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82화
토펜느 부주교는 로암을 따라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걱정되십니까?”
이런 놈이 아니었는데.
로암 사제는 신관치고는 속에 품은 음습한 욕망이 상당한 사내였다.
그런 만큼 토펜느 부주교도 간혹 그의 사상에 동조하면서도 그를 인간적으로 좋게 보지는 않았다.
그것과는 별개로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구석도 있었다.
지금 상황과 신의 계시. 그리고, 그의 접근이었다.
“로암 사제. 대체 신께선 저희에게 어떤 것을 말하고 계신 겁니까.”
자존심이 상한다. 피조물이 감히 창조주의 의지를 시험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호기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저는 당신을 인도하기 위해 신께 계시를 먼저 받았습니다. 결론만 놓고 말하자면……. 이 사태의 원흉은 데이비 성자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토펜느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게 사실입니까?!”
“토펜느 부주교. 부주교께서는 신의 성흔을 받고도 아직도 의심하십니까?”
그 말에 토펜느 부주교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가 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짜 성자라면 그가 받은 성흔은…….”
“성흔은 신이 내린 흔적이지만 때에 따라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초대 성녀 다프네 이후로 지금껏 성녀나 성자의 존재가 드러난 적이 있습니까? 단연코 없습니다. 그것은 성흔을 받은 이들이 타락하여 역사에서 지워졌을 가능성도 있지요.”
토펜느가 조금만 노련했다면 이 말에 어폐를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성흔 때문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성흔을 받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너무 벅찬 상황에 다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성흔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모든 삶이 인정받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 사태를 그가 만들었다고요? 증거는?”
“그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지나간걸 보았을 겁니다. 그 외에도 증거는 있습니다. 다만,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시기가 좋지 않다니요!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토펜느 부주교.”
낮은 음성으로 그가 토펜느를 불렀다.
“데이비 왕자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습니까?”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제국도 함부로 건드리기 힘든 게 하인스 영지라고 들었습니다.”
고작 일개 영지의 전력이 제국이 비견된다는 소문은 좀처럼 믿기가 힘들다.
“사실입니다. 만약 여기서 수틀리면 그는 이 대륙을 파멸로 몰아넣을 겁니다. 그땐 늦어요.”
“하지만 지금 이렇게 은밀하게 움직인들…….”
“단 한 번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이 사태를 일으켜 모든 죄를 다른 존재에게 덧씌우고 얻으려 하는 게 뭔지 모릅니다. 하지만. 좋은 일은 아니겠죠.”
그래. 자신에겐 성흔이 내려왔다. 그렇다면 길잡이로 지정된 로암의 말은 신빙성이 충분하다.
토펜느 부주교가 숨을 짧게 들이켰다.
“미안하지만 가문의 힘이 있다 해도 나는 그를 직접적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선택된 이유는 그것입니다. 하찮은 존재니까요.”
“뭐…….”
“데이비 성자가 당신을 신경쓸 것 같습니까? 천만에요. 어림도 없습니다.”
그가 신랄하게 그를 비난했다.
“그렇기에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그에게 보이지 않는 빈틈을 찾아 찌를 수 있는 존재. 이봐요 토펜느 부주교. 역대 성자와 성녀들이 왜 그렇게 강대한 업적을 발현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독사 같은 혓바닥으로 토펜느를 계속해서 현혹했다.
신실한 신자이기에 성흔을 맹신하면서 생기는 빈틈을 잘 파고든 것이다.
“그것은…….”
“성흔은 신의 축복이 깃듭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내려진 성흔은 보호입니다.”
“보호?”
“네. 신께서는 당신이 가진 성흔의 힘을 이용하면 그에게 시간의 결계를 씌울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대단한 성자라도 시간의 틈 사이에 빠지면 이형의 힘을 다 무시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게 아닌 이상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가 의도대로 움직일지는…….”
“걱정 마세요. 그는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만 신께서는 그것을 쉽게 찾지 못할 거라 하셨습니다. 그가 우왕좌왕하면 그때 기회를 보고 일을 시작하면 됩니다.”
데이비가 초단이나 포식의 힘 등 여러 계열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절대 내리지 못할 결론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까지 강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그를 또다시 현혹시켰다.
“잠깐이면 됩니다. 그를 결계 속에 가둬두세요. 그동안 저는 지금 사람들의 혼을 빼앗고 있는 이 끔찍한 사태를 종식시키겠습니다. 거대한 의식인 만큼 데이비 성자도 많은 것을 걸었습니다. 의식이 실패로 돌아가면 그는 막대한 반동으로 무력화될 터. 그때 증거를 들이밀고 그를 제압할 겁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예,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성흔을 믿으십시오.”
“그렇다면…… 믿겠습니다. 제가 할 일을 자세히 알려주십시오.”
로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여신의 뜻대로…….”
그는 로암의 말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 *
“사망자는 단순사고를 제외하면 없습니다만, 몸에서 뭔가가 빠져나간 이들은 하나같이 이 상황입니다.”
리나 성녀는 주교들의 보고에 표정을 굳혔다.
넋이 나간 것처럼.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것 같은 몰골에 그녀는 눈물을 훔쳤다.
“분하네요오…… 제가 할 수 있는게 없다니…….”
이타심 하나만큼은 확실했던 리나 성녀였다.
나차 제국의 슈네리아와는 조금 다른 느낌은 분명 있었다.
“데이비 니임…… 어떻게 안될까요오?”
고서를 모두 뒤져보아도 이런 사례에 대해 적힌 것이 없는 만큼 리나 성녀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성흔을 먼저 받은 나였던 모양이었다.
“마치 혼이 빠져간 것 같아요오…….”
“혼이 나간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 사태의 원흉을 처리하면 어떻게든 답이 보일 겁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녀가 평소답지 않게 똘망똘망한 눈으로 물어오니 부담이 상당하다.
“예. 저도 확신은 안 서는데. 이들이 빼앗긴 건 생명력과 비슷한 인간 고유의 힘이니까요.”
생명력과는 다른 생명체가 품고 있는 또 하나의 무형의 에너지.
측정하거나 다루는 게 불가능한 어떤 무언가.
성녀 다프네는 이것을 두고 시간을 빼앗겼다고 표현했다. 그 부작용이 뭔지.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그녀도 잘 모르겠다고 표현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당장 이걸 빼앗긴다고 이들의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극심한 무력감. 혼란. 판단저하. 그 외에도 여러 부작용이 있는 것 같지만 일시적인 효과에 가까워.
그녀는 그렇게 설명한 뒤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며 떠나버렸다.
곁에서 서포트해줄 것처럼 말하더니, 그렇게 떠나는 그녀를 향해 내가 물었었다.
이럴 거면 뭐하러 내려와서 도와준다고 합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 또한 두루뭉술했다.
-성국 전체에 뭘 좀 준비할 거야. 어차피 내 얼굴이 괜히 알려져도 좋을 게 없으니.
그녀가 나름대로 생각이 있다면 존중해주는 수밖에.
혼란 속에서 다시금 모인 대륙회의에서 나는 내가 시간을 끌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목적을 던졌다.
마냥 숨기기만 해선 빠른 협조를 받지 못할 테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헤탄 왕국에서 내가 잡아 죽인 악마종은 과거 마족을 조종하던 존재와 함께 움직인 놈들입니다. 그중 유일하게 남은 개체인지는 나도 모릅니다만.”
잠시 말을 멈춘 나는 모여있는 시선들을 향해 말했다.
“당시 헤탄에서 벌어진 대폭발은 놈이 부활하면서 생긴 여파일 뿐이지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셨습니까?”
“하면…….”
“네. 이번 건 그때보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그러니 자잘한 문제 다 내버려 두고 이 사태를 만든 원흉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 대가리를 따버리면 자연스레 사라질 거라 여긴다.
우선적으로 놈은 초단이나 고위마법으로도 죽지 않았다.
시간에 관련된 놈의 힘이 어떤 영향을 미친 건지. 아니면 그놈에게 다른 숨겨진 수가 있는 건지는 몰라도, 놈을 삼진은 아웃이라는 걸 새겨줘야 했다.
초단이로도 되지 않는다면 포식의 권능을 이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문제는 이놈을 찾는 건데…….”
“마치 천재지변처럼 상황만 벌어졌을 뿐, 그 악마라는 존재가 있는지 확인조차 되지 않았으니까요.”
가장 심각한 문제. 정작 성국이 난장판이 되었음에도 대체 어디서 이런 의식이 벌어지고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에 나는 짧게 혀를 찼다.
“진짜 이 수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자 알버스 황태자나 율리스 등 다른 이들이 나를 본다.
그리고, 자주 에반젤린의 레어에 놀러 가던 율리스는 내가 뭘 하려고 하는지 눈치챈 듯 보였다.
“데이비…… 설마…….”
“예. 어지간해선 하고 싶지 않았는데. 별수 없겠네요.”
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허공에 손을 부드럽게 그어 내렸고. 허공을 찢었다.
“악마 새끼 찾는다는데 어쩔 수 있나.”
허공을 찢고 공간을 넘어선 나는 성큼성큼 대상이 있는 방으로 향했고 간단한 노크 후에 바로 문을 열어젖혔다.
컴퓨터 앞에 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비명을 지르며 춤을 추고 있는 에반젤린을 볼 수 있었다.
“…….”
내가 이런 실수를 하네.
에반젤린은 어린아이가 아닌 만큼 그녀의 사생활을 지켜줘야 하는데. 간단히 노크했다고 벌컥벌컥 들이민 꼴이었다.
반사적으로 에반젤린이 엄청나게 화를 내며 나가라고 소리칠 것을 예상하고 어떻게 변명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찰나였다.
“아빠!!! 사랑해요!!”
갑작스런 비명과 함께 그녀가 얼굴에 화색을 띠며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어 내 품에 매달리듯 안겼다.
“에반……젤린?”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잠시 뇌의 연산이 정지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매번 술 냄새난다. 아빠 싫다. 라며 툴툴거리던 그녀가 이렇게 내게 안겨드는 건 상당히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
-아니 이걸 이렇게 런각을 본다고?
-방장 뭐해! 내기가 장난이야?!
슬쩍 고개를 돌려 채팅 로그를 빠르게 훑으니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컴퓨터의 한켠에는 잘하지도 않던 RPG 게임의 화면이 켜져 있는게 보였다.
“에린아. 너 내기했니?”
“아빠! 일단 나중에 이야기하고 나가요! 내가 다 사 줄게!”
계속해서 내 몸을 밀치며 빨리 같이 나갈 것을 종용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대충 상황짐작이 되었다.
내기하다가 시청자에게 패배한 뒤로 수치가 가득한 춤을 출뻔했다가 내가 나타나자마자 도망 각을 잡은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싶지만 반대로 이런 모습을 보여준 저들에게도 고마움이 느껴졌다.
“그래. 뭐 어때. 딸자식 애교도 보고 좋네.”
피식 중얼거리자 채팅창에 빠른 물음표들이 도배되기 시작했다.
“에반젤린. 지금 조금 급한 일이 있는데. 네 힘이 필요할 거 같거든? 방송 멈출 수 있을까?”
“응? 아아. 방송한 지 아직 한 시간밖에 안 됐는데…….”
그녀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말하자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 안 오면 티오니스에서 몇 명이 죽어 나갈지 몰라.”
자세한 정황을 묻지도 않고 그녀가 돌아선다.
“여러분들. 방송 여기서 종료해야 할 거 같아요.”
-어……어어? 벌써간다고?
-엄마 여기 추워…….
-여기 어디야? 너무 어두워…….
-미친놈들아 그만해. 방장 어여 다녀오셈. 사람 목숨 걸린 일인데 방송이 중요하나.
-올 때 메로나.
다행인지 상황을 이해한 대다수의 시청자들이 수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평소 에반젤린이 이미지 관리를 잘했다는 뜻이리라.
이렇게 보면 그녀는 정말로 방송 체질인 게 아닐까.
고개를 돌려 보니. 시청자 수가 20만에 가깝다. 게임을 하면서 시청자가 늘었다더니, 상당수는 외국인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여러분 바이. 그럼 나중에 다시 봐요.”
-다음에 오면 내기 벌칙 수행하는 거 알지?
“뭐래. 내기는 그때그때 끝내야죠. 다음 기회에~”
-양심이 죽으신 듯.
결국, 내기의 벌칙을 수행하지도 않은 채 방송을 종료해버린 에반젤린은 숨을 짧게 들이켠 뒤 안도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에 나는 말 없이 허공을 찢어 열었고, 그녀를 데리고 성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그 새끼!! 그 새끼가 살아있어!!”
성국에 발을 디디기가 무섭게 에반젤린이 격분하며 폭발적인 기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악마종과 고대룡은 대체 왜 이렇게 극상성인 것일까.
놈이 숨는데 도가 텄다 한들, 에반젤린에게선 절대 도망칠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