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22화
역시 기분 나쁜 공간이다.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넌 아무렇지도 않냐? 난 아까부터 굉장히 거슬리는데.”
레이나는 그저 조금 불길하다는 것을 제외하곤 아무런 영향이 없어 보이건만, 정작 나는 알 수 없는 굉장히 불쾌함이 전신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마치 분노조절장애가 온 것처럼 괜스레 열받고 모든 것이 짜증 나게 느껴지는 장소였다.
“이놈의 여신은 대체 여기 뭘 만들어놓은 거야.”
처음 결계에 손을 댔을 때 들려왔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이놈의 세계는 뭔가 앞뒤가 많이 맞지 않았다.
대륙의 심장이 버젓이 노출되어있는 것부터. 어째서인지 신격에 이른 내 정신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기류와 내 제어를 벗어나는 여러 가지 힘들이 있었다.
이곳은 단순한 차원이라고 보기엔…….
“차라리 몽환 세계 같은 느낌이네.”
토씨 하나부터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시스템이 여신의 테스트 서버 같은 느낌을 주는 세상이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이런 문제가 있는 세상이면 보통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어야 하는데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뮤린 황녀를 포함한 이 세계의 인간들이 단순히 시스템을 구성하는 톱니바퀴냐 묻는다면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 말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안에 있던 황제의 영혼은…… 어떻게 된 걸까요.”
“그거 거짓말일 거야.”
담담하게 말한 나는 고동치는 거대한 심장을 향해 걸어갔다.
악마가 죽으면서 연결의 주체였던 옥좌는 부서졌고, 오염은 빠르게 사라져간다.
놈이 마지막에 내뱉은 저주치고는 너무 허무한 결과였다.
“거짓말이요?”
“보통 영혼을 관리하는 권능은 우치 그 양반이 가지고 있지만 데스 로드 정도 되면 영혼을 보는 건 어려운 것도 아니거든.”
내가 본 악마에게선 영혼이 단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행…… 이겠죠.”
“육신은 이미 빼앗겼을 테고. 남은 혼이 없는 거로 봐서는 아마 윤회에 들었겠지.”
“그런데…… 뭔가 굉장히 허무하게 끝나버렸네요. 아무리 당신의 힘이 말도 안 되는 디메리트가 있는 걸 몰랐다고 해도…….”
그때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레이나를 품에 안듯 감싸고는 뒤로 물러났다.
두근!!
동시에 무형의 고동 소리가 내가 있던 지역에 닿았다.
“으…… 으읏…….”
당황한 듯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레이나를 내려놓은 내가 고개를 들었다.
“너도 입 조심해야겠다.”
입만 열면 사태를 꼬아버리는 건 누굴 닮은 건지.
“꺅!”
내가 그녀를 던지듯 내려놓자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은 그녀가 나를 본다.
그리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 심장이 갈라지고 있는 거 같은데요?!”
“알아. 물러나 있어. 나를 부르고 있는 거야.”
내 말에 레이나는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하게 고집을 부릴 상황이 아니라는 건 그녀도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저 멀리서 아직 녹아 없어지지 않은 이형종들 중 남은 녀석들을 먹어 치우고 있는 베헤모스에게 소리쳤다.
“베헤모스! 지금 당장 물러나요!”
[으엉? 아직 이놈들 못 먹…….]
“알았으니까 빨리! 그리고 은총 내놔요!”
허락도 받지 않고 내게서 신력을 끌어다 사용한다.
날개를 펼친 그녀가 섬광이 되어 베헤모스를 낚아채고 싱크홀 밖으로 빠르게 날아올랐다.
아니, 기도 자꾸 그런 식으로 할래?
상당량의 신력이 빠져나가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기분이 묘하게 나쁜 게 버릇없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느낌이 이러할까.
겉면이 갈라지는 심장을 향해 시선을 돌린 나는 한 손을 뻗어 허공에 고정시킨 뒤 붕괴하는 심장을 억눌렀다.
고작 놈의 심장을 대가로 바쳤다고 대륙의 심장부가 붕괴한다?
웃기는 소리. 이건 악마 놈의 심장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뿐. 본래 이 심장이 지닌 목적이 발현된 꼴이다.
이윽고 무형의 기류를 마구잡이로 토해내는 심장이 대륙에 큰 영향을 끼치기 전에 남은 한 손을 미리 뻗어둔 손 쪽으로 당기며 퍼져나가는 파장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퍼져 나오려는 막대한 에너지가 내 손을 따라 서서히 억제되기 시작하지만, 반탄력 또한 경이적인 수준이었다.
그그그극!!!
그리고 막대한 생명력을 끌어오기 시작한다.
붉은 공허의 왕. 생명력의 주인.
권능을 가진 신격.
순식간에 내 형체가 신격에 가장 걸맞은 무성 형태로 변하기 시작한다.
머리가 길어지며 흩날렸고 키가 조금 작아진 느낌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아마 거울로 보면 곱상하게, 아니 예쁘장한 외모로 변해있으리라.
신력을 다룰 때 이 형태만큼 안정적인 게 없으니 말이다.
모든 힘에 의지가 서린다.
강제로 폭주하는 심장을 억누르는 내 시야가 푸르게 변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였다.
맹렬하게 폭주하던 심장의 파동이 한차례 내 힘과 충돌한 직후 내 시야에 묘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문자, 여기저기 깨져있지만 이상하게 알아볼수있었다.
[자격을 지………… 확인, 태초…… 따라 완…… 동기화를 진행. 신께서 이르시길. 고행이 있으라.]
딱딱한 분위기를 풍기는 허공에 뜬 문자와 함께 내 몸 안으로 파장에서 흘러나온 독특한 힘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와 거대한 심장 사이에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었고, 내 몸 안의 신력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링크에 어울리며 의식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마치 이때를 노렸다는 듯 심장과 공명하는 내 신력이 내 의지를 벗어나 멋대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억지로 밸런스를 맞춰 나의 변화를 막아주던 힘들이 멋대로 검게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내 의지는 그대로인데. 힘만 변하는 기분 나쁜 상황 속에서도 나는 힘의 폭주를 강제로 억눌렀다.
처음부터 대비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조금 후회가 몰려오지만, 결과적으로 언젠가는 부딪혀야 할 시험이기도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더욱더 힘을 끌어올렸다.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
[준비도 없이 신격에 도전하는거냐?]
동시에 의식 너머로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들렸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해서 거대한 하나의 세상 자체가 붕괴하는걸 틀어막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거부하지 마라, 온전한 자격을 지닌 네가 이곳에 온 시점부터 시험은 시작되었다. 거부하면 너는 물론, 이 공간이 붕괴한다.]
“웃기고 있네. 누구 마음대로.”
[정제되지 않은 네 악업은 흑아병을 없애줄 심장이 현재 붕괴하고 있다. 무방비가 된 네 육신을 지켜줄 이가 있는가?]
그 질문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결계 밖에서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는 레이나와 말없이 나를 직시하는 베헤모스가 보였다.
믿음은 깊게 필요하지 않았다.
레이나에게 현 상황을 전달할 수단은 없다. 마음 같아선 가장 든든한 일리나가 곁에 있으면 했지만, 그녀는 이곳에 없으니 레이나를 믿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래.”
동시에 내 의식이 육신에서 벗어난다.
유체 이탈과는 다른 묘한 느낌이었다.
* * *
데이비가 무릎을 꿇는다.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심장의 앞에서 침묵하는 데이비를 결계 밖에서 보던 레이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저게 무슨?!”
데이비가 자신을 한번 본 뒤 힘을 풀고 천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동시에 그의 의식이 사라진 듯 힘이 빠진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갈라진 심장은 계속해서 고동친다.
문제가 생겼다면 데이비의 표정에 드러났을 텐데.
그가 잠깐 돌아봤을 때 그의 표정은 마치 믿고 있다고 말하는 듯한 미소였다.
콰앙!!
반사적으로 눈치챈 그녀가 결계를 두드린다. 하지만 단단한 결계는 쉬이 부서지지 않았다.
심장과 공명하면서 생긴 결계는 대수림의 심장부를 감싸는 결계에 비하면 훨씬 약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식할 정도로 단단했다.
“또 결계!!”
쾅!! 쾅!!
순식간에 만들어낸 기검으로 계속 두드려보지만 쉽게 부서지진 않았다.
신격을 지닌 존재를 수용하기 위한 결계. 당연한 단단함이었다.
“힘을 빌려오기도 힘든 상황에…….”
상황은 그 이후로도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데이비가 앉아 침묵하고 있는 장소에서 검보랏빛의 어마어마한 기둥이 하늘 위로 쏘아져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꿰뚫듯 올라간 빛의 기둥을 중심으로 거대한 원형 구름이 퍼져나간다.
숨이 막힐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의 여파가 주변으로 흘러넘치고 대수림의 숲이 순식간에 뒤집어지며 대지 격변을 일으켰다.
보기만 해도 불길한 기류.
그 속에서 레이나는 온전히 보았다.
침묵하는 데이비의 곁으로 다수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말이다.
데이비와 흡사하지만 조금 다른 존재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건 끝없는 원소 마나.
신성력. 사령 마나. 그리고 마기를 포함해 여러 힘들이었다. 하지만 데이비가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둡고 검었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데이비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레이나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두근!!
대륙의 심장이 고동치며 무형의 채찍들이 날아들어 그 존재들을 휘감는다.
마치 데이비를 헤치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콰직!!
심장의 표면에 다시 한번 금이 가며 채찍들이 부서져 내렸다.
마치 저들을 막을 힘조차 남지 않았다는 듯 채찍은 무력하게 부서져 나갔다.
제대로 막아내지도 못할 거면 이놈의 결계라도 치우던가!!
속으로 그런 외침을 내뱉어본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럼에도 심장은 데이비를 보호하기 위해 계속해서 채찍을 만들고 부서지기를 반복했다.
[비켜봐라, 멍청한 것.]
그때 가만히 침묵하고 있던 베헤모스가 눈을 천천히 뜬다.
동시에 녀석의 전신에 막대한 빛이 흘러나왔고 이내 거대한 체격을 지닌 거대한 본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다수의 촉수를 흩날리는 거대한 4족 보행형 흰 수염 고래는 이내 귀가 찢어질 듯한 포효를 터뜨린 뒤 결계에 그대로 몸을 들이박았다.
콰아앙!!!!!
대지가 울리는 말도 안 되는 질량 충격에도 결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끄아악!! 빌어먹을 내 머리!]
바닥을 뒹굴며 괴로워하던 베헤모스의 전신은 한 눈으로 시야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하다.
하지만 놈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 더욱 막대한 힘을 내뿜으며 점차 거대해지기 시작했고 이전보다 두 배는 커진 모습으로 다시 질량 폭격을 가했다.
콰앙!!!!!
“오…… 흔들렸어요!”
[진짜냐?!]
“어…… 음, 잘못 본 거 같아요.”
[너부터 먹어 치워버리기 전에 닥쳐라!]
콰앙!!!
저렇게 전신으로 들이박으면 그에 따른 반탄력이 굉장할 것이다.
특히 현재의 결계는 그런 반탄력에 상당한 힘을 두고 있는 결계가 분명할 터. 베헤모스는 자신의 몸에 엄청난 데미지가 누적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들이박았다.
쾅!!! 쾅!!!
압도적인 질량 폭격이 계속 이어졌을까.
베헤모스의 육신 일부가 일그러지는 게 보이자 레이나가 격하게 소리쳤다.
“그만둬요! 당신까지 위험…….”
[감히 내 자존심을 건드려?!]
그그그그그그극!!!
모든 것을 해방한 듯 베헤모스의 크기가 더욱 불어나기 시작했다.
삼 환수왕 중 가장 거대한 존재는 단연 베헤모스라 할 수 있다.
다만 녀석의 크기는 너무 거대한 탓에 본래 이전의 형태처럼 크기를 줄이는 편이지만 데이비와 계약하고 온전히 힘을 얻고 있는 현재로선 상관없었다.
-크우우우우우우!!!
대기를 뒤흔드는 막대한 포효소리와 함께 도저히 크기를 가늠하기 힘든 거대한 규격의 존재가 앞발을 내디딘다.
발 하나가 거대한 싱크홀을 가볍게 덮어버릴 정도로 거대해진 놈은 이내 그대로 거대한 입을 이용해 결계를 물어뜯었고 강제로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단순 질량을 헤아리는 수준을 넘어선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깨지지 않는 결계를 보며 레이나가 이를 악물었다.
베헤모스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이미 놈의 몸체는 대수림 대부분을 덮었고, 그 때문에 베헤모스의 아래에 있던 레이나는 밤이 온 것처럼 어두운 느낌을 받았다.
[그그그그그!!]
무식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베헤모스의 무식한 육탄 돌격은 멈출 줄 몰랐다. 하지만 그 덕분일까.
처음으로 데이비의 결계에 확연한 일렁임이 보였다.
이에 레이나는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고 그대로 신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창. 신창 롱기누스를 손에 쥐었다.
[롱기누스 두 번째 형태.]
[죽창]
그녀의 의지에 따라 긴 장창으로 변한 롱기누스를 역으로 틀어쥔 레이나는 빠르게 집중했다.
자신이 아니라 일리나가 이곳에 있었다면 그저 시공격검으로 베어버리면 될 일이다.
하지만 시공격검은 현재 일리나를 제외하고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이가 없다.
평행세계에서 온 그녀 본인조차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비야 포식의 권능으로 시공격검의 힘을 먹어 치워서 흉내를 내는 정도이지만 일리나 정도로 온전히 사용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면 흉내라도 내야지.”
그녀의 전신에서 막대한 힘이 흘러나왔다.
데이비가 다치게 둘 수 없다. 그녀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너무도 중요한 은인이며, 그녀에게 다시없을 소중한 사람이 아닌가.
검을 놓았고, 한번 망가졌으며 이제는 다른 이가 되었기에 재능에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빠드득…….
롱기누스를 쥔 그녀의 손에 힘이 가해진다.
데이비가 자신에게 보여준 시선과 웃음은 명백히 그녀를 완전히 믿고 무방비 상태가 된 것이다.
그것에 두 번은 없다.
마나를 극도로 응축시켜 창에 담은 레이나가 고개를 강하게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푸른 안광을 번뜩이며 타오른다.
동시에 그녀의 등 뒤로 새하얀 날개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전 검은 날개와 뒤섞인 것과는 다르게 온전히 순백의 빛을 띠었다.
검신 하레스가 남긴 시공격검은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극한의 재능을 지닌 이들만 들여놓을 수 있는 하나의 절대 경지였다.
비록 흉내일 뿐이지만 상관없었다.
그녀가 한다면 자신도 한다.
레이나는 아주 잠깐만이라도 그 지고의 경지를 억지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쩌어엉!!!
그녀의 손을 타고 내찔러진 창은 아주 한순간, 찰나의 순간에 공간을 넘어 차원을 찢어 열었고, 그 결과 결계에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그가가가가각!!]
고통스러워하는 베헤모스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놈은 더욱더 강하게 결계를 물어뜯어 압박했다.
베헤모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틈이 만들어진다. 양쪽으로 가해지는 압력을 방어하기 위해 힘들 때문에 중앙에 아주 옅게 틈이 생긴 것이다.
신격이 만들어낸 장막이지만 불안정하다. 그렇기에 뚫을 수 있었다.
레이나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결계 안으로 섬광처럼 날아들었고, 검은 존재들이 데이비를 향해 다가가는 검은 존재들을 향해 기검을 방출해 튕겨냈다.
데이비 이외엔 관심이 없다는 듯 그것들은 아주 천천히 그를 향해 접근할 뿐이었다.
거대한 빛의 기둥을 만들어내고 있는 데이비의 육신은 너무도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누가 여기서 자래요!”
화가 난 듯 소리치며 그녀가 손을 뻗었다.
파지지지직!!
“꺄아아아아악!!”
끔찍한 격통과 함께 거대한 기둥 속에 있는 데이비를 붙잡은 레이나의 팔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데이비를 그 기둥 속에서 끌어냈다.
그녀의 옷 소매 부분은 이미 불타 사라졌고 그녀의 피부는 여러 차례 찢겨 나갔지만 상관없었다. 흉터도 남지 않을 것이고 설사 흉터 좀 남아도 상관없었다.
데이비를 끌어안은 레이나의 날개가 그를 감싸기가 무섭게 거대한 백색의 장막이 데이비와 레이나를 보호하듯 감쌌다.
쿠웅!!
저 멀리서 결국 데미지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베헤모스가 보였다.
다시금 결계는 닫혔지만 상관없었다.
데이비에게 이미 닿았으니 말이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데이비의 몸을 뒤에서 꽉 끌어안은 채 그녀가 데이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그녀의 고질병인 남성공포증이 데이비에겐 약하다곤 하지만 이렇게 장시간 접촉하는 건 그녀에게 굉장한 부담을 주었다.
폐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좁은 공간에 갇힌 것처럼 식은땀이 흐르고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럼에도 레이나는 손을 놓치지 않았다. 손을 놓는 순간 그녀와 데이비를 감싼 장막이 사라지고 검은 존재들이 데이비의 육신을 찢을 것이다.
자세히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감은 그렇게 울부짖었다.
여기서 데이비의 육신이 붕괴하면 그는 타나토스나 넬타리드처럼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불안함.
“난 아직 당신이 없으면 이 세상이 무서워요. 부디 날 두고 가지 말아요.”
그녀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데이비를 뒤에서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마치 그녀를 괴롭히는 트라우마를 견뎌내려는 것처럼 말이다.
* * *
막대한 힘의 변동이 나차의 차원 전체를 뒤엎는다.
차원의 격리구간. 레어에서 검은 블랙 슬라임을 꼭 끌어안고 있던 에반젤린은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으스스스…… 뭐야 왜 오한이 돋는 거야.”
말없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블랙 슬라임을 인형처럼 꼭 끌어안은 에반젤린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킵슨 mk-6! 가서 온도 좀 올려줄래?”
레어를 지키는 허수아비가 뒤뚱뒤뚱 걸어가는 걸 보며 에반젤린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오한이 돋으면 아빠한테 무슨 일이 있을 때밖에 없는데…….”
딸아이의 직감은 생각보다 너무 정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