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34화
보스타 왕국의 왕실에는 다수의 왕족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바실론 뤠 보스타는 그중 가장 막내인 왕자였다.
“저하, 차이드 백작가 망나니의 정학이 한 달 정도 남았습니다.”
“청문회는 준비되었어?”
유약한 인상과 다르게 서늘한 목소리를 낸 소년은 흔들의자에 앉은 채 와인잔을 빙그르르 돌리며 씨익 웃었다.
“예. 7성 교수들과 학생회에서도 사실상 판결을 내린 듯 보입니다. 청문회이니 재판이니 하지만 결과적으로 바뀌는 건 없을 겁니다.”
사실 미드 차이드가 살아남았다고 했을 때 당황했었던 왕자였다.
그가 살아서 자신을 암살하려 한 범인을 바실론으로 지목하면 귀찮아질 게 뻔했으니 말이다. 다 죽어가던 그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놈은 살았다.
이에 바실론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무슨 짓을 하려 하기 전에 7성 교수들과 학생회를 구워삶았고, 마치 자비를 베푸는 척. 친구를 위하는 척하며 그의 처분에 유예를 두었다.
증거를 처리하고 완벽하게 그를 나락으로 몰기 위해서였다.
단순한 심심풀이? 미드 차이드에겐 그렇게 말했지만, 진실은 조금 다른 축에 있었다.
“녀석이 살아났다고 했을 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 쪽이 더욱 발이 빨랐지. 안 그래?”
바실론의 물음에 무릎을 꿇고 있던 이가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신 대로 모든 요소에 대비를 해두었습니다. 그 누구도 미드 차이드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증거를 사멸시키기 위해 걸어둔 정학기간이 끝나면 그를 청문회로 불러내 결말을 내면 될 일입니다.”
“좋아. 그 외에 문제는?”
“없습니다. 차이드 백작가는 막대한 빚을 지겠지요. 저하께서는 그때 손을 내미시고 차이드 백작가를 손에 넣으시면 됩니다.”
차이드 백작가는 보스타 왕국을 넘어 대륙 조약에 보호받는 가문이다.
성초의 재배 때문이었다.
다만, 이번 일만 완성된다면 왕실에서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차이드 백작가를 그의 손에 넣을 수 있게 되리라.
“저하께서 차기 국왕이 되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경하드립니다.”
“별거 아니야. 그런 개망나니가 있어 준 게 참 좋았어. 제 형제들은 참 멀쩡한 이들이라 다루기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호랑이 아비의 아래로 개의 자식이 나온 건지.”
유약한 얼굴로 독설을 내뱉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대가 되는구만.”
“저…… 그런데 저하.”
“뭐지?”
“딱 하나 불안요소가 있긴 합니다.”
“진실의 천은?”
바실론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3서클 마법사가 최소 조건인 아티펙트를 1서클 마법사가 쓸 리가 없으니.”
“그렇다곤 하나……”
“고작 한 달도 안 남은 기간에 3서클에 도달할 재능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1서클 마법사로 기어 다니지도 않았겠지. 신경 쓰지 마라.”
그는 아직 미드의 곁에 누가 붙어있는지 몰랐다.
* * *
차이드 백작가의 장남 타프는 물러났다.
요시아는 그와 내기를 했고, 내기에서 이길 시 차이드 백작가에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성초를 소량 요구했다.
당연히 거부한 그였지만 어째서였을까. 동생을 한번 흘긋 본 그는 결국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말만 번지르르했을 뿐 요시아의 입장에서 현 상황을 타개하기란 쉽지 않았다.
뱀파이어 로드라곤 해도 그녀의 수준은 4~5서클 정도의 마법사. 그렇기에 아직 미숙한 점이 많았다.
예상보다 더딘 성장세. 가르침으로 인해 생기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을 그녀는 냉정하게 분석했고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인스 아카데미로 역소환진을 이용해 돌아온 그녀는 거침없이 영주성으로 대뜸 찾아왔다.
현재 하인스 영주성은 황족도 함부로 오기 힘든 장소이지만 그녀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데이비의 피를 빨기 위해 숨어든 횟수만 벌써 두 자릿수를 넘었으니 말이다.
“어머. 요시아 조교수님 오셨네요? 저하께 말씀드릴까요?”
“아뇨. 선생님을 만나러 온 게 아니에요.”
“그럼?”
“페르 언니를 만나게 해주세요.”
페르세르크.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자 토인족 시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님께선 지금 정원에 계세요. 안내해드릴까요?”
“부탁드려요.”
“어? 어니다!”
그때 저 멀리서 홍단이가 작은 몸으로 도도도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다리안을 등에 업은 채 뛰어오는 청단이도 보였다.
“요시아 어니!”
“홍단이 청단이! 잘 지냈어?”
“응! 막막! 다리안이랑 놀고 이써써!”
해맑게 웃는 그녀들을 보며 요시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며칠 전에 시험 결과가 발표 났고 초단이가 합격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곳에 있었구나 싶었다.
“어니! 이거 머글래?”
그때 홍단이가 허리춤에 있는 주머니를 열어 떡꼬치를 내밀었다.
“홍다니가 아껴놓은 거야!”
“와. 맛있겠다. 하나 먹어도 돼?”
“응! 머거!”
그녀의 해맑은 미소에 요시아는 마침 배도 고팠겠다 잘됐다 싶어 한입 베어 물었다.
물론, 요시아도 정상이 아니라는 주변 평가가 있는 또라이라는 점이었다.
다섯 개의 떡꼬치 중 3개를 먹어치워 버리자 홍단이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두…… 두 개, 두 개가 남았어…….”
현실을 믿고 싶지 않은지 울먹거리던 그녀가 애써 웃는다.
“개…… 괜차나…… 홍다니 갠차나…….”
말은 그리하지만, 홍단이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몸을 간헐적으로 떨었다.
이대로 가다간 홍단이가 울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선생님이 알게 된다!
요시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는 이내 허리춤을 뒤적거리고는 공간확장 주머니에서 커다란 상자를 꺼내 홍단이에게 건네주었다.
“홍단아! 이거 먹어!”
“응?”
울먹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올려다보았다.
“서부대륙에서 정말 어렵게 구한 과자야. 처음 보지? 제조 과정이 까다로워서 왕족도 쉽게 못 먹을 만큼 맛있는 거야.”
그녀의 말에 홍단이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저…… 정말 홍다니가 먹어도 대?”
“그럼!”
식은땀을 흘리며 요시아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이거 먹으려고 몇 달을 기다렸는데…….’
“근데 어니는 왜 여기 온 거야?”
“아. 페르 언니를 만나러 왔어.”
“후후…… 아가씨들도 같이 가시겠어요?”
토인족 시녀가 옅게 웃자 다리안을 등에 업은 청단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응! 갈래!”
세상에 누가 저 귀여운 두 아이를 세계 최고의 검이라고 생각이나 할까.
종종걸음으로 꺄르륵 거리며 걸어가는 홍단이와 청단이를 따라 걸어간 그녀는 아름다운 정원의 테이블에 앉아있는 유리아와 륀느, 그리고 점순이를 볼 수 있었다.
“어라? 페르 언니는요?”
“은공과 함께 신목의 성지로 가셨답니다.”
“신목의 성지…… 거긴 왜…….”
“최근 레이나 양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요시아는 문득 홀로 찾아왔다가 다시 돌아간 레이나를 떠올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레이나였지만 나차 제국에 갔다 온 뒤로 그녀에게서 묘한 기류가 흐른다는 느낌을 받은 적 있는 그녀였다.
여유롭게 차를 음미하던 유리아가 손뼉을 쳤다.
“맞다. 온 김에 이거 한잔하시겠어요?”
유리아의 제안에 요시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이거 또…… 이상한 거 넣은 거 아닐 거라 믿어요.”
“걱정 마세요. 열매를 이용해서 만든 거니까요.”
굳이 맛만 좋으면 벌레 날개를 우린다든지 할 이유는 없다는 태도였다.
“우으, 엄마 없서?”
다리안을 등에 업고 있던 청단이가 두리번거리며 묻자 륀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로선 영주성에 없다고 보고.”
“청다니 갈래…….”
그리고는 울상을 지으며 다리안을 업고 어디론가로 가버렸다.
이에 홍단이도 입을 삐쭉이더니 그녀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돌아가 버렸다.
“최근 륀느 양에게 잘 붙지 않네요.”
그 말에 륀느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그런데 듣기로는 보스타 왕국에 잠시 출장 가셨다고 하던데. 하던 일은 잘됐나요?”
“그게요…… 생각보다 쉽게 일이 안 풀리네요.”
그 말에 유리아와 륀느가 순간 눈을 마주쳤다.
“그래요?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선생님은 절대 이번 일에 직접 나선다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혼자선 영 길이 안 보이니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좀 구해볼까 해서요.”
요시아의 말에 유리아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럼 우리 미식연구회와 요시아 양의 사이에 아주 좋은 접점이 있을 거 같은데…….”
유리아가 눈을 번들거리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도와줄게요. 대신. 성공하면 우리 부탁을 하나 들어주실래요?”
“이렇게 쉽게요? 뭘 원하시는데요?”
그 질문에 유리아는 비어있는 소형 혈액 팩 하나를 건넨다.
“이거, 요시아 양이 은공의 피를 보관할 때 쓰는 팩이죠?”
“이건 또 어디서…….”
“은공의 피를 조금만 나눠주세요. 어때요?”
미식연구회.
이 또라이들은 아직 데이비의 피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저기…… 전에 들은 적이 있는데 음식에 사람 피 섞는 거…… 그걸 먹고 싶어요? 식인이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
“흐음…… 그러면 요시아 양은요?”
“아니 그렇게 말하면 제가 무슨 식인종 같잖아요.”
요시아는 이 또라이들이 정말로 피를 연구해볼 생각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애초에 저도 사람 잡아먹진 않아요.”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유리아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피를 연구해보는 건 조금 그럴 수도 있겠네요.”
흐지부지 끝나는 듯싶었지만, 유리아는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럼 거래는 없던 거로……”
텁!
“이거 왜 이러세요. 미식연구회가 인맥이 얼마나 넓은지 내가 잘 아는데.”
“대가를 받을 수가 없잖아요?”
“아니 좀 도와주면 안 돼요?!”
요시아의 부탁에 유리아는 한참 동안 고민하듯 생각했다.
“흠, 우리 미식연구회는 계산은 철저한데…….”
“자꾸 그러시면 지금 선생님 피 뽑아서 작당 부린 거 다 이르는 수가 있어요. 그러면 미식연구회에 주어지는 자금 다 회수될지도 모르는데…….”
요시아는 초강수를 뒀다.
* * *
결국, 미식연구회의 협조를 받아내는 데에 성공한 요시아는 계획대로 돌아감을 느꼈다.
비록 유리아를 포함해 미식연구회엔 마법사가 존재하지 않지만, 그들은 놀랍게도 미식연구회라는 독특한 활동을 통해 여러 인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여러 마법사들과 접선, 혹은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가장 상책은 데이비를 제외하고 현재 서클이 가장 높은 마법사 중 하나인 페르세르크의 힘을 빌리는 것이지만 그녀는 데이비와 함께 현재 신목의 성지에 가 있는 만큼 도움을 받긴 힘들었다.
“기왕 시작한 거 제대로 해봐야겠죠?”
다만 요시아 프랑소스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실전경험! 륀느가 실전경험을 높게 평가.”
“영약 쪽은 어떨까요. 제가 그동안 연구해온 연구대로라면 마법사의 마나 운용과 서클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여러 음식이 있답니다. 효과는 이미 시험해봤으니 확실할 거에요.”
“환각을 보여주고 강제로 플라시보 효과를 일으키면 어때.”
이 또라이들은 요시아가 자신들에게 어떤 도움을 요청했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거기에 응해주지 않았다.
미식연구회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인맥을 이용한 도움은커녕 제 입맛대로 의견을 제시하며 실험체 다루듯 미드를 강화시킬 기괴한 방법을 꺼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요시아의 마법 경지가 그리 높지 않아 그들의 의견을 온전히 반박할 수단이 없다는 점이었다.
“우선 마나 순환부터 영 효과가 시원찮다는 거죠? 그렇다면 우선 이걸 써보죠.”
유리아는 늘 들고 다니는 작은 가방에서 처음 보는 약재를 꺼냈다.
“그런 건 처음 보는 데요.”
“엘프의 영역에서나 볼 수 있는 독초에요. 흔히 보긴 힘들죠.”
아무렇지도 않게 독초를 꺼내 양손에 들고는 번갈아 보던 그녀가 하나를 가방에 넣고 기괴하게 생긴 덩어리를 꺼냈다.
“그건요?”
“슬라임의 코어를 특유의 방법으로 발효시켰죠. 맛은 솔직히 없는데. 굉장히 마나를 민감하게 만들어준답니다.”
맛있고 몸에 좋은 걸 만들겠답시고 오랜 시간 또라이짓을 해온 그녀였다.
단순 식재료를 넘어 맛만 좋으면 가리지 않고 써먹어 본 그녀에게 있어서 방대한 식재료 데이터는 가히 경이적인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자…… 이걸 먹여보죠.”
“먹어도 괜찮은 건가요……?”
“걱정 말아요. 먹고 죽진 않아요.”
천재지만 아직 미숙한 마법사인 요시아와 각자의 방법으로 극상의 또라이 기질을 드러내는 미식연구회가 손을 잡고 미드를 개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웁…… 우웩!”
당연히 효과만 있으면 맛을 포기한 조합인 만큼 요시아를 믿고 독초와 슬라임 코어를 섞은 수프를 먹은 미드 차이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이건 실패네요.”
“실험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건 당연한 결과잖아요.”
“어머나. 처음엔 확신 못 하셨잖아요? 결과만 따지면 완전한 실패는 아니랍니다. 실제로 마나가 민감해져서 유동량이 늘지 않았나요?”
“음…… 확실히 이런 상태면 제어를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한데…….”
단순히 수치상의 효과만 따지는 유리아와 다르게 요시아는 마법사인 만큼 미드 차이드가 흩뿌리는 마나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주 조금씩. 그녀가 보지 못한, 데이비만 볼 수 있었던 차이점에 대한 힌트를 잡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구나……. 이래서 이 녀석이 이걸 이해 못 하고 있던 거였어.”
유리아의 괴짜 같은 행동으로 인해 요시아는 자신이 가진 문제점을 조금씩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미드의 폭발적인 성장의 디딤돌이 되었고, 요시아의 변화에도 가속 페달을 밟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인지와 편견을 조금씩 부수며 스스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됐으면 이것도 먹어보시겠어요? 이번엔 제법 맛은 좋아요.”
“오, 이건 그래도 맛이 있네요. 그런데, 이건 뭘로 만드신 건가요?”
“크라켄 피쉬의 분비물과 레드 테일 피쉬의…….”
“우웨에엑!!”
물론, 결과가 좋다고 하여 유리아의 정신 나간 재료 선정까지 빛을 볼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