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277화 (1,277/1,559)

제 1277화

코오나가 휩쓸린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고 한다.

헤탄 왕국에 개인적인 볼일을 위해 떠난 그녀는 거대한 폭발 후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원흉을 만들어낸 것으로 추정되는 악마 놈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켜 헤탄 왕성에서 대참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미래에서 그 폭발에 휘말렸어야 했을 코오나는 현재 미식연구회와 영지개발부의 일원들을 모아놓고 필요한 작전을 수립 중이었다.

처음엔 단순 데이비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움직였다.

신성 그룹 인사팀에 휴가 계획서를 제출하고 통과되기가 무섭게 이곳으로 넘어왔다.

그런데.

“이건 저희가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

유리아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새빨간 미니스커트가 달린 산타복을 흔들어 보였다.

“은공께서는 이런 느낌에 상당히 많이 무르시니까 효과는 최고일 거라 생각하고 직접 지구에서 공수해온 물건인데.”

아쉬운 듯 이리저리 대보던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어떻게 해요?”

코오나가 조급함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사고를 치는 데엔 최고의 재능을 지닌 자들이다. 그리고 코오나는 현재 사고를 칠 작정이었다.

마치 부모에게 관심을 갈구하는 아이처럼 말이다.

물론, 데이비가 그녀를 소홀히 대한 적은 없었다. 대체 어떻게 일일이 다 체크하는 지 자잘한 것 하나하나 챙기는 건 물론이고 한번 볼 때마다 평소와 다른 점을 찾아냈다.

어떤 면에선 이 인간, 스토커가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지만 코오나는 그런 관심이 기꺼웠다.

그렇기에 한때엔 착각도 했다. 그가 자신을 이성으로써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풋풋한 상상을 말이다. 물론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곤 하지만 말이다.

나쁜 생각인 걸 알면서도 그녀는 속에서 차오르는 그런 음습한 욕망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데이비에게도 못 할 짓이고, 그의 부인들에게도 못 할 짓임을 알기에.

그래서 그녀는 딱 한 번. 데이비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는 거로 만족하고자 했다.

“이걸 써볼까요?”

그때 에오니샤가 품 안에서 작은 약을 꺼냈다.

“흥분제에요. 의약품으로 쓰이는 건데. 이걸 적재적소에 잘만 이용하면 굉장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안 돼요.”

하지만 그런 에오니샤의 과감한 제안은 코오나의 손에 제지당했다.

“저는 그 사람을 어떻게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냥…… 제가 어린애가 아니라는 것만 보여주고 싶어요.”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데이비가 하는 짓은 마치 수십 년은 차이 나는 진짜 부모와 자식 같은 괴리감이 느껴졌다.

코오나는 그게 못내 불만이었다.

“그런데, 지금 계획을 짜본들. 무슨 소용이야. 그 사람이 지금 없는데.”

“그러네요. 게다가 얼마 전에 습격도 있었고, 이상한 소문도 돌고 있는 상황이니.”

잠시 고민하던 두 집단과 코오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선을 넘으면 안 돼요. 작전은 이번 일이 적당히 해결될 때까지 보류할까 하는데. 어떤가요?”

페르세르크와 관련된 문제에 엮여있는 상황 속에서 사고를 친다는 건 가뿐히 선을 넘는 것이다.

“은공은 저희를 믿어주고 계세요. 그런 만큼 저희도 일정 이상 선을 넘는 짓을 할 순 없어요.”

가까운 사이이기에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물론. 의도하지 않은 사고를 용서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

“그럼 작전의 시작은 그 사람이 일을 마치고 영주성으로 돌아오는 시기로 하죠. 내일일 수도 있고 모래일 수도 있어요.”

“네.”

코오나는 데이비가 돌아오는 날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웃을 것을 생각하며 기분이 좋아졌다.

* * *

그우우우우우아아아아!!!

끔찍한 괴성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고막이 상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하늘의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해진 먹구름 사이로 본래 이 시간대에 보여선 안 될 검은 달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검은 달?”

“가짜야.”

달처럼 보이는 무언가일 뿐, 저것은 달이 아니었다.

조용히 침묵하고 있기를 잠시. 아벨의 기운이 흉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저것이 그 사람을…….”

애초에 아벨은 코오나를 혼수상태로 만들어버린 범인에 대한 극도의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흔적이 없어서 범인이 누구인지도 찾지 못하던 상황 속에서 범인을 찾았으니 녀석이 앞뒤 분간 못 하고 달려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팍!!!

이에 나는 검붉은 검을 꺼내 달려드는 아벨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 그를 제지했다.

“놓아주세요. 아버지!”

눈앞에 불구대천의 원수가 나타났다는 사실 때문일까. 아벨은 앞뒤 분간 못 하고 내게 화를 냈다.

이에 나는 망설임 없이 녀석의 다리를 걷어차 버렸다.

“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아버리는 녀석이 다시 일어나지도 못하게 아공간에서 부적 네다섯 장을 꺼내 그대로 녀석의 몸에 검은 천과 묵색의 기둥을 박아버렸다.

상위급 주박술이었다.

아벨을 불신하는 것은 아니었다. 악마의 무력만 놓고 보면 조금 위험하긴 해도 얼마든지 감당 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게 끝인지 나로서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고작 이 정도의 힘이 맞는지. 녀석이 더 숨긴 게 있지 않은지.

무엇보다. 한번 죽였으나 되살아난 놈에게 다른 특성이 없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아벨. 이놈에 대해 아는 게 있냐?”

분명 이와 비슷한 폭발을 일으켰다는 것은 각성을 했을 거라는 뜻일 텐데.

아벨은 이놈에 대해서는 전혀 본 적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럼 그놈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그 묘한 흐름 속에서 검은 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에 심연이 가득 찬 듯 꿈틀거리던 검은 달이 이내 기이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달이 아니었다.

“눈…….”

바로 하늘에 뜬 거대하고 불길한 눈이었다.

그냥 두기엔 상당히 꺼림칙할 정도로.

이에 나는 아공간을 찢듯 열어젖힌 뒤 대궁을 하나 꺼내 들었다.

신궁 브류나크.

회랑의 영웅인 궁신 아폴론의 활이었다.

뜨드드득!!!

엄청난 장력이 머금어진 소리와 함께 활시위가 당겨진다.

보통 게임에서 전사가 힘 스탯을. 궁수가 덱스를 올린다고 하였던가.

일반적인 현실에선 정반대요.

마나가 있는 이 세상에선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똑같다는 걸 모른다.

대궁의 막대한 장력을 버텨내고 유지할 근력이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니까.

신궁 브류나크는 그런 점에서 따지면 악랄하기 그지없는 활이었다.

마나를 쏟아 넣을수록 장력을 엄청나게 올릴 수 있으니 말이다.

터어엉!!

마나로 뭉쳐진 푸른 화살이 정확히 눈의 동공을 노리고 날아든다.

장력도 장력이지만 그 마나에 담긴 힘이 강해 반드시 꿰뚫을 수 있을 만한 화력은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이 화살 한 방으로 저게 뚫릴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게 맹렬하게 날아든 화살을 향해 바닥에 있던 괴물, 아니 악마가 손을 뻗어 검은 그림자 줄기들을 꾸역꾸역 쏘아 보내 그것을 막으려 들었다.

하지만, 신궁에서 발사된 화살은 그것들을 가볍게 찢어 발겨버렸고, 이내 눈의 지근거리까지 날아들었다.

찌지지직!!

이후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허공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화살은 눈을 관통하다 못해 완전히 찢어버리고는 사라졌다.

“어?”

이게 뚫려?

* * *

순식간에 눈이 찢어지면서 주변의 하늘은 검은빛에서 붉은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에에엑!!!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는 놈을 보며 아벨이 나를 바라본다.

“아버지…… 뭔가 잘못 된 거 같은데요.”

“아들.”

“네?”

“나도 모르겠으니 입 좀 다물자.”

콰아앙!!

하늘이 붉게 변한 뒤부터 석상으로 변해있던 악마의 움직임이 심상찮게 변했다.

놈의 발밑에 있는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나와 아벨을 향해 날아든다.

현재 이 왕궁에 생존자가 있을지는 알 길이 없지만 단 하나라도 살아있다면 일단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정령왕 노아스를 불러내며 말했다.

“폭발 범위 내에 살아있는 인간들은 전부 바깥으로 피신시켜.”

이딴 걸 숨기고 있었으니 죽어도 싼 놈들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석상을 숨기고 있던 것은 헤탄의 왕이었을 뿐 휘말린 다른 불쌍한 인원이 아니었다.

비척거리는 놈을 향해 아벨이 검을 빼 들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저 절대 못 물러납니다.”

“안 말린다.”

이놈의 분이 풀린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아벨이 약한 녀석이었다면 가차 없이 쳐냈을 테지만. 부상의 정도만 제외하면 아벨도 훌륭한 전력이었으니 말이다.

“저…… 믿어주시는 겁니까?”

“네 성장 척도를 내가 모를 수가 없지 않나.”

어느새 소환한 홍단이와 청단이를 합쳐 초단이를 만들어낸다.

학교 일로 바쁜 삶을 살아가는 초단이지만 전에 광역파괴마법으로 짓눌러도 살아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초단이로 아예 베어버리는 게 맞았다.

초단이는 내가 갑자기 아공간을 통해 불러냈음에도 전혀 싫은 기색을 내지 않았다.

청적색의 장검이 웅웅 울리며 내 힘과 공명하자 아벨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아…… 초단이 누님!”

“쉿.”

초단이는 아직 그를 모르니 당황할 수밖에 없다.

내가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로 제스처를 취하며 노려보자 녀석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 아벨에게 적의를 느낀 것일까. 악마는 나를 무시한 채 곧바로 그림자의 줄기들을 아벨에게 쏘아 보냈다. 위협적이긴 하나 결국은 그뿐인 수준의 공격.

아벨에게 듣기로 녀석은 재능이 없었다고 한다.

태생부터 가진 것은 가장 높았으나 그것을 다루는 힘이 부족했다고 했던가.

나는 녀석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아직 제대로 보지 못했기에 문득 아벨의 저력이라는 것을 보고 싶기도 했다.

아벨이 정확히 어떤 상황이고 어떤 난관에 봉착해있는지를 말이다.

이윽고. 아벨을 향해 사방에서 날아들던 검은 그림자의 줄기들이 지근거리까지 닿았을 무렵.

아벨이 천천히 손을 뻗어 올렸다.

동시에. 나 이외엔 본 적이 없는 혈도 서클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의 눈에 이채가 띤다.

으드득!!!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무형의 힘인 염동력이 그를 향해 날아들던 검은 줄기들을 모조리 허공에서 묶어버렸다.

“음?”

뿌드드득…… 콰직!!

섬뜩한 소리가 나기가 무섭게 아벨의 숨이 거칠어진다.

지쳐서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

격한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듯한 그 모습에 점점 더 아벨의 힘이 강해지는 게 보였다.

점점 강력한 압박이 악마를 짓누른다.

악마는 어떻게든 저항해보려 하지만 품고 있는 힘을 대부분 사용하지 못하고 있기라도 한 건지 맥없이 짓눌리고 있었다.

당장 슬리지아 이상급의 힘이라면 이 정도 압력은 아무렇지도 않게 걷어냈을 터인데.

그 의문 속에서 더욱 강한 힘을 내뿜으며 적을 압박하는 아벨의 모습에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멀쩡한데. 딱히 재능이 없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어쩌면. 아벨은 자신의 성취 속도에 비해 다리안의 성취 속도가 빨라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그 말인 즉. 아벨이 둔재였던 게 아니고. 다리안이 천재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아벨이 품고 있는 가능성에 비해 지금 그의 무력수준이 낮은 것도 사실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파지직!!

스파크가 튀는 소리와 함께 붉은 하늘이 불길한 기류를 흘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악마의 형상이 점점 부풀어나기 시작했다.

손 쓸 틈도 없이 빠르게 커져가는 놈을 보며 나는 다시 물었다.

“아벨.”

“예 아버지.”

“저건 본적이 있냐?”

“없습니다.”

저것도 본 적이 없다. 코오나를 그 지경으로 만든 범인은 저놈이 맞는데. 이상하게 아벨은 저놈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만한 폭발을 일으키고 대체 이 악마 놈은 어디로 사라졌던 것일까.

나로선 알 길이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보였다.

“저걸 그냥 둘 수도 없고.”

이미 폭발이 일어난 시점에서 미래의 코오나가 혼수상태에 빠지는 건 막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흉인 이놈이 깨어난 이상 그냥 두면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프리아 여신은 초 단위로 모든 것을 계산하고 단 하나의 사실만 바꾼 채 미래를 역변시킬 수 있지만, 그 권능을 빌려올 뿐 미래를 세세하게 조작할 능력은 아벨에게도 나에게도 없다.

“초단아. 가자.”

중요한 건 시간을 끌어서 이득을 볼 게 없다는 사실이다.

붉은 하늘 자체도 거슬리고, 거대해지는 악마도 꺼림칙하다.

내 목소리에 초단이가 반응하듯 내 등 뒤로 그녀의 형상이 흐릿하게 나타났다.

거대한 괴물로 변해버린 녀석은 겉보기엔 4족 보행을 하는 기이한 생명체처럼 변해 있었다.

비늘이라고 보기엔 맨들맨들한 피부에 여기저기 뿔이 돋아난 갈색빛의 형상을 지닌 녀석은 이목구비 중 입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녀석이 입을 쩍 벌리며 고개를 들기 시작하자 하늘에 빛으로 된 시곗바늘이 생겨났다.

시계의 위치는 11시.

이윽고 녀석의 시계의 분침이 곧바로 시계방향으로 돌기 시작한다.

척 봐도 12시에 도달하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초단이가 나와 공명하며 막대한 힘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새 더 강해졌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언제 꺼낸 건지 모를 도깨비 가면 같은 것을 꺼내 얼굴에 쓰는 초단이의 등 뒤로 검고 날카로운 날개 같은 것이 돋아났다.

그리고 그녀의 형상이 그렇게 변할 때마다 내 등 뒤로도 귀기 어린 힘이 서린다.

“아버지! 제가!”

“물러나 아벨.”

아무리 아들을 믿어도 저건 안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한 손에 초단이의 그립을 쥐고 한 손에 초단이의 검신 아래쪽을 짚은 뒤 한 발 내디뎠다.

그대로 귀신 검을 발현한 뒤 천마의 검술을 펼쳐냈다.

이놈은 내게 한번 죽을 뻔한 적이 있기에 나를 보자마자 무리하게 자신을 활성화 시켰다.

이놈이 이렇게 깨어난 원흉은 나 때문이리라.

[필사즉생 생즉필사]

쩌억!!

허공을 찢어발기며 귀기 어린 초단이의 검기가 폭사하듯 터져나갔다.

놈은 과거 강대한 파괴마법을 맞고도 살아남았다.

어떻게 한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또다시 부활하지 말란 보장이 없는 이상 초단이를 통해 녀석의 부활조건을 억제하지 않으면 또 다시 부활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이윽고 초단이의 검기 놈을 반으로 갈라버리려던 찰나.

붉게 변한 하늘이 한차례 일렁였다.

동시에 시간이 아주 잠깐 멈춘듯한 착각이 일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초단이의 검기가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단순히 없앤 게 아니었다.

-아버지!

“이 새끼 시간을 제 마음대로 조작하네.”

초단이의 검기 자체에 외부의 힘을 거부하는 권능이 발현되고 있었음에도 막대한 시간을 부과하여 스스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아무리 강한 검기가 방출되어도 무한정으로 지속되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지간한 시간의 비틀림으로는 초단이의 검기에 통째로 베여 적용되지 않았을 텐데 다루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벨이 가진 시간의 권능과 비슷한 힘을 악마가 다루고 있었다.

그때 내 귓가로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리아의 개…… 나와 계약하지.

놈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내게 전해왔다.

-나는 위험천만한 네놈과 싸울 의도가 없다. 내가 바라는 건 오직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뿐.

“누구 마음대로.”

-불완전하지만 나는 시간을 다룬다. 내가 네놈을 죽일 수는 없을지라도 네놈 또한 절대 나를 죽일 수 없다. 공격이 들어오는 경로 전체에 시간을 비틀어버릴 테니까.

갈라지는 목소리로 목소리를 털어내는 놈을 향해 내가 한 발 더 내디뎠다.

아, 나는 모르겠고.

아벨의 걱정스런 외침이 들려온다.

“아버지! 그놈! 저와 같은 시간을 다루는 거 같으니 일단 물러나서!”

시간을 맹신하는 건지, 믿지 못하는 건지. 어느 쪽이든 아비로서의 위엄을 보여야 할 때가 왔다.

“아들.”

“예?”

“이런 놈에게 대처하는 법을 가르쳐주마.”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놈에게 접근한 뒤 이번엔 검기를 방출하지 않고 검에 머금어 그대로 휘둘렀다.

깜짝 놀란 놈이 급히 시간을 비튼다.

자신의 시간 조작에 굉장한 자부심을 지닌 듯 보이지만 놈은 아직 나에 대해 아는 게 많이 없었다.

검이 닫기 직전 내 입가에 호선이 걸렸다.

“그게 최선이야?”

이 새끼야.

[먹어라.]

으드득!!

내 몸에서 흘러나온 포식의 힘이 놈이 깔아놓은 시간의 비틀림을 먹어치워 버리며 방어를 무산시켜버렸다.

쩌억!!

그리고 뒤이어 떨어지는 초단이의 검이 놈을 비스듬히 갈라버렸다.

-끼아아악!!

끔찍한 고통이 서린 비명이 터져 나온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