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58화
미식연구회와 에반젤린이 거대한 나무를 만들어낸 직후 그녀들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눈치채고 그 자리에서 도망쳐버렸다.
마치 이런 일이 익숙하다고 말하듯 유리아와 륀느는 신속하게 자리를 이탈했고, 그 과정에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 륀느는 어떤 가루를 뿌려 자신들의 흔적을 은폐하기까지 이르렀다.
“미…… 미쳤어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에반젤린이 당황하여 소리 지르자 점순이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 난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라고!”
정확히는 점순이가 꺼낸 독특한 폭마석에 이상을 눈치챈 에반젤린이 말하기도 전에 사고가 터진 것이다.
이에 에반젤린과 점순이의 시선이 모두 유리아와 륀느에게 향했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폭마석 안전 검사한 거 아니었어?!”
“전혀 문제가 없어요. 폭마석은.”
“그럼 왜 저게…….”
“폭마석이 아니니까요.”
담담하게 중얼거린 유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뭐? 폭마석이 아니라고?”
“네. 신목과 비슷한 향이 나긴 하는데…… 세계수의 묘목은 현재 남은 게 없어요.”
아직 완전해지지도 않은 묘목이 폭마석 속에 숨겨져 있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렷다.
“크기가 이상하게 클 때부터 이상한 느낌은 들었는데. 역시.”
에반젤린도 점순이가 들고 날뛰던 폭마석의 형태를 기억해냈는지 어지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저건 뭔데?”
“글쎄요.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해요.”
유리아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걸리면 은공이 저희를 아작낼 거라는 사실이죠. 그러니 지금 당장 여기서 도망쳐야 해요.”
과거 흑마법사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그 일이 우연찮게 진짜 흑마법사들을 잡아내 버리면서 정상참작이라도 됐을 터다.
하지만 지금 현 상황은 정창 참작 여지가 전혀 없는 말 그대로 테러였다.
“나…… 난 몰라.”
도망치려는 에반젤린의 팔을 륀느가 잡는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산다는 말을 륀느가 높게 평가.”
“이…… 이거 놔!”
“아가씨. 뭉쳐야 살 수 있어요.”
유리아가 다가왔다.
“아가씨. 이건 사고에요. 아가씨의 도움이 없으면 저희 미식연구회가 근간부터 박살 날 수 있어요.”
“그래도…….”
“부탁드려요. 아가씨. 미식연구회가 활동을 못 하면 앞으로 더 맛있는 음식을 개발하는 게 어려워질 거에요.”
“아. 그건 안되죠!”
유리아의 간곡한 부탁에 에반젤린이 벌떡 일어났다.
유리아가 간혹 기괴한 재료를 쓰긴 하지만 멀쩡한 재료를 이용해서 만드는 것들도 제법 많았다.
초단이와 곧 만나야 하는데. 정작 이런 사고가 터져버렸으니 만나기도 애매했다.
우웅…….
그때 에반젤린의 아티펙트로 초단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린아. 방금 식당 쪽에서 이상한 사고가 터진 거 같은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말없이 그걸 보던 에반젤린은 식은땀을 흘리며 아티펙트에 대답했다.
“응? 식당에 무슨 일이 있어? 그럼 어쩔 수 없네? 다, 다음에 갈게!”
[응? 응, 알았어. 조심히 들어가. 수업이 끝나면 바로 찾아갈게.]
“응 고마워.”
에반젤린은 마치 학교에 온 적이 없었다고 말하듯 넘겨버렸다.
* * *
륀느의 방해 공작은 분명 지구의 현재 기술력으론 도저히 밝혀낼 수 없다. 미식연구회는 인식 저해 마법을 걸고 있었고 도망치는 순간에도 륀느가 뿌린 것들이 그곳의 흔적들을 지워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식연구회. 당장 집합.]
데이비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령의 기억을 지워도 정령왕을 불러내 기억을 복구시켜버리는 데이비를 상대로 그들의 방해 공작은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유리아가 방방 뛰며 몸을 빙글빙글 돌았고 륀느는 무표정한 얼굴로 [오류]를 연신 중얼거리고 비틀거렸다.
“후…… 미치겠네, 진짜…….”
그리고, 씨를 직접 발아한 원인이 되었던 점순이는 굉장히 울적해져 있었다.
데이비의 성격이 어떤지 잘 알기에 미식연구회 활동에 앞서 이 사태를 직접 초래한 점순이의 과실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요란스러우니까 좀 가만히 좀 있어요!”
에반젤린의 레어. 그곳에 모인 그들은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어쩌다가 이리 된 건지. 분명 완벽했는데 그런 변수가 나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네요.”
지구는 모를지라도 그의 눈을 속일 순 없다.
에반젤린을 보험으로 내세우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불안함이 사라지진 않았다.
“어쩌겠어요, 일부러 한 것도 아니고. 설마 거기에 그런 게 끼어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륀느. 이번엔 절대 배신하지 않기로 해요. 저도 세계수의 이름에 맹세할게요.”
이에 륀느 또한 자신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헤일로, 월륜을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륀느가 결속을 높게 평가. 이전과 같은 배신은 절대 용서치 않을 거라 명시.”
과거 흑마법사의 주구를 이용한 사고를 쳤다가 절벽에 매달린 적이 있던 그들은 이전에도 그 과정에서 서로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갈긴 바가 있었다.
그렇기에 유리아와 륀느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점순이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우선 사태가 벌어진 이상 수습은 해야 해요. 하지만 점순 양은 절대 걱정 말아요. 우리 미식연구회는 부원을 버리지 않습니다.”
“믿어도 돼?”
“그럼요. 절대 버리지 않아요. 혼이 나도 같이 나고 벌을 받아도 같이 받을 겁니다.”
그 말에 미식연구회의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덜컹!!
그때였다.
넷의 몸이 흠칫 놀라며 고개가 돌아간다.
“여기 있었네?”
빙그레 웃으며 걸어오는 저승사자를 보며 유리아와 륀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은공. 이 일은…….”
“아빠! 화내지 말아요! 이건 사고에요!”
그 말에 데이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에린아…….”
“아빠 진짜 여기서 화내면 나 아빠하고 말도 안 할 거야!”
에반젤린은 사고에 휘말린 미식연구회를 두둔하기 위해 필사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에 륀느와 유리아가 조용히 소곤거렸다.
“요격 성공?”
“격추한 거 같네요.”
에반젤린에겐 한없이 약한 데이비였다.
교육을 제외하곤 이렇게 딸 바보가 없을 정도의 모습을 보이는 데이비였기에 잘 먹히는 듯했다.
하지만. 뒤이어 들어오는 이들을 보며 그녀들의 표정이 굳었다.
만삭의 배를 이끌고 나타난 페르세르크와 검집에 넣은 칼디라스를 들고 들어오는 일리나.
뒤이어. 에이리아가 담담한 얼굴로 들어와 방문을 쾅! 하고 닫는다.
마치 도망갈 생각하지 말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데이비는 에반젤린에게 굉장히 약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페르세르크나 일리나, 에이리아는 달랐다.
이에 유리아와 륀느가 황급히 소곤거렸다.
“요격실패. 요격실패.”
“망했네요. 보험이 한순간에 개박살 났어요…….”
“어…… 엄마?”
당황한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에반젤린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러나자 페르세르크 또한 예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에린아. 같이 할 이야기가 있을 거 같구나.”
“어…… 엄마! 잠깐만! 난 아니야! 난 그냥 미식연구회의 제안을 받고 따라간!”
황급히 소리치지만, 그녀들은 망설임 없이 에반젤린을 질질 끌고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고생하세요, 서방님.”
“고마워 에이리아.”
“네에.”
평소 화를 잘 내지 않는 에이리아까지 전혀 두둔할 생각이 없는 그 모습에 뭔가 심하게 꼬였다는 생각이 드는 미식연구회였다.
쾅!!
이후 유리아가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저…… 은공? 아가씨는 정말 아무 잘못이 없는데요?”
“잘못이 아예 없진 않지. 그래도 혼낼 정도는 아니라서 그냥 잔소리 정도로 넘어갈 거야.”
“그럼 왜…….”
“내가 쟤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아서. 니들, 에린이 방패 세워서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머리 굴리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륀느와 유리아가 딸꾹질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너희가 발아시킨 건 세계수의 묘목이야, 세상에 흘러 들어간 묘목이 자연에 버려져 있다가 퇴적층에 쌓이고 강한 압력을 받으면서 폭마석처럼 변했던 거고.”
겉은 폭마석인데 내부의 핵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당연히 영양분은커녕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묘목은 빠르게 씨앗으로 퇴화했고 마치 가사상태처럼 힘을 응축해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니 과즙에 섞인 그 작은 수분을 먹고 가사상태에서 깨어나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려버린 것일 터였다.
대체 얼마나 운이 없어야 그런 엄청난 불량품을 살 수 있었던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게 진짜로 불완전한 폭마석이었으면 거기서 얼마나 많은 인간이 다쳤을 거 같아?”
데이비의 질문에 유리아와 륀느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저기! 이건 그러니까!”
이에 점순이가 움찔하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유리아가 그녀의 팔을 잡아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알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안전불감증이야. 그런 위험한 물건을 다루면 그만큼 긴장했어야지. 평소엔 금방 눈치챌 애가 전혀 몰랐다는 건 아예 신경을 안 썼다는 소리니까 이번엔 나도 돕진 않을 거다.”
확실히 가장 먼저 폭마석의 이변을 눈치챈 건 에반젤린이었다.
데이비의 말에 할 말을 잃은 셋이었다.
아무리 딸을 사랑해도. 혼낼 때는 혼내야 했다. 물론, 에반젤린은 혼난다기보다는 잔소리를 듣는 정도로 그칠 테지만 정작 데이비로부터 미식회를 보호해줄 수는 없게 되었다.
“그래도 전후 사정 정도는 모르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기회를 주마.”
담담하게 말한 그가 고개를 돌렸다.
“셋 다 눈감아. 이 사고를 일으킨 범인만 자수하면 그쪽만 혼낼게. 대신 어쭙잖게 손을 안 들거나 전부 들면 내가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그 말에 점순이가 다시 한번 놀랐다.
유리아가 실수로 잘못된 폭마석을 가져온 건 사실이지만 쿠르 열매에 눈이 돌아가서 척 봐도 이상한 폭마석을 꺼내 든 건 그녀였다.
물론 그녀도 할 말은 있었다. 준비했다 해놓고 그런 잘못된 불량품을 가져온 게 아닌가. 그냥 여기서 유리아가 범인이라고 말해버리면 자신은 안전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유리아가 다시 그녀의 팔을 잡았다.
저를 믿어요. 하는 눈빛.
점순이는 그것을 보며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 미식연구회는 절대 부원을 배신하지 않는다.
그 믿음 속에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셋 셀 테니까 자수해.”
데이비의 말에 점순이는 파르르 떨며 꼭 감은 눈을 실눈으로 떴다.
그러자 그녀의 옆에 무릎 꿇듯 앉아있던 유리아와 륀느가 망설임 없이 한쪽 팔을 높이 들어 올리는 걸 보았다.
잘못을 해서 벌을 받아도 같이 받는다.
점순이는 스스로 자신이 했다 말해주는 두 사람이 너무 고마웠다.
이에 점순이는 그녀 본인도 천천히 손을 들었다.
두 사람에게만 맡길 순 없었다. 데이비가 아무리 싸이코 같은 놈이라도 생각보다 정이 많은 인간일 터.
점순이는 당당하게 팔을 들었다.
그 진풍경을 보는 데이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불안함에 휩싸여있던 점순이는 본능적으로 실눈을 살짝 뜨며 옆을 보았다.
곧게 뻗어 올린 륀느와 유리아의 팔은 전혀 내려가지 않았다.
역시 같이 모든 것을 감당해주는 그녀들의 결속력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유리아와 륀느의 팔 끝을 본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곧게 팔을 뻗어 올린 륀느와 유리아는 손목만 살짝 꺾어서 검지손가락으로 점순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얘가 그랬어요.
말은 하지 않아도 저게 뭘 뜻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멍청하게 홀로 자신이 했다며 팔을 들고 있었다.
“유리아. 륀느. 나가.”
이윽고 데이비의 말에 점순이가 비명을 질렀다.
“이…… 이 배신자 년들이!!”
어떻게 니들이 내게 이럴 수 있냐라며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륀느와 유리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순식간에 빠져나가 버렸다.
이후 데이비가 빙그레 웃으며 밧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셋 전부를 묶었다. 천천히 나가던 유리아와 륀느를 포함하는 행동이었다.
“어?”
“음?”
순식간에 도망치려던 륀느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유리아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원래 같으면 미식연구회 폐쇄지만, 이게 새옹지마라고, 니들이 공로를 세웠으니. 사흘만 매달리자.”
“자, 잠깐만요 은공! 공로를 세웠는데 왜 매다는 건가요!”
“그게 세계수 묘목이 아니고 폭탄이었으면 니들 사람 죽였어. 연구를 하는 건 좋은데 위험물품이면 확인은 똑바로 했어야지.”
그 말에 셋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할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이름 멋대로 팔아서 폭마석을 사?”
저게 진짜 의도 같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미식회는 결국 존폐 자체는 보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지원금의 절반을 삭감당하는 건 물론이오, 미국의 국립 자연보호지대에 있는 절벽에 며칠간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미국의 정부와도 협약된 탓에 셋이 묶여있는 장면은 정말 수많은 이들의 구경거리가 되었고, 관련 영상은 이른 시간 안에 [티오니스식 벌주기]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조회수를 끌어모았다.
* * *
미식연구회를 처단한 데이비는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정말 고맙습니다! 데이비 왕자! 비록 사전에 협의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신이 그 거대한 신목을 심은 뒤로 사막화되던 지역들에서 다시 초목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다 해야 할 일을 한 겁니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맺으면 서로 좋잖아요?”
“아아. 당신은 정말. 훌륭한 분이군요. 넬타리드 교단에서 신목의 일대를 관리해주기로 했습니다. 한국에 심어진 건 조금 아쉽지만 뭐 결과적으로 모든 국가에서 발생하던 사막화가 조기에 뿌리뽑혔으니까요.”
여러 나라의 대통령이나 외교부 장관들의 미소에 데이비 또한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겉보기엔 나이 차이도 많이 나 보이지만 누가 갑인지는 누가 봐도 알 만한 풍경이었다.
“그럼 말입니다. 기왕이면 성의도 좀 받을까요? 저도 아무런 대가 없이 이렇게 내주면 나중에 귀찮아질 거 같아서요. 대신 신목은 주기적으로 관리해주겠습니다. 아마. 당분간은 사막화 현상이 거의 없을 테고, 잘하면 사하라 사막이나 벌목이 심하게 된 아마존 밀림도 빠르게 복구될 거 같은데.”
각 나라에서 골머리를 쌓던 전 세계 동시다발적인 사막화 현상을 막았는데 간단한 보상을 못 할까.
각 지도부는 자신들의 정권에 큰 커리어를 남겨준 티오니스 성자와의 협약을 그냥 놓칠 이들이 아니었다.
굿판은 미식회가 벌였지만, 떡은 그놈이 챙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