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49화
요시아에게 대강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다만 에반젤린의 일로 퀭해져 있던 내겐 그리 관심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차이드 백작은 그걸 묵인했고?”
“이미 베르아 영애가 그걸 받아들인 시점에서 혼약은 성사되었죠. 이제라도 파투낼 방법이 없는건 아닌데. 그렇게 이유 없이 일방적으로 혼약을 파투내면 향후 왕실에서 제안하는 일을 차이드 백작가에선 거부할 수 없게 되니까요.”
“흔한 이야기네. 성초를 재배하는 가문은 절대 중립을 지켜야 하니까.”
정치적으로는 발언권이 없지만 왕국 내에서도 함부로 무시 못 할 권한을 가지고 있는게 차이드 백작가였다.
“그런데 백작도 참 웃기지 않아요? 어차피 베르아 차이드와 혼약을 맺은 바실론 왕자가 그녀를 이용해서 백작가에 압박을 가하려 할 텐데 말이죠. 게다가 영애의 혼약 승낙도 가문의 결정이 아니라면서 거절할 수도 있을 테고.”
요시아의 의문에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한다.”
“서방님은 전에 에린이의 방송에서도 가끔 그러시더니.”
에이리아의 핀잔에 나는 그녀의 다리에 머리를 베고 누운 채 눈을 감았다.
“요시아. 네가 보기에 왜 백작이 그랬을 거 같으냐.”
그 질문에 요시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거기에 이유가 필요해요? 뭐, 이미 성사된 혼약을 파투내기 힘든 건 향후 그 일로 왕실에서 백작가에 빚을 지워두는 걸 경계하기 때문이겠죠. 왕실도 그걸 노리고 바실론 왕자를 미끼로 내세운 걸 테고요.”
“그 말이 맞다.”
“그럼 나머지 두 이유는요? 가문의 결정이 아니라고 거절할 수도 있잖아요. 난 이해가 안 되는데.”
“첫째. 아까 네가 말했듯 바실론 왕자는 본래 왕실에서 힘이 없는 왕자야. 그런 왕자가 생각보다 화끈하게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이유는 왕실에서 그를 지원하기 때문일 거다.”
“아……기억해요. 왕자가 분명 그랬어요. 자기 뒤에 빽이 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겼거든요.”
일이 잘못되어도 왕실의 입장에서 막내 왕자일 뿐인 바실론을 쳐내기에 문제가 없다.
다만 바실론이 성공하면 왕실에 큰 이득이 되기에 왕실에서는 절대 혼약 파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명분이 부족해. 딱히 바실론 왕자가 결격 사유가 있는 건 아니니까. 거기에 딸이 결정한 것을 존중한 것도 있을 것이고.”
거기에 베르아 차이드가 백작가를 물려받는 것도 아닌 만큼 바실론 왕자의 생각과는 다르게 차이드 백작가를 압박할 수도 없다고 판단했으리라.
이미 성사된 혼약을 파기하기엔 백작가가 잃어야 할 것이 너무 크다.
다만 혼인을 한다고 해서 왕실에서 그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명확하다.
그러니 백작은 원리 원칙대로 백작가의 신념에 위배되지 않는 이번 혼약을 그냥 지켜보는 것일 것이다.
“무슨 아비라는 인간이 그래요?”
“귀족가의 정략혼은 원래 인간성을 빼고 보는 게 맞아. 지금 이 순간에도 대륙에는 정략혼으로 사랑 없이 결혼하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
다만 차이드 백작가 정도 되는 특권을 지닌 가문이면 얼마든지 자식들이 원하는 혼사를 치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럼에도 하지 않는 이유는 차이드 백작이 끔찍할 정도로 원리 원칙을 따지는 인간이기 때문이리라.
“가문이 가진 특권으로 사욕을 채우지 않는 청렴결백함. 속이 터지게 답답하긴 해도 그게 차이드 백작가가 지금까지 털어서 먼지 한번 안 나온 이유기도 하고.”
“그런데 왕실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바실론도 음흉한 인간이지 멍청이는 아니에요.”
실제로 그랬다.
차이드 백작가에 엄청난 빚을 떠안겨준 뒤 가문 자체를 흔들고, 그 뒤에 은혜를 입혀 멋대로 쥐고 흔드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방법이지만 지금의 방법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 이세라라는 하녀를 이용해 미드를 이용하든, 베르아 차이드 영애와 혼약을 맺어 그녀를 이용하는 두 방법으론 차이드 백작가를 쥐고 흔들 수 없지.”
다만.
“요시아. 네가 만약 왕실이라고 했을 때 어떻게 하면 이용할 수 있을 거 같나.”
그 질문에 요시아는 잠시 고민하다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설마…….”
“보스타 왕국은 최악의 경우 그런 결정도 내릴 거다.”
현 상황을 두고 볼 때 베르아 차이드를 제외한 모든 차이드 백작가의 혈통을 죽여버리면 간단했다.
베르아 차이드가 비록 출가외인이 되긴 했으나 가문은 유지되어야 한다.
따라서 베르아 차이드는 그녀의 소관으로 이양될 수밖에 없게 된다.
“말도 안 돼. 아무리 왕실이라도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왜 안돼. 얼마든지 가능하지. 그리고 그건 최악의 경우일 뿐이고. 그 외에도 방법은 있어.”
“뭔데요?”
나는 차이드 백작가를 조사한 서류를 내밀었다.
“베르아 차이드를 학대하면 그걸 두고 볼 수 없는 차기 가주의 입장에선 신나게 흔들릴 수밖에 없거든. 그러니까. 바실론의 입장에서 미드 차이드를 협박한 건 수단에 불과해. 스페어 플랜에서 가장 중요한 키는 베르아 차이드지.”
어느 쪽이건 최악의 인간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면 백작은 그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작가의 완전무결을 지키기 위하여 딸을 포기하려 들 것이다. 차기 가주는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 이에게 물려주거나 그렇게 만들려 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최악의 경우 백작이 자기 손으로 딸아이의 눈을 감게 만들 가능성도 있었다.
“세상에 그런 인간이 있어요?”
“요시아. 세상에는 말이야. 지켜야 할 게 있는데 힘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아. 세상일이 나처럼 되지 않는다는 거다.”
하녀 이세라를 통한 미드 차이드의 앞날을 틀어막는 방법은 하나의 수단이다.
베르아는 거기에 넘어가 혼약을 받아들였지만, 이세라에게 애증을 느끼는 미드가 아니었어도 왕실은 그녀를 압박해 얼마든지 혼약에 도장을 찍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힘이 부족한 자들이 강요받는 선택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생각보다 이 일에 대해 잘 아시네요.”
“조사한 것도 있는데. 비슷한 이가 내 주변에도 한 명 있었거든.”
“누구요?”
크리아네스 올 라운. 너무도 미우면서 증오하지는 못하는 내 아버지.
물론,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바리스나 윈리와 달리 나는 그 아버지라는 존재를 끝까지 용서하지 않았다.
“그럼 이 일을 해결하려고 한다고 할 때 선생님이면 어떻게 하겠어요?”
요시아가 은근슬쩍 해결책을 물어왔다.
“방법이 있긴 한데.”
“네. 뭔데요?”
“안알랴줌.”
이게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우리 진리를 보신 대현자님이 한번 생각해봐.”
“아 진짜! 놀리지 말라니까요?!”
“왜 그러십니까 대현자님. 진리를 보는 자라면 응당 이런…….”
“아아아아악!!”
극심한 부끄러움으로 인해 비명을 지르며 그녀가 내게 덤벼든다.
* * *
베르아 차이드의 정략혼 문제로 인해 차이드 백작가는 여지없이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미드 차이드의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그와 같이 이 일에 대해 차이드 백작에게 아뢰어야 할 형들은 현재 아무도 집에 없었다.
타프의 경우 왕실에서 큰 조사단이 꾸려져 그곳으로 파견을 나갔고, 차남의 경우 집안 꼴이 보기 싫다며 나간 상황이었기에 이곳에 있는 건 미드 차이드 혼자뿐이었다.
“아버지. 미드입니다.”
차이드 백작의 집무실에 찾아온 미드는 곁으로 다가온 시종을 바라보았다.
“가주님께서는 현재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도련님 돌아가시는 게.”
“문 열어.”
그 말에 미드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도련님!”
“문 열라고 말했어. 예전처럼 드잡이질해줘?”
그 말에 시종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 말씀하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도련님. 가문의 기사들을…….”
“되었다. 들여보내라.”
그때 집무실의 안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시종은 놀란 듯 문을 바라보다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문을 열었고, 미드는 천천히 걸어 들어가며 책상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제 아비를 시야에 담았다.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베르아 누님이 혼인하는 것을 그냥 보실 겁니까?”
“이미 베르아의 선택으로 혼약은 약식으로 성사되었다. 여기서 거부할 명분이 없지. 강제로 파투내는 건 가능하지만 그것은 우리 차이드 백작가를 흔드는 구심점이 될거다.”
놀라울 정도로 싸늘하게 말하는 제 아비를 보며 미드는 속에서 구역질이 나는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 저는 예전부터 당신이 정말로 싫었습니다.”
그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인정은 했습니다. 외골수적이고 정말 놀라울 정도로 원칙주의자이기에 그 잘난 백작가는 잘 지키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가 인상을 찡그린 채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에겐 딸보다 가문이 더 소중합니까?”
“입 조심해라, 미드 차이드. 네놈이 지금까지 먹고 입은 것들 전부가 이 가문에서 나왔다.”
“그럼 이걸 다 토해내면 됩니까? 그럼 누님의 혼약을 막아주실 겁니까?”
“의무는 등한시하고 권리만 쥐고 흔드는 건 귀족이 아니다. 그저 한량일 뿐이지.”
미드 차이드의 인내심이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가 아무리 사리분간을 하게 되었어도 그 성질머리가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억눌렀을 뿐 이런 불합리 속에서도 눈을 감고 있을 만큼 얌전한 성질머리가 아니었다.
“그 잘난 귀족가문 때문에.”
“미드 차이드. 입 조심하라 말했다.”
“당신이 싸질러놓은 그 잘난 원칙주의로 고립된 덕분에.”
“미드!!”
“지금 당신의 딸이, 내 누님이 팔려가게 생겼다고. 그 이유야 무엇이었건 당신은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안 된다고!”
퍽!!
백작이 던진 물건이 미드의 머리를 후려쳤고 미드의 이마에서 피가 한줄기 흘러내렸다.
“바실론 왕자는 음흉한 놈입니다. 분명 누이를 이용해서 가문을 뒤흔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쓸 겁니다.”
“…….”
“나는 누이가 그렇게 희생되는 꼴은 못 봅니다. 특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깟 원리 원칙!!”
한숨을 내쉰 그가 이전에 없던 서늘한 시선으로 백작을 똑바로 직시했다.
“내 죄라면, 어리석었다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을 보게 된 현 상황 속에서 아버지가 그 잘난 원리 원칙에 얽매인다면.”
그가 옷에 박혀 있는 가문의 문장을 집어던졌다.
“나는 더 이상 이 가문의 일원으로 남지 않겠습니다.”
탱그랑!!!
그리고는 돌아섰다.
“불경한 놈…….”
백작이 분노를 억누르며 으르렁거렸다.
“미드 차이드, 그것이 너를 지금껏 키워준 가문에 대한 예우이더냐?”
그 말에 성질머리가 머리끝까지 치고 오른 미드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분노라는 것은 어느 정도 차고 오르면 오히려 차갑게 식어버리기 마련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도 당신이 내 뺨을 치고 역정을 낼 때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내가 해온 게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다르네요. 눈앞에 현실, 앞으로의 미래를 보고 있으면서도 그 잘난 규칙에 얽매인 가주님께는”
숨을 한번 고른 그가 경멸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 어떤 존중도 필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역겨우니까 내 이름 부르지 마십시오.”
“미드 차이드. 미드 차이드!! 내 말 끝나지 않았다! 당장 돌아와라!!”
미드 차이드는 가문을 드러내는 모든 징표를 내던지고는 그렇게 가문을 등졌다.
당연히 그가 소란을 피우는 소리는 백작가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백작가의 정문을 빠져나가는 그를 향해 한 사람이 뛰어왔다.
“미드! 뭐하는 짓이야! 당장 아버지께 가서 죄송하다 말씀드려!”
드물게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베르아 차이드가 그를 타박했다.
화장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누님은 속도 없습니까?”
“뭐?”
“뭐 때문에 그 빌어먹을 왕자의 혼약을 받아들이셨는데요.”
“그건.”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저나 형님들 혹은 가문의 일로 협박을 받으셨겠지요. 그게 뭔지는 나도 모릅니다.”
미드는 자신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추리력을 발휘했다.
한정된 단서로 알아내기엔 이번 일은 스케일이 너무 컸으니 말이다.
“다만 이리 허겁지겁 나와 저를 말리신 걸 보니 제가 마냥 밉지는 않으셨나 봅니다.”
“…….”
“미워해도 시원찮을 동생을 위해 자기 인생을 나락에 내던지고도 아직도 나를 걱정합니까?”
그 질문에 베르아의 눈시울이 축축해졌다.
“미드. 누나 말 듣자 응? 아버지께 사과드리면 용서해주실 거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저 한순간의 비행으로…….”
“아니요.”
싸늘하게 일갈한 그가 말했다.
“이 시간부로 나는 차이드의 성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누님이 그 개같은 인간과 혼약을 맺는 꼴은 못 보겠습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 그동안 누님께 저지른 못난 행동을 참회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베르아 차이드에게서 등을 돌린 채 가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베르아 차이드는 오열하며 주저앉았고, 차이드 백작은 싸늘한 얼굴로 가문을 빠져나가는 제 아들을 창밖으로 지켜만 보았다.
* * *
요시아 프랑소스는 차이드 백작과 거래를 한 게 아니었다.
미드 차이드 본인과 거래를 한 셈이었다.
“잘하는 짓이다. 그놈의 충동은 내가 억누르라고 했지.”
“후회는 안 해요.”
그가 자조 섞인 얼굴로 로브를 여몄다.
“선생님도 이 이상 관련되지 않는 게 좋아요.”
“안 그래도 우리 선생님이 그러더라. 괜히 나서지 말라고.”
현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막말로 바실론 왕자가 갑자기 미쳐서 데이비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쉽게 풀릴 방법은 없으리라.
특히 지금의 데이비 올 라운은 에반젤린의 일로 굉장히 저기압이니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할 듯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요시아는 이제 차이드라는 성까지 버린 미드를 보곤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