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13화
무거운 침묵 속에서 슈네리아는 천천히 걸어 나갔다.
좀 전까지만 해도 계속되던 폭음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자신의 제어를 되찾은 것일까.
어쩌다가 폭주하는 상황까지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슈네리아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들에게는 그들만의 사정이 있는 거라고. 슈네리아가 가진 눈으로 보기에 레이나는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천사. 그 이상의 무언가였다. 하지만 그런 새하얀 존재가 검은 어떤 무언가에 의해 타락하는 모습은 안타깝게 비칠 수밖에 없었다.
“저기…….”
다만 지금 레이나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콰앙!!
바로 뒤따라오며 그녀를 호위해주고 있는 사내 때문이었다.
집행관 말석. 이름은 샤드란.
데이비가 제압하고 현재 슈네리아가 지닌 가면의 원래 주인이다.
“뭔데.”
마나를 두른 맨손으로 가디언을 순식간에 제압해버리는 마공사.
집행관 말석을 보며 슈네리아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저를 도와주는 거죠?”
“지금 그것보다 네 동생들을 구하는 게 더 급한 일 아니었나?”
“…….”
아무리 봐도 막판에 뒤통수를 후려갈기거나 함정을 판 것 같진 않았다.
애초에 함정을 팔 이유가 있긴 할까.
그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 슈네리아를 제압할 수가 있을 텐데 말이다.
데이비가 건네준 수호석이 하나 있지만 이게 어떤 물건인지는 그녀도 잘 몰랐다.
결국 어떤 이해도 하지 못한 채 지하 깊숙한 곳까지 프리패스로 밀고 들어간 후에야 그녀는 천천히 커다랗고 낡은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에…….”
“비켜. 그냥 열면 손이 익어버릴 거다.”
그렇게 말한 샤드란은 조용히 손에 마나를 감쌌고 그대로 문고리를 잡아 비틀었다.
콰직!!
어떤 방비 마법이 걸려있는 듯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부서졌다.
상상 이상의 마나 컨트롤 실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을 수준이 아닌가.
강화된 손으로 문을 잡아 뜯어버리고 던져버린 샤드란은 이내 내부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두 명의 소년 소녀가 팔을 뒤로 묶인 채 감옥의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게 보였다.
“슈나이츠! 슈니아!”
다름없는 소중한 동생들이라는 사실에 슈네리아는 본래라면 해야 했을 경계도 잊어버린 채 후다닥 뛰어나갔다.
기력이 쇠한 듯 추욱 늘어져 있던 두 동생을 양팔에 끌어안은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
“아…… 아아아…….”
슬픈 목소리를 내며 그녀가 오열했다.
“미안해…… 미안해…… 누나가 미안해…….”
부모님이 처형당한 이후 황제를 향한 복수심을 약하게 만든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차가운 곳에 포박당한 채 묶여있는 동생들을 보니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그냥 매국노 소리를 듣더라도 굴복했다면, 적어도 동생들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흐느끼는 그녀의 온기 때문일까.
기절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두 동생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나?”
먼저 반응한 것은 남동생인 슈나이츠였다.
“그래! 누나야! 누나가 여기 왔어!”
“누나…… 으윽…….”
여동생인 슈니아에 비해 구타 흔적이 많다.
아마 동생을 감싸기 위해서 자신이 대신 폭력을 당한 것이리라.
다행이라면 슈니아는 아직 멀쩡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기절한 듯 보이지만 말이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누나가 구하러 왔어.”
“어떻…… .흐읍?!”
그때 슈나이츠가 기겁한 얼굴로 샤드란을 시야에 담았다.
“지…… 집행관!”
“다시 보네 꼬맹아.”
와들와들 떠는 슈나이츠를 보며 슈네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 된 것에요?”
“뭐, 숨길 게 있나. 저 둘을 여기로 잡아 온 건 나거든.”
“…….”
대체 저자는 뭘 하고 싶은 것일까.
경계심이 잔뜩 어린 얼굴로 동생들을 가리듯 물러난 그녀가 샤드란을 노려보았다.
“오해하지 말라고, 내가 하지 않았으면 쟤들은 죽었어.”
“……그걸 어떻게 믿으라는 거죠? 당신은 집행관인데.”
“이봐. 나도 입장이라는 게 있다고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도박 수를 던질 거 같아?”
“…….”
타박해본들 그가 뭔가 내놓을 리가 없었다. 불만이 없을 순 없지만 지금 중요한 건 레이나가 수용소를 부수는 동안 최대한 빠르게 모두를 탈출시키는 것이었다.
“자, 그럼 나갈까?”
“잠깐만요!”
슈네리아가 그를 불렀다.
“또 왜.”
“다른 분들은…….”
“지금 네가 남 걱정할 때인가?”
“그렇다고 해도…….”
여기에 남겨진 이들은 방치될 것이다.
언제 상황이 안정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감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를 죽음만 기다리는 것이다.
“그건 너무한 일이잖아요.”
그녀의 말에 샤드란의 눈이 가늘게 뜨여졌다.
“이봐. 네 앞가림이나 하지?”
“그들 중 진짜 죄수는 없어요! 전부 억울하게 끌려온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당신을 믿을게요. 제 동생들을 이번엔 안전한 장소로 빼내 주세요.”
“넌?”
“이곳 수용소에는 일괄적으로 철창을 관리하는 곳이 있어요. 그곳에서 모두 해방시킬 겁니다.”
단호한 그녀의 말에 샤드란이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이냐? 돌았어?”
“알아요! 얼마나 멍청한 소리인지! 하지만 이곳에 수용된 인원이 수천 수만이에요! 그 사람들을 다 죽이라고요?!”
“…….”
슈네리아의 외침에 샤드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이내 말했다.
“데리고 나가.”
“뭐라고요?”
“너보단 내가 여기 지리에 대해 잘 아니까 데리고 나가라고. 이미 대부분 방어 병력들이 빠지거나 무력화됐으니 문제없이 나갈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꺼져.”
한숨을 내쉰 그가 손사래를 쳤다.
이에 슈네리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하는 거죠? 당신은…….”
“폐하의 명을 따르는 집행관이다?”
“……네.”
왜 황제의 집행관이 적인 자신을 돕는 건지 그녀는 아직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건 나중에 다시 보면 그때 이야기하자고. 조금 긴 이야기가 될 테니.”
그렇게 걸어 나가는 샤드란을 보며 슈네리아는 그를 불러 세웠다.
“자…… 잠깐만요!”
“뭔데.”
“이거…… 이거 가져가세요.”
그녀는 데이비에게서 받은 수호석을 그에게 내밀었다.
“꼭 살아 돌아와요. 그래서 전부 설명해야 할 거예요.”
“손해를 보는 장사 같지만…… 좋아.”
수호석을 받아 품에 챙긴 그가 스르륵 하며 사라지자 슈네리아는 빠르게 동생들의 포박을 풀어주고는 두 사람의 팔을 잡아끌었다.
“누…… 누나! 어떻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 어서 따라와!”
레이나의 공격으로 인한 굉음이 지하 곳곳에 울려 퍼졌다.
* * *
“크윽…… 배…… 배신자…….”
집행관 샤드란을 올려다보며 분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간수들을 지나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슈네리아 레켄은 정말 영악한 소녀였다.
“이걸로 내 진심을 떠보겠다 뭐 이런 건가?”
뭐가 되었건 뭐 좋다. 그의 결정에는 변함이 없으니 말이다.
“그보다. 밖에서 그 난리가 나고 있는데. 니들은 여기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다 도망칠 궁리나 하고 있었나? 습격이 없었어도 너희들은 즉결처형감이다.”
쓰러진 이들을 향해 싸늘하게 일갈한 그는 피가 잔뜩 묻은 손을 털어냈다.
그리고는 천천히 다가가 마법 장치에 손을 올린 뒤 마나를 끌어올렸다.
집행관 최고의 근육뇌 알보 단장이라면 못하겠지만 그는 말석일지라도 마나에 능통한 존재. 이 정도 조작은 어렵지 않았다.
수많은 수정구 속으로 비치는 철창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안에 갇혀 상황을 지켜보며 절규하던 수용인원들이 흠칫 놀라기 시작한다.
이에 그는 천천히 음성 송출 장치를 가동한 뒤 입을 열었다.
“기회가 있을 때 잡아라. 탈출하려면 지금뿐이다.”
그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이오!”
“뭐긴. 지금이라도 잘못된 걸 바로잡아야지.”
그가 싸늘하게 웃었다.
위험변수인 자신을 떨쳐내고는 이미 떠나가 버린 슈네리아. 영리한 건지 무서운 건지.
결과적으로 그가 정말로 배신할 생각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돼버리면 그가 할 수 있는 건 극도로 줄어든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미안하긴 한지 수호석을 맡겼는데. 이런 마나도 한 줌 안 느껴지는 미신에 맡길 만큼 집행관이 안일한 존재는 아닐 터다.
“애초에 여긴 나를 이길 존재가 없지.”
본래라면 이곳을 지키는 집행관 서열 1위 스토벨 바르샤가 지키겠지만 그는 현재 황제의 명령으로 정벌을 나가 있는 상황이다.
즉, 이곳에서 그를 막을 수단 따윈 없었다.
“자. 그럼 나도 슬슬 탈주를 해볼…….”
스가가각!!!
그때였다.
카아앙!!
온몸의 본능이 경종을 울리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샤드란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럼에도 그를 공격한 검강은 끝내 그의 옆구리에 큰 상처를 남겨버렸다.
“크으…….”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그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재수가 좋더라니…….”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비틀거린 그가 물러났다.
그리고는 조작 패널을 등진 채 주저앉았다.
“감히 폐하를 배신하는 거냐? 샤드란.”
“하…… 이봐. 이게 어떻게 배신이야.”
그가 싸늘하게 비웃었다.
도망칠 장소는 없다. 문은 하나 다른 곳은 부수기엔 시간이 필요하고 설사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가 뭘 하기도 전에 저 괴물 같은 서열 1위 집행관 스토벨 바르샤가 그의 목을 날려버리리라.
‘아직 죽으면 안 되는데…….’
아직 뭘 해보지도 못했다.
이대로는 안 되는데. 이래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되는구나.
속으로 그런 후회를 해보지만, 그는 이내 후회를 걷어 들였다.
그가 한 행동으로 인해 이곳에서 죽어갈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건졌다.
‘그래. 원래는 이게 맞았지.’
그가 힘없이 웃었다.
저항할 수 있으나 결과가 정해져 있고. 도망칠 수 있으나 결국 잡힐 것이다.
차라리 시간이라도 끄는 게 좋으리라.
눈앞에 서 있는 중년의 사내 스토벨 바르샤는 황제의 최대 전력인 존재였으니 말이다.
겉보기엔 새치가 듬성듬성 있는 인상 좋아 보이는 중년 아저씨지만 집행관 내에서도 그의 무력은 독보적으로 강한 존재였다.
어쩌면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듯 말이다.
“폐하께서는 배신자를 용서치 않으신다. 말해라. 샤드란.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지른 거냐.”
그는 샤드란을 죽이기에 아깝다는 듯 말했다.
이에 샤드란은 상념을 털어버리고 묵혀둔 말을 꺼냈다.
“거 안 어울리는 수염은 치워버리는 게 어떠쇼.”
“…….”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바로 정당한 충절이니까.”
그 말에 스토벨은 말없이 검을 들었다.
“폐하께서 어떤 결론을 내리셨든 우리는 따르면 된다. 거기에 반항하는 자는 집행관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그가 검을 들었다. 그를 구할 존재는 하나도 없는 현 상황에서 스토벨이 검을 내리친다.
허탈하게 웃으며 눈을 감은 샤드란은 이내 다가올 깔끔한 고통을 기다렸다.
하지만 소리가 끝까지 울려 퍼지진 않았다.
그도 대신 그의 주머니 속에서 굉장한 뜨거움이 느껴졌다.
카가가가각!!
섬뜩한 소리에 눈을 부릅뜬 그가 입을 쩍 벌렸다.
그를 대신해서 스토벨의 검을 받아낸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푸른색 계통의 머리카락을 가진 작디작은 소년이다.
하지만 소년은 검을 머리로 받아낸 채 인상만 찡그리고 있었다.
“아야야…… 아프다…….”
인간이. 그것도 꼬마 소년이 어떻게 저 괴물의 검을 맨머리로 받아내는가.
티타늄도 부수는 돌머리도 저 정도는 안 되겠다.
철푸덕!!
그때였다
갑작스런 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는…….
“물고기? 아니…… 인어?”
바닥에 늘어진 채 펄떡거리고 있는 인어가 하나 보였다.
“꺄악! 수호자님! 여기 물이 없어요!!”
“멍청한 년! 그러니까 따라오지 말라니까!”
“수호자님이 보팔 님 대신에 놀러 가신다는데 어떻게 안 따라가요! 그보다 수호자님! 물! 저 말라비틀어질 거 같아요!”
“헛소리 마라! 그런 녀석이 잘도 모래사장에서 일광욕이나 즐겼구나!”
“꺅! 내 예쁜 비늘에 상처가!”
지구에 서식하고 있는 존재. 심해의 폭군이자 태초의 포식자. 베헤모스와 그에게 달라붙어 다니는 불사의 인어, 소야였다.
“너…… 대체 나한테 뭘 준 거야…….”
멍하니 그 꼴을 보던 샤드란은 저들이 소환된 매개체가 조금 전까지 뜨겁게 달아오른 수호석임을 깨달았다.
대체 이 꼬마 숙녀는 자신에게 무엇을 준 것일까.
카각!!
그때였다.
스토벨이 검을 비틀어 다시 소년의 목을 치려 하자 푸른 소년은 거침없이 눈을 번뜩이더니 한 손을 순식간에 거대화했다.
동시에 거대한 팔로 스토벨의 다리를 낚아챈 그는 자기 체격에 맞지 않은 엄청난 힘으로 그를 마구잡이로 내리쳤다.
“건방진 놈이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쾅!! 쾅!!! 쾅!!
수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팔로 스토벨을 마구 내리치는 소년과 바닥에 추욱 늘어진 채 싱싱한 횟감마냥 펄떡거리는 인어.
그리고, 패대기쳐지고 있는 서열 1위의 집행관.
베헤모스의 본체를 모르는 샤드란의 입장에선 눈앞의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