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20화
뮤린 황녀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지금 만나려 하는 이들은 절대 제국과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일부는 단순히 안 좋을 뿐이지만 나머지는 그야말로 철천지원수가 따로 없었다.
“저하.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요. 어차피 영상구를 통한 원거리 통신일 뿐이니. 가죠.”
뮤린 황녀가 뒤편에 있는 성녀복을 입은 슈네리아를 향해 말하자 슈네리아 또한 긴장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는 없어요.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그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니까.
짧게 한숨을 내쉰 뮤린 황녀는 이내 회의실로 당당하게 입성했다.
동시에 사방에 배치된 수정구슬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며 4명의 남녀의 모습을 비쳤다.
각기 그녀를 향한 시선이 곱지는 않다.
“앉으세요.”
담담하게 말하며 가장 상석에 앉은 그녀가 속으로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악귀의 딸이 잘도 우리와 접촉했군.]
[무슨 연유로 우리를 기만하려 드는 거지?]
[슈네리아 영애가 아닌가.]
한 사람은 그녀의 뒤편에 있는 슈네리아 레켄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모두라곤 할 수 없지만, 그녀가 많은 저항군을 도운 건 사실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현 나차 제국의 전권을 위임받은 뮤린 프라시아스 나차입니다.”
싸늘하면서도 기죽지 않는 모습으로 그녀가 자신을 소개하지만 좋은 반응이 나올 리가 없었다.
[우리가 한가롭게 서로 자기소개나 할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한 압박감.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불안함. 그리고 증오에 노출되는 것으로 온몸의 피부가 저릿저릿해지는 기분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허벅지를 보이지 않게 꼬집으며 떨림을 진정시켰다.
“여러분들을 불러 모은 이유는 현 황제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지?]
“현 시간부로 나차 제국은 당신들 모두에 대한 지명수배 및 적대행동을 멈추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네 사람의 숨이 크게 들이 쉬어진다.
사실상 저들은 저항을 할 뿐 이길 수 없으니 말이다.
[그게 무슨 뜻이지?]
[이야기를 듣자 하니 겁도 없이 타차원을 또 공격했다가 크게 한번 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내부가 불안전해지니 우리를 달래려는 건가? 웃기지도 않는군.]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이 나라를, 아니 이 대륙 전체를 바꿀 겁니다.”
그녀의 말에 네 사람의 눈에 놀라움이 서렸다.
“잘못된 걸 바로잡고, 고통받는 이들과 차별받는 이들을 사라지게 만들 겁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였다.
“그 과정에서 많은 출혈이 생기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악순환을 반복시키지 않을 겁니다.”
그녀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당신들 모두에게 정식 동맹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목표는…….”
그녀가 목에 걸린 목걸이를 꺼냈다.
그곳에는 커다란 열쇠가 달려있었다.
“세계의 중심부에 숨어들어 세상 전체를 좀먹고 우리 모두를 이 지경으로 만든 악귀를 처단할 겁니다. 반론은, 받지 않아요.”
황제의 위압에 눌려 그저 숨만 쉬고 살아가던 황녀가 처음으로 둥지를 벗어나 날갯짓을 시작했다.
* * *
[나를 찾아와라.]
“괜찮아요?”
나를 제외한 인물, 레이나와 베헤모스, 메가로드리아나 샤드란까지도 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내가 장벽에 손을 대고 있는 내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마치, 어서 오기만을 기다리는 듯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직접 확인해봐야만 했다.
‘세계의 심장부에 있는 놈과 다른 위치야.’
같은 장소이지만 다른 위치.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공간.
그야말로 하나의 이차원적인 무언가였다.
마치 나를 부르는 듯한 그 느낌에 나는 조금 더 집중해보았다.
명백한 프리아 여신 고유 신력의 흔적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트리거가 된 것일까.
목소리는 그때 이후로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세계의 심장부, 대륙의 중심은 거대한 대수림이다.
다만 그 대수림 사이에서도 결계가 쳐진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은 차이가 있었다.
“우선 결계가 열릴 때까지 이곳에서 머물러야 할 거 같습니다.”
꽤 정중해진 샤드란의 말투에 레이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기 죄송한데요.”
“네.”
“평소처럼 해주면 안 될까요? 좀 많이 느끼해서…….”
참을 수 없다는 듯 레이나가 한바탕 쏘아붙이자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가면을 뒤집어썼다.
“그…… 그럼 그렇게 하자고. 어쨌든 야영 준비는 이쪽에서 할 테니 기다리면 될 거야. 나 참 원래 이곳까지 도착하는 기간을 생각하면 딱 맞춰서 도착해야 하는데 설마 저 흑룡을 타고 올 줄이야…….”
아직까지 메가로드리아에 대한 두려움이 쉬이 가지 않는지 그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때 코를 찌르는 악취가 샤드란의 코에 닿았는지 인상을 찡그린다.
“이거…… 오염에 대한 정보는 들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네.”
그렇게 말하며 그가 공간 확장용 가방을 열었다.
“일단 주변을 돌면서 오염을…….”
“위험할걸?”
내 말에 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가, 내가?”
“그래 너.”
담담하게 말하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이나 또한 신창 롱기누스를 가볍게 들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움직임 같은데요?”
“그렇겠지. 여기까지 온 이상 그놈도 가진 패는 다 꺼내야지.”
저놈은 독 안에 든 쥐.
차원 통로를 통한 도주는 나로 인해 할 수 없고 그 외에 모든 도주 요소는 이미 틀어막혔다.
그 말과 동시에 사방에서 악취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까지 숨어있다가 드러난 것처럼 사방에서 몰려오는 역한 냄새와 함께 숲의 바닥이 보랏빛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그중 일부는 끔찍한 살점처럼 비틀렸다.
시간을 끌고 싶은 건지, 아니면 이걸로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지.
시시각각 오염되는 바닥이 늪처럼 변하고 그 안에서 끔찍한 형태의 괴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
생전 처음 보는 끔찍한 이형종들의 모습에 샤드란이 긴장한 듯 중얼거렸다.
“인간이네.”
“인간?!”
“그래. 악마 놈 특유의 비틀린 에너지에 노출된 인간 같은데…….”
잠시 중얼거린 나는 주변에 있는 돌멩이를 가볍게 걷어찼다.
퍼엉!!!
순식간에 오러를 머금고 날아간 돌멩이는 보기 좋게 이형종의 몸통을 날려버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놈들은 마치 물리 면역이라고 외치듯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닿기 직전 놈들의 주변에 스멀거리는 기류가 오러를 약하게 만든다.
마치 마나의 구조를 흐트러뜨리던 블랙 슬라임의 광물처럼 말이다.
샐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괴물이 오러가 잘 안 먹힌다고 하면 심각한 문제이기에 샤드란이 긴장한 듯 중얼거렸다.
“오러를 머금은 공격에도 안 먹힌다니…….”
“그럼 이것도 너프해 보시지.”
담담하게 말한 나는 포위하듯 모습을 드러내는 그들 중 하나를 향해 가볍게 성화포를 발사했다.
[6급 성마법]
[성화포]
투쾅!!!!
새하얀 백색빛의 섬광이 순식간에 이형종 하나를 감싸기가 무섭게 놈의 육신 전체가 빠르게 타오르며 연기로 흩어져나갔다.
단순히 화력만 보면 묵직한 강화 오러를 두른 돌멩이보다 약하다.
하지만 효과는 정반대였다.
-끼이이이익!!!
괴성을 내지르며 이형종의 육신이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신성력. 생각보다 상성이 확실한 놈이네요.”
레이나의 부연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푸스스스스스!!!
순식간에 주변을 장악하며 놈들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위험성을 눈치채고 재빠르게 나를 치기 위해 몰려든 것이다.
동시에 마나의 흐름을 방해하는 공기가 더욱 짙어지기 시작했다.
“젠장! 마나가 움직이질 않네!”
샤드란이 인상을 찡그리며 확장 가방 안에서 방패와 검을 꺼내 들었다.
“여긴 원래 이런가?”
“신수님의 광석은 이곳에서 많이 채굴돼. 대부분 마나의 구조를 흐트러뜨리는 자연환경이지. 그리고 대륙의 심장부, 이곳은 유난히 그런 자력이 심한 곳이고. 다만 지금 시기는 이 흐름이 강할 때가 아닌데…….”
자연적으로 마나의 구조가 흩어지는 공기가 돌고 있다.
본래라면 이곳은 마법을 사용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이 대수림의 중심부를 제외하고는.
그렇기에 가장 안전한 은신처이기도 했다.
“원래라면 지금 시기는 이렇게 흐름이 강하지 않아.”
마나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현상에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에 레이나에게 물어보자 그녀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못 쓰는 건 아닌데. 소모가 심하네요. 도움이 안될 거 같아요.”
“베헤모스는?”
“흥. 나는 마나 따위 없어도 힘이 넘친다.”
저놈은 형태가 꼬맹이라 해도 본체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 어류니까 가능하긴 할 터다.
“흐름이 강해진 이유를 모르겠네. 분명 처음에 왔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마 그거 나 때문일 거다.
이 장소. 이상하게 나와 공명하고 있다.
그리고, 나를 부르던 그 목소리가 사라진 직후부터 이 흐름이 강해졌다.
마치 나를 시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불공평하네요. 왜 저놈들은 멀쩡한 건지.”
“마나로 움직이는 게 아니니까.”
대체 얼마나 오래 준비해온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그우우우…….
이윽고 놈들이 본격적으로 밀고 오기 시작하자 나는 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성흔이 찌르르 울리며 신력과 공명한다.
[6급 성마법]
[성화포]
다시 한번 성화포가 내 손끝에서 발현되어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세상에…… 이게 다 몇 개야…….”
경악하는 샤드란을 무시한 채 나는 내 주변으로 떠오르는 광원들을 마치 미니건을 쏴 갈기듯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쩌엉!! 쩡!!
순식간에 쏟아지는 빛의 섬광에 이형종들의 육신은 순식간에 꿰뚫려 나갔고 천천히 무너져 내려갔다.
순식간에 정리되기 시작하는 놈들 틈 사이로 한두 놈씩 은밀하게 밀고 들어오는 놈들이 있었지만, 레이나가 그걸 두고 보지 않았다.
서걱!!
새하얀 신성력을 머금은 창을 휘둘러 그들의 목을 날려버린 레이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많이 오네요.”
“그래 보이네.”
“솔직히 힘을 끌어내는 게 쉽지 않아요.”
그녀의 말대로 이 기류는 점점 격해지고 있다. 마치 일정 이상의 수준이 되지 않으면 접근을 막는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적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수십 마리에 불과하던 적들은 이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본다면 나를 중심으로 대수림 전체에서 놈들이 나타나 기어 오는 모양새일 것이다.
마나의 활용이 어려운 지역에서 막대한 질량 생명체를 들이밀어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방법이라면 확실히 어지간한 존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푸확!!!
“젠장! 이 빌어먹을 악마 놈이 소모전을 준비했구나! 심장부로 향하는 결계가 쉽게 열리지 않을 걸 알고 준비한 거야.”
마나의 활용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샤드란은 방패로 놈들을 밀치고 검으로 급소를 찔러 넣었다.
일단 신성력으로 인챈트를 해준 덕분인지 녀석의 공격에도 이형종들이 조금씩은 무너져 내려갔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마치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방해하는 놈들을 보며 나는 한 손을 높이 들었다.
화아아아악!!!
[신께서 가로되. 엿이나 먹으라 하셨다.]
[9위계 최후 성마법]
[신의 중지 손가락]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며 주변을 짓누른다.
모든 것을 정화시키는 빛처럼 주변을 모조리 장악한 거대한 백색의 신성력은 이내 거대한 기둥이 되어 낙하했고 대수림 전체를 그대로 삼켜버릴 것처럼 내리꽂혔다.
쿠웅!!!!!
어마어마한 진동과 함께 보랏빛으로 일그러져 있던 대지가 순식간에 정화되어간다.
그리고, 그에 영향을 받듯 모습을 드러낸 이형종들의 형체가 순식간에 분해 증발되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레이나나 베헤모스야 그러려니 하지만 멍하니 이 상황을 보는 샤드란에게는 충격적인 장면인 듯 보였다.
담담하게 전역을 정화시켜버리는 나를 보며 그가 물었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그 질문에 나는 굳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곳을 죄다 장악한 듯 보이지만 결국 황제도 저 결계 안에 몸을 숨긴 이상 더 이상의 간섭은 힘들 것이다.
장기적으로 나를 계속해서 소모시킬 생각이었던 듯 보이지만 일대 전체를 정화시켜버린 이상 놈이 할 수 있는 건 문이 열리고 내가 들어갈 때까지 멍하니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으리라.
깔끔하게 주변을 치워버린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언제 된다던?”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여유롭게 말하는 나를 보며 샤드란은 헛웃음을 흘렸다.
적이든 아군이든 계획, 예상을 뒤엎어버리는 이 앞에서는 할 말이 사라질 수밖에 없으리라.
* * *
나름대로 알차게 준비한 요격 몬스터들이 모조리 격살당한 뒤로 더 이상의 습격은 없었다.
레이나는 그동안 마나의 사용에 익숙해지기 위해 마나를 계속해서 운용했고 나는 그저 묵묵히 하루를 기다렸다.
그리고, 본래 예상보다 빠르게 다음날이 밝자마자 변화가 일어났다.
파직!! 파지지직!!!
뮤린 황녀는 생각보다 굉장히 유능했던 모양이었다.
“본래 예상 시간보다 훨씬 빨리 가동됐네. 황녀 저하께서 힘을 쓰신 모양인데?”
대륙의 심장부로 향하는 결계가 옅어지는 걸 보며 샤드란은 지도를 펼쳤다.
“대수림 결계 내부는 그야말로 미로니까 조심히 따라와. 까딱하면 전후좌우 완전히 방향을 잃어버릴 테니.”
그의 안내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자 레이나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저기…… 괜찮은 거 맞아요?”
“괜찮은데. 왜?”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요.”
레이나가 조심스레 나를 향해 말했다.
이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가자.”
결계의 내부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치 생태계가 바뀐 것 같은 변화에 레이나는 아름다운 숲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군데군데 상당히 오염된 지역이 보이곤 있지만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이곳을 마냥 잠식하는 건 어려웠는지 그리 많지 않았다.
또한 이형종들 또한 하나도 보이지 않은 거로 보아 놈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몰라도 이곳에서 마냥 자기 집마냥 진을 치는 건 쉽지 않은 듯 보였다.
그때였다.
찌릿하는 느낌과 함께 머릿속이 진탕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괜찮아요?”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레이나가 재빨리 이변을 눈치채고 내게 다가왔다.
“안색이 창백한데…….”
“그냥 속이 좀 안 좋아서.”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드는 것도 오랜만이라고 할 정도로 불쾌했다.
정작 나 이외엔 그 누구도 이질점을 눈치채지 못하지만 오로지 내게만 적용되는 느낌이었다.
정체 모를 이질감을 애써 무시한 채 걸어 나가자 곧 대수림의 중심부 지하로 이어진 거대한 길이 보였다.
마치 세계의 심장을 표현해놓은 듯한 거대한 지형이 보인다.
너비만 수 킬로미터에 달하고 그 깊이가 굉장히 깊은 싱크홀.
그 싱크홀의 중앙에 붉은빛을 내뿜는, 거대한 바위가 보였다.
심장처럼 생긴 붉은 바위는 끊임없이 빛으로 맥동하며 대륙 전체를 향해 에너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내 눈에 비치는 붉은 바위는 기괴해 보이지만 말 그대로 대륙의 심장부라 불러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저것이 있기에 대륙에 녹음이 있고 평온이 존재한다.
즉 저 심장 같은 바위는 말 그대로 이 대륙의 심장이었다.
역시. 이놈의 대륙은 일반적인 차원과 다르다는 게 절절히 느껴졌다.
인간들은 다를 바 없으나 이 차원을 구성하는 대륙 자체가 기본적인 틀과 많이 달랐다.
“저길 봐요.”
그때 레이나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손을 뻗었고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거대한 심장과도 같은 바위의 앞에 고고하게 옥좌를 놓고 오만하게 앉아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노인의 모습 때문이었다.
젊은 황제의 모습은 이미 가져다 버린 모습이었지만 그 육신은 달랐다.
깡마르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노인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고 당장이라도 3대 500은 우습게 칠 것 같은 근육을 자랑하는 체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도 여유를 잃지 않고 있던 그가 내게 말했다.
“질리지도 않고 여기까지 찾아왔구나. 하나 이미 늦었다.”
그가 끌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그대로 손을 뻗었다.
그가 손을 향한 곳은 바로 샤드란이였다.
“주인을 무는 개는 필요 없는 법이지.”
콰아앙!!!
동시에 샤드란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폭발에 휘말려 튕겨 나갔다.
이에 레이나가 신창 롱기누스를 꺼내 응전하려 할 때였다.
스르륵…….
그녀의 주변으로 두 명의 인영이 빠르게 내려섰다. 나차제국에서 황제가 제국을 버렸을 때 그를 따라 사라진 집행관들이었다.
한 놈은 스토벨 바르샤일테고, 나머지 한 명은 이름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 외에도 레이나를 포위하듯 사방의 초목이 보랏빛으로 일그러지며 기괴한 이형종들을 쏟아냈다.
“짐에게 거역하는 자는 죽어야 하지 않겠나.”
끝을 알 수 없는 힘이 흘러나온다.
괜히 잡졸은 아니라고 말하듯 놈은 자신의 힘을 어김없이 드러냈다.
만족스러운 듯 그가 기괴하게 웃었다.
“이곳까지 오면 뭔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는가?”
굳이 놈의 말에 나는 어울려주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만들어낸 기검을 튕겨 그에게 날려 보냈다.
푸욱!!!
끝없이 기검의 형성을 방해하는 기류가 흘러나왔지만 나는 그런 제약을 깡그리 무시한 채 황제, 아니 황제의 육신을 먹어 치운 놈의 심장에 기검을 찔러넣었다.
-끼에에에에에에엑!!
동시에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는 놈이 몸을 버둥거렸다.
푸욱!! 콰득!!
이에 나는 손을 이리저리 휘저어 그의 몸에 꽂힌 기검을 계속해서 비틀었다.
-크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진다. 추가로 만들어진 기검이 날아들어 놈의 몸에 꽂힌다.
그것으로 모자라 나는 왼손으로 기검을 만들어 계속해서 방출시키면서 오른손에 홍단이를 뽑아 쥐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본체. 즉. 이번만큼은 그도 부활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목이 잘려나간 놈의 몸이 액체처럼 흐물거리더니 이내 순식간에 합쳐지며 재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곳에서 한가지 흐름을 본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심장의 힘을 빨아먹네.”
“호오. 이게 보이느냐. 그래. 보인다면 더욱 절망하기 쉽겠지. 이 심장은 이미 나와 동화되었다. 이 심장을 파괴하지 않는 이상 나는 죽지 않아.”
자신이 불사의 존재라 밝힌 꼴이었다.
물론 죽이라고 한다면 못 죽일 것도 없다.
하지만, 그의 생명력을 채워주는 이 대륙의 중심 심장.
그 심장을 부수는 순간 이 대륙이 부서질 거라는 건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니까 물건 간수 잘하라니까…….”
나는 일을 이따위로 처리해놓은 프리아 여신에게 투정을 피우는 기도를 올린 뒤 몸을 튕겼다.
깊디깊은 싱크홀 아래로 내려선다.
본래라면 어두워서 내부가 보이지 않아야 하건만 너비가 워낙에 크고 내부에도 수많은 발광석들이 존재하는 탓에 상당히 환했다.
수백 미터를 빠르게 내려선 나는 정면에 보이는 황제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네놈이 강한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를 죽이면 이 차원도 같이 죽는 거다.”
놈이 인질을 잡았다.
그것도 차원, 대륙 전체를 말이다.
놈에게 한 발 내디디며 나는 한 손에 검은 화염을 피워올렸다.
“심장부는 너와 달리 고통을 못 느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아주 죽여달라고 빌게 해준다고.”
나는 빙그레 웃으며 나를 경계하는 놈에게 망설임 없이 9서클 원소 마법, 지옥 불을 던져버렸다.
죽지만 않으면 얼마나 괴롭히건 상관없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