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68화
데이비는 해태로부터 알아낸 단편적인 정보를 세 와이프와 공유했다.
“그러니까 아벨이라는 이름을 지었을 때 꾼 예지몽은 고대 황제인 난봉왕 아벨과는 관련이 없다는 거네요?”
“애초에 이름이 같다고 같은 삶을 산다는 것도 웃긴 일이지. 다만 예지몽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니 우리도 착각한 것뿐이고.”
여신이 막내의 이름을 지어준 것은 다리안 같은 케이스와 막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신격의 핏줄.
그것이 사사하는 바는 너무 거대했다. 운명의 굵기나 부여되는 의미까지.
하나하나 많은 요소가 그를 구속하고 거대한 주축으로 만든다.
페르세르크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잘록해진 배가 영 익숙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자신의 배를 쓸어내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다른 이도 아니고 저 속이 꽉 막힌 데이비의 아들이 이 여인 저 여인 다 후리고 다니는 몹쓸 놈으로 자란다는 건 좀 황당한데.”
일리나는 쉬이 믿기지 않는지 한켠에 놓은 아기 침대에 잠들어있는 다리안과 막내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어린 다리안이지만 처음 보는 동생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평소엔 잘 가지 않는 아기 침대까지 들어가 제 동생을 끌어안고 자는 모습이 퍽 귀엽게 보였다.
“그럼 아벨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게 좋은 거 아닐까요?”
에이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신격의 핏줄이라 흐름이라는 게 자연스레 저 아이를 얽매 미래를 정해버리는 건 너무 가엾잖아요.”
“반대로 좋은 미래를 찾을 수 있으면 그 이름으로 가는 게 맞을 수도 있지.”
아무리 그래도 부모인 만큼 자식이 잘되길 바랄 수밖에 없다.
이 여자 저 여자 후리고 다니는 몹쓸 놈으로 클 바에야 차라리 바르게 커 주길 바라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언니도 같은 생각이에요?”
“본녀도 고민이 되는구나…….”
웃긴 일이었다.
“아니 그 꽉 막힌 데이비의 아들이 이렇게 문란하다는 게 좀 이해가 안 되는데.”
“데이비의 아들이니 가능한 게지.”
페르세르크는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는지 피식 웃었다.
“데이비의 아들이니까요?”
“데이비는 오래전부터 가치관이 잡혀있었어. 그렇기에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았을 게야.”
“그건 알고 있어요.”
“그런데 막내는 어떨까.”
당장 티오니스에서 일부다처제는 드문 현상이 아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힘 있는 왕족이라 하면 여러 부인을 거두는 경우도 많았다.
“막내는 그 조건부터 달라. 일단 엄마부터 셋이니.”
막내가 받아들이는 세상은 데이비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그런데 데이비와 같이 의도하지도 않고 여기저기 들쑤시는 걸 닮았다면.”
그 한마디에 에이리아와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비는 자신이 절제하기에 일정 이상 선을 긋는다. 하지만 그렇게 그어도 데이비에게 연심을 품은 여인이 생각보다 많았었다.
“알베르타의 튜나 재상. 외곽차원의 뮤린 황녀. 그 외에도 신목의 성녀까지.”
“신목의 성녀까지요?!”
신목의 성녀. 현 세계수 알의 신녀인 에밀리아.“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놀란 일리나가 펄쩍 뛰었다.
“그 하이엘프 아가씨도요?!”
“그뿐이 아니야. 용의 둥지에 있는 작은 골드 드래곤 아가씨 하나도 데이비에게 연심을 품었었기도 했었지.”
아직 어린 헤츨링이 커서 데이비에게 가고 싶다고 말했다가 혼이 났다는 이야기를 그녀는 들은 바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서방님은 알게 모르게 대못을 참 많이도 박았네요.”
“그리고 그 생각에 쐐기를 박은 건 오늘 있었던 일 때문인 게지.”
그녀는 오늘 코오나와 데이비가 나눴던 대화를 두 사람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일리나와 에이리아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긴 인생을 구원해주었고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아이니까.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있나.”
“그동안 잘도 숨기고 있었네.”
애 취급하지 마세요.
그건 단순한 투정이 아니었다.
왜 자기를 여자로 봐주지 않냐는 무언의 시위나 다름없었다.
“저희가 이런 말 하긴 뭣한데…….”
“그래. 너희도 결국 같은 케이스니까. 다만 이 이상은 안 된다고 못 박은 이상 본녀도 누군가가 더 이상 접근하는 걸 듣진 않을 게야.”
“그렇게 치면 레이나 씨도…….”
에이리아가 중얼거렸다.
“아니. 레이나는 조금 케이스가 달라. 연심보다는 집착에 가깝지. 아이가 부모를 독점하고 싶어 하는 집착욕.”
결과적으로 데이비는 알게 모르게 이 여자 저 여자 후린 경력이 있었다.
다만 본능적으로 절제하고 선을 긋는 데이비와 다르게 막내는 살아온 배경부터 다르니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그럼 그 아비를 계승하니 뭐니 했던 건 뭐에요? 지가 무슨 부자왕이야?”
지구의 게임 중에 비슷한 대사를 했던 어떤 캐릭터를 인용하며 일리나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건 데이비가 가진 마왕의 위나 신격 때문이겠지.”
데이비는 어떤 황제나 왕이 가진 위치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으니 비뚤어진 아이가 노려도 이상할 법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사실 본녀도 괜히 불안 불안한 요소를 안고 가기보다는 편안하고 좋은 길을 찾았으면 싶은 것도 사실인 게야.”
그럼에도 페르세르크가 함부로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존재했다.
“그렇게 막내의 운명을 우리가 멋대로 결정할 권한은 없을진대.”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좋은 미래를 골라주는 게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이지만 반대로 그게 그 아이의 삶을 억류한다면 절대 좋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이라는 거네요. 그런데 여신님이 다른 이름도 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다곤 하는데. 지금까지와 별반 다를 바는 없어 보이는구나.”
“어렵네요. 저는 어떻게 되건 아이가 자라면서 보고 느끼고 저 스스로 미래를 정했으면 좋겠어요. 거대한 흐름에 묶여 있는 건 너무 가엾잖아요.”
의견은 분분했지만 당장 결정될 순 없었다.
“적어도 다가오는 만 개월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생각해봐야 할 거 같구나.”
“데이비는 어떻게 하고 싶다고 하던가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본인이 가장 혼란스러울 게야.”
아들의 운명이 이렇게 비틀려버린 건 그가 신격을 지녔기 때문이니 말이다.
막내가 신의 핏줄이라는 굴레만 지고 있지 않았어도 이렇게 복잡한 삶을 살진 않았을 터였다.
“차라리 결정할 수 있는 계기라도 있으면 좋겠네요.”
일리나가 몸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리자 페르세르크가 흠칫 놀랐다.
“음?”
“왜 그래요. 언니?”
페르세르크의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
“아니…… 조금 전에 막내의 고유 마나가 다른 곳에서 느껴진 것 같아서.”
“에이 착각이겠죠. 갓 태어난 아이가 마나를 어떻게 활성화해요.”
태어나자마자 말을 외치는 것만큼이나 신빙성이 떨어지는 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페르세르크는 엄마로서 아들의 마나조차 구분하지 못할 리 없었기에 묘한 기시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 * *
어두운 공간. 새카만 로브를 뒤집어쓴 다섯 명의 인영의 앞에 누군가가 저벅저벅 걸어들어왔다.
“그래서 저희를 찾아오신 이유는 뭔가요?”
“복수하고 싶어요.”
어두운 공간 내에 한 소녀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복수 대상은 데이비 올 라운.”
그 한마디에 주변의 공기가 몇 도는 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반면 폭탄 발언을 내뱉었음에도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다섯 명의 인영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음성이 변조된 듯 기이한 기계음을 내는 이들을 향해 방문객은 단호하게 말했다.
“얄미워서요.”
그렇게 말한 이는 음성변조 마법이 걸린 로브를 휙 던졌다.
동시에 그녀의 뒤로 푸른 빛과 화염을 머금은 거대한 신수 하나가 스르릉 나타나 그녀의 뒤편에 앉았다.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코오나였다.
코오나는 뭔가 심통이 난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근처에 있는 스위치를 눌러 주변을 밝게 만들었다.
“어둡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있으면 눈 다 버려요.”
분위기를 박살 내는 한마디였다.
환하게 밝혀진 어두운 공동 내부의 모습에 서로를 바라보던 검은 로브의 인영들은 이내 천천히 자신들의 로브를 벗어던졌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유리아 헬리샤나였다.
미식연구회의 수장인 유리아를 필두로 다른 이들이 로브를 벗기 시작했다.
륀느와 점순이를 포함한 미식연구회.
그리고 뒤이어 로브를 벗는 것은 다름 아닌 영지 개발부서의 에오니샤와 티아라였다.
“…….”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바라보던 두 연구회는 이내 코오나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도 될까요?”
유리아의 말에 코오나는 근처에 있는 의자를 가져와 거기에 앉은 뒤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 진짜 너무하지 않아요?”
그녀는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여지도 주지 않을 거면 차라리 확실하게 선을 긋던가.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괴로워하는 걸 보며 즐기는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계속되는 투정에 곰곰이 듣고 있던 찰나였다.
“륀느가 매우 높게 평가!”
갑자기 급발진을 하는 륀느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돌아갔다.
아니 데이비의 호위대장인 륀느가 저러면 안 되지 않나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좋아져 버린 내가 멍청이인 건 아는데 이건 너무 억울하잖아요.”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코오나가 이렇게 찾아와 푸념할 정도면 얼마나 서러웠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다만 륀느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희가 오라버니의 도움을 받아서 여기서 자리를 가지고 있는데. 오라버니의 뒤통수를 치라는 건가요?”
“당한 만큼만 돌려줄 거예요.”
그 방식이야 생각해봐야 할 일이지만.
“하지만 이건 좀…….”
유리아가 고민하듯 중얼거리자 점순이가 쐐기를 박았다.
“우리 세계수 묘목 때문에 매달린 지 얼마 안 된 거 알지? 또 사고 치면 그 인간이 우릴 반으로 접어도 할 말이 없어.”
아무리 얄미워도 목숨만큼 소중할까.
이에 거절하는 분위기로 넘어가려던 찰나였다.
“그래서, 할 거예요. 말 거예요.”
그 질문에 그곳에 있던 이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벌떡 일어났다.
“그걸 어떻게 참아요.”
“진짜 지난번에 기획서 엎을 때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나는데.”
“재미없어 보이니까 안된다고 했죠?”
“복수해야 합니다!”
방금까지 후환을 두려워하던 이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 찬물을 끼얹은 한마디가 있었다.
“니들 그러다가 이번에도 잡히면 진짜 연구회 폭발하고 그 인간 분노하는 걸 볼 텐데 그래도 괜찮아?”
점순이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활활 타오르던 그녀들의 시선이 점순이에게 닿았다.
똑똑한 연구개발부서의 두 사람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에 둘은 입을 천천히 뻐끔거리고는 무언가를 말했고.
점순이는 한숨을 내쉬고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보자.”
데이비용 대 안티 연합이 결성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비록 그 속내에 서로 다른 속내가 가득할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