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76화
헤탄의 왕실에는 블러핑을 던져 놓았다.
괴이한 소문을 퍼뜨리는 놈을 잡는다는 명목.
애초에 그런 일 하나로 내가 직접 올 필요가 있냐는 말이 나올 수 있다.
찔리는 게 있으니 직접 오는 게 아니냐.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지만 기왕 벌어진 일 나는 최대한 내가 이점을 챙길 수 있도록 판을 짜야 했다.
마침 내가 헤탄 왕국에 있으니 내 행동에 대한 변명으로는 충분했다.
페르세르크와 내가 금실이 좋다는 이야기는 대륙에 이미 익히 퍼진 소문이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없는 걸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페르세르크의 정체를 알리려던 이는 아벨이었고, 그 아벨은 현재 내 옆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숍 말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으니까.
“체스 두는 사람 어디 갔나.”
“아버지, 한 번만 물려주세요.”
“후…… 뒤끝 진짜…….”
한숨을 내쉬던 아벨이 갑작스레 고통이 밀려온 듯 거칠게 기침을 토해냈다.
“쿨럭! 쿨럭! 하아…….”
겉모습만 멀쩡하게 해놨을 뿐 사실 그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임시방편으로 거동이 가능한 정도였기에 나는 그가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 그런데 저희 없는 범인을 찾는 거죠?”
“그렇지.”
진짜 범인은 내 곁에 있으니까.
“그럼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범인을 못 잡으면 그 후폭풍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런 건 문제가 안 돼.”
비숍을 어찌 놓아야 할지 몰라 곰곰이 생각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내가 따낸 녀석의 나이트를 다시 판 위에 올린 뒤 내 말을 하나 뒤로 뺐다.
“아…….”
“우선은 적당히 수색하는 척하면서 우리가 찾는 걸 찾아보고, 그 과정에서 왕성 한쪽에 구멍을 내놓을 거야. 도망친 흔적을 남겨놓는 거지. 그것도 안 되면, 최후의 수단도 있고.”
“최후의 수단이요?”
“헤탄 왕국의 국왕이 절대 입을 열 수 없는 약점을 들이밀어야지. 그러니 그런 자잘한 건 내게 맡기고 넌 조사에만 집중해.”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그리 달갑지 않지만, 이 찜찜한 구석을 알아봐야 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미래의 내가 무슨 이유로 밑도 끝도없이 널 여기로 보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만.”
한 수 물려준 체스 덕분에 다시 활개를 치는 아벨의 체스판 위에 내 말 하나가 강하게 놓이며 그의 모든 퇴로를 틀어막아 버린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가족끼리는 돕는 거다. 아들.”
시간의 권능을 빼앗긴 이상, 아벨이 유예시간이 지나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다시는 나와 마주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가 존재할 미래 시간대와 내가 있는 시간대는 두 개의 평행선이 되어 마주 보는 동전이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아벨이 단순한 환각이나 가짜는 아니기에 결정에 번복은 없었다.
아들이 힘들어하는 걸 지켜볼 아비는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네 할아버지처럼 되지 않을 거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이후 내가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것을 잊지 않았다.
* * *
침입자를 찾아낸다는 명목하에 내가 헤탄 왕성에 체류하는 건 허락 받았다지만 모양새가 웃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결의된 사안을 가지고 물고 늘어질 인물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달갑지 않다는 티를 풀풀 풍기는 이가 없는건 아니었다.
“왕자를 수행할 기사들입니다. 모두 왕실 기사들로 실력이 출중한 이들입니다.”
두 명의 기사를 내게 붙여준 대신이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폐하께서 윤허하셨다지만 왕자께서는 외부인이십니다. 부디 대륙의 성자로서 그에 걸맞는 예우를 부탁드립니다.”
처음부터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그였기에 나는 빙그레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대의 머리에. 태양이 있으라.
“머리 조심하세요.”
“예?”
“두피에 열이 많이 차면 습해집니다. 두피가 습해지면 머리가 많이 빠지니 조심하세요. 아, 그리고, 간이 안 좋으신 모양인데…… 그러다가 쓰러지십니다. 술 끊으세요.”
내 말에 그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흘렸다.
“이상이 의원으로서의 소견이니 신경 쓰시기를.”
그래 봐야 늦었다만.
나는 아벨과 두 기사를 대동한 채 이동을 시작했다.
“네놈은 따라와라.”
그때였다.
대신이 아벨을 향해 손짓했다.
“나를 부르셨습니까.”
“건방진 놈. 아무리 네놈이 데이비 왕자님의 시종이라곤 하나 결국은 시종. 시종까지 수색에 같이 합류하라는 허락은 받지 못했다.”
그의 거만한 말투에 아벨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이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는지 나를 바라본다.
어찌할 거냐.
여기서 괜한 소란을 피우면 그런 것들이 허사가 되는 게 아니냐.
그런 시선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
치잉!
“으윽?!”
동시에 내 몸 안에 남아있던 베르샤의 저주가 후작에게 스며든다.
마나와는 다른 심연의 힘인 만큼 일반적인 마법으론 흔적도 잡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의 혼절에 후작의 시종이 당황한 듯 그의 몸을 부축했다.
“후작 각하! 괜찮으시옵니까!”
“후작은 몸이 안 좋으신가 봅니다. 내 시종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먼저 가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후작의 시종은 갑작스런 주인의 혼절에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거 말했잖습니까. 간안좋으니까 술 끊으라고.”
그는 자신의 주군이 베르샤의 저주에 당했다는 걸 모르는 그는 조심스레 이동했다.
그러기에 누구 아들에게 그딴 말을 하랬는가.
만약 이곳에서 내가 발견한 그것과 관련이 되어있다면 절대 곱게 둘 생각이 없었다.
예측상으론 모르는 이가 대부분인 것 같지만.
“가도록 하지. 우선 놈이 도망쳐 들어간 장소부터 찾아보자고.”
나는 헤탄의 국왕에게 그 침입자 놈이 왕성의 외벽을 넘어 침입했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는 이상 그런 식으로 침입하는 건 불가능하기에 국왕도 설마 진짜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가? 하는 의심을 품었던 것이었다.
물론 제대로 된 조사나 공작을 펼치기 위해선 방해가 되는 둘을 어떻게 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적으로 정보의 선두에는 내가 있던 만큼 나는 가장 먼저 조사해볼 장소를 고른 뒤 그곳의 외벽을 통해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뻥카를 던졌다.
물론, 사실 여부를 모르는 기사들은 단순히 그러려니 하며 따라올 뿐이었다.
왕성 내부는 헤탄 국왕으로부터 침입자를 수색하기 위해 부산스러운 모습이었다.
당장은 문제없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말 침입자가 들어온 게 맞는지.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지 의심이 들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일의 중점은 빠르게 치고 빠지기였다.
아벨은 어떻게든 그 짧은 시간 안에 해답을 찾아내려 했지만 나는 아벨이 찾는 파장을 찾는 건 빠르게 포기했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서 변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 근거는 충분히 있었다.
“이곳이 말씀하신 장소입니다. 왕자께서 보신 장소의 반대편이지요.”
내가 놈을 놓쳤다 증언한 장소의 반대편. 왕성 내부.
침입자가 정말로 있다면 놈은 반드시 이곳을 지나 어딘가로 향했다는 뜻이었다.
사실 정황을 모르는 기사들은 내가 놈의 흔적을 쫓는 줄로만 알고 간단한 지리를 안내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의심은 분명 있었다.
이에 나는 마치 주변의 흔적을 찾는 것처럼 정령들을 불러냈다.
“정령?”
“세상에…….”
내가 정령들을 불러내자 신기한 듯 기사들이 중얼거리는 게 보였다.
일단 기사라곤 하지만 이놈들의 실력은 척 봐도 왕실 기사단 내부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가진 놈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나는 정령과 입을 맞춰놓은 대로 연기를 했다.
“노움. 이곳에 침입한 놈이 사라진 방향을 찾아 줄 수 있어?”
그리고 정령의 언어로 다른 목적을 말했다.
[지금 이 왕성 안에 특수한 힘의 파장이 아주 미약하게 느껴지고 있어. 그걸 찾아. 그리고 안내 도중에 침입자의 흔적을 조금씩만 남겨놔.]
대지의 기억과 땅의 눌림 그런 부분을 짚으며 내가 요구하자 노움은 대답 대신 땅속으로 스며들었고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작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곳으로 향했다는 말인가요?”
“가도록 하지.”
“하지만 저곳은 내성입니다. 감히 침입자 따위가 왕성에 발을 들이민 것도 모자라 내성까지…….”
“내부의 조력자가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
나는 기사들의 반론을 무시한 채 걸어 나갔다.
“잠깐 멈추십시오! 이 이상 들어가시면 곤란합니다!”
“어이.”
그들의 말을 끊으며 나는 담담하고 낮게 물었다.
“그 말인즉슨 왕실이 그놈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다고 받아들여도 되나?”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그렇지않고서야 이렇게 수색을 방해할 이유가 있나?”
“그것은…….”
“그리고, 그대들은 내게 길을 안내하는 이들이지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없을 텐데.”
감시역이긴 해도 대놓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게 그들의 불편한 입장이었다.
“알겠습니다.”
결국, 꼬리를 내리는 그들을 보며 나는 기세를 거둬들였다.
그리고 노움이 안내한 내성 쪽으로 향했다.
노움이 찾아낸 힘의 흐름이 내성이 아닌 성의 바깥이었다면 차라리 그쪽으로 향했겠지만 놀랍게도 마법진이 감지한 그 파장은 내성 안쪽에서 뿜어져 나왔다.
처음엔 의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따라오던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가는 곳마다 마치 침입자가 있었던 것 같은 미세한 흔적들을 보며 당황한 낌새를 숨기지 못했다.
흔적만 놓고 보면 정말로 침입자가 있는 모양새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들과는 별개로 나는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갈수록, 왕성 내부에 깔린 이질적인 차단 마법진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한 그 모습은 분명 이질적이었다.
“아버지…… 이거.”
아벨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나를 향해 조용히 물어왔다.
“아벨. 네가 찾는 그 파장은 아직도 느껴지지 않았지?”
“네.”
“어쩌면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미래의 나는 이 사실을 눈치챘고, 일이 커지기 전에 막으라고 그를 보낸 것이 아닐까.
미래의 내가 얼마나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과 큰 차이가 없다면.
나 또한 같은 선택을 내릴지도 모른다.
코오나를 구하고 싶어 하는 아벨에게 직접 일을 해결할 힘을 길러주고 싶은 건 나도 미래의 나와 같은 판단일 테니.
“멈추십시오!!”
이윽고. 내성의 안쪽에 이르렀을 때. 기사들이 더는 안 된다며 내 앞을 막아섰다.
그들은 침입자의 흔적이 정말 말도 안 되는 곳까지 이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급히 나를 말렸다.
“이곳부터는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된 명예관입니다. 왕족을 제외한 그 누구도 진입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인즉슨. 내부 조력자가 헤탄의 왕족이라고 판단해도 되겠나?”
그 말에 기사들이 움찔거렸다. 혼란스러울 것이다. 정말로 왕족 중에 일부가 그를 보호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융통성 없이 충성심이 강한 기사들은 그것과는 별개로 이곳에 있는 무언가를 내가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더욱 강하게 나섰다.
“이 이상은 협정에도 없습니다. 이 이후의 추적은 저희 헤탄 왕국 내에서 자체적으로 조사를…….”
그래 뭔가 숨겨놨으니 수 겹으로 차단장을 펼쳐놓았고, 다른 걸 다 제쳐놓고서라도 이곳에 못 들어가게 하는 거겠지.
그리고, 나는 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 것 같았다.
“비켜.”
내 싸늘한 경고에 그들은 입을 다물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검을 뽑아 앞을 막아섰다.
“아무리 대륙의 성자라 할지라도 이곳은 헤탄 왕국입니다. 이 나라에 온 이상 이나라의 법도를 따라주십시오. 출입은 절대 불가합니다.”
그들의 말에 나는 눈을 잠시 감았다.
아벨은 혹여 여기서 더 밀고 들어갔다가 내게 향후 큰 문제가 될까 싶어 물러나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뻐억!!
“끄윽…….”
그가 입을 열었을 땐 내가 그들의 복부를 후려쳐 기절시킨 후였다.
“아……아버지?!”
“여기서 물러나면 여기 뭔가를 숨겨놓은 헤탄의 국왕이 어떻게 나올까. 아들.”
“그야 당연히 이걸 숨기겠지요.”
“그렇지?”
그러니 그냥 못 넘어간다.
“속에 악마를 숨겨놓은 이상 그냥 물러나 줄 생각은 없다.”
콰앙!!
나는 선대 헤탄의 왕족의 물건들이 보관된 명예관의 문을 박살 내버렸다.
당연히 엄청난 경보가 울리며 주변이 시끄러워졌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명예관 안으로 들어간 내 눈에 띠인 거대한 조각 때문이었다.
“…….”
과거. 에반젤린이 눈이 돌아가서 죽이려 들었던 악마종.
나차 제국의 황제에게 빙의했던 악마가 숨겨놓고 지구에서 활성화시킨 악마의 알.
내가 광역 파괴마법으로 짓이겨버린 악마가 어째서인지 이곳에 석화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분명 완전히 으깨서 죽여버렸을 텐데.
“이건…….”
“이 악마. 전에 죽인 적이 있거든. 다만 그때와 다르게 놈의 힘의 파장이 조금 변했다.”
그 말인 즉.
“시간이 흐르면서 이놈의 힘의 파장이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거지.”
즉. 이 악마의 석상이 코오나를 그 지경으로 만든 유력한 범인이라는 소리였다.
“그럼 저 악마가…….”
“수십 년 뒤에 어떻게 변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악마의 힘이 더 강해졌다면 코오나에겐 치명적일 수도 있겠네.”
코오나는 해태의 힘을 쓴다고 하지만 마냥 전투능력만 놓고 보면 상위급 강자라고 볼 수 없었다.
드드드드드득!! 촤라락! 스캉!
얼마 지나지 않아 명예관 외부 쪽에서 다수의 병력과 기사들이 들이닥치며 나와 아벨을 향해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허겁지겁 달려온 것처럼 보이는 헤탄의 국왕이 나를 노려보는 게 보였다.
“이게 무슨 짓인가! 데이비 왕자!!”
나를 향해 일갈을 터뜨리는 국왕을 향해 나는 석상을 가리켰다.
“저게 뭡니까.”
“뭐……뭘 말하는 겐가! 이곳은 선대 헤탄의 왕족들이 남겨놓은 업적과 물건들이 보관된 신성한 장소네! 아무리 데이비 왕자와 협약을 하였다 한들 이것은 명백한 월권행위! 따라서 나는 이 일을 국제연합에 강하게 항의할 것이네!”
분통을 터뜨리는 국왕의 한마디에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한 손을 휘저어 그대로 일대 영역에 어마어마한 중력을 발현시켰다.
“그윽?!”
“컥!!”
순식간에 당황한 그들의 몸이 눌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 악마가 어떻게 차원을 넘어 지구에서 티오니스로 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수십 년간 그 누구도 모르게 이곳에 숨어있었던 악마가 일으킨 사고로 아벨이 이 지경이 됐고 코오나가 혼수상태가 되었다는 것.
적을 죽이고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내 잘못도 있지만. 설마 완전히 죽어버린 놈이 다시 이렇게 버젓이 부활해 헤탄 왕성 내부에 숨어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이윽고 내가 국왕에게 자세한 설명을 다시 강요하려던 찰나.
명예관 안쪽에 있던 석상이 옅게 진동하더니 이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풍기는 힘은 확실히 전에 봤을 때와는 비교도 못할 만큼 강해져 있었다.
이후 내가 손을 뻗어 그 석상을 채로 박살 내버리려던 찰나.
석상의 주변에 놓인 독특한 색의 마나석들이 모조리 석상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거대한 시공의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나와 아벨이 있던 장소를 휘감기 시작했다.
“아! 시공의 태풍은 좀!!”
당황한 아벨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보랏빛 줄기들이 사방으로 뻗어져 나가며 일대의 기사와 황제 모두에게 날아들어 꽂히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끄어어억!!!”
나는 곧바로 황제에게 향한 힘의 줄기를 끊어버렸지만 이미 다른 줄기들은 동시다발적으로 그들의 생기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처음 보는 구조를 지닌 거대한 파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설마!!”
그제야 아벨도 눈치챘는지 눈을 부릅 떴다.
“아버지! 이 파장이 분명합니다! 완전히 날아가 버린 헤탄 왕성에서 찾은 파장과 비슷해요!”
그의 외침과 함께 어마어마한 폭풍이 내가 손을 틈도 없는 속도로 퍼져나갔다.
이게 지난번에 봤던 악마 놈이라고? 웃기는 소리.
놈은 반신은커녕 심연의 공주 슬리지아 이상급의 위험성을 지닌 생명체가 되어있었다.
어쩌면 미래의 나는 이보다 훨씬 강해져 굉장히 귀찮아진 악마종을 사전에 처리하려 했던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지간한 힘으로 분해시켜도 죽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해서 한계 없이 강해진다.
다만 포식의 힘까지 가진 내가 죽이기 애매하여 과거까지 엮은 것을 보면 완전히 변한 놈은 기존의 악마종을 넘어선 무언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미래에서 내게 토스를 해왔다면. 이제 남은 건 스파이크뿐.
나는 놈이 터뜨린 파장 속에서 아벨과 나를 보호했던 장막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한순간이 지옥도처럼 변해버린 왕성을 말이다.
“…….”
조용히 그 꼴을 바라보던 내가 물었다.
“미래에서도 이랬나?”
“이보다 더 거대했습니다. 그런데 놈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죠?”
시간이 부족한 아벨은 조급함을 숨기지 못했다.
반면 나는 거대한 폭발을 일으켜 지옥도를 만들어 놓고 도망쳐버린 악마종의 흔적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여신님 말도 들어봐야겠네.”
이 세상 어딘가에, 여신이 내게 말해주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악마 놈의 힘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질적인 부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