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33화
데이비 왕자는 금방 떠나갔다.
그의 곁을 지키며 짹짹거리던 성격 나쁜 뱀파이어 로드이자 스승이나 다름없는 요시아 프랑소스도 역소환진을 이용해 돌아갔다.
다시 돌아온다곤 했지만 언제 오는지에 대해 듣진 않았다.
고요한 별장의 방안. 본래 감옥에 갇혔어야 했으나 데이비 왕자가 오해를 풀어준 덕에 방에 있는 꼴이었다.
그의 손에는 낡은 병에 담긴 포도주가 쥐어져 있었다.
술이라. 늘 마시던 것이다.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린다. 평민들을 얕잡아보고, 시종이나 시녀들에게 시비를 거는 것도 일상이었다.
과거의 그였다면 이런 낡은 술을 가져왔냐며 성질을 부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오히려 이런 낡은 술이 그에게 더 맞았다.
“너나 나나 참 꼴이 우습구나.”
그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바르게 올라오는 취기에 따라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한번 잘 고민해봐. 적어도 내가 보기엔 네 잘못은 아니니까.]
데이비 올 라운. 대륙에서 가장 강한 존재이자 대륙의 성자. 그가 했던 말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는 듯한 말투에는 도저히 그에게 함부로 할 수 없는 무거움이 서려 있었다.
나이 차이가 고작 몇 살인데.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건 쉬이 믿기지가 않았다.
과거의 그였다면 질투하고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냉정하게 보면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그가 해준 던지듯 한 말에 마음에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싸늘한 표정이나 무서운 위압감과는 별개로 자신이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을 때. 유일하게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주었다.
아버지, 차이드 백작의 말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가 중앙 아카데미에서 사고를 쳤고, 그 사고로 인해 차이드 백작가에선 엄청난 빚을 졌으니 말이다.
중앙 아카데미는 엄청나게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만큼 수많은 시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시료의 상당수가 존재하는 국보급 아티펙트가 모인 박물관이 폭발한 게 발단이었다.
그는 아직도 쉬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불살라지는 아티펙트들과 오래된 유물들이 불타는 장면을 말이다.
바닥에 쓰러진 채 거칠게 제압당해있던 그와. 그런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던 학생회. 그리고 아카데미 내부에 존재하는 7성 교수들.
아카데미의 교수이자 아카데미의 최고위 원로나 다름없는 7성 교수들의 위압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아니라고, 이건 오해라고.
하지만 자신이 해온 일 때문일까.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던 학생회도, 대부분 학생에게 친절한 7성 교수들도, 하물며 차이드 백작가가 가진 특권에 빨대를 꽂아 꿀을 빨고자 아부를 떨던 놈들도 모두 모른 체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존재였는지를 말이다.
억울한 일을 덧씌워 사람을 휘두르는 망나니 같은 행동.
지금처럼 스케일을 크게 저지른 바는 없지만 크든 작든 그는 오래전 많은 이들을 그렇게 괴롭혀본 사례가 있었다.
그땐 자신이 우선이었고, 자신에게 덤벼들었기에 잘못한 것이다.
힘없는 놈이 나쁜 것이고, 당한 놈이 병신 머저리인 것이다.
그렇게 비웃었다.
하지만 실제로 당해본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
자신이 괴롭힌 이들도 이랬을까.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자신은 그저 탐욕스레 시료들을 구경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간단한 장난을 쳐볼까 생각만 했을 뿐이라고 항변해보았다.
하지만 그를 믿어줄 사람도 없었고, 그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이 사태의 범인으로 몰았다.
너무 억울해지면 사람의 이성이 마비된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피력했다.
사람은 다급한 상황이 되면 이성이 마비된다.
그곳에서 포박되어 학생지도실로 끌려가던 미드 차이드는 어느덧 보인 틈을 발견하고 그대로 도주했다.
아카데미가 그에게 내놓은 유일하게 상황을 완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버린 것이다.
그렇게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아카데미 부지 밖으로 도망친 그는 자신이 이렇게 도망치면 안 된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슬럼가에 도달했을 때.
그는 타오르는 갈증과 지속된 마나 사용으로 인해 탈진이 왔다.
그리고, 쓰러진 그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의 본가인 차이드 백작가가 충성을 다하고 있는 왕국. 보스타 왕국의 막내 왕자인 바실론 뤠 보스타로 나이는 그와 같았다.
집안에서 안 좋은 일에 휘말린 이후 아카데미로 쫓겨난 미드 차이드에게 다가와 준 그와 친분이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유약하고 선해 보이는 인상을 지닌 왕자이며 미드 차이드가 더욱 망나니짓을 할 수 있게 뒤에서 도와주던 인간이기도 했다.
그의 성정이 좋은지 나쁜지는 사실 관심 없는 분야였다.
하지만, 그가 도움이 되고 이득이 된다는 건 분명했다.
바보같이 착해빠진 왕자의 위세를 등에 업고 망나니짓을 이어나갔던 그였지만 그렇게 바보같이 착해빠진 왕자의 말은 곧잘 믿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사실 자신에게 이렇게 편견 없이 다가와 준 건 그였기 때문이 아닐까.
아카데미의 모든 학생들조차 처음 그를 봤을 때부터 소문을 듣고 경계했었으니 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는 그를 너무 믿었지.’
다시 만난 그는 악귀였다.
박물관을 찾아가게 만든 것도 그였고. 이 사태의 뒤에 그가 관련되어있다는 것도 분명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한 말이 중요했다.
‘고맙다. 오랜 시간 멍청하게 놀아나 줘서. 네 덕에 차이드 백작가는 내 것이 될 수 있게 되었다. 고맙다. 네가 내 욕망을 실현시켜줘서.’
그 이후로도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지만, 미드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질문을 했다.
왜 이러는 거냐고. 자신이 대체 무엇을 했다고.
그 질문에 왕자는 그리 답했다.
심심풀이.
이윽고 왕자는 쓰러진 미드의 입에 괴이한 약을 부어 넣었다.
동시에 마나 탈진으로 죽어가던 그는 그것을 마시고 서서히 죽어갔다.
바실론 뤠 보스타 왕자는 이곳에 사람이 오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사냥이 끝난 개는 잡아먹힌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쓰러진 미드의 손을 짓밟은 뒤 비웃으며 떠나갔다.
버려진 것이다. 이용했다곤 해도 그가 집 아카데미, 아니 이 나라 전역에서 유일하게 믿은 인간이 그렇게 그를 버린 것이다.
흔적이 남지 않는 미약한 독에 중독되어 죽어가던 그는 자조 어린 미소가 들었다.
꼴이 우습다고.
그렇게 흐려지던 시야 너머로. 그는 누군가가 손에 쥔 과일 바구니를 가지고 걸어오다 화들짝 놀라는 것을 보았다.
본적이 있는 얼굴이다.
오래전 차이드 백작가에서 일했던 평민 하녀. 성격이 바보같이 착해서 자주 이용해 먹었고, 제 잘난 맛에 살던 그가 아버지에게 혼났다는 이유로 매질해서 내쫓은 것도 모자라 그녀의 가족까지 모조리 말려버렸던 소녀였다.
소녀에게 미드 차이드는 말 그대로 끔찍한 원수나 다름없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바실론 왕자가 비웃으며 던졌던 한마디가 떠오른다. 그렇게 의식을 잃은 그는 그렇게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낡고 냄새나는 방안에서 눈을 떴고, 한쪽 구석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작은 남매를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쫓아낸 하녀의 유일한 가족인 하녀의 동생들이었다.
그들도 미드의 얼굴을 알고 있기에 두려움을 숨기지 못했다.
이후 약초를 들고 들어온 하녀 이세라는 차가운 얼굴로 그에게 약초를 건네고는 말했다.
“독이 약해서 금방 치료했어요. 쓰러진 지 사흘이 지났으니 어서 돌아가세요.”
딱히 원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증오를 내비치지도 않았다.
그는 멍하니 하녀 이세라를 보다 물었다.
자신을 왜 살린 것이냐고.
그 질문에 이세라는 차가운 얼굴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착각하지 마세요. 지금도 저는 당신을 보면 신물이 나고 너무도 밉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어가는걸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이에요. 돌아가세요.’
거짓말이라는 것은 어째서인지 알 것 같았다.
이에 미드는 격통에 시달리는 몸을 이끌고 그녀에게 윽박지르다시피 소리 질렀다.
‘값싼 동정이나 하는 것이냐. 내가 누군지 아느냐. 네까짓 게 뭐라고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살려놓느냐!’
뻔뻔한 그 외침은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는 잘 알았다. 그 외침이 그를 지금의 존재로 바꿨다는 것을 말이다.
‘오래전 도련님이 흘리듯 건네준 아주 작은 은혜를 갚을 뿐입니다.’
그 은혜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오래전 기억 따위는 이미 다 잊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렇게 하녀 이세라의 집을 벗어난 그는 고요하고 낡은 집을 멀리서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심심풀이로 괴롭히고 억울한 누명을 씌워 쫓아냈던 하녀.
그녀의 꼴과 자신이 다를 게 무엇이냐고.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무심코 한 짓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받았는지.
사람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하였던가.
그는 그제야 자신이 짓밟은 이들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악랄한 인간이었는지도 깨달았다.
그는 그렇게 눈물을 애써 삼키며 떠나갔다.
자신은 그녀에게 미안하다 할 자격도, 그녀의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다는 걸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돌아왔다.
“표정이 왜 그래? 옛날 생각이라도 난 거야?”
“……오셨네요.”
미드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잘못된 걸 바로잡을 것이다. 잘못을 빌더라도 자신이 올바른 인간이 되었을 때. 그때 제대로 사죄하리라. 평생이 걸리더라도.
“전에 하던 이야기, 마저 못 들었는데. 그래서? 그 하녀는 어떻게 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다만, 이세라의 동생이 난치병을 앓고 있더군요. 그래서 약초를 구해 몰래 가져다 놓았습니다. 금화 몇 닢하고요.”
이걸로 잘못을 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너무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돌아온 뒤엔? 사고 친 직후였잖아. 지금 네가 여기 갇혀있는 것도.”
“일주일 만에 저택에 돌아왔을 때 본 것은 아버지의 싸늘한 시선. 형제들의 차가운 냉대였습니다. 당연하죠. 가족들에게 나는 사고나 치는 구박 덩어리였으니까.”
전부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사고를 치고 어마어마한 빚을 떠안게 만든 그를 백작은 당장이라도 베어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배다른 형제이자 유일한 누이인 장녀 베르아 차이드가 목숨만큼은 부지해달라며 간청했고 그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확실히 오해를 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네가 여자를 끼고 있다고 이야기를 들으면 눈이 돌아갈 법도 하네.”
요시아가 혀를 찼다.
“동정은 안 할게. 네가 한 짓은 명백히 잘못이 맞으니까.”
“알고 있어요.”
“그래도. 도와줄 순 있어. 지금이라도 바뀌고, 네가 잘못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요시아의 말에 미드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저를 돕는 겁니까? 계약도 사실 거의 대충이었고, 제 과거를 듣고 나서도 많이 화내셨잖아요.”
그 질문에 요시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선생님과 만났을 때 이야기를 해줬던가?”
“아뇨. 자세히는 들은 적이 없네요.”
“나도 바보같이 굴었거든. 선생님과 만나고 바뀐 거야. 그래서 남 일 같진 않더라.”
“선생님도 다른 이들을 짓밟았습니까?”
“짓밟진 않았어. 무시했지.”
정도의 차이일 뿐 비슷한 처지였다.
“그래서 네가 얼마나 큰 결심을 내렸고 변했는지 나는 이해해. 그래서 도와주는 거야.”
증좌도, 뒤집을 방법도 없다. 사실상 아카데미의 사고는 이제 그의 짓이라고 기정사실화 되었다.
“마나 운용을 연습할 건데 도와주실 수 있어요?”
“흥. 너 같은 침팬지가 따라올 수 있겠어?”
“해야죠. 비록 제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곤 있지만, 정학이 풀리면 아카데미에 소환되어서 그때의 일을 다시 추궁당할 겁니다. 그때까지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야 해요. 박물관에서 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어떻게 벌어진 건지.”
아는 게 없다 보니 당했다. 그러니 최대한 알아야 했다.
그가 마법을 고집하는 이유도 사실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그…… 데이비 왕자님은?”
“그 사이코패스. 당연히 돌아갔지. 네 아버지가 워낙에 원리원칙주의자라 거래가 안 된다고 생각했을 거야. 선생님은 틈을 찌르는 걸 좋아하지만 상대의 신념을 무자비하게 밟진 않거든.”
“그거…… 저 들으라고 한 소리죠?”
“들켰니?”
피식 웃는 요시아가 핏방울로 만든 채찍을 들었다.
철썩!!
“으억!!”
“뭐해. 빨리 운용해. 이 채찍. 엄청 아픈 것도 모자라서 마나의 운용을 방해할 거야. 넌 그 방해를 무시하고 마나를 순환시키는 거고.”
“무슨 교육난이도가…….”
“괜찮아. 사람 쉽게 안 죽어. 내가 널 도와줄게. 네가 올바른 인간으로서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시작은 데이비의 피를 언제든 빨기 위해 계약마법을 연습하다가 생긴 사고였다.
하지만 요시아는 자신처럼 변하려 하는 미드 차이드에게 어떤 연민을 느꼈다.
“그래서. 그 하녀는 어떻게 할 거야?”
“하녀요? 이세라?”
“응.”
그 질문에 미드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와서 그녀에게 뭘 할 리가 있나요. 다만…… 그녀가 동생들과 함께 평생을 걱정 없이 살게 해주고 싶을 뿐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억울한 삶을 강요받은 그녀가 더 이상 힘들지 않기 위해.
“흐음…… 정말 그거야?”
“아 몰라요! 그건 나중에 할 일이고 지금은 정학이 끝나고 아카데미 청문회에서 반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차이드 백작가는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물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 가문은 끝장이었다.
그때였다.
똑똑.
“실례합니다.”
차가운 하녀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야?”
이에 요시아가 안개처럼 흩어지고 미드는 익숙하게 자리에서 이러나 조용히 문을 열었다.
“타프 도련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타프 형님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차이드 백작가는 네 명의 자녀가 있다.
장남 타프 차이드와 삼남 미드 차이드는 같은 어미의 배에서 태어난 형제이고 차남 배텀 차이드와 장녀 베르아 차이드는 배다른 형제이기도 했다.
“왔나.”
싸늘한 연무장 위에서 가검을 붕붕 돌리고 있던 그가 미드 차이드에게 검 한 자루를 던졌다.
“받아라.”
“형님.”
“하.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네놈이 나를 형님이라 부르는 거지? 전에는 분명 빌어먹을 꼰대라고 부르지 않았나?”
“그건…….”
“됐다. 입바른 소리 소리나 듣자고 네 낯짝을 보러온 게 아니다.”
싸늘한 목소리로 타프가 일갈하자 미드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영애께서도 이 시간까지 이곳에 계신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닌 거 같습니다.”
타프는 정중하게 뒤에서 나타난 요시아에게도 말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현재 미드 차이드 영식과 계약을 맺고 있습니다. 걱정하시는 바는 알지만 제 몸은 제가 간수할 수 있으니 신경쓰지 마세요. 그리고 영애보다는 요시아 조교수라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요시아의 담담한 대답에 타프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엄한 소문이 돌 겁니다. 그걸 모르진 않으시겠지요. 물론, 저 망나니 놈과 놀아난 시점에서 영애의 수준도 알만하군요.”
그가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어차피 알고 있는 이는 극히 드무니까요. 그리고, 동생을 너무 무시하는 거 같은데 형제 맞나요?”
“무시라…… 저놈에게 그런 가치가 있다면 말입니다. 영애께서 그런 것을 구분할 판단력을 가지고 계시다면 지금이라도 저 망나니 놈을 손절하시는 게 옳을 겁니다.”
묘하게 답답한 표정을 짓는 그였다.
“형님.”
“검을 뽑아라.”
“저는 검을 잡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네 편한 대로 해라. 어차피 대련을 봐준다는 건 핑계나 다름없다. 죽일 각오로 덤벼야 할 거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검을 뽑아 들었다. 살기가 어린 검. 동생을 기어코 죽이겠다는 의지가 흐릿하게 비칠 정도였다.
이에 미드는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검을 내려놓고 허리춤에 매고 다니던 완드를 쥐었다.
“네놈은 언제나 가문에 먹칠을 했지. 고작 몇 년 사이에 네놈은 차이드 백작가를 두려움의 상징으로 만들어버렸다.”
“…….”
“아버지께 상황은 전해 들었다. 그래. 네 맘대로 살아보니 속이 후련하더냐? 하. 기어이 어마어마한 빚을 만들었다지.”
“형님.”
“형님이라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 빚을 모두 갚든 갚지 못하든 차이드 백작가는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아마 왕실에선 빚의 부담을 줄여주는 대신 간섭을 늘릴 테지.”
카앙!!!
순식간에 달려든 타프 차이드가 검을 휘둘렀다.
망나니같이 포악한 검에 미드가 이를 악물고 베리어를 펼쳐 공격을 막아냈다.
“네놈은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났다.”
“…….”
“하지만 그걸로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거칠게 미드를 몰아쳤다.
캉!!! 카앙! 캉!!
분명 반격할 틈은 있었다.
하지만 미드는 공격은커녕 방어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너를 사랑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난 너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하셨지만 나는 네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동생이니 나 또한. 배다른 형제인 배텀과 베르아 또한 너를 신경 썼다.”
카앙!!
“크읏?!”
순간적으로 금이 간 베리어를 박살 내버린 그를 타프는 거침없이 걷어차 버렸다.
“그 결과가 이것이냐? 형제들의 믿음을 모조리 저버리고 개 망나니 같은 삶을 사는 꼬라지가?”
타프 차이드.
그는 미드 차이드가 아카데미에서 사고를 치기 전부터 왕실 군벌로서 파견을 나가 있었다.
그렇기에 최근 그가 변한 것도, 자세한 내막도 알 길이 없었다.
“고민을 많이 했다. 변방에서도 너를 어찌해야 멀쩡하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다.”
“…….”
“하긴 말을 들어먹었다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겠지. 여기서 곱게 죽어라. 아버지께는 내가 직접 말할 테니.”
그가 착잡한 음성으로 검에 검기를 두르기 시작했다.
농도만 보면 익스퍼트 상급의 수준이었다.
“형님!! 그만두십시오!”
“왜 덤비지 않지? 겁이라도 먹었더냐? 제 잘난 맛에 살더니 목숨이 경각에 달하니 몸이 안 움직이기라도 하더냐?”
카앙!! 캉!!
공격이 거세지면서 방어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물러나기만 하던 미드의 몸에 상처가 이리저리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된 수비태세에 결국 팔에 상처를 남긴 미드가 주춤거린다.
큰 틈이 생긴 것이다.
“널 죽이고 나도 따라가겠다.”
바닥에 쓰러진 미드를 짓밟듯 제압한 타프는 검을 익숙하게 회전시켜 역수로 틀어쥔 뒤 그의 심장에 검 끝을 겨누었다.
“저승에 가서…… 같이 어머니께 사죄하자.”
쩌어엉!!
엄청난 소리와 함께 쇠 울림이 울려 퍼졌다.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차갑고 흉포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검을 맨손으로 낚아채고 있는 요시아를 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고작해야 20대도 되지 않은 소녀가 분명하다.
망나니 같은 동생 놈이 꼬신 여인이니 그 수준은 안 봐도 뻔했다.
아버지에게 듣기로는 하인스 영지에서 온 소녀가 그의 곁에 있다고만 들었지 그녀가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들은 바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익스퍼트 상급의 기사가 내지른 오러가 서린 검을 맨손으로 낚아챘다?
당혹성을 숨긴 채 그녀를 바라보던 타프는 이내 검이 붉게 물들며 파스스 바스러지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가장 놀란 것은 그녀가 지근거리까지 접근했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저 나이에 저 정도의 경지를 지닌 이는 타프의 생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멍하니 있던 그의 검을 맨손으로 낚아챈 요시아는 붉은 기류가 감도는 손을 움직여 검을 튕겨냈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래도 동생을 많이 사랑하셨나 보네요.”
“외부인이 신경쓸 문제가 아니오. 그리고. 경고하는데 당장 물러나시오. 이건 우리 차이드 백작가 내부의…………”
“죄송한데 그럴 순 없겠네요. 그가 죽으면 저는 계약을 완수할 수가 없어요.”
“뭐라?”
쌍심지를 켜는 타프의 말에 요시아가 뭐라 말하려던 찰나.
문득 요시아는 오한이 돋는 시선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어떤 눈빛을 잠깐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그 서늘한 기류를 풍기던 장소로 빠르게 이동한 요시아는 아무것도 없이 덩그러니 솟아있는 나무를 발견했고 이내 나무 아래에 부서진 나뭇가지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꺅?!”
그리고 비명을 내질렀다.
어둠 속에서 환하게 미소짓고 있는 레이나가 그녀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 레이나 언니?”
“잘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왔어요.”
“네?”
“잘하고 있는 거 같네요.”
“그…… 무슨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요시아가 눈을 꿈틀거렸다.
“아참. 요시아 프랑소스 양.”
왜 어색하게 이러는 걸까.
요시아가 애써 웃었다.
“네?”
“궁금한 게 있어서요.”
“말씀하세요.”
“혹시…… 당신은 데이비 그 사람을 어떻게 여기고 있나요?”
이해할 수 없는 뜬금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되는대로 진실을 털어놓았다.
“사람 괴롭히기 좋아하는 사이코패스 선생님.”
“…….”
“뭐. 그래도 사람이 인성이 나쁜 건 아니고 듬직한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냥 조금 짜증 나는 선생님이죠. 은인이기도 하고. 아, 피 맛이 기가 막힌 건 덤이고.”
그 대답에 레이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요?”
“네. 문제라도 있어요? 갑자기 시선이 느껴져서 깜짝 놀랐잖아요.”
“미안해요. 그냥 궁금했어요. 그 마음 변치 않기를 바랄게요. 아참 그리고 나차 제국이라는 곳에서 앙큼한 도둑고양이가 성흔을 받았는데. 이건 나중에 같이 회의를 좀 해야 할 거 같아요.”
“네?”
스르륵…….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그녀. 그리고 어둠 속에서 검은 용이 형체를 인지하기도 전에 엄청난 속도로 사라져 버리는 걸 그녀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검은 용은 메가로드리아일 것이다. 대체 왜 온 거야. 그리고 저 질문의 의도는 뭐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거지에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녀는 이내 좀전의 사태를 깨닫고 화들짝 놀라 연무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자리에서 일어난 미드 차이드와 말없이 그를 보고 있는 타프 차이드가 보였다.
타프 차이드는 아마 제 동생을 여기서 죽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시아 때문에 그 시도가 무산으로 돌아갔다.
타프 차이드는 제 동생이 어떤 결심을 했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이 나서는 건 도움이 안될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형님.”
미드 차이드가 결심이 선 듯 조심스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 죽을 수 없습니다.”
“추하구나.”
“예, 추합니다. 하지만 이대로 죽으면 모든 걸 바로잡을 수가 없습니다.”
“…….”
“저는 바뀔 겁니다. 이미 늦었을지라도. 이제부턴 완전히 바뀔 겁니다.”
“뭐라고?”
“믿어달라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말 그대로 개망나니였으니까요. 제가 어떤 과거를 지니고 있었기에 개망나니가 되었는지 이해해 달라 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가 개망나니가 된 이유에 대해서 요시아는 들었다. 하지만 그건 핑계일 뿐이라는 것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미드.”
타프 차이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불신과 경악이 서려 있었다.
“그러니…… 조금만 지켜봐 주세요.”
미드 차이드는 처음으로 자신의 가족에게 지신의 변화, 그리고 포부를 조심스레 밝혔다.
자신이 할 수 있는게 무엇일까. 자신이 잘 가르치고 있는게 맞는가. 요시아는 머릿속에 복잡하게 굴러감을 느꼈다.
기대와 걱정이 서린다.
데이비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줬지만, 그녀에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기에 더욱 긴장되었다.
하지만. 천천히 입술을 달싹인다.
“타프 영식. 저와 내기 하나 하실래요?”
“무슨 말입니까.”
“별거 아니에요. 재밌는 내기가 될거에요. 두고 봐요. 미드 차이가 뭔지 보여줄게요.”
요시아는 일리나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무슨 무슨 차이를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