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08화
잠에서 깨어난 레이나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데이비에게 깔려 비명을 한참 지른 뒤 기절하듯 잠든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의 기억이 없는 거로 보아 지금까지 잠들어있었던 모양이었다.
“몸이…… 가볍네.”
생각 이상으로 가벼워진 몸은 그녀가 타락하기 이전보다 훨씬 좋았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움직이고 싶을 정도로 편한 몸을 일이 저리 움직여본 그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몸이 이렇게 가벼워진 게 기절하기 전 데이비가 해준 안마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괜스레 미안하고, 고마웠다.
말하지 않은 뻐근한 부분까지 찾아내 풀어준 그가 더욱 고마웠다.
자신은 그에게 해준 게 없는데. 그는 많은 것을 자신에게 해주었다.
처음 검을 겨눴던 자신과는 다르게 말이다.
달칵!
“앗! 깨어나셨네요.”
이윽고 문이 열리며 머리색과 눈 색을 바꾼 슈네리아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아티펙트를 해제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마침 먹을 걸 좀 구해왔어요. 괜히 보는 눈이 있을 테니까요.”
그녀는 품 안에 숨겨둔 주머니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를 꺼내 들었다.
“미안해요. 시국이 이래서 제대로 대접도 못 해 드렸는데.”
“신경쓰지 말아요. 그보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그분은 잠시 할 일이 있다고 나가셨어요.”
데이비를 찾는다는 걸 금방 눈치챈 그녀가 물었다.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두 분은 어떤 관계인지 물어도 될까요?”
“그건 왜 물으시는 거죠?”
“아뇨 단순히 남매라고 보기엔 너무 다르시니까…… 아, 이건 다른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요…….”
횡설수설하는 슈네리아를 보며 레이나가 키득거렸다.
“그러네요. 그 사람과 내 사이라…….”
잠시 침묵한 그녀가 대답했다.
“그 사람은 내 전부에요.”
“어머…… 연인 관계셨군요.”
“아니에요. 그런 거…….”
“괜찮아요. 두 분 정말로 잘 어울리시는걸요.”
“아니라니까요.”
단호한 대답에 슈네리아가 머쓱한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분이 모든 것이라 말씀하셨잖아요. 보통 연인을 제외하고 그렇게 표현하진 않을 텐데…….”
“은인이에요 내 목숨과. 내 인생 모두를 구원해준 사람.”
“그분은…… 대체 어떤 분이죠? 저는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어요.”
“눈이요?”
“네. 어떤 본질을 보는 눈이죠. 그런데…… 그 사람에게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그녀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정말 아무것도. 살면서 그렇게 공허한 건 처음 봤어요.”
그녀의 설명에 레이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이건 마치…….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칭찬을 받는 모습을 보며 콧대가 높아지는 기분이라고 할까.
데이비를 처음 보았을 때 직감은 있었지만 그에게서 마나를 제대로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사실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었는데.”
잠시 말을 끊은 그녀가 정중하며 우아한 자세로 레이나에게 머리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와 제 동생들은 황제가 보낸 암살자들에게 살해당했을 거예요.”
“고개를 드세요. 감사나 받자고 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로 인해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니까요. 이걸 잠시 봐주시겠어요?”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종이를 내밀었다.
“국가 전복을 꾀한 테러리스트들의 명단과 얼굴이 적힌 수배지에요.”
그곳에는 놀랍게도 데이비의 얼굴이 찍혀있었다.
“생사불문. 제국에선 이미 그분을 위험인물로 낙인찍은듯하네요.”
심각하게 말하는 그녀였지만 레이나는 그저 심드렁했다.
데이비의 말대로라면 충분히 경고를 해줬으니 더는 덤벼들지 않을 거라 했는데. 인간은 참 어리석은 모양이었다.
“일국의 황제가 암살당한 시점에서 함부로 이런 것을 내놓긴 쉽지 않을 텐데…….”
홀로 중얼거리는 레이나를 향해 슈네리아가 말했다.
“저는 나차 제국에 저항하는 저항군과 연이 있어요. 그리고 그들은 제국에게서 탈취한 차원통로 제어장치를 하나 확보하고 있구요.”
그녀가 말했다.
“도와드릴게요. 두 분이 다른 세계로 도망칠 수 있도록.”
그는 이곳에서 일주일 가까이 체류할 것이라 말했지만 상태가 이리 심각하다면 이야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레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사람이 체류하겠다고 결정했으면 거기에 이견을 달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그들은 저희 고향을 침공했죠. 그 결과가 이것이고.”
“말 잘했네.”
덜컥!
그때 문이 열리며 데이비가 들어왔다.
“어디를 갔다 온 거예요?”
“일주일 정도 체류할 건데. 주변 조사는 좀 해놔야지. 그보다 그거 좀 줘봐.”
데이비가 손을 내밀자 슈네리아는 떨떠름한 얼굴로 수배서를 내밀었다.
“흠…….”
진지한 표정 때문일까. 슈네리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이거 이상하게 찍힌 거 같은데?”
“그대로인데요?”
“내가 이렇게 사악하게 생겼다고?”
“음…… 가끔씩 웃을 때?”
레이나가 조심스레 말하자 데이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지금…… 이게 얼마나 중요한 상황인지 모르시는 거예요?! 제국이 눈에 불을 켜고 있다니까요?! 위치가 드러나면 바로 병사들이 들이닥칠 거에요. 그러니까 제 말을 들어요.”
그녀가 애원하듯 말했다.
“제국군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단 말이에요…… 잡히는 순간 바로 광장에서 스윽.”
그녀가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아시겠어요? 이건 일개 강함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고집부리지 말고…….”
“레이나. 오는 길에 이 영지 특산물로 빵을 팔더라. 먹고 싶지?”
“좋아요!”
“갈까?”
“네.”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두사람을 보며 슈네리아는 속이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감사만 표하고 두사람을 안전한 장소로 옮겨주려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이는 저들을 보고 있으면 이게 맞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검은 흑룡이 나타나 시국이 흉흉한 마당에 이들까지 이러니 그녀로썬 속에 천불이 날 수밖에.
“잠깐만요! 그럼 하다못해 이거라도!”
결국, 그녀는 계획을 일정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이 사람들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어…… 그렇다면 하다못해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원천 차단하는 수밖에…….’
속이 타지만 그들은 그녀와 그녀의 동생들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어차피 자신들은 곧 제국의 추적을 받을 테니 그 과정에서 이들을 포함시켜 잘 도망 다닌다면 문제는 없으리라.
“흠…… 이걸 굳이 해야 하나?”
“뭐…… 뭐라구요? 지금 이거 안보여요?! 정신 차려요! 수배서가 나돌기 시작하면 어제까지만 해도 형, 동생 하던 사이도 갈라지게 되어있어요!”
그만큼 현상금이 높으니까.
별수가 없다.
실제로 나차 제국에게 제압당한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배신을 당했는지 생각해보면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저들은 다른 차원에서 차원통로를 타고 왔다고 하였던가. 대체 뭐하던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곳에 있는 것보단 안전할 텐데.
“그러네. 괜히 소란이 일긴 하겠네.”
“알겠죠? 그러니까……”
“확실히 괜히 소란이 벌어지면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겠다.”
말을 들어 처먹질 않는다.
그녀는 속으로 빌었다. 제발 문제가 없기를.
* * *
슈네리아의 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이비는 레이나를 데리고 영지를 쏘다녔다.
“어이구 감사합니다.”
영지 특산물인 붉은깃 꿩의 꼬치고기.
내가 이곳을 대강 조사하면서 본 특산물 중 하나였다.
“이건…… 무슨 고기에요?”
“붉은깃 꿩의 고기라네. 맛있기로 유명한 집이니까 한번 들어봐.”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슈네리아가 내민 변장 아티펙트를 사용하지 않았다.
기왕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즐기려면 아예 의심 자체를 안 하는 게 답일 터.
그렇기에 나는 경악하는 그녀를 뒤로한 채 셋 전부에게 인식저해마법을 걸어버렸다.
사람이라곤 인식하나 인상이 흐릿해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 정도.
알고 당해도 어이가 없는데 모르는 이들이 그걸 구분할 방법이야 있을까.
고위 마법을 극도로 정제하여 사용하면 하나의 기적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였던가.
과학자들이 늘 입에 달고 사는 극도로 발달된 과학은 마법과 다를 바가 없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결국, 외모를 바꾸지도 않고 이 영지. 아니 도시를 마음껏 누빌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작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요새 쪽에선 부대장이 폐인이 되거나 갑자기 레이나가 사라진 일로 부산스러울 텐데.
말없이 붉은색의 고기를 노려보던 레이나는 이내 결심을 내렸는지 조심스레 꼬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앗…… 맛있어.”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어때 끝내주지?”
일리나는 상당히 고양이 혓바닥이라 매운 음식에 약한 편이었다.
자존심은 있어서 버티는 척은 하지만 간혹 장난을 치기 위해 그녀에게 매운 음식을 먹이면 울먹거리던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달라졌다 해도 결국은 일리나인 레이나 또한 매운 음식보다는 단 음식을 더 선호했다.
행복한 표정으로 꼬치고기를 우물거리는 레이나를 보며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음료도 내밀었다.
“자. 이것도 마셔봐.”
“이건 뭐에요?”
“과즙에 우유를 섞어 만든 거라는데. 괜찮더라.”
과즙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며 컵을 받아든 그녀가 홀짝홀짝 마시더니 눈을 반짝였다.
“이것도 달아…… 이건 대체 무슨 과일이에요?”
“음…… 흔히 볼 수 있는 거긴 한데. 나중에 에이리아에게 만들어달라고 해볼게.”
“정말이죠? 헤헤.”
기분이 좋은지 고기를 오물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내 허리춤이 파르르 떨렸다.
스팡!!
동시에 허리에 매어둔 두 자루의 검. 홍단이와 청단이가 현신하고는 그대로 레이나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호…… 홍단이도 먹고 싶은데!”
“청다니도…….”
갑자기 나타난 두 아이의 모습에 슈네리아가 깜짝 놀란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저…… 두 아이는…….”
“내 딸.”
“겨, 결혼하셨어요? 그보다 아직 젊어 보이시는데…….”
슈네리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홍단이 청단이를 바라보았다.
레이나에게서 고기를 받아 오물거리는 두 아이가 워낙에 귀여웠던 탓일까.
끝내 슈네리아는 표정이 풀어지며 발그레해질 수밖에 없었다.
“언니이. 이거.”
그때 눈치를 살살 살피던 홍단이가 조심스레 다가가 슈네리아에게 꼬치를 내밀자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벌리자 홍단이가 꼬치구이를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꺅 귀여워!”
결국, 참지 못한 그녀가 홍단이와 청단이를 끌어안는다.
그 모습을 부럽다는 듯 바라보는 레이나를 향해 장난기가 돋은 나는 손에 쥔 여분의 꼬치를 그녀의 입에 쑥 넣었다.
“웁?!”
“어때. 맛있지?”
내 웃음에 그녀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곧 현 상황이 이해가 되었는지 빨갛게 물들인 얼굴로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착각하게 하지 마세요.”
“타락한 기운은 어때.”
그녀의 옆에 앉은 채 몸을 등받이에 기댄 내가 물었다.
“확실히 약해졌어요.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당신이 호전되었다는 소리겠죠?”
그녀는 내 상태에 영향을 받는다.
내가 변할수록 그녀는 더욱 심하게 영향을 받아 타락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상태가 좋아졌다면 내게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무엇이 원인일까.
프리아 여신이 했던 말을 곱씹어보면 내가 변하기 시작하면서 그 영향이 레이나에게 간다고 했다.
지금까지 멀쩡하다가 이 차원에 오면서 어떤 영향을 받아 그녀에게 큰 변화가 생긴 것이다.
내 정신적인 이유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는 소리인데. 사실 아직도 정확히 어떤 점이 원인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선택한 것은 최대한 초심을 찾아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받은 레이나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 또한.
“흐음…… 역시 두 분 연인이신가요? 그런데 결혼까지 하셨다면서, 설마 불륜…… 같은 건가요?”
그때 슈네리아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연인 아니라니까.”
“하지만 두 분의 행동을 보면 연인 같은걸요.”
그 질문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고 레이나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레이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레이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헛기침을 하며 내게서 시선을 피해버렸다.
“이분은 제 은인이에요. 그뿐이에요.”
“정말로요?”
슈네리아는 자신이 지금까지 언제 들킬까 노심초사하던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분위기에 녹아들고 있었다.
마치 대화하고 있는 동안만큼은 아무런 걱정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괜히 장난기가 샘솟는다.
이에 내가 뭐라 말하려던 찰나.
우웅…… 우우웅!!
갑자기 슈네리아가 가지고 있던 마법장치 하나가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빨간빛을 내뿜는 그것을 보며 슈네리아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설마…….”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급히 돌아가야 할 거 같아요. 이거 받으세요!”
그녀가 황급히 어떤 신분 패를 내밀었다.
“이거면 통행에는 문제가 없을 거예요. 볼일이 끝나면 바로 이곳에서 서쪽 방향에 있는 도시로 와줘요!”
황급히 돌아서서 도망치려던 그때였다. 워낙에 급하게 돌아서서 움직인 터라 누군가와 부딪혀버린 것이다.
작은 체격을 지닌 그녀와 다르게 그녀와 부딪힌 이는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끄응…….”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은 슈네리아는 아픈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사과하며 다시 움직이려 했다.
뭔가 급한 일이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행동은 그녀와 부딪힌 이와 시선을 마주하면서 온전히 바뀌어버렸다.
“제…… 제국 집행대…….”
그녀의 중얼거림에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던 사내의 입에서 흥미롭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호오. 집행대를 알고 있나 보군. 아가씨? 재밌는 마법을 몸에 두르고 있는데?”
그가 손을 휘젓는다.
동시에 슈네리아가 하고 있던 변장 아티펙트들이 그대로 부서져 버렸다.
“호…… 생각지도 못했군. 1급 지명 수배자. 슈네리아 레켄이라…….”
감탄하며 중얼거린 그가 그녀에게 손을 뻗는다.
얼어붙은 그녀는 그에게서 도망치지도 못한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나…… 나를 잡으러 온건가요?”
“틀리지. 널 만난 건 우연이거든. 사실은 폐하를 시해하려 한 겁 없는 암살자를 수색 중인데 얻어걸렸네?”
슈네리아는 내가 아직 걸리지 않았다고 판단했는지 필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끌었다.
“그…… 그럼 이번엔 못 본 척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럴 수야 있나. 그래도 1급 지명 수배범인데.”
가면을 쓴 그에게서 묘한 웃음소리가 나왔다.
“네게선 들어야 할 정보가 많거든. 걱정 마, 넌 나차 제국의 내륙시민이니까 협조만 잘하면 아우바츠 수용소로 끌려가진 않을 테니.”
그가 슈네리아의 어깨를 잡았다.
본래대로라면 어떻게든 뿌리치거나 도망쳐야 할 텐데.
공포가 각인이 된 건지 그녀는 움직이지 못했다.
이에 그 꼴을 보고 있던 내가 레이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줄까.”
“구해줘야죠.”
“그럼 데이트는 이걸로 끝인데?”
“데이트는 무슨. 애랑 놀아주는 아빠도 아니고.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다시 이런 시간을 만들 수 있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녀의 말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동작 그만.”
그리고는 손가락을 튕긴 뒤 인식 저해 마법을 해제했다.
아직 충동은 더 볼 것 없이 집행대라 불린 사내를 죽이라 말했지만 나는 애써 그 선택을 부정했다.
내 성미엔 맞지 않지만 지금 내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면 그 여파는 고스란히 레이나에게 향한다.
지금 나는…….
성인군자이니라.
참을 인 자를 수십번을 새기며 내가 부드럽게 웃었다.
운좋은 줄 알아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