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15화
갑작스레 나타난 집행관 샤드란.
그리고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를 베헤모스와 인어 소야로 인해 소란스러워지는 건 당연했다.
첨벙!!
근처에 있는 호숫가에서 헤엄을 치며 그곳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과 태평하게 놀고 있는 소야와 그런 소야를 지켜보고 있는 베헤모스를 멀찍이서 바라본다.
“그러니까 저것들이 수호석에서 나왔다는 거잖아?”
본래 보팔 레빗은 기본적으로 그림자를 통해서 이동할 수 있다.
다만 이곳은 보팔 레빗이 그림자를 타고 이동할 수 없기에 수호석을 매개체로 이동시켰는데 아무래도 보팔 레빗 대신에 이 사고뭉치들이 나타난 듯 보였다.
재밌어 보여서 들어왔다고? 남 속도 모른 채 펄떡거리는 저 인어를 당장 회 쳐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멀찍이 모닥불을 지피고 있는 샤드란은 분명 나와 충돌했고, 내게 가면을 빼앗긴 사내였다.
당시 내 상태 때문에 죽이지 않고 방치했더니 그새 일어나서 나를 따라온 셈이었다.
정작 본인은 내가 무언가를 느꼈기에 일부러 살렸다고 착각하는 듯하지만 말이다.
뭐가 되었건 현재의 그는 딱히 우리와 적대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내 입장에서도 직접적인 원흉인 황제를 제외한 이미 항복한 나차 제국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나라를 빼앗긴 저항군들의 입장에선 나차 제국 자체가 미울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가 나를 도와준 건 사실이에요.”
슈네리아는 샤드란을 흘끗 보며 내게 언질을 줬다.
“하지만 쉽게 믿을 순 없겠죠. 그의 꿍꿍이를 알지 못하니까.”
일단은 도와준 입장이니 대놓고 적대하진 않지만, 경계의 대상인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레이나, 네가 보기엔 어때?”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준 것도 그예요. 그러다가 다른 집행관을 만나 죽을뻔한 것도 사실이고요. 아마 베헤모스 씨가 없었다면 그는 죽었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원하는 게 있으니 살려준 거겠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건가요?”
“들어는 보자. 저놈이 내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할 수가 있으면 받아들이는 거고, 아니라면 협상 결렬이고. 지금 중요한 건 네 상태인데. 괜찮은 거 맞아?”
레이나가 또다시 폭주했다.
그건 이미 예측하고 있던 바였다. 나 또한 상황에 심취해있었으니 말이다.
참 기묘한 세상이다.
“괜찮아요. 이번엔 전보다 버틸 만했으니까요. 그래도 두 번 다시 이런 경험을 겪고 싶진 않아요. 마치…….”
그녀가 잠시 말끝을 흐렸다.
“제가, 제가 아니게 된 것 같은 불쾌한 느낌이었어요.”
천천히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다 멈칫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는 게 좋겠는데.”
“아뇨. 여기 있게 해주세요. 당신과 끝까지 함께 할게요.”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
“저기…… 이야기는 끝났나?”
그때 상념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모두 시선을 돌리자 그가 떨떠름하게 웃어 보였다.
“너무 적의 드러내지 말자고. 난 지금 너희 편이니까.”
“배신이라도 했나?”
“배신이라니, 난 처음부터 황제 폐하에게 충성을 다한 몸이야. 말석이라곤 하지만 내가 집행관으로서 활동한 기간은 제법 길거든.”
그가 적당히 떨어진 돌무더기에 걸터앉았다.
“사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거든. 어때. 들어볼래?”
“아니, 안 듣는다. 그래도 도움을 받은 입장에서 그냥 넘어가긴 뭣하니 살려는 줄게.”
“아하하…… 생각보다 더 냉정하네. 이미 나차제국은 당신에게 항복한 거 아닌가? 이 이상 분쟁은 의미가 없어.”
“그걸 정하는 건 너희가 아니고 내가 하는 거지. 그리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이쪽도 나름대로 정보통이 있거든. 황제가 나차제국을 버렸고. 뮤린 황녀 저하께서 전권 대리자가 되셔서 당신에게 항복했다고.”
“분하진 않나?”
그래도 인간 한 명에게 제국이 굴복한 꼴이니까.
“분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되겠지.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이 정도면 주눅 들 만도 할 텐데 그는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황제. 그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장소가 여럿 있어. 그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에 관한 비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도 여럿 있지.”
“그래서?”
“그를 찾게 해주겠다. 대신. 한 가지 사실만 같이 조사해줘.”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황제를 배신한다고? 충성을 다하니 뭐니 할 땐 언제고.”
“난 처음부터 지금까지 황제 폐하를 향한 충절을 버린 적이 없어.”
“그런데 황제를 팔아넘긴다고?”
“지금의 황제가 진짜 황제가 아니라면 문제가 될 건 없지.”
그는 고민하다 품 안에서 어떤 작은 상자를 꺼냈다.
“처음엔 단순히 의심이었다. 하지만 이걸 보고 조사할수록 점점 이해할 수가 없더군.”
“이건 뭐죠?”
“폐하의 침소에서 발견된 거다.”
레이나의 질문에 그가 상자 안에서 꺼낸 살점 덩어리를 보여주었다.
“난 마공사야. 마나에 민감하지. 그래서 처음엔 폐하의 마나가 아닌 다른 마나가 느껴지는 게 조금 이상했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처음엔 그런 줄 알았어. 하지만, 거기 아가씨.”
“네…… 네? 저요?”
슈네리아가 깜짝 놀라 허둥지둥거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네가 지원하던 타차원 저항군이 폐하를 암살했던 일을 기억하나?”
“……네. 기억해요. 그 때문에 저는 황제가 죽지 않을 거라 생각했구요.”
그녀의 대답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부활했을 때 우리는 신수님의 은총이 아직 폐하께 남아있는 줄 알았다. 블랙 슬라임. 아니, 신수님은 폐하의 곁에 꼭 붙어 있었으니까. 어떤 은총을 받아도 이상하진 않다고 생각했지.”
말아쥔 그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아니었어. 암살당한 날 폐하를 호위하던 과정에서 입수한 폐하의 옥체에서 이것과 같은 파편이 발견됐다. 도저히 인간의 몸에서 나올 수가 있는 게 아니야.”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악마의 살이다.”
숨을 크게 들이쉰 그는 내게 말했다.
“아직 증거가 부족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악마가 폐하에게 빙의했고. 지금의 황제가 되었다고.”
빙의를 했건 바꿔치기를 당했건 결과적으로 현재의 황제는 가짜라는 소리였다.
“처음엔 증거도 없고 조력자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나는 폐하를 대놓고 조사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나는 아가씨가 저항군을 도와 폐하를 암살하는 상황을 보고도 모른 척 넘어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확신을 얻었다.
지금의 황제가 가짜라고.
“폐하는 원래 이런 분이 아니었어. 나차 제국을 노리던 자들을 몰아내면서도 안타깝게 죽어가는 이들을 향해 진혼을 올려주었고, 전쟁이 지속되는 것을 계속해서 반대하셨지. 지금처럼 전쟁이 미친 피의 군주가 아니었다고.”
나와 같은 케이스 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그저 상황이 비슷해서 착각한 것인가.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다행히 그 과정에서 나는 폐하가 숨겨놓은 여러 비밀들을 알아냈다. 그것들을 전부 알려주지. 대신 폐하가 정말로 악마에게 빙의 당해서 육체가 변한 것이라면.”
이를 뿌득 갈며 그가 선언했다.
“반드시 폐하의 원수를 갚아야 해. 하지만 내 힘만으론 부족하다. 황제는 뭔가를 더 숨기고 있어.”
결과적으로 그는 내가 황제를 찾을 수가 있게 도와줄 테니 그 과정에서 필요한 조사를 도와달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야기 좀 자세히 해봐.”
시간 단축이라면 나쁘진 않은 거래였다.
지금 내 변화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거슬리게 황제가 남아있는 것도 달갑진 않았다.
“정확히 무엇을 해주길 바라는지.”
내 말에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우선…… 그분을 만나줘.”
“그분?”
“그래. 이번엔 적이 아니라. 거래 대상으로써.”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한바탕 난리가 난 이후 나차제국은 황제가 제국을 버림으로써 많은 것이 변했다.
생각 이상으로 황제가 장악한 존재가 많았는지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제국을 빠져나가 자취를 감췄고, 갑작스런 대규모 공석으로 인해 전권 대리자가 된 뮤린 황녀는 골머리를 싸맬 수밖에 없었다.
“하아…….”
머리가 너무 아프다.
“아바마마는 이런 걸 혼자 해오신 건가? 아니…… 지금 상황대로라면 그는 아바마마가 아니야.”
황녀는 알싸하게 울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중얼거렸다.
대부분의 집행관은 전투가 불가능하고 그나마 운신이 가능한 건 마나 탈진을 회복하고 있는 마법사 집행관 이니스와 연락이 두절된 집행관 샤드란이 전부였다.
황실을 지탱하는 관리들도 상당수 사라져버린 상황에 황제가 제국을 버리고 이 같은 사태가 벌어지니 민심도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뮤린 황녀도 현 제국의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제국은 광기로 가득 찼으니 말이다.
다만 힘없는 황녀인 그녀가 그것을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똑똑.
“누구야?”
“저하. 샤드란입니다.”
“샤드란?! 어서 들어와!”
날카로운 눈매로 문을 노려보던 그녀는 황급히 소리쳤고 이내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이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다…… 당신은?!”
그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붉게 달아올랐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샤드란! 제국을 배신한 건가요?!”
“아닙니다. 황녀 저하. 저는 언제고 폐하를 향한 충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한데 어째서?!”
“그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녀 저하. 집행관 말석 샤드란 정식으로 건의드립니다. 신을 믿고 조사를 허락해주십시오.”
그의 말에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뮤린 황녀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주변의 이들을 살폈다.
제국에 귀의했으나 알고 보니 저항군을 돕고 있었던 슈네리아 레켄. 그리고 한 명은 처음 보는 여성이다.
그 외에 묵묵히 서 있는 잘생긴 남자는…….
“당신의 말대로 제국은 더 이상 차원 통로를 사용하지 않아요. 당신에 대한 모든 적대 활동도 멈췄습니다.”
“알고 있어. 제국은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아.”
“그럼 왜…….”
“널 만나러.”
데이비의 말에 뮤린 황녀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슈네리아와 레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뮤린과 데이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그…… 저를 만나러 왔다고요.”
“그래. 황제를 찾아야 하거든.”
“아…… 네.”
보기 드물게 실망하는 그 모습과 별개로 그녀는 사납게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느낀 건데 말이야. 너무 싫은 티를 내는 거 아닌가?”
그 말에 그녀가 흠칫 놀랐다.
“네…… 네?”
“너무 노려보는데.”
“그…… 그건…….”
“뮤린 황녀 저하께선 눈매가 조금 날카로우신 분입니다.”
샤드란의 정중한 어조에 데이비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럼 말고.”
묘한 대치 속에서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분쟁을 멈췄어도 현재 제국에서 당신은 공포의 대상이며 적대 대상이에요. 제대로 된 분쟁의 종지부를 찍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대놓고 들어오면…….”
“저하. 저하께서 가지고 계신 폐하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아바…… 마마의?”
“예. 이번 사태로 확신이 섰습니다. 현 황제는 이미 저하의 아바마마가 아니라는 사실을요.”
그의 말에 뮤린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정복한 국가를 해방하는 일도 신경 써야 하는데…….”
국력이 급속도로 약해진 탓에 정복국가들을 그냥 둘 순 없었다.
뮤린 황녀 본인도 이렇게 타국을 억압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나차 제국의 미래가 보장되었다.
“일단 알겠어요. 다른 이들은요?”
“이니스와 알보 단장에겐 이미 연통을 보냈습니다. 쉽게 믿진 않겠지만…… 그들도 저하를 따를 겁니다.”
그 말에 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빨개진 얼굴로 눈치를 살폈다.
더 이상 적이 아니라면 굳이 뭐라 할 건 없었다.
“저…… 차라도 한잔…… 하실래요?”
그녀가 용기를 내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