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57화
미식연구회의 주요 멤버는 총 넷이라 할 수 있다.
수장인 유리아 헬리샤나와 륀느 그리고 점순이, 마지막으로 다크엘프인 아이나 헬리샤나.
다만 하인스 정보부대인 그림자의 수장으로써 바쁜 아이나와 다르게 각자 직책이 있으면서도 탱자탱자 놀기 바쁜 둘은 그새를 못 참고 지구로 떠나버렸다.
나는 일을 안 하고 직무유기하듯 도망쳐버린 유리아를 대신해 신목의 성지로 와있었다.
“의외구나. 평소라면 유리아 그 사고뭉치의 뒷덜미를 낚아채 끌고 올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으로 말하는 [알]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나는 손을 흔들었다.
“뮤우 잘 지냈어?”
“응! 잘 지냈어! 여기 과일이 엄청 맛있어!”
알의 다리에 앉아있던 뮤우는 순식간에 쪼르르 달려와 품에 안겨들었다.
“헤헤! 비밀친구!”
“뭡니까 그 표정은.”
“너 이 아이에게 손을 대려는 것이냐?”
“죽고 싶어요?”
신목의 성지의 중심.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세계수 [알]의 현신체는 유리아가 정성스레 보살피고 있는 달의 숲에 존재하는 하프 엘프 뮤우를 귀엽다는 듯 시야에 담았다.
“애 데리고 뭐 하는 건지.”
“어허. 보면 모르느냐. 적적하던 차에 이리 귀여운 아이가 놀러 왔는데.”
내게 죽은 싸이코 같은 세계수와는 달리 현 세계수 알은 하프 엘프에게도 굉장히 친화적이었다.
뮤우가 잘 따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그래. 본래라면 유리아가 직접 보고해야 할 일을 네가 직접 찾아왔으니 뭐 이야기가 있겠지?”
“세계수 묘목 남는 거 있어요?”
내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마계에 심은 것 말고는 없지.”
“조졌네.”
“흐음?”
“반쪽 신 넬타리드가 세계수 묘목이 필요하답니다. 지구에 자연지기가 너무 떨어졌다고.”
“그렇구나. 지구도 작은 차원은 아니니 차원을 조율하는 이들의 입장에선 세계수의 묘목도 필요할 테지.”
그리 말하며 그녀가 고고하게 앉은 자세 그대로 손을 부드럽게 휘저었다.
그러자 바닥에 있던 나무줄기 하나가 스르륵 움직이더니 그녀의 앞으로 움직였고 이내 작은 열매 5개를 드러냈다.
“다만 보다시피 묘목으로 완전히 자란 것들이 하나도 없다. 제일 빠른 녀석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
“그럼 됐습니다.”
담담하게 돌아서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묘목이 급한 거 아니었느냐?”
“없다는데 별수가 있나. 업보 청산해야지 뭐.”
카드값을 돌려막는 것도 아니고 인간을 너무 오냐오냐한 지구의 신 넬타리드의 업보였다.
“아, 네가 죽인 이그드라실의 기록에 따르면 발아하지 못한 묘목 하나가 언제 한번 대륙에 흘러 들어간 적이 있다고 하더구나. 그거라도 찾아보는 게 어떨는지.”
“발아도 안 되는 불량에다가 오래전에 흘러나간 것을 무슨 수로 찾습니까, 진짜 환경파괴 적당히 하라니까.”
넬타리드의 설명대로라면 이른 시간 안에 자연지기가 너무 소모되어 지구가 자체적으로 회복기에 들어간다는 모양이었다.
그리되면 지구 곳곳에 대규모 사막화가 진행된다는 소리였다.
그걸 막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자연지기 덩어리인 세계수의 묘목이 필요했다.
간단히 하는 이야기였지만 지구의 입장에선 가히 발등에 불이 떨어질 정도로 심각한 이야기였다.
실제로 현재 지구 곳곳에서 소규모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 * *
결국, 폭마석이 가득 든 커다란 큰 가방을 양손으로 낑낑거리며 차원을 넘은 유리아는 지구 특유의 텁텁한 공기에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엘프라면, 그것도 하이엘프라면 굉장히 민감해야 할 사안임에도 그녀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누군가가 보면 언니이자 다크엘프인 아이나가 하이엘프고 하이엘프이자 동생인 유리아가 다크엘프라고 해도 믿을 수준이었다.
“그런데 폭마석들 다 어디서 난 거야.”
뭔가 불만이 서린 표정으로 따라오던 점순이의 질문에 유리아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샀어요.”
“그걸 아무런 보증 없이 샀다고?”
“네. 은공의 이름을 조금 썼거든요.”
들키면 그대로 절벽에 매달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유리아였지만 그녀는 당당했다.
“륀느 양이.”
점순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누가 봐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정도로 한심하다는 눈빛이 강하게 깃든다.
하지만 어차피 사고를 쳐도 유리아와 륀느가 다 덮어쓸 텐데 무슨 상관일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난 빵이나 먹으면서 연극이나 보련다.”
“우선 에반젤린 아가씨를 보러 갈 거예요. 보험은 들어야죠.”
데이비용 보증수표. 에반젤린의 존재는 필수였다.
* * *
-아니이이! 천장을 대체 몇 번을 쳐야 되는 데에!!
비명을 지르며 울먹거리는 에반젤린은 절제의 꼬드김에 넘어가 또다시 수집형 가챠 게임에 한창 빠져 있던 참이었다.
그리고 어렵게 모아둔 용돈을 모조리 탕진한 뒤 우울함에 빠져 있었다.
“하…….”
천천히 슈팅 게임을 켜는 그녀를 보며 채팅창은 난리가 났다.
[??잠깐만]
[?????]
[야! 미친 방장 슈팅 게임 켰다!]
[사출경보! 사출경보!]
띠링!
사수자리 님께서 5,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악랄한 방장. 또, 또 슈팅 게임 죽으면 목숨 다 됐다고 방종하려는거지?! 우리 대기실로 다 내쫓으려는 거지?!]
“아…… 죽었네?”
삐릭!
-방송이 종료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사출되는 시청자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에반젤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방종이었다.
방송 내내 그녀를 놀리던 시청자들에게 단죄를 했으니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녀가 방송을 정리하기가 무섭게 눈치를 보던 유리아가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좋은 제안이 있는데 들어보실래요?”
“어라? 언제…… 왔어요?”
테러로 인해 폭파된 건물 때문에 현재 에반젤린은 그녀의 레어에서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인터넷이 통하는 건 데이비가 어떤 흐름을 만들어놨기 때문일 터다.
에반젤린의 중얼거림에 그녀의 어깨 위로 검은색의 슬라임 하나가 황금색의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뻐끔거렸다.
“조금 전에 왔답니다. 아가씨. 혹시 초단 아가씨의 학교에 가볼 생각 없나요?”
그 말에 우울해하던 에반젤린이 벌떡 일어났다.
대답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국대의 부지는 큰 편이다.
초단이가 첫 수업을 들어간 뒤로 에반젤린은 초단이가 다니는 대학이라는 곳에 상당히 관심이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도 공부를 빡세게 한다면 입학할 수야 있겠지만 지금 그녀에겐 별로 땡기는 일은 아니었다.
“언니 바로 보러 갈 거예요?”
“아뇨. 우선 배가 고프니 뭐라도 먹을까요?”
그녀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대학의 내부 지도를 펼치고는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륀느와 점순이, 에반젤린과 유리아.
넷 모두의 조합은 실로 엄청나게 눈에 띄는 만큼 인식 저해마법을 이용해서 관심의 방향을 강제로 틀어버린 에반젤린이었다.
“기왕이면 레이나 언니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현재 은공의 부탁을 받고 타 차원에 가 있다고 하더군요.”
데이비가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야 라고 하는 순간 얼굴에 화사한 꽃이 피더니 냉큼 가버렸다고 한다.
그녀의 묘한 변화에 대해선 사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고 가장 걱정하는 게 일리나이기도 했다.
유리아와 륀느는 이미 한국대에서 명물로 소문난 학생식당의 볼케이노 핫 윙을 먹어볼 생각에 한창 빠져있는 듯 보였다.
“그런데. 외부인이 그렇게 들어가도 돼요?”
“이미 조사를 해보았답니다. 주요 시간을 제외하곤 외부인의 출입도 자유롭다더군요.”
그럼 문제 될 거야 없다.
한적한 식당에 들어서자 유리아는 매의 눈으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좋아요. 좋아. 위생상태는 나쁘지 않아 보이네요. 먹는 거로 장난치는 작자들은 혼이 나야 하죠.”
그 말에 에반젤린은 눈을 흘겼다.
겉보기엔 정말로 해맑아 보이는 유리아지만 음식으로 장난을 치는 걸 보는 순간 눈이 돌아가 버리는 미치광이였다.
“만약에 잘못되었으면 그 자리에서 정령 소환할 거였죠?”
“어머, 여긴 지구인걸요. 그렇게까진 하지 않을 거예요. 여기서 사고를 치면 은공께서 피곤하시니까요.”
그 말을 누가 믿을까.
이윽고 주변을 둘러보던 유리아는 평범해 보이는 식당을 둘러보다 식권 자판기의 버튼을 꾹꾹 눌렀다.
“이걸로 표를 사는 건가 보네요, 어라? 왜 안 나오지?”
“후…… 나와봐요.”
이에 에반젤린이 주머니에서 작은 지갑을 꺼내 지폐를 밀어 넣었다.
“이건 이렇게 쓰는 거예요.”
“아가씨. 대단하시네요.”
“엣헴. 이 정도는 다 아는 거예요. 그런데 뭐 드실래요?”
“볼케이노 핫 윙.”
“볼케이노 핫 윙.”
유리아와 륀느는 이미 이곳의 명물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입을 모아 말했다.
이윽고 넷은 식권을 모두 뽑은 뒤 주문을 했고, 한자리에 모여 새빨간 빛을 머금은 닭요리를 바라보았다.
“좋아요. 겉으로 보기에도 잘 튀겨졌네요. 양념의 간은 직접 봐야겠지만 냄새나 색감으로 볼 때 품질도 나쁘진 않아요.”
유리아는 날카롭게 음식을 분석하며 중얼거렸다.
“저기 근데요. 여긴 학생식당이에요. 대학 학생이 수백 명인데 그 수백 명 치 분량의 음식을 하니까 애초에 레스토랑 같은 대단한 곳에서 먹는 음식과 비교할 수 없는데요?”
“아가씨.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얼마나 괜찮은 아이디어를 썼는가랍니다.”
그녀의 요리에 대한 지론은 굉장히 해박했다.
“티오니스의 식문화는 오랜 시간 발달해온 결과물이에요. 단순히 주식으로 먹는 고기, 쌀. 빵. 흔히 볼 수 있는 옥수수나 감자, 고구마도 원래부턴 이렇게 흔하고 널리 퍼진 음식이 아니었어요.”
유리아는 흔한 정보지만 그동안 쉽게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지식을 늘어놓았다.
“단순히 여기 있는 햄도 그렇답니다. 이 햄의 탄생 비화만 놓고 보면 전투식량에서 비롯된 것이죠. 지구도 티오니스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티오니스를 예로 들어볼까요? 흔히들 먹는 빵은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나요?”
식사를 하기 전 유리아는 간단히 음식문화에 대해 이리저리 설명해주었다.
흔한 식재료와 음식들이 어떻게 전파되었고 발달하여왔는지를 말이다.
“이 쌀밥이라는 것도 그렇죠. 처음 이것을 맛보았을 때의 황홀경은 잊을 수가 없어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서, 얼마나 많은 연구 끝에 만들어졌을지.”
간단한 음식이라도 그 음식이라는 게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은 길고도 길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맛을 볼까요?”
유리아의 해맑은 미소에는 음식이라는 것을 탐구하는 데에 정말로 열정이 가득했다.
“윽 매워…….”
천천히,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우아하게 식사를 시작하는 유리아와 다르게 륀느는 말없이 닭요리를 노려보다 포크 하나를 역수로 집어 들었다.
쾅!
그리고는 강하게 찍어 내린 뒤 한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매운 만족. 톡 쏘는 맛을 륀느가 높게 평가.”
“흐…… 흐으…… 매운데 맛있어!”
“인간은 많이 발전했구나.”
에반젤린은 매운맛 뒤에 찾아오는 감칠맛에 푹 빠졌는지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점순이도 다르지 않았다.
흔한 음식이다. 딱히 특출날 것은 없다. 하지만 독특한 소스는 유리아의 흥미를 상당히 끌었다.
‘역시 이번 선택은 옳았네요. 잘하면 하인스 영지에 큰 음식 변혁을 가져올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유리아가 수장으로 있는 미식연구회는 기본적으로 엄청나게 사고를 많이 치는 동아리라 할 수 있다.
하인스 영지엔 여러 동아리가 존재하지만, 미식연구회의 사고비율은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럼에도 데이비가 미식연구회를 그냥 두는 이유는 단순히 유리아나 륀느가 데이비의 최측근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사고를 무마시키기엔 데이비의 성격이 유한 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사고를 치는 만큼 하인스 영지의 식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미식연구회의 존재의의였다.
유리아가 사고를 치긴 하지만 그녀가 주기적으로 내놓는 새로운 요리법이나 요리도구, 혹은 음식에 대한 발전은 하인스 영지의 고유 특산물을 만들어냈고, 실제로 이 요리법의 레시피를 독점함으로써 각 대륙에 퍼뜨려 저작권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절대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좋은 예시로 린디스 제국의 황실에선 하인스 영지에서 만들어진 고유의 식문화에 한창 빠져 귀족들 사이에서도 흔히 즐겨 먹는 음식으로 자리 잡을 수준이었다.
이곳에 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명물이라 불리는 음식은 다 각자의 이유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 요리에서 어떤 영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녀는 맛이 좋아진다면 애벌레도 삶아버릴 정도로 괴이쩍은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그녀의 미각은 가히 경이적인 수준이었다.
실제로 재료만 모르고 먹으면 그녀가 개발한 요리를 극찬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독특한 방식이네요. 예상대로예요. 이런 방식으로 이런 맛이 가능하다면…… 준비물을 이용하면 완전히 새로운 맛을 끌어낼 수 있겠어요.’
만족스러운 듯 유리아는 냅킨으로 입가를 조용히 닦은 뒤 말했다.
“자. 시작할까요?”
그 말에 륀느가 바닥에 놓인 커다란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잠깐만요! 그거 폭마석 아니에요?!”
당황한 유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말아요. 아가씨. 여길 날려버릴 생각은 없답니다.”
그리 말하며 그녀는 륀느에게 손을 뻗었다.
“쿠르 열매.”
스윽.
륀느는 기다렸다는 듯 보랏빛의 열매를 그녀에게 내밀었고 유리아는 그것을 받아 한 손에 쥔 뒤 나머지 한 손으로 폭마석을 쥐고 물의 정령을 하나 불러냈다.
식당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냐 할 수 있지만, 인식저해마법 때문에 관심도 거의 받지 않는 상황에서 폭마석을 알아보는 인간이 없기에 문제도 없었다.
유리아는 긴장한 얼굴로 물의 정령을 부려 폭마석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러자 폭마석이 빠르게 옅은 빛을 뿜기 시작했고 그녀는 그것을 가볍게 쪼개어 그 안에 있는 핵이나 다름없는 조각을 집어냈다.
폭마석을 감싸는 돌멩이와 다르게 작은 보석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장비가 없어요. 그렇기에 위생적으론 문제가 많지만, 이 예산과 시간만 더 타낼 수 있으면 이 폭마석의 핵을 요리도구로써 개조해서 반 영구적으로 쓸 수 있을 거예요.”
작게 쪼개진 폭마석을 쿠르 열매에 찔러넣은 그녀는 쿠르 열매 표면이 흐물흐물해지는 걸 확인했다.
“3, 2, 1.”
륀느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시간을 재며 알려주었고, 유리아는 그것을 보다 망설임 없이 쿠르 열매를 양손으로 잡고 꾹 짜듯 즙을 닭요리 위에 뿌렸다.
“쿠르 열매는 독특한 열매에요. 내부에서 빠르게, 너무 과하지 않게 익히면서 과육이 변형을 일으킬 거에요. 그리고 그 변형을 일으킨 과육은 과즙에 큰 변화를 주죠.”
보통사람이라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며 꾹꾹 짜낸 그녀가 이내 보랏빛 걸쭉한 소스처럼 흘러내린 과즙에 닭요리를 고스란히 발랐다.
“이곳에 온 이유는 이 닭요리가 굉장히 상성이 잘 맞을 거라는 조사 때문이었어요.”
“세상에…… 나 지금 유리아 언니가 대단해 보여…….”
에반젤린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고 점순이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광기는 진짜 인정한다.”
이윽고 완전히 소스를 녹아들게 만든 유리아가 포크를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이게 맞아요!”
새로운 향이다.
맡는 것만으로도 침샘을 자극하는 맛있는 향기에 남은 셋은 침을 흘릴 기세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점순이와 륀느가 폭마석 3개를 더 꺼냈다.
“빨리. 이것도 해줘!”
그 말에 유리아의 물의 정령이 폭마석을 감싸기 시작했고 유리아가 했던 것처럼 열매에 찔러 넣었다.
맛은 그야말로 황홀경. 당장 맛있다며 동서남북으로 포효를 할법한 신기하고 톡 쏘는 맛에 에반젤린이 손뼉을 쳤다.
“와. 이거 진짜 맛있다! 대단해요!”
평소에 저 또라이들이라며 무시하던 미식회의 활동성과에 에반젤린이 눈을 반짝였다.
이후 넷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쿠르 열매를 더 꺼냈고 폭마석을 감싸고 쪼개기를 반복했다.
“아! 하나 남았다! 이것도 부탁해!”
한창 맛에 정신이 팔린 점순이는 조금 더 큰 폭마석을 꺼내 유리아에게 내밀었다.
“흐응? 이건 사이즈가 좀 크네요.”
“무슨 상관이야! 이거 진짜 맛있어! 빨리!”
“잠깐만요. 아무래도 조금 이상한 거 같은데 그건 놔두고.”
“아 빨리! 이거 엄청 맛있단 말이야!”
확실히 혁신적인 톡 쏘는 맛. 유리아는 점순이와 에반젤린이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며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꼈다. 그래. 생각보다 색이 좀 탁하고 크면 어떠한가.
그녀는 물의 정령에게 부탁해 그것도 가볍게 감쌌다.
점순이는 한창 기대감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같이 눈을 반짝이던 에반젤린은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이윽고 유리아가 폭마석을 가열시켜주고 점순이가 그것을 쪼개 핵을 꺼낸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쿠르 열매에 찔러 넣으려던 그 순간.
“안돼!!”
에반젤린이 뭔가 깨달은 듯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미 조금 크던 폭마석의 핵은 쿠르 열매 속으로 들어갔고. 점순이는 한창 신이나 과육을 으깨 과즙을 짜내려 했다.
그런데, 주르륵 흘러내릴 거라 생각한 열매의 과즙이 나오지 않았다.
“응?”
이에 유리아와 륀느가 동시에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뭔가 이상…….”
“잠깐만! 생명 에너지가 너무 과하게!”
에반젤린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바닥에 엎드렸다.
그와 동시에 쿠르 열매가 스스로 찢어지며 튕겨 나갔고, 그 사이로 도대체 어떻게 이런게 들어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나무뿌리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열매의 과즙을 삼켜 수분을 얻은 어떤 씨앗이 순식간에 발아한다.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을 박살 내며 파고든 거대한 뿌리는 단단하게 땅속에 자리 잡았고, 이내 얼마 가지 않아 폭발하듯 성장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거대해지기 시작한 거대한 나무.
순식간에 발아하여 천장과 창문을 박살 내고 높이 높이 뻗어져 나갔다.
“꺄아아악!!”
“으악! 저게 뭐야!
그 사고는 당연히 수많은 이들을 혼란 속에 빠뜨렸다.
조용히 식사를 즐기던 대학생들은 갑작스런 거대한 나무의 출현에 비명을 지르며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사건의 중심에 있던 유리아와 륀느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폭마석을 담아두었던 가방을 집어 들고는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
뒤늦게 상황을 판단한 점순이와 에반젤린은 그녀들을 따라 도망치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들이 이곳에 있었다는 증거는 학생식당의 한쪽 벽면을 완전히 날려버린 채 우뚝 솟아버린 거대한 거목만이 알려줄 뿐이었다.
그날 갑작스레 솟아난 나무로 인해 뉴스에서는 연일 심각한 사안을 다루듯 언급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