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52화
타박타박 소리가 아주 조용히 울려 퍼졌다.
방금 전까지 요란스러웠던 굉음이 사라진 직후, 마치 소리가 사라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바실론왕자는 멍하니 굳은 채 새로운 침입자인 나를 바라보았고, 미드 차이드는 치명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낄낄거렸다.
“푸스스…… 쿨럭쿨럭…… 넌 이제 X됐어 이 개X끼야.”
제대로 웃지도 못해서 바람이 빠지는듯한 소리에 귀족가의 영식치고는 거친 말투, 그의 몰골은 누가 봐도 심각해 보였지만 나는 녀석의 허리를 걷어차 버렸다.
“아주 입만 살았지.”
“커헉…… 왜…… 왜 이러세요!”
“자상에 갈비뼈도 몇 개 나갔고, 마나도 오염됐네. 시체도 이것보단 상황이 좋겠다.”
한치의 가감 없이 평가를 내리자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저…… 살수있나요?”
“가만히 있어 봐.”
천천히 다가가 엎어져 있는 그를 똑바로 뉘인 뒤 뼈를 강제로 틀어 맞췄다.
그러면서 동시에 마나를 불어넣어 오염된 마나를 격리시키고 몸 밖으로 끌어냈다.
“끄으아아아악!!”
끔찍한 격통에 그가 버둥거렸지만 나는 요지부동으로 그를 짓누르고 뼈를 맞췄다.
“으학!! 컥!”
“엄살피우지 마라.”
“진짜! 잠깐만요 진짜 더럽게 아픕니다!”
확실히 뼈를 맞추는 것도 그렇지만 오염된 마나를 강제로 끄집어내는 것도 상당한 고통을 수반하리라.
그때였다.
스릉…….
순간적인 살기와 함께 내 뒤편으로 누군가가 빠르게 접근해왔다.
급소인 후두부를 노리고 정확히 검을 찔러 들어오는 이를 보며 쓰러져 있던 미드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공허한 얼굴에 넝마만을 걸친 채 한 손에는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을 쥔 소녀.
하녀 이세라였다.
사람한 번 해쳐 본 적 없고 칼 한번 제대로 쥐어 본 적 없던 그녀치고는 너무도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주…… 죽이시면 안 됩니다!”
동시에 그가 비명을 내질렀다. 내가 당하는 것에 대해 놀 란게 아니었다. 내가 이세라를 죽일까 염려한 것이었다.
이놈을 죽여야 할 것인가, 살려야 할 것인가.
순간적으로 짜증과 충동이 일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이세라를 무시한 채 더욱 억세게 뼈를 맞췄다.
“으악!!!”
쾅!!
물론 내가 저항하지 않으면 그녀의 검이 나를 정확히 노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세라의 공격은 내게 닿지 못했다. 창을 바닥에 꽂아 넣은 륀느가 순식간에 그녀의 앞을 막아서더니 맨손으로 칼을 부숴버리고는 이세라의 팔을 꺾어 바닥에 처박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작은 체격과 다르게 200kg이 넘어가는 륀느의 몸은 하나의 무기나 다름없었지만 이세라는 놀랍게도 그 무게를 견뎌내면서도 버둥거렸다.
“그으…… 그아아아…… 아아아악!”
마치 괴물이 된 것처럼 괴성을 내지르며 악을 쓰는 그녀를 허망하게 바라보던 미드가 비명을 다시 내질렀다.
“끄악!!”
“뼈는 다 맞췄다. 후유증은 없을 테니 치료비는 따로 청구하마.”
“…….”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가벼운 회복마법을 펼친 나는 멍하니 있던 바실론이 한발 두발 물러나는 것을 무시한 채 말했다.
“도망가게? 어디로 도망가게.”
“무슨…….”
“너 여기서 나가도 똑같아.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여기 있어라.”
담담하게 말한 뒤 이제는 쓰러진 이세라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빠르게 그녀의 마나를 훑는다.
너무 늦었다. 뱀파이어의 힘이 깃들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초를 이용해 만든 약에 너무 강하게 중독되어있었다.
자기 수명과 여러 부작용을 대가로 막대한 힘을 얻는 약은 단기간에 연구한다고 나올 성과가 아니었다.
약의 효과를 차단한다 해도 회복하기는 어려울 터. 조금 어려운 방법을 쓰면 구할 수는 있겠지만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다.
“트라우마가 좀 남긴 하겠다만.”
그녀의 뇌리로 이어진 하나의 마나줄기를 강제로 끊어낸다.
그러자 그녀가 건전지가 다된 인형처럼 툭! 하고 쓰러져 버렸다.
“이세라!!”
“안 죽였으니 쫄지마 인마.”
“아…… 안 죽었어요? 그, 그럼 다행인데.”
이세라의 뒤틀린 마나의 흐름은 뇌리로 쏘아지며 그녀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고 세뇌 효과를 발휘한다.
그 흐름을 강제로 끊었으니 아마 당분간은 후유증에 시달릴 테지만 연구가 완성되지 않은 탓인지 응급조치는 가능했다.
이후 나는 멍하니 굳어있던 바실론 왕자를 바라보자 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한껏 여유로움을 가장하며 내게 말했다.
“이건 예상외군요. 티오니스 성자가 타국에 내정간섭을 하다니.”
“내정간섭?”
“예. 나는 이 나라의 왕자입니다. 그리고 이일에 당신이 간섭한다는 건 즉, 하인스 영지가 힘으로 저희 보스타 왕국을 억압한다는 뜻이겠죠.”
계속해보라는 듯 내가 그저 지켜보고 있자 그는 자신감을 얻었는지 더욱 큰 어조로 소리쳤다.
“예, 당신은 강하겠죠. 제국도 당신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걸 꺼릴 정도로 당신이 가진 세력의 힘은 강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죠. 중립을 이루되 절대 명분 없이 함부로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야 타국에서도 당신의 존재를 중립으로 존중할 테니까요.”
“흠…….”
“하지만 지금은? 어떤 명분이 존재합니까. 이건 단순히 내정간섭입니다.”
그가 씨익- 이를 드러냈다.
“그러니 여기서 멈추시지요. 당신이 물러나면 저도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불문에…….”
퍼석!!
동시에 무언가가 뭉개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바실론왕자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표정을 찡그렸다.
“커헉?! 이게 무슨?!”
“뭔가 착각하는데. 알려져도 상관없어.”
“무슨 말입니까.”
“무슨 말이긴. 직접 확인해보던가.”
그렇게 말하며 압박을 해제하자 그는 허겁지겁 내게서 등을 돌려 부러진 다리를 대신할 막대를 하나 쥐고 절뚝절뚝 도망쳤다.
“저기. 그냥 둬도 됩니까?”
“그래도 끝장나기 전에 자기 상황은 봐야지. 그 정도 자비는 상관없지 않냐.”
어차피 바실론 왕자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보스타 왕국이 뱀파이어의 힘을 이용하려 했던 건 짜증 나는 일이지만 그걸 공론화 시켜서 보스타 왕국을 뭉갤 생각도 없었다.
온건파만 남은 현재 상황에서 뱀파이어와 인간 사이에 갈등을 부추긴다는 말은 반대로 인간과 전쟁을 했던 마족과의 골을 더 깊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테니 말이다.
“일단. 저 위에서 들리는 층간소음부터 해결하자. 요시아.”
그 말과 함께 박살 난 천장 쪽에서 누군가가 빠르게 내려섰다.
먼지를 여기저기 덮어쓰긴 했지만 상처하나 보이지 않는 요시아는 표정이 좋지 못했다.
“뭐가 있든?”
“이것저것 뒤섞인 키메라요. 예전에 다 없어졌다고 알고 있었는데. 남은 게 있었나 보네요. 수도 많고, 남은 놈들이 합쳐져서 6서클 마법으로도 쉽게 안 죽네요.”
“그 정도로 튼튼한 놈이 있었나.”
“밀피유의 말로는 여기는 뱀파이어들이 오랜 시간 연구해온 정수가 있었다고 해요. 파기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그 왕자 놈이 세뇌 강화 기술을 이용해서 괴물을 제어하에 두려고 했던 모양이에요.”
일반 병사들조차 상당히 강화시키는 약물이니 괴물이 강화된다고 이상하게 볼건 없었다.
요시아의 말과 함께 박살 난 천장 쪽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핏줄이 징그럽게 돋아난 거대한 괴물.
그 형태는 이루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놈은 자신과 방금까지 싸우던 요시아에 대한 존경심이나 경외심 같은 건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혈기로 만들어진 생명체가 뱀파이어 로드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건 조금 놀라운 결과였다.
“제어가 안 돼?”
“기계가 사람한테 충성하는 거 봤어요? 저건 혈기로 만들어진 키메라 덩어리일 뿐이에요. 그리고 약물을 썼는지 세뇌도 강하게 되어있고.”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캬아아아악!!!
이윽고 키메라가 괴이한 비명을 내지른다.
수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를 지닌 놈의 괴성에 미드 차이드가 귀를 틀어막고 고통스러워했다.
“끄윽! 끅!”
“요시아.”
“네?”
“제한 풀어줄 테니까 저거 흔적도 없이 날려버려.”
여기서 뱀파이어의 흔적이 더 발견되면 내게도 좋지 않다.
“흔적을 지워요? 공론화 안 시킬 거에요?”
“사고 친 놈들은 과격파 뱀파이어인데 이게 알려지면 인간과 척을 지지 않은 온건파만 다 뒤집어쓰게 될 거다.”
그건 요시아에게 좋지 않았다.
“선생님…….”
감동이라도 한 것인지 그녀가 나를 올려다본다.
“그리고 마족 프로젝트도 지장이 생길 거고.”
당장은 힘들어도 향후 십 년 이십 년 그 안에 마족과 인간의 증오를 희석시킬 계획을 짜고 있는 내게는 좋은 결과가 아니었다.
“뭐해. 빨리 치워버려.”
그 말에 요시아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사뿐사뿐 걸어 나갔다.
“서……선생님! 위험해요!”
나는 몰라도 요시아에 대해선 아직 잘 모르는지 미드 차이드가 황급히 소리쳤다.
6서클 마법사라도 괴물의 생김새만 보면 굉장히 위험해 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걱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아아아아!!
요시아를 향해 거대하고 뒤틀린 팔을 휘두르는 괴물이 움직임과 동시에 바닥에서 핏방울 같은 것들이 생겨나더니 순식간에 혈창이 되어 놈을 성게처럼 꿰뚫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마나의 전조현상도 없이 피로 만들어진 장벽과 단단한 육신을 완전히 꿰뚫어버리는 혈창에 미드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저게…… 무슨…….”
“뱀파이어로드가 고블린으로 보이나.”
뱀파이어로드는 일개 개체에 한해 재앙에 가까운 힘을 지닌 강한 존재.
그렇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가볍게 손을 튕긴 요시아가 손을 다시 훑자 바닥 곳곳에서 튀어나와 괴물을 꿰뚫은 붉은 창들이 일제히 흩어지며 사라졌다.
쩌억!!
동시에 그렇게 흩어진 핏방울 속에서 거대한 늑대의 입 같은 것이 튀어나오더니 괴물을 한입에 삼켜버리고는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미친…….”
제 스승의 본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직접 인지한 미드는 멍한 얼굴이었다.
“야. 미드. 선생님 개쩔지?”
“선생님, 마법 왜 배웠어요? 영창도 없이 그만한 화력을 낼 줄 알면서.”
“조용히 해 오랑우탄 같은 놈아. 밖에서 이런 거 쓰다고 다니다간 칼침 맞을 일 있어?”
지구나 다른 세상은 몰라도 티오니스에서 뱀파이어는 그런 이미지였다.
그제야 요시아가 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도 몇몇 이유로 힘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한 듯 보였다.
정말 흔적도 없이 키메라를 지워버린 요시아는 오랜만에 사용하는 힘이 영 불편한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님. 여긴 왜 오신 건데요? 절대 안 나서신다더니?”
요시아는 내가 나타날 거라곤 생각지 못한 듯한 모습이었다.
“저도 뱀파이어와 관련된 일을 제외하곤 간섭 안 하려고 일부러 최대한 사렸는데.”
“이제 그럴필요 없어. 나서도 돼.”
“왜요? 이 일 알려지면 귀찮아지는 거 아니었어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기. 괜히 엮여서 귀찮아지면 내 휴가가 날아가는데.”
“그럼 왜? 설마, 절 구하러 오셨다거나…….”
요시아가 뭔가 기분이 좋아진 듯 해맑게 물어왔다.
“차이드 백작과 거래했다.”
그 한마디에 요시아는 짧게 혀를 차며 불만을 토로했고 미드 차이드는 눈을 부릅떴다.
“방금 무슨…….”
“네 아버지가 너와 네 누이 구하려고 날 찾아왔다고.”
원리 원칙에 따라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도 버릴 거라고 생각했던 차이드 백작이 딸과 아들을 지키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게 쉬이 믿기지 않는 듯 보였다.
* * *
“허억!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바실론 왕자는 내부로 들어갔다.
티오니스 성자 같은 괴물을 상대로 도망쳐봐야 얼마나 도망치겠는가. 현재 그의 목숨줄은 보스타 왕국의 비호뿐이었다.
우우웅!! 우웅!!
왕실과 이어진 아티펙트를 가동시킨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목이 쉬어라 소리질렀다.
“당장 형님을 바꿔라! 급한 일이다!!”
고통을 억누른 채 다급히 소리 지르기를 한참. 곧이어 그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형님! 큰일입니다! 이곳에 티오니스 성자가 나타났습니다!”
그가 아티펙트가 설치된 장치를 부술 듯 강하게 내리치며 상황을 피력했다.
“이미 성공샘플도 빼앗겼습니다! 이대로 두실 겁니까?!”
그의 외침에 아티펙트에서 출력된 왕자가 바실론을 시야에 담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성공샘플? 티오니스 성자가 그곳에 왜 있다는거지?”
“무슨 말입니까? 형님! 빨리 지원을 요청하든지 아니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설마. 왕실에서 금지한 성초를 이용한 마약을 제조한 것이냐?”
“형님?”
“네놈이 타락한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된 줄은 몰랐군.”
담담하게 말한 그가 서늘한 표정을 지었다.
“현 시간부로 인간으로서 해선 안 될 짓을 한 네놈을 왕족에서 제명한다. 폐하께서 윤허하신 일이다.”
이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이 일을 제안한 건 다름 아닌 그였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마냥 잡아떼는 것은 물론 오히려 그를 잡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위치를 말해라. 바실론. 네놈이 한때 왕자였다면 죄를 받아들이고 처벌을 받아라.”
“무슨 개소리야!!”
그가 아티펙트를 마구잡이로 내리쳤다.
“형님이 시킨 거잖습니까! 나는 당신을 믿…….”
격하게 소리치던 그가 움찔했다.
꼬리 자르기.
현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만큼 바실론이 멍청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멍하니 제 형을 바라보던 바실론은 실성한 것처럼 허허 웃으며 아티펙트를 꺼버렸다.
그리고는 몸을 돌렸다.
“당신이 나섰을 때부터 이해했어야 했는데. 내가 멍청했군.”
“거봐. 왕실은 네 동아줄이 아니라니까.”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그를 보며 바실론은 이해했다.
이 모든 일에 데이비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데이비가 직접 했건 그가 국제연합을 움직였건 중요한 것은 국제적으로 금지된 이 연구가 공론화되었고 보스타 왕실은 곧바로 바실론을 꼬리 자르기 하여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며 일관했다.
즉. 모든 죄를 그가 다 뒤집어쓰게 생긴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익숙하지? 네가 하던 짓이잖아. 남의 죄를 다 뒤집어쓰는 거.”
“…….”
“아. 조금 다르긴 하네. 이번엔 네가 직접 나섰으니 너도 죄가 있는 건 마찬가지지.”
“대체…… 당신이 어째서 이러는 겁니까. 제가 알기로 당신은 미드 차이드와 그리 각별한 사이가 아니었을 텐데요?”
주먹이 부서질 듯 강하게 쥐며 그가 물어왔다.
“별 이유는 아니야. 네가 저지른 짓에 차이드 백작이 생각을 바꿔먹고 내게 직접 도움을 요청했다.”
차이드 백작이? 그럴 리가. 가문을 위해서라면 가족도 버릴 수 있는 그런 비정한 인간이 고작해야 자식을 구하기 위해 자기 원칙을 깼다는 건 쉬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게. 네가 미드 차이드를 그렇게 바꿔준 덕에 이렇게 된 게 아닌가 싶은데.”
허탈하게 주저앉아버린 바실론이 데비이를 노려보았다.
“대체 그가 뭘 약속한 거지?”
“굳이 알려줘야 하나?”
“하.”
분노가 섞인 헛웃음을 터뜨린 그가 이를 악물었다.
“제안하지. 차이드 백작이 약속한 대가의 2배를 주겠다.”
“안될걸?”
“아니. 나는 이 나라의 왕자다. 당신은 나와 원한 관계도 아닐터. 서로 잇속만 맞으면 얼마든지 거래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바실론의 말에 데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차이드 백작이 뭘하건 보스타 왕국이 뭔짓을 하건 그건 국제연합과 싸우는 거지 나랑은 상관없거든.”
“그렇다면!!”
“그런데 싫네? 내가 뭐하러?”
“…….”
“그리고 넌 절대 못 들어주는 것이기도 하고.”
멍하니 있던 바실론이 뒤편을 바라보았다.
기절한 이세라를 등에 업은 미드 차이드와 륀느. 그리고 요시아가 보였다.
“대체……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당신 같은 강자가 뭐가 아쉬울 게 있다고 이렇게 남의 계획을 다 망쳐놓느냐고!”
그의 절규 어린 외침에 데이비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는 너무 익숙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심심풀이.”
그 한마디에 미드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걸렸고, 반대로 바실론의 표정이 흙빛으로 어두워졌다.
심심풀이는 그가 미드차이드를 죽일 때 그에게 했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아아아!”
성초관련 연구의 죄를 전부 다 덮어쓴 것도 모자라 왕실에선 손절을 당했고, 눈앞에는 데이비 왕자가 있다.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아도 조만간 왕실에서 모든 죄를 덮어씌워 그를 처형할 거라는 건 분명했다.
“걱정 마라. 난 죽일 생각은 없으니.”
“하지만 미래는 없겠지.”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뱀파이어 문제도 입 다물어주잖아.”
데이비의 선심 아닌 선심에 그가 이를 뿌득 소리 내며 갈았다.
이 사태를 모조리 조종한 원흉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후 그는 근처에 쏟아진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붉은 피처럼 생긴 액체가 담긴 주사기들이 여럿 들어있었다.
“저건?”
이에 요시아가 눈을 꿈틀하며 중얼거리자 바실론이 악을 질렀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가만히는 못 있지!”
그리고는 주사기들을 한 손에 틀어쥐고는 그대로 자신의 몸에 찔러넣었다.
뱀파이어의 연구기록, 이번 성초 연구의 모든 단초가 되는 기록들을 이용해 만든 성과. 인간을 강화인간으로 만들고 세뇌시키는 약물로, 반쯤 완성된 강화 약물의 원판이기도 했다.
수년간 보스타 왕국이 뱀파이어의 기록을 가지고 만들어낸 결정체였다.
꾸득…… 꾸드드득!!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하는 그를 보며 데이비가 한숨을 내쉰다.
“다 죽인다!”
살기를 터뜨리며 악을 지르는 바실론을 보던 데이비의 손에 새하얀 빛이 머금어졌다.
“두 개만 알려줄게. 첫째. 뱀파이어의 힘은 신성력과 상극이다. 그리고 네 눈앞에 있는 건 성자고.”
변화는 멈추지 않는다.
작은 체격을 지니고 있던 그의 몸이 거대화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건 요시아 너도 배워야 할거다.”
담담하게 말한 데이비가 손가락을 튕겼다.
“상대가 변신하는 동안 기다려주는 건 멍청한 행동이다.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뱀파이어의 흔적이 알려지면 안 되지.”
[가로되 신께서 이르시길]
[엿이나 먹으라 하셨다.]
[9위계 성마법]
[신의 중지 손가락]
빠르게 힘을 증폭하며 거대해지던 그의 앞으로 부서진 천장 위 말끔해진 하늘 위에서 새하얀 빛의 기둥이 낙하해 그를 완전히 산화시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