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43화
일순간 이어진 고요함 끝에 찾아온 어마어마한 굉음과 충격파.
충격 속에서 빠져나온 군인들은 모두가 같은 생각에 빠졌다.
티오니스 성자라는 존재가 가진 힘에 대해선 들은 바 있었지만, 실제로 본 무력은 아득히 상상을 넘어서고 있었다라고.
군부에서는 당연히 많은 각성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각성자 중에서도 군인으로서 활동하는 이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 그들, 아니 그들 중에서도 특출나다 알려진 상위 각성자나 1세대 각성자 중에서도 일부 오르는 S급 각성자들의 전투를 봐왔던 적이 있던 그들조차도 지금의 충격을 끌어낸 적은 없었다.
“감사…… 합니다.”
고개를 숙여 보이는 보나프로트 중장을 말없이 보던 데이비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다 말했다.
“감사하지 마세요.”
담담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숨겨진 감정은 차디찬 냉대였다.
말없이 부상을 입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바라보던 데이비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생명력을 빨아먹는다라. 예상이 맞긴 한데. 미묘하네.”
화아아악!!!
동시에 그의 손끝을 타고 마치 별천지 같은 현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끝으로 모여든 연녹빛의 가루들이 거대한 기류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죽은 이들을 제외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을 향해 다수의 생명력이 스며들어 갔다.
세 번째 달.
타나토스.
악신의 잔재, 그리고 현 세상 전체에 생명력을 순환시키는 거대한 매개체.
파괴 불가의 신체.
여러 명칭은 존재하지만, 저 달은 붉은 공허의 왕인 데이비가 생명력을 온전히 제어함으로써 완전히 다룰 수 있는 하나의 수로나 다름없었다.
“조금만 가용하면 가능하겠네.”
조용히 중얼거린 그가 가볍게 휘저은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바짝 말라 죽어가던 이들의 몸이 본래대로 돌아오며 서서히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데이비는 고개를 돌려 보나프로트 중장을 향해 말했다.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줄까요?”
“그게 무슨…….”
“저건 하나의 전송체입니다. 당신이 멋대로 발사한 화력 무기의 물리 에너지나 각성자들의 비 물리 에너지를 모조리 먹어치우고 필요한 곳에 보냈다는 소리입니다.”
“…….”
“다른 곳은 몰라도 결국 사고 치셨네요.”
“…….”
“베돌프 장군은 대충 알고 있더군요. 그래서 미리 전해 들은 게 있어서 직접 손은 대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직접 바뀌고 싶은 것도 있고.”
그 질문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부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부관.”
“예. 보나프로트 장군.”
“나를 쏴라.”
“예?!”
“어리석게 부하들을 애꿎은 죽음으로 내몰았다. 너무 안일했다. 나 혼자서 완벽하게 파악했다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하다못해 베돌프 영감과 한번 상의를 했다면 문제점을 찾아냈겠지.”
그는 결정을 내린 듯 보였다.
“그러니 나를 쏴라. 군법회의에 상관살해에 관해선 어떤 말도 나오지 않을 거다.”
그가 단호하게 말하자 부관이 덜덜 떨며 물러났다.
“장군! 이러지 마십시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데…… 데이비 왕자! 티오니스 성자님!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그의 외침에 데이비가 물었다.
“결정이 났습니까?”
“…….”
“당신네 부하들이 사람 잘못 봤네.”
담담하게 말하며 그를 지나쳐 간 데이비가 말했다.
“죽은 영혼은 윤회의 길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제법 많네요.”
“예?”
“죽어서도 당신을 지키려는 부하들이 많다고.”
데이비는 망설임 없이 그를 지나쳤다.
“보통 영혼이 이렇게 남아서 주변을 맴도는 건 잘 없는데 말입니다.”
[그는 고지식하지. 어떤 면에선 너무 엄격하네. 하지만. 그는 참군인이면서 그 누구보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 인생을 바친 사내일세. 장군이 단 한 명의 부하를 위해 직접 총을 들고 뛰어드는 경우는 흔치 않지.]
베돌프 장군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데이비가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가는 건 이번만입니다. 뭐 이 이상 엮일 일이 있겠느냐마는…… 됐고, 퇴각하세요. 저놈들이 노리는 건 각성자와 연합의 군대가 화력을 쏟아붓는 겁니다.”
“이곳 말고도 다른 곳에도 존재하오. 게다가 방금전처럼 강대한 일격을 먹어치운다면…….”
“배터리 성능이 좋긴 해도 순간적으로 허용치 이상의 데미지가 들어오면 못 견디고 파괴됩니다.”
파트로시스트 그놈들은 자신들만이 정보에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쪽은 그들이 모르는 정보원까지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움직이게 해놨습니다. 용병으로서 고용했는데 밥값은 해야죠. 연합에서 약속한 품목 중 하나인 식량이면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양인데.”
그 말에 보나프로트 장군이 허탈하게 물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소.”
“뭡니까?”
“대체 연합에서 약속한 그 소량의 보상을 어디에 쓰려는 게요?”
“어디 쓰긴요. 지구에선 흔해 빠진 자원이 다른 곳에선 극히 귀한 자원일 때가 있습니다. 마침 가용 가능한 자원이기도 하고, 필요로 하는 이들도 있고.”
“필요로 하는 이들?”
“예. 정신 나간 성녀가 하루가 멀다하고 기도를 올려대서.”
데이비가 지겹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데이비의 주변으로 새카만 연기들이 솟아오르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 * *
보나프로트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나간 지역 이외에도 다수의 지역에서 거대한 슬라임형 몬스터가 생겨난 건 사실이었다.
그들은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지만, 위험성을 느낀 군대나 각성자의 공격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직 아무도 몰랐다.
어떤 상황이건 반드시 공격은 들어온다.
그것만 기다리고 있었건만.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나타난 거대한 슬라임형 괴형체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존재를 보고 몸을 강하게 꿀렁였다.
저벅…… 저벅…….
놈을 향해 다가오는 존재는 새하얀 존재였다.
크기는 괴형체에 비하면 미약할 정도로 작다.
하지만 놈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달랐다.
뿌득…… 뿌드득…….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새하얀 몸체에 터질듯한 체격을 지닌 거대한 2족 보행형 토끼는 괴형체를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이리저리 꺾었다.
뚜둑…… 뚜두둑…….
그리고는 손가락 마디를 소리 나게 꺾은 뒤 불은 콩알 같은 눈을 번뜩였다.
-뀨.
새하얀 재앙 토끼.
보팔레빗의 손에 엄청난 물리력이 장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팔레빗의 공격을 시작으로 다수의 지역에서 경이적인 모습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밤하늘의 별을 담은듯한 몸체에 얼굴까지 밤하늘로 가득한 거대한 미노타우로스가 검고 거대한 건틀릿을 잘그락거리며 맨손으로 거대한 괴형체를 찢고 으깼다.
금우궁 타우르스.
유일하게 직접 현신 및 활동이 가능한 별자리였다.
그뿐만 아니라 한쪽에서는 거대한 도깨비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근육단련회의 소수 멤버 중 4명의 정예 중 하나인 존재.
도깨비 두억시니가 움직였다.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전력이 분산되어 움직였다. 생존한 심연의 공주 이실디는 곁에 따라온 베드란데와 투덕거리며 싸우기 바빴지만 이미 그녀의 발치엔 완전히 조각나서 흩어지고 있는 괴형체의 파편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외에도 백은의 거검 신검 칼디라스를 든 일리나.
세피로스화한 륀느가 움직였다.
유일하게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레이나도 있었지만, 그녀는 오로지 자신만이 중요한 임무를 맡아 데이비를 돕는다는 사실에 환희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유일하게 남은 괴형체를 토벌 중인 요시아 프랑소스는 복부에 상처를 입은 채 비명을 지르며 뒹구는 제자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아학!! 끄아아악! 나 죽어요! 진짜 뒤져요!”
“사람 쉽게 안 죽어 이 침팬지야!! 긁힌 상처로 요란 피우지 마!”
뱀파이어의 힘을 사용한다면 일거에 찍어눌러 버릴 수 있을 텐데. 6서클 마법사의 힘만을 사용하라는 제약을 받은 요시아는 괴물을 억제하고, 괴물의 공격에서 그녀의 제자를 지키는 데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괴형체는 지금껏 만난 다른 실전경험 상대보다 많은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부족했다.
아직 큰 거 한방이 더 필요했다.
요시아는 데이비가 내려준 적당한 과제를 수행하며 자신을 단련했지만, 그 과정에서도 미드 차이드의 성장에 예의주시했다.
미드 차이드의 성장 속도는 경이적일 정도로 빠르지만 거대한 한방이 부족한 현시점에서 그녀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위기 속에 던지는 건 위험부담도 크지만 좋은 성과를 낼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본래라면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휴식이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지금까지 깨달은 것들을 복기해야 할 시기였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렇기에 요시아는 도박 수를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미드.”
“으하악…… 하아…… 하아…… 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겨우 정신을 차린 미드 차이드가 엉망이 된 몰골로 조심스레 말했다.
“도박 수를 던질 거야. 이미 다른 지역에 나타난 것들은 선생님이 다 처리했겠지. 아마 시간이 길어지면 이쪽도 정리 하러 오실 거야.”
그렇게 되면 곤란해지는 건 그녀였다.
“하지만 이놈을 그냥 둘 순 없어. 계속해서 네 힘을 먹어치우고 어디론가로 보내고 있거든.”
데이비에게 이 사실을 전했으나 돌아온 이야기는 간단했다.
조금 후에 찾아간다.
그 말이 끝이었다.
그게 뭘 뜻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이 괴물을 통해 미드가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가였다.
다만, 이 괴물이 대체 이렇게 모은 에너지를 어디로 흘려보내는지 알 수 없다는 게 답답했다.
선생님은 괜한 문제에 관여하게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아마 해결해도 본인이 해결하려 할 터.
다만 그 주체가 되는 파트로시스트의 마지막 은신처를 데이비라고 쉽게 알아낼 수 있을지는 그녀로서도 미묘한 의문으로 남았다.
“시간 없으니까 잘 들어. 마지막 기회야. 이번에도 3서클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녀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진다 생각해.”
* * *
역겨운 냄새. 마치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유도하는 듯한 냄새는 에반젤린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소중한 친구인 절제, 박승현을 죽일뻔했던 나차 제국의 병사들. 그 병사들의 패잔병이 녹아든 파트로시스트는 에반젤린에게 있어서 절대 용납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플리츠 스커트에 니트를 덧입은 작은 상의, 그리고 하얀빛을 띠는 얇은 가디건을 마치 팔에 걸치듯 걸친 그녀는 등 뒤에 생겨난 거대한 마법진에서 뻗어져 나온 날개를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든 뒤 고요한 사막의 협곡에 닿았다.
지독한 냄새는 이곳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짙어졌다.
이 냄새의 원흉이 무엇이건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여기 절제는 물론, 자신까지 공격한 자식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평소라면 냉정했을 텐데.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쉽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저 닥치는 대로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싶다는 분노만이 들끓었다.
“무슨 상관이야.”
이내 마음을 정리한 그녀는 가볍고 부드럽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묵직한 울림이 퍼지더니 이내 그녀의 손에 검붉은 장검이 쥐어졌다.
겉으론 툴툴대지만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아빠가 그녀를 위해 만들어준 검. 용신검 트와일라잇이었다.
과거 암흑신관과의 전투로 그녀는 한 차례 더 강해졌고 그녀가 가진 종족의 본능을 조금 더 일깨웠다.
반대로 완전 현신이 더 어렵게 되어버렸지만, 힘의 총량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
아마 그녀의 친모가 가진 힘에 점점 비슷해져 가고 있으리라.
고요한 사막.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황색의 바위 절벽들을 보던 그녀는 이내 다수의 기척을 감지하고 고개를 들었다.
눈을 한차례 깜박인 후 그녀는 시야에 담긴 다수의 불청객이 보였다.
‘드론?’
하늘에 뜬 것은 민수용이라고 할 수 없는 독특한 마나 파장을 지닌 드론들이었다.
게다가 드론뿐만이 아닌 모습을 다 드러내진 않았지만, 주변에서 다수의 마나 파장과 살기도 느껴졌다.
명백히 그녀를 반기지 않는 느낌이었다.
다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혐오스러운 냄새로 인해 머리꼭지까지 돌아버린 에반젤린은 그야말로 분노의 화신이었다.
정신계통의 힘을 지닌 드래곤인 그녀는 일반 여타 드래곤보다 제어가 강한 편이다.
기본적인 성격도 배경이 되지만 그녀가 그 유명한 고대룡의 사춘기 상태에서도 이정도를 유지하고 있는 건 그녀의 태생적인 힘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그러한 에반젤린이 이성을 놓고 대뜸 달려들 정도로 역겨운 냄새가 놈들에게서 풍겨 나온다.
“뭔진 모르겠지만 당신들, 저를 막으려는 거죠?”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에 보랏빛 뇌전을 검에 머금은 에반젤린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런데 이걸 어째? 나도 당신들을 그냥 둘 생각이 없는데. 특히.”
말을 끊은 그녀의 눈이 세로로 찢어지며 그녀의 양쪽 어깨 위쪽으로 거대한 마법진 두 개가 허공에 생겨났다.
그리고 비늘을 가진 용의 앞발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기는 크지 않지만 그 안에 풍기는 힘은 가히 경이적일 정도로 무거웠다.
세계 최강종.
고대룡의 힘이었다.
“인간도 아닌 괴물을 상대로.”
인간의 형체를 벗어나 점점 감염된 무언가처럼 기괴하게 비틀어지는 자들을 보며 에반젤린이 한걸음 내디뎠다.
탁…… 타탁…… 타다다다닥!!!
황색의 바위로 가득 찬 바위 절벽을 점차 빠르게 내달리던 그녀가 움직인다.
콰앙!!!
동시에 그녀의 신형이 엄청난 가속을 받은 스포츠카처럼 쏘아져 나갔고, 가장 선두에 있던 괴물이 황급히 소리쳤다.
“정신 차려라! 상대는 꼬맹이다! 살생을 함부로 하지도 못하는 애송…….”
콰지지지직!!!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선두에 있던 괴물의 두꺼운 목이 허공을 날았다.
반응도 못 할 속도로 파고들어 머리통을 날려버린 에반젤린은 그들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힘을 지니고 있었고 잔혹했다.
살생을 함부로 못 한다면서.
그럼 저건 뭔데.
아무리 변이매개체를 통해 악마의 힘을 몸에 받아들인 강화 인간들이라도 인간이다.
목숨이 아까운 건 변치 않는다.
한차례 강화된 그들은 군용 제식 병기인 돌격소총에 맞아도 멀쩡히 버티며 싸울 수 있는 단단한 육체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그런 육체는 눈앞의 흑발을 가진 소녀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몸에서 빨려 나갈 것 같은 공포스러운 위압 속에서 그들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도망치게요? 미안한데 놔줄 생각은 없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의 등 뒤로 보랏빛의 뇌전 구체 같은 것이 떠올랐고, 마치 저글링 하듯 빙그르르 회전하기 시작했다.
데이비에게 작전 대부분을 들켰어도 이 장소만큼은 들키지 않았기에 승산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에반젤린이라는 예상외의 전력이 참가해버린 것과 그녀의 행동과 분노가 예사롭지 않다는 건 파트로시스트에게도 경이적인 일이었다.
그때였다.
피잉…… 콰앙!!
어디선가 날아든 거대한 무언가가 그대로 에반젤린을 노리고 날아들었고 에반젤린의 머리가 마치 총을 맞은 것처럼 크게 휘청거리며 뒤로 젖혀졌다.
대물 저격 총을 이용한 장거리 저격.
아무리 단단해도 이렇게 방어 장막도 없이 정면으로 맞으면 절대 무사하지 못할 거라 여긴 그들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하지만.
이내 그들의 얼굴엔 믿을 수 없음에 대한 의심. 그리고 두려움. 경악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탄두를 지닌 대물 저격 통의 탄환을 이 사이에 끼운 채 고개를 든 에반젤린이 스산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어 탄두를 수수깡처럼 으깨버리고는 뱉어내는 것을 봐버렸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녀의 뒤에서 솟아 나와 있던 거대한 용의 앞발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 빌어먹을, 도망쳐!!!”
그 모습을 본 이들이 경악에 차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렸지만, 에반젤린이 반 현신시킨 본체의 앞발은 자비 없이 일대 공간 전체를 일거에 찢어발겨 버렸다.
거대한 바위 절벽이 마치 칼에 잘린 종이마냥 비스듬히 잘려나간 것도 모자라 마치 깍두기처럼 조각조각 나서 흩어진다.
아무리 강화를 해도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이들은 그제야 확신했다.
에반젤린을 공격해서 데이비 올 라운의 시선을 끌고자 했던 행동은 정작 데이비의 시선도 제대로 돌리지 못한 채 심어둔 스파이들만 발각되게 만들었고, 급기야 공격대상이었던 에반젤린이 극도로 분노하게 하여 자신들을 찢어발기게 만들어버렸다.
거대한 참상에 휘말려 조각난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반 악마들은 그들을 지나치는 에반젤린의 손이 튕기는 것을 마지막으로 온몸이 검은 불꽃에 휩싸여 사라져버렸다.
사막, 바위 절벽에 용의 재앙이 시작되는 데엔 많은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 * *
“젠장! 혹을 떼려다가 더 크게 붙여버렸군!”
“바깥은 어떻게 되었나!”
“방어선이 모조리 박살 났습니다. 숨겨놓은 통로 쪽으로 똑바로 옵니다!”
“망할! 병력들 전부 내보내! 내보내서라도 그년을 막으라고!!”
대체 어떻게 찾아온 것일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자신들이 에반젤린을 공격할 때 파견한 조직원이 악마의 변이매개체를 흡입하고 변한 것 때문에 에반젤린이 악마의 냄새를 맡아버린 게 문제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빨리!! 빨리 불러오라고!”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던 와중 그들의 시야에 비친 감시카메라 중 하나에 에반젤린의 모습이 담겼다.
동시에 에반젤린의 눈이 감시카메라에 닿았다.
콰직!!
감시카메라 하나가 박살 난다.
노이즈만 가득해진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찰나.
두꺼운 바위 아래 비밀 은신처에 몸을 숨기고 있던 파트로시스트의 간부들은 단단한 바위의 틈 사이로 갑자기 거대한 발톱이 파고들어 와 마치 쇠를 찢어발기듯 우그러뜨리는 광경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작디작은 소녀의 등 뒤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용의 앞발이 바위를 마치 종잇장처럼 찢어발기며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 아아…….”
“여기도 아니네.”
정작 자신들에겐 크게 관심도 없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녀였지만 이미 그녀의 입에는 가히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가 응축되고 있었다.
용의 분노라 불리는 전유물.
드래곤 브레스가 고스란히 은신처를 녹여버리듯 한차례 그어져 나갔다.
데이비는 일정 수준에 이르는 검과 마법만 에반젤린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그 후엔 크게 가르치지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여긴 건가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헤라클래스와 고대룡 이클립스의 피를 이어받은 에반젤린은 그 태생적인 힘만으로도 이미 재앙에 가까운 힘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재앙 같은 힘은 이제 알에서 탈피했음에도 가히 재액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