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80화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일이 있다고 했던가.
유리아는 맞은편에 앉아 보리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골다 장로를 바라보았다.
“크으…… 이 맛이지.”
그는 세상 모든 일은 술과 함께라면 헤쳐나갈 수 있다는 생각의 소유자였다.
“쯧쯧. 내 언제 한번 사고 칠 줄 알았지.”
“할말이 없네요.”
“그런데. 놀랍군. 배신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달의 숲의 수장이 혼자 다 뒤집어쓸 줄이야.”
끌끌 웃는 얄미운 드워프를 향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대단한 이유 때문이 아니에요.”
유리아는 평소답지 않게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빚만 지우려고 했는데요.”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은공의 얼굴을 봤을 때…….”
“그만. 알고 있네.”
다 알면서 모른척하던 얼굴.
“흐읍…….”
유리아의 눈에 눈물이 방울졌다.
“은공의 그 얼굴을 봤을 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마지 잊고 있던 게 갑자기 떠오른 것처럼. 흡…….”
골다 장로와 유리아는 초창기부터 데이비와 함께해왔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 이상으로 데이비에 대한 애착이 큰 것도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끅끅거리며 울음을 삼키는 유리아를 말없이 보던 골다 장로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쓴 경험 했다 생각하시게.”
표면적으론 사실 그 누구도 더 이상 유리아를 타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페르세르크가 직접 나선 셈이다.
하지만, 그런 결정이 일반적으로 내려질 수 있는 것일까.
아무리 부하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역린을 후벼 파 버린다면 당장 눈이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데이비는 유리아를 많이 아꼈기에, 그리고 그 일의 전반은 자신의 잘못이라는 전제가 깔려있기에 모른 척 무시해버렸고, 페르세르크는 남편이 그렇게 괴로워할 거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데이비를 위해 고작 그 정도 처벌로 모든 것을 덮었다.
유리아를 공식적으로 처벌할 모든 명분은 그리하여 사라졌지만.
정작 유리아에게 남은 자괴감과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저는 어떻게…… 어떻게…….”
어지간해선 절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 적 없던 유리아가 이토록 서럽게 우는 걸 보면 단순히 뺨을 맞은 것만으로 서러워서 운다고 착각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지애로 묶여온 골다 장로의 입장에선 유리아가 느끼는 감정은 지독한 자책감이었다.
엘프에게 비하면 짧은 시간이지만 유리아에게 있어서 데이비는 당장 절대 잃고 싶지 않은 그런 인연이었고 소중한 은공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달의 숲을 떠나 하인스 영지에 자주 체류하며 미식연구회를 핑계로 데이비의 주변을 지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때로는 말이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더욱 애착이 가는 상대도 있는 법이지. 다음부터 그러지 않으면 되는 것이네. 자자 오늘은 다 털어내세나.”
조용한 펍의 테이블에 앉아 우는 하이엘프와 그런 하이엘프를 떨떠름하게 다독여주는 드워프의 목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국제연합의 회의를 주체하는 곳은 성국에서 맡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헤탄 왕성에 남은 붉은 하늘은 성국의 사제들이 보기에도 너무 이질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성국 측에서는 이번 일에 대해 전면적인 개입을 요청했고, 괜한 문제로 큰 사고가 벌어지는 걸 우려한 삼 제국은 한발 물러나 상황을 관망했다.
그리고. 그 사태의 주요 용의자로 지목된 나는 현재 성국을 방문한 상황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고를 치시네요. 학장님. 당신은 미식연구회나 영지개발부를 욕할 자격이 없어요.”
하인스 아카데미의 교수 앨리스 대주교는 피곤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내게 독설을 내뱉었다.
“미안하지만 이쪽도 피해자입니다.”
“예. 알죠. 당신이 그런 짓을 의도했을 거 같진 않으니. 그래도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해명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조심하세요. 성국 내엔 고지식한 틀딱들이 가득하니까.”
틀딱…….
굉장히 거친 단어선별에 내 표정이 구겨졌다.
“그래도 대주교이셨던 분이고 교수님인데 워딩이 너무 천박한 거 아닙니까?”
“허…… 당신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죠.”
그녀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처음부터 그녀는 나와 많이 충돌했었다.
한때 그녀는 빛을 등졌고, 나는 그런 그녀를 죽이려 했으니 말이다.
다만, 당시의 여신은 어떠한 이유로 그녀를 살려냈다.
그것이 나를 위한 행동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흥미가 가는 나 따위보다 애정을 쏟아준 앨리스 대주교를 아꼈기 때문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녀가 내게 특수한 집착을 가진 건 1만 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그녀가 감정을 드러낸 건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피조물인 내가 이해하는 건 사실 어려운 문제였다.
“특히 젊은 놈들을 조심하세요. 막 사제가 된 놈들은 그래도 말뿐이지만 어느 정도 위치가 정해진 놈들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광신도와 말을 섞지 말아라. 그런 말이 나도는 건 그들이 위험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말이 안 통하기 때문.
그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당신이 신경 써야 할 정도로 막장은 아닐 테지만 시선이 곱진 않을 거예요. 그런 놈들 하나하나 일일이 신경 쓰거나 개화시키려 들지 말고 무시로 일관하세요.”
말이 안 통하는 자들을 상대로는 무시가 진리인 법.
앨리스는 성국 출신이었기에 성국 발샤스의 생리에 대해 밝았다.
“에이 설마. 그래도 꼴에 성자인데.”
대륙에 하나뿐인 성자. 성흔을 받은 존재로 치면 공개된 존재만 놓고 봐도 단 둘뿐인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런 이를 눈앞에 두고 어설픈 짓을 할 정도로 멍청한 나라가 아닐 거라 믿어보지만 얼마나 갈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히 성국 발샤스의 교황청에 들어오자마자 온도 차이가 극심하다는 느낌은 강하게 들었다.
첫째는 나를 향해 조용히 경의를 표하고 지나가는 이들이었다.
대부분이 적당히 잔뼈가 굵은 이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질투나 반감을 가진 이들. 대부분 젊은이들로 나름대로 숨긴다고 애쓴 노력은 보이지만 미숙하기 그지없었다.
앨리스 대주교의 말대로 이제 자리를 잡고 머리가 굳은 젊은 사제들이나 자세한 내막 따위는 모른 채 단순히 질투를 보내는 하급신관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나잇대로 완벽하게 둘을 나눌 순 없지만, 그 비율이 상당히 높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생각보다 놀랍네요.”
“전에 그런 말 하신 적이 있죠? 문명인은 머리통이 도끼에 쪼개질 일이 없으니 더욱 무례하고 야만적이라고.”
“흠…….”
“사제라고 다를까요. 티오니스 대륙에서 사제를 함부로 대하는 이들은 없어요. 젊은 이들 중 성국에서나고 정해진 엘리트 코스를 밟은 녀석들은 세상이 생각과 다르다는 걸 잘 몰라요.”
하급 사제, 즉, 신부나 부제, 주임신부까지. 젊은 세력들이다.
앨리스의 말마따나 성국 내에서 이들을 해치거나 위협하는 이도 없고, 성국 내에서 사제는 상당한 대접을 받으니 자연스레 이것들이 젊은 혈기에 겁이 없어지는 것이다.
“사제라고 금욕하는 건 아니에요. 젊은 혈기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저 또한 과거에 그랬죠. 방향은 달랐지만.”
성녀 후보로서 성녀가 되기 위해 생각 이상으로 강행수단을 많이 둔 적이 있던 그녀였다.
리나 성녀를 상대로 상당히 열등감을 지닌 적도 있었고, 하는 것도 없고 능력도 없어 보이는데 헤실거리는 미소 하나만으로 똑같은 성녀 후보가 된 리나 성녀를 곱게 보지 않은 것 또한 많았다.
그렇기에 그들의 행동이나 질투에 더욱 공감하는 것일 터다.
“어차피 당신의 눈에는 하나같이 애송이들뿐이니까.”
“선을 넘는 놈이 아니면 건드릴 생각 없어. 성국은 영 껄끄러워서.”
앨리스 대주교를 따라 교황청의 중앙 본관으로 향한 나는 성국의 대소 사제들이 모여 의논을 하는 의회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대한 프리아 여신상이 음각된 장식부터 아름다운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원형 테이블에 천천히 들어가자 내부의 인원들이 많이 보였다.
홀로그램을 통해 대륙 간 통신에 참석한 존재도 있었고 직접 행차한 이들도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혹시 제일 늦게 왔습니까?”
“자리에 앉으시지요. 성자 데이비 올 라운.”
원형테이블의 반대편 끝 의자를 가리키며 노령의 사내가 말했다.
그는 법왕이나 교황을 대신하여 의견을 전달하는 원로회 대신관인 듯 보였다.
그 외에도 내로라하는 수많은 국가의 인사들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개중엔 의외의 인물도 있었다.
“율리스?”
“오랜만입니다. 스승님을 대신하여 제가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내 동생. 윈리의 부군이자 나의 친우. 율리스 6급 중앙장로도 있었다.
대부분은 내게 호의를 보내는 이들이었지만 그들 중 눈에 띄게 적의를 드러내는 이 또한 있었다.
헤탄의 왕족. 하루아침에 자신의 국가가 풍비박산이 났으니 그 범인으로 추정되는 나를 곱게 볼 리가 없다.
앨리스 대주교는 내 옆에 빈자리에 앉았다.
“성자 데이비 올 라운을 변호하기 위해 온 앨리스입니다.”
앨리스는 자신의 과거 직급 같은 건 다 내려놓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성국에 온 것은 앨리스 대주교를 제외하고도 아벨과 에이리아 또한 존재했지만, 에이리아가 과거 성국에 머무르면서 신세를 졌던 곳에 인사를 하고자 하여 아벨을 그녀의 곁에 붙여 두었다.
몸이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라도 8서클 마법사. 그런 만큼 녀석이 있으면 에이리아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으리라.
“그럼 긴급 대륙회의를 시작함세.”
그말과 함께 헤탄의 왕족. 젊은 청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작 며칠 전입니다. 저희 헤탄 왕국은 서대륙의 남부에 있는 작은 국가입니다. 하지만 소왕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헤탄 왕국의 왕성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하나의 자랑거리이며 자부심입니다.”
그가 분노를 감추지 못한 채 손을 부르르 떨며 나를 노려본다.
“누군가가 헤탄 왕성을 하루아침에 개박살 내버리지만 않았다면 아마 못해도 수백 년은 더 그 위상을 자랑했겠지요.”
물론 소왕국이며 헤탄의 왕성의 가치만 놓고 보면 그리 높지 않지만, 그가 자신의 불리한 패를 까놓을 이유는 없었다.
“저는 당시 폐하의 명을 받아 외곽영지를 시찰하고 있었습니다만. 소식을 듣고 급히 왕성으로 돌아갔을 땐 이미 모든 것이 파괴되어있더군요.”
그가 작은 아티펙트 하나를 올려놓고 활성화 시켰다.
그것은 하인스 영지에서 최근 수출하기 시작한 물건으로 영상석의 화질을 정령의 기억을 덧씌워 끌어올린 고화질의 영상 저장 아티펙트였다.
가격이 싼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왕족이니 구할 정도의 재력은 있을 터다.
완전히 폐허가 된 헤탄의 왕성. 그리고. 아직까지 없어지지 않는 붉은 하늘.
왕성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그 붉은 하늘은 없어지지만 아직까지 왕성의 하늘엔 붉은 하늘이 자리하고 있다.
주변이 술렁였다.
듣기만 한 대로 소식이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이에 법왕이 조용히 손뼉을 쳤다.
“마침 저희 성국의 사제 조사단도 확인을 마치고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마치…… 괴이쩍은 무언가가 강림한 것 같은 모습이라 하더군요.”
그리고, 그 범인으로 추측되는 이가 다름 아닌 그곳에 있던 나로 의심이 되는 상황.
헤탄의 생존한 왕족은 내게 해명을 요구해왔다.
“만약 당신이 이 일의 원흉이 아니라면 그에 대한 해명을 부탁하지요.”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나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듯했다.
“왕자께서는 내가 범인이라고 단정 지으신 듯 보입니다만.”
“천재지변입니다. 이 같은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가. 이 대륙에 성자를 제외하고 존재할 수 있습니까?”
“그런 이유로 내가 범인이라 말하고 싶은 겁니까? 그럼 한번 들어나 봅시다. 만약 내가 범인이라면 뭘 원합니까.”
“무엇을 원해요? 만약 당신이 우리 헤탄 왕국의 왕성을 날려버리고 폐하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을 죽인 게 사실이라면. 절대 용서 못 합니다. 강력한 제재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의 단호한 한마디에 팔란의 황제. 살리반이 내게 물어왔다.
“정말 당신이 한 일입니까?”
“정확히는 나도 피해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신이 아니라면!! 그만한 폭발이 어떻게 일어난 것입니까!! 그리고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당신이 그 타이밍에 헤탄 왕국을 찾아와 폐하를 알현한 것부터 납득할 수 없습니다!”
헤탄의 젊은 왕족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 게 훤히 보였다.
이놈도 어릴 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나타난 나라는 존재가 국제연합의 협약에 수긍하고 따르는 건 단순히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걸 몰랐다.
국제연합과 나의 힘 싸움은 이미 예전에 끝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합을 존중하기에 그에 맞춰주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 목이라도 바라는 눈치군요.”
“당신이 범인이 맞다면요.”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빙그레 웃었다.
동시에 내 곁에서 정보를 정리하던 앨리스 대주교가 눈을 부릅 뜨며 나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내가 움직인 후였다.
쿠웅!!!!!
어마어마한 압박이 사방에 짓눌리기 시작하자. 대륙간통신 아티펙트들이 지직 소리를 내며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고 참석해있던 이들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고작 여파만으로 그러할진대. 정작 내가 모든 위압을 집중한 헤탄의 젊은 왕족은 다를까.
젊은 혈기에 젊은 세대. 엘리트 코스란 코스는 다 밟아오며 살아온 그는 살면서 느껴 본 적 없는 죽음의 기류에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컥컥거렸다.
“데이비!”
율리스가 황급히 놀라며 주변의 위압에서 모두를 보호하는 장막을 펼쳤지만, 헤탄의 왕족까지 보호하진 못했다.
“멈춰요! 지금 대륙하고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이에요?! 이기고 지고를 떠나서 그건 원치 않으신다면서요!”
앨리스까지 내게 매달려 말려보지만 나는 조용히 그를 노려보았다.
헤탄의 왕족은 숨이 쉬어지지 않고 온몸에 끔찍한 격통이 밀려올 정도로 무겁게 짓누르는 위압에 정신을 못 차린 듯 부들부들 떨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그를 짓누르며 오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하. 일 친 놈이 성낸다더니. 뻔뻔하기 그지없지.”
그그극!! 쾅!!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테이블이 갈라진다.
율리스의 보호를 받은 각국의 인사들은 몰라도 주변 건물까지 보호받지는 못한 것이다.
쾅!!
뒤이어 이변을 눈치챈 성국의 젊은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들이닥쳤다.
“예하!!”
다만, 호기롭게 뛰어든 것과 별개로 내가 내뿜는 압박에 보호받지 못한 이들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크억!!”
“컥!!!”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는 건 타국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충돌을 피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 중 직접 참석한 이들은 손을 들어 제 호위들을 말렸으나 그러지 않은 자들은 호위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나를 경계했다.
스화악!!!
그리고, 그 무거운 대치가 이어지길 잠시. 나는 압박을 한순간에 거둬들이며 말했다.
“헤탄의 왕국에 이런 소문이 돌았습니다. 제 부인, 페르세르크가 마족이라고.”
“…….”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내게 압박을 받고 있던 헤탄의 왕족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끔찍한 위압에 겁에 질린 듯 벌벌 떨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린다.
“단순히 넘기기엔 소문의 정도가 커지더군요. 입장 상 헤탄 왕국과 하인스가 충돌할 수도 있음에도 헤탄 왕실은 이를 방치. 나는 귀찮은 분쟁을 막기 위해 일부러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냥 두면 하인스와 헤탄 사이에 분쟁이 반드시 벌어진다.
전쟁이야 국제연합의 조항에 따라 거의 멈춘 상황이지만 분쟁까지 막을 순 없었다.
지구와 달리 상호 확증 파괴라는 게 덜하니 말이다.
“그건 이쪽에서도 받은 정보로군.”
린디스 제국의 대표인 알버스 황태자가 턱을 어루만지며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마치…… 전쟁을 바란 것처럼 말이야.”
실상은 마족에 눈이 돌아가 있는 미치광이 왕이 그 정보를 자세히 얻기 위해 방치한 것이다.
대륙의 성자인 내가 고작 이런 일로 소왕국을 핍박할 리 없다는 근거 없는 믿음 하나만 가지고 그것을 묵과하며 상황을 지켜본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그는 인지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내가 직접 헤탄왕국으로 가서 헤탄의 국왕에게 직접 요청했습니다. 그놈을 추적하게 해달라고.”
입에 침 좀 바르고.
“그런데 그놈이 헤탄의 왕성으로 도망쳤더군요. 그것도 왕족들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까지 숨어든 걸 확인했습니다. 헤탄 왕성에선 보여주지 않으려 버텼지만, 이쪽도 인내심이 바닥이라서 말입니다.”
밀고 들어갔더니 거기서 뭘 봤는지 알고 있나.
나는 품 안에서 기이한 힘을 풍기는 육편 조각을 갈라진 테이블 위에 던졌다.
“무슨 이유였는지 헤탄의 국왕이 어떤 생명체를 숨겨놓고 있더군요. 얼마 전 이방인들의 고향에서 이놈이 수많은 이들을 죽일뻔한 사례가 있습니다. 그때 찍어눌러 죽여버린 놈이 고스란히 부활해서 버티고 있더군요.”
그리고 그놈은 아직도 죽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일반적으로 죽여도 죽지 않고 초단이로 베어도 살아남았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지만, 초대 리치 닉스 같은 불사특성을 지닌 놈이 또 없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물론, 지금의 힘이라면 닉스조차 붕괴시켜버리는 게 어렵지 않겠지만.
“그놈은 내게 한번 죽은 경험이 있다 보니 극도로 경계하더군요. 석화되어 치유하던 몸을 버리고 폭주하여 왕성 전체를 날렸습니다. 온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헤탄의 왕성을 날려버린 겁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했습니까?”
그 말에 조용히 침묵하던 법왕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대신관이 천천히 일어나 내가 내놓은 육편에 손을 뻗었다.
“이것은…… 어찌 이리 괴이한 기운이란 말인가…….”
“괴변이오!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는 상황이란 말이오!”
“왕자께서는 내 말이 증거가 없다 하였지요.”
내 말에 그가 움찔 몸을 떨었다.
“반대로. 내가 이렇게 증거까지 내밀었는데 상황증거만 가지고 몰아붙이는 건 말이 됩니까? 내가 많이 우습게 보였나 보네요.”
“그……그것은…….”
“그럼 그놈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면 그땐 어찌하겠습니까.”
놈이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어딘가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내가 그리 확신하는 건 헤탄의 하늘에 떠오른 붉은 하늘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그 괴물 또한 당신이…….”
“이봐. 왕자.”
싸늘하게 일갈한 내가 그에게 몰아붙였다.
“지금 내가 기분이 좋지 않아. 그렇게 단순히 꼬리를 잡으려 들지 말고, 정확한 증거를 들이미는 게 좋을 거야.”
인내심이 날아가서 국제연합이고 나발이고 헤탄 전체를 지도에서 지워버리기 전에.
어차피 서로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게 현 상황이라는 입장이 팽배했다.
하지만 나는 결백을 증명할 방법은 여럿 존재했다.
하지만 이미 뭔가 씐 듯 구는 일부가 과연 그것을 보고도 납득할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니 강하게 밀고 나가는 수밖에.
공포로 주변을 짓누르면 이런 귀찮은 일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위태로운 관계를 위해 내가 지금까지 노력해온 게 아니었다.
그때. 회의장 바깥으로 열린 문 너머로 문득 기이한 냄새가 풍겨왔다.
“배교의 향?”
“음?”
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자 데이비. 그게 무슨 말이오?”
“배교의 향이 잠깐 느껴졌는데. 혹시 못 느끼셨습니까?”
배교의 향. 신실한 신자가 신을 배교했을 때 나는 특수한 기척이다. 아주 옅어서 느낀 이는 없는 듯 보였지만 분명 그것이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성기사 일부가 허겁지겁 내부로 뛰어들어왔다.
“크……큰일 났습니다. 예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