸 누가 외치는 기분이 드니까.”
“내가 해결할 테니 걱정 마.”
“웃기지 말아요! 이게 누구 때문인데!”
그녀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스르릉!!
동시에 그녀의 주변으로 다시 떠오른 검붉은 기검들이 나를 겨눈다.
터엉!!
그리고 언제 꺼냈는지 모를 신창 롱기누스가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대체……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평소의 그녀와. 비틀려버린 그녀의 성격이 뒤섞여 있다.
나를 향한 그리움과 미안함. 그리고 나를 향한 원망과 증오가 동시에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뭔진 몰라도 그걸 전부 해소시켜주는 게 가장 안전하게 그녀를 본래대로 되돌리는 방법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거기에 대해선 할말이 없다. 그러니까 괜히 신경쓰지 말고 마음껏 발산해.”
내 말에 그녀의 인상이 찡그려진다.
“제발…… 그러지 말라구요. 당신은 내 은인이잖아. 은인을 죽일 듯이 공격해야 하는 내 입장도…….”
“풉…….”
내 비웃음에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네가?”
그 한마디가 그녀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진짜 성격 더럽네요!”
그녀는 계속해서 그녀를 충동질하던 파괴본능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
그녀의 검은 기류가 더욱 강해지며 주변으로 발산된다.
이거면 됐다.
나는 비처럼 쏟아지는 검들을 피해내며 빠르게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당연히 그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나를 죽일 기세로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위협적이기 그지없는 수준의 공격들이었다.
카앙!! 캉!!
절대 불멸금속인 헬릭시윰으로 만들어진 창답게 놀라울 정도로 초단이의 검을 잘 버텨냈다.
“하압!!”
그녀의 창이 순식간에 내 심장을 노리고 파고들어 왔다.
순식간에 쳐내듯 막아내지만, 그녀의 공격은 여기서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재차 이어지는 연격은 그녀의 주특기가 검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카앙!! 캉!!
공격의 주도권은 그녀가 쥐고 있다.
나는 그녀의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 검은 기류가 계속해서 발산되기만을 유도했다.
그 탓일까.
그녀의 충동이 일순간 강제적으로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
“음…….”
마냥 막고 있을 순 없기에 간간이 반격을 섞어주었건만.
그런 간단한 반격조차 피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들이댄 것이다.
마치 자신의 몸을 방패 취급하듯 말이다.
온전한 레이나도, 그녀를 상대하고 있는 나도 그리 달갑지 않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타락한 힘의 충동은 그녀를 더욱더 위험하게 몰아붙였다.
검을 빼지 않으면 초단이가 그녀를 찌르게 된다.
당연히 그녀의 힘을 탈진시키려는 목적을 지닌 나로선 주객이 뒤바뀌는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내가 무리하게 검을 거둬들이면서 생긴 틈이 벌어졌고, 그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제 몸을 방패 삼아 들이댔다.
나를 죽이려고 작정한 충동은 그녀의 몸조차 신경 쓰지 않고 저돌적으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언월도 형태의 롱기누스 창날이 금빛으로 번뜩인다.
[팔라디아 식 행성분열창]
[맨틀 깎기]
콰드드득!!!
그녀의 손에 쥐어진 롱기누스 창을 이용한 일격이 내리꽂혔다.
그녀가 배우고 싶어 하였기에 가르쳐주었던 팔라디아식 창술.
비록 온전한 실력은 아니지만 제법 높은 완성도의 강기가 만들어진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맹수가 발톱을 꺼내든 것 같은 위압이 풍겨 나왔다.
피할 틈 따윈 주지 않겠다는 듯 파고들어 오는 공격을 보며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의 창을 막아도 날아드는 건 검은 기검들이다. 이 정도면 제법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순식간에 거대한 빛의 발톱이 일대를 완전히 휘감는 것을 보며 나는 초단이를 가볍게 비틀었다.
그리고는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정면으로 부딪쳤다.
초단이의 권능?
엿이나 바꿔먹으라지.
레이나는 어떤 의미로는 기술보다 힘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 그녀의 주특기를 나는 정면으로 깨부술 생각이었다.
[중검 극의]
[노 네임드 킹(무명의 왕)]
일순간, 하늘이 찢겨 나갔다.
말 그대로 먼지와 연기로 인해 회색빛 구름만 가득한 이 어둑어둑한 세상의 하늘이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진 것이다.
“하아…… 하아…….”
그래도 빛의 용사였다고 그녀의 무력은 칭찬할 만한 수준이었다.
“진짜 말도 나오지 않아서…… 그걸 그렇게 베어버려요?”
“이것도 나름대로 억제하고 있는 거야. 그보다…… 줄긴 했는데. 완전히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수준인데…….”
그녀의 몸 안에 있는 타락한 힘이 그녀를 잠식하기에 나는 그녀가 힘을 최대한 방출해 탈진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그녀의 타락은 온전히 소모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소모시키면 다시금 스스로 회복하듯 흘러나왔다.
이대로 두면 또 어느 정도 차오르면서 그녀를 충동 속에 빠뜨리리라.
단순한 권능이나 기적으로는 그녀의 타천사 행을 막을 수 없었다. 나는 권능을 필요할 때만 사용해왔을 뿐 이런 상황에 대비해 익혀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본적으로 그녀의 힘이 누구에게서 나오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녀의 이런 변화는 사실 그녀가 아니라 내 쪽에서 손을 봐야 할 문제였다.
“아직…… 아직 전부 사라지지 않았어요. 몸이 멋대로 움직이진 않는데…….”
완전히 탈진한 그녀가 추욱 늘어진 채 힘없이 물어왔다.
“아무래도 근본적인 원인인 내가 문제인 거 같다.”
이 차원에 온 뒤로 내 힘의 밸런스가 엉망진창이었다.
아마 이 세상 자체가 아니라 본래부터 아슬아슬했던 첨탑이 이곳에 오면서 어긋나버린 게 문제이리라.
“그럼…… 저 원래대로 못 돌아가는 건가요?”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물어왔다. 사실 현 상황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건 다름 아닌 그녀였을 테니 말이다.
“아니. 그건 아니야. 우선은 돌아가자. 여기 이차원에 있으면 너한테 좋은 영향은 전혀 없을 거야.”
처음엔 그저 남의 차원통로를 훔쳐 침공을 하려 하는 자에게 경고만 하려 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
나는 하인스로 통하는 차원문을 찢은 뒤 힘이 다해 쓰러진 그녀를 안았다.
힘의 대부분을 하늘로 방출했다지만 노 네임드 킹을 정면으로 맞은 인상 그녀의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을 터였다.
실제로 큰 상처를 입고 그녀를 보호하던 회색빛 깃털 수천 장이 완전히 박살 나버렸으니 말이다.
“아까 그…… 소녀는…….”
“따로 데리고 갈 거야. 어차피 그 애도 여기 두면 오래 못 살 거 같더라. 가문보다 동생의 안위가 중요하면 따라오겠지.”
그리 말하며 한 발 내디디는 그때였다.
파직!!!
균열 너머로 들어가기 전 누군가가 그 틈 사이로 걸어 나왔다.
“여신님…….”
내가 그녀를 정체를 입에 담았다.
[네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 돌아가선 안 돼.]
“어째서입니까?”
[나를 한번 믿어주겠니?]
가장 속 터지는 부류의 말이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이렇게 찾아와서 한마디를 하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 엄청난 무리가 되는 것을 말이다.
“……일단 자잘한 상처부터 치료부터 해야겠네. 몸도 좀 씻고.”
결국, 나는 행선지를 바꾸었다. 레이나는 하루 이상 바깥에서 몸을 이리저리 굴린 탓에 먼지가 그득그득해져 있었다.
검게 변했던 그녀의 복장은 다시금 새하얀 빛을 찾았지만 먼지가 많이 묻은 탓에 꽤나 꾀죄죄해져 있었다.
그쯤 되자 레이나는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저…… 혹시 저 냄새 나나요?”
“응 난다. 피 냄새, 먼지 냄새.”
“진짜!”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소리쳤다.
“괜찮아. 냄새 안 나는 인간이 어디 있나.”
내 미소에 허탈한 생각이 들었는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뺨 맞기 좋으니까. 냄새가 나도 안 난다고 해주는 게 매너라고요.”
“그래. 기억은 해둘게.”
나와 레이나의 투덕거림에 프리아 여신은 어느 정도 안도한 듯 보였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습니까?
[인지한 건 다행이야. 하지만 쉽지 않을 거야. 아무리 인지해도 변하기 시작한 자신을 되돌리는 건 많은 노력이 필요해.]
“하나만 물어도 됩니까?”
내 질문에 그녀가 태블릿을 들어 [?] 라는 아이콘을 띄웠다.
“여기 이 차원, 대체 왜 이런 겁니까.”
[외곽차원이자 하위차원.]
그녀의 한마디에 나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같은 인간이나 차원의 격이 달라. 네게는 더욱 하찮아 보일 수 있는 세상이야. 그 괴리감은 아슬아슬하게 밸런스를 맞추고 있던 너의 변화를 가속하지.]
“타나토스도 이렇게 변한 겁니까?”
[조금 달라. 하지만 너는…….]
그녀는 잠시 태블릿을 바라보았다. 글귀가 반쯤 깨진 것을 본 그녀가 태블릿을 주변 바위에 마구 내리쳤다.
치직!!
그러자 다시 작동하기 시작하는 태블릿이었다.
[힘을 너무 빨리. 너무 많이 얻었어.]
다른 이들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지만 그녀의 권능과 막대한 신격을 얻은 내게는 보이는 그 차이가 지금 사태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사실을 알려준 탓일까.
여신은 자신의 몸이 반쯤 투명해진 것을 보고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일단 돌아가세요. 꼴이 말이 아니네.”
고작 몇 마디 했다고 존재가 옅어질 정도면 사실상 작은 기적을 연달아 발현한 셈이나 다름없다.
“저…… 어떻게 해요?”
“어쩌긴. 일단 너 쉴 곳부터 찾자. 당분간 데이트라도 하겠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건데요!”
내 품에 안긴 채 그녀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인 얼굴이었다.
하인스로 바로 데려가는 게 중요해 보였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나는 미리 피신시킨 슈네리아에게 붙여준 추적 마법을 가동시켰다.
그리고 그녀의 주변으로 좌표를 고정시킨 뒤 그대로 공간 자체를 전이시켰다.
마나의 파장 자체가 불안정하지만 금방 자리를 잡는 것을 보며 레이나가 문득 물어왔다.
“저…… 많은 사람을 죽였어요.”
“그래.”
“저는 용사의 자격이 없네요.”
“은퇴한 주제에 자격을 찾아? 멍청이 아냐, 이거?”
내 타박에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으흑…… 흐흐흑…….”
그리고는 내게 안긴 채로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슬픔을 보며 나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전이를 잠시 취소한 나는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다른 이라 해도 그녀의 근본은 일리나.
내 사랑하는 세 번째 부인인 일리나 데 팔란이다.
레이나가 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일리나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그걸 해줘야 할 듯싶었다.
“다 울고 나면 그걸 해줄게.”
“흑…… 흐흑…….”
과거 일리나의 마나 통로를 개척해주면서 했던 데이비식 안마를 말이다.
일리나도 좋아했으니 근본이 같은 그녀도 결국은 좋은 반응을 보여주지 않을까.
내가 그녀를 달래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