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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287화 (1,287/1,559)

제 1287화

토펜느 부주교는 자신과 손을 잡은 로암 사제를 따라 움직였다.

성흔을 얻었다. 성자였으나, 성흔의 자격을 빼앗기고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데이비 올 라운 왕자.

적어도 토펜느 부주교가 보기엔 그는 성자로서의 자격은 없는 남자였다.

그를 미워한다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엘리트 교육 코스를 밟아온 토펜느 부주교에게 있어서 성국의 사제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그의 인생의 진리나 다름없었고, 그런 진리와 전혀 다르게 움직이는 데이비 왕자의 행동은 도저히 성자로서 이해할 수 없는 분야였다.

물론, 그래도 성흔을 가지고 있으니 안 보는 곳에선 다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번 성국 사태에서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어디론가 가버리는 것을 본 뒤로 그는 정말로 그가 성자로서 자격이 있는 인간인가 의문스러웠다.

로암 사제와 토펜느 부주교. 현재 그들은 고신전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성국의 상징과도 같은 성역은 보통 성국민이라도 볼 수 없지만, 출입이 엄금된 특수한 결계가 쳐진 고신전은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 프리아 여신님의 기적이었다.

그런 기적의 결계가 쳐진 고신전이 현재 붉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성자 데이비 올 라운이 들어간 뒤로 더욱더 심해진 끔찍한 느낌이 드는 붉은 안개였다.

“저걸 보시죠. 그가 들어간 뒤로 저 끔찍한 안개가 더욱 짙어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흔을 되찾기 위해 지금 성국의 고신전을 더럽히고 있는 겁니다.”

이미 성흔으로 인해 반쯤 세뇌가 끝난 토펜느 부주교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감히…… 성국의 유구한 역사를 담당한 고신전을…….”

“시간이 없습니다. 당신의 성흔을 이용하면 데이비 왕자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의 힘을 순간적으로 약화시켜주세요.”

그 말과 함께 그의 손목에 생겨난 성흔이 옅게 공명하기 시작하자 토펜느 부주교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고신전을 감싸던 붉은 안개가 흔들리기 시작하며 토펜느 부주교의 신성력에 이질적인 성흔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것은 분명 데이비의 것이 분명하다!

결단을 내리기가 무섭게 그가 크게 기도를 읊었다.

“자애로우신 태초의 빛이시여, 감히 청하옵건대…….”

동시에 그의 주변으로 엄청난 크기의 마법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만든 것인가.

스스로도 놀라면서 이토록 신성한 마법진을 만들어낸 것에 대해 그가 경악스러워하던 순간.

저 멀리서 다수의 인영이 급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뭐 하는 거야!! 당장 멈춰!!”

그 정체는 다름 아닌 하인스 영지의 신성학 교수로 있는 앨리스 대주교였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토펜느 부주교가 가장 존경하던 인물. 그런 그녀가 인상을 험악하게 구긴 채 달려와 그가 만들어낸 마법진 밖에서 소리를 질렀다.

“당장 멈춰! 뭐 하는 짓이야!!”

“신의 뜻대로…….”

“무슨 개소리야! 여신의 뜻이 왜 이런 끔찍한 마법의 발현인데!”

그녀의 행동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신성한 의식을 진행하는 자신을 막는 것일까. 분명 자신이 만든 마법진은 그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신성함 그 자체가 느껴졌다.

그런데 자신을 믿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만 다급하게 자신을 말리는 앨리스 대주교나 다른 고명한 사제분들의 표정이 워낙에 심각한 터라 그의 마음속에 한켠의 불안감이 서렸다.

“의심하지 말지어다.”

그때,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다름 아닌 로암 사제였다.

그는 마치 홀린 것 같은 얼굴로 사제들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그에게 속삭였다.

“믿으십시오. 빛은 당신의 편입니다. 저들은 그래봐야 여신을 모신다고 말하는 존재들. 성자 데이비 올 라온에게 속아 넘어간 어리석은 양들일 뿐입니다.”

“…….”

“자. 어서. 어서!”

그의 외침에 토펜느가 눈을 감았다.

“이봐, 젊은 사제님. 당장 멈춰. 지금 후회할 짓 하는 거야.”

앨리스 대주교가 위협하듯 말하자 토펜느 부주교는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여신께서 함께하심이니, 태초신의 의지를 의심하지 마라…….”

“저 미친놈이!!”

그 말과 함께 토펜느 부주교의 마법이 완성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토펜느 부주교의 몸에서 엄청난 탈력감이 일며 그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 돌아버리겠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틀린 것은 신의 뜻을 모르는 저 멍청이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토펜느 부주교는 문득 자신의 손에 있던 성흔이 시커멓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이게…… 무슨?”

동시에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가던 신성력이 자신이 알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무슨?”

신성력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것은, 자신이 역겹다고 느꼈던 붉은 안개의 것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으윽…… 으으으윽?!?!”

동시에 엄청난 통증이 그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고, 이내 사방에서 엄청난 수의 희끄무레한 것들이 날아올라 붉은 안갯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건 대체…….”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의 몸이 검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신성력이 오염되기 시작한 것이다.

“말도 안 돼…… 나는 분명!”

자신은 틀리지 않았을진대,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 주변을 황급히 둘러본 그의 입이 벌어졌다.

처음엔 일반시민들의 몸에서만 빠져나가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인을 넘어 어지간한 신성력을 지닌 존재들도 모조리 빼앗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희끄무레한 것들을 빼앗긴 이들은 무력감에 시달리듯 쓰러져 나갔다.

그나마 멀쩡한 건 앨리스 대주교를 포함한 고위 신관분들뿐이었다.

신성 마법으로 방어해도 빠져나간다. 방어 자체가 소용이 없는듯한 모습이었다.

“로……로암 사제!! 대체 무슨…… 이게 대체!”

자신이 믿은 순백의 신성력이 끔찍한 무언가로 변하고 성흔도 사라졌다.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가 붙잡을 수 있는 동아줄은 로암 사제뿐이었다.

하지만 로암 사제는 그의 기대를 철저히 배신했다.

스르릉…….

푸욱!!!

어디서 꺼낸 건지 모를 검은 칼을 이용해 토펜느 부주교의 몸을 꿰뚫어버린 그가 기괴하게 웃어 보였다.

“아아…… 고맙습니다. 토펜느 부주교. 당신 덕분에 계획이 완성되었어요.”

그 말과 함께 고신전의 붉은 안개가 요동치기 시작했고 이내 파스스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팔에 상처를 입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성자 데이비 올 라운과 그의 딸이라 알려진 에반젤린 올 라운. 그리고 리나 성녀와 처음 보는 남자였다.

“…….”

이 일은 데이비 왕자가 저지른 일이라면서.

그런데 저 괴물은 대체 뭐고. 왜 그들이 싸우고 있는가.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던 찰나.

로암 사제가 스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토펜느 부주교. 신실한 신자가 신께 받는 애정이라는 건 참 무섭습니다.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죠.”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피를 울컥 토해내며 그가 로암 사제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엘리트. 비록 어리석다곤 해도 몸에 품은 신성력은 정순했고, 많았지요, 여신께서 당신을 많이 아꼈다는 뜻입니다. 그 탓일까요.”

로암 사제의 눈에 광기가 번들거렸다.

“저 혼자선 빨아들일 수 없었던 성국 인간들의 시간을 가리지 않고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저기 쓰러진 고위 사제분들까지 말입니다.”

인간들의 몸에서 빠져나가던 희끄무레한 것들. 그것들이 데이비 성자의 짓이라 여겼건만, 진실은 잔인하게도 그 범인이 그라고 지목하고 있었다.

“대체…… 대체 왜! 당신이 무슨 이유로!!”

그의 발악적인 외침에 로암 사제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라고 못할 건 뭡니까.”

“뭐……라고?”

“나라고 대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보세요.”

그의 손에 엄청난 힘이 느껴지는 검은 구체가 생겨났다.

“이렇게 힘이 내 손에 들어왔는데. 지금 나는 단신으로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가 된 겁니다. 나도 이제 데이비 성자처럼 막대한 존재감을 가지게 된 거라 이 말입니다. 당신 덕분에.”

“로암……로아아암!!! 지금 나를 속인 것이냐!”

토펜느가 검에 찔린 채 발악하자 로암은 손가락을 튕겨 그를 허공에 띄워 올렸다.

그리고는 검붉은 빛이 띠는 빛의 기둥 속에 그를 가두었다.

“이런 너무 화내지 말고 기다리세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아직 남았습니다.”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는 건가?”

“예, 데이비 성자는 어차피 나와 계약한 저자가 치워줄 테니 이제 전 대륙에서 나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게 될 겁니다.”

질투심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변화는 그 사람이 품고 있는 깊은 욕망이 무엇인가에 따라 완전히 달라졌다.

“어째서…… 어째서 성흔과 신성력이…….”

토펜느 부주교는 사실 그것이 제일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느낀 것은 분명 성흔이었고, 신성력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것 일까.

“당신 또한 나와 같습니다. 그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고, 이 번 일로 인해 그에게 크게 실망했죠. 경험이 부족하고 자만심에 쩔어있던 어리석은 당신이었기에 이렇게 된 겁니다.”

“네놈에게 신의…… 신벌이 떨어질 것이다!!”

“신벌? 웃기는군.”

피식 웃은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봐야 변하는 건 없는 법이지. 토펜느 부주교, 당신의 그 뒤틀린 질투심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된 덕분에 나와 계약한 저 존재가 건 환각에도 쉽게 속아 넘어간 것뿐.

성흔도, 성흔으로 인해 생긴 신성력도, 신의 계시도 그가 직접 보고 느낀 것들 전부 가짜, 환각이었다는 말에 토펜느 부주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잘 보라고, 이게 당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니까. 1등 공신인 당신은 직접 봐야지. 나는 당신에게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 당신이 노력해준 덕에 저 존재가 내게 엄청난 힘을 주었거든. 이 힘을 지니고 있으면 나는 절대 죽지 않아.”

그 말에 토펜느 부주교의 얼굴에 절망이 서렸다.

그때였다.

희끄무레한 것들을 먹어 치우고 엄청난 힘을 뿜어내기 시작하던 악마에게 데이비가 조소를 흘렸다.

동시에. 새하얀 빛의 기둥들이 그의 주변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 * *

일리나 데 팔란.

신성하다 싶을 정도로 깊은 기운을 풍기는 백은의 거검을 한 손에 내리 세운 채 빛의 기둥 속에서 걸어 나온 그녀는 시선을 살짝 낮게 내리깔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가 풍기는 기세는 예전처럼 폭발적인 느낌은 없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칼이 들이 밀어진 것 같은 서늘함이 보였다.

“데이비…… 다친 거야?”

일리나는 가장 먼저 데이비의 팔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에 데이비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새끼가 날 때렸다.”

사실은 데이비 홀로 힘을 부하시켜서 만든 내상에 불과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 한마디에 일리나의 이마에 혈관이 짧게 돋았다.

“저 애들도?”

“그래. 온전한 신격을 지니고 있어서 내가 저놈을 죽일 수가 없거든.”

그 한마디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말했다.

“언니. 움직임만 막아줘요.”

그 말과 함께 허공에서 거대한 흑빛의 창이 내리꽂히며 그를 향해 낙하했다.

이에 악마종이 황급히 고신전의 주변을 박살 내듯 힘을 방출하며 그 힘을 쳐내려 했다.

-푸스스스 같잖은 수를!

하지만 그의 행동은 갑작스레 움직이기 시작한 그림자가 그의 행동을 제약하면서 강제로 멈춰졌다.

쩌엉!! 쩡쩡!!

결국 낙하한 검은 창은 그의 몸에 꽂혀 들어갔고 그는 괴로운 괴성을 토해냈다.

동시에 빛의 기둥 속에서 요시아와 페르세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시아가 그림자를 조작해 놈의 움직임을 막고 페르세르크의 마법이 그의 몸을 꿰뚫은 것이다.

말없이 데이비의 곁으로 다가오는 두 사람을 보며 그가 악마종을 비웃었다.

“넌 실수한 거야.”

-웃기는 소리. 신격조차 나를 어찌할 수 없다. 네놈이 아닌 이상 나를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보는가. 고대룡 이클립스라도 데려오지 않는 이상…….

그가 분개하며 제압당한 팔을 움직였다.

콰창!!!

동시에 단단해 보이던 검은빛의 창 일부가 깨져나갔고, 그의 손끝으로 막대한 시간의 힘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푸스스스. 뭔가 착각하고 있군.

그 말과 함께 악마종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힘이 주변을 비틀어버리기 시작했다.

-여신의 축복을 물려받지 못해 필멸의 한계조차 넘지 못하는 피조물 따위가 감히 넘볼 수 있는 권능이 아니다.

그의 말과 함께 주변의 모든 시간이 제각각 비틀리듯 무너져 내렸다.

-영원히 내게 닿지 않는 시간의 틈 속에 갇히게 되리라.

그는 자신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그의 권능은 가히 경이적인 힘 그 자체였고, 그것을 막기 위해선 온전한 신격 정도는 되어야 막아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여신과의 오래된 약속이 온전히 적용받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에게 있어서 데이비의 힘은 더 이상 그에게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는 상황.

필멸의 한계조차 넘지 못하는 다른 이들이 감히 그를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고삐가 풀려버린 그의 힘은 페르세르크와 요시아의 힘을 순식간에 비틀어버렸고, 시간의 굴레 속에서 비틀려버린 그녀들의 힘을 순식간에 파훼시켜버렸다.

상처가 빠르게 재생되자 그는 만족스러운 듯 가장 가까이 있던 에반젤린과 아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너를 제외한 존재는 고작해야 이 정도일 뿐이다. 머릿수가 늘어난다 한들 네놈의 힘이 내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이상 어떤 수단도 나를 어찌할 방도가 없음이니.

그의 말과 함께 시간의 힘이 아벨과 에반젤린을 휘감듯 감싸기 시작했다.

-그 틈 속에 빠진 자는 영원히 격리된 시간 속에서 미쳐갈지니.

그는 데이비 올 라운이라는 존재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승리를 장담한 듯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일리나.”

페르세르크의 중얼거림과 함께 백은의 거검을 들고 있던 일리나가 한 발 내디딘다.

동시에 양손으로 거검의 그립을 쥔 그녀의 눈에 섬뜩한 기류가 서림과 동시에 백은의 거검, 칼디라스가 허공을 찢어발겼다.

[시공격검]

[일도양단]

쩌억!!!!

순식간에 비틀린 시간선과 그로 인해 격리된 공간이 잘려 나간다.

그리고, 자신의 힘을 맹신하고 있던 악마종의 몸이 반으로 잘려 나갔다.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아니었으나 타격은 상당했다.

-이……이게 무슨?

그는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데이비가 일리나와는 절대 부부싸움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다.

여신에게 받은 권능이 잘려나간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보고 있는 그를 향해 데이비가 비웃듯 말했다.

“시공겪검은 시간과 공간에 간섭하는 검술이거든.”

다른 말로 하면 일리나는 그야말로 여신의 약속이 이행되고 있는 악마종의 유일한 하드 카운터나 다름없었다.

당황한 악마종이 흠칫 놀라 물러나려 했다.

어떻게 만들어낸 기회인데. 신격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게 그였다.

그런 마당에 여신의 약속으로 인해 신격이 그의 몸에 영향을 줄 수 없게 된 이상 사실상 그를 막을 존재는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신격도 아닌 존재가 감히 권능을 베어버렸다라고 말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그런 혼란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일리나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아……안돼!!!

쩌억!!!

허공을 내리긋는 거검의 일검에 그가 만들어낸 무수한 시간의 틈이 일순간 붕괴하고 갈라진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날아든 검은 다시 한번 그의 몸을 베어버렸다.

터엉! 텅텅텅!!!

뒤이어 검은빛의 창이 또다시 허공에서 나타나 틈이 생긴 그의 몸에 낙하했고 그를 꿰뚫으며 그 자리에 고정시켜버렸다.

-캬아아아악!!!

그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의 몸을 지켜주던 시간의 힘이 일리나에 의해 무력화 당해버린 탓에 그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데이비를 어찌하기 위해 무리하게 공간을 해제하고 힘을 빨아들인 것은 좋은데. 그 때문에 정작 데이비 올 라운보다 더 위험한 존재를 불러온 꼴이었다.

-고작 이런 것을 하나 막았다고 하여 나를 어찌할 것 같은가! 네놈들과 달리 나는 여신의 첫 아이 중 하나! 고작 이런 것으로 온전히 나를 막을 수 있다 생각지 마라!!

그의 몸에서 시간의 힘을 제외한 환각의 힘까지 뻗어져 나온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악마종을 위협하는 건 비단 일리나나 요시아. 페르세르크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꺼림칙한 힘이네.”

동물형 잠옷을 입고 있는 점순이와 가죽 표지의 책을 끌어안고 있는 베르단데가 동시에 손을 뻗어 그의 권능을 자신들의 힘과 정면으로 충돌시켰다.

셋 모두 계열이 다른 힘이지만 한가지는 같았다.

환각을 다루는 힘.

비현실이든 환각이든 그 모든 것의 굴레는 같았다.

비록 완전히 막지는 못해도 충돌을 일으키는 것으로 상쇄하는 건 어렵지 않다는 뜻이었다.

악마종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적어도 이쪽에 대해서 조금 더 면밀히 조사했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다.”

물론, 그에게 조력하던 로암 사제가 그것을 알 리 만무했지만 말이다.

데이비는 무너진 고신전의 바깥쪽에서 멍한 얼굴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로암 사제와 칼에 찔린 채 허공에 고정된 토펜느 부주교를 시선에 담았다.

궁지에 몰린 악마종은 점차 압박해오는 이들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흐…… 흐흐흐흐…… 흐흐흐흐…….

마치 실성한 듯 외치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외통수에 몰린 그였다. 데이비의 힘이 아닌 일리나의 힘에 노출되면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그가 발악하듯 외쳤다.

-어찌 나를 이리 헌신짝 버리듯 버린단 말이오! 나의 어머니시여! 당신에게 나는 그저 버려진 불량품에 불과했나이까!!

처절한 절규가 서린 남성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여신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우리가 바란 것은…… 그저 당신의 관심과 사랑뿐이었거늘…….

자신들을 두고 떠난 여신은 다른 곳에 완전한 세상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새로운 자식들을 만들어냈다.

버려진 적이 없는 배부른 놈들.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여신만을 기다리다 부르짖으며 사라져간 동족들이 아직도 기억 속에서 강하게 남아있는 그였다.

반면 이 땅의 생명체들은 그런 슬픔 따위는 모른 채 제 욕심만을 채울 뿐이었다.

그 증오가 지독한 원한이 되어 주변을 휘감자 일부는 그 섬뜩함에 질린 듯 입을 조금 벌릴 정도였다.

-좋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우리를 마지막까지 버리고자 한다면. 나는 끝까지 당신에게 저항할 겁니다.

남성, 악마종의 처절한 절규와 함께 그가 손을 뻗어 허공에 떠오른 토펜느 부주교를 향해 말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 나를 위해 바쳐라.

“내가…… 내가 대체 무슨짓을……. 으윽?! 커헉! 무슨 짓을!?

허공에 묶인 채 멍한 얼굴로 자책하고 있던 토펜느 부주교가 격하게 고통을 호소하며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네놈을 이용해 모든 것을 엎을 것이다.

무슨 수단을 사용한 건지 몰라도 일개 부주교인 토펜느의 몸에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는 악마종 때문에 일리나가 다시 검을 들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토펜느에게 가해지던 힘은 갑작스레 빛을 내뿜는 무언가가 그의 몸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는 것을 보며 강제로 멈춰졌다.

-저…… 저게 무슨?!

“이……이건…….”

토펜느 부주교에게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그와 부딪혔던 교구장 옷을 입고 있던 여성.

그녀가 준 물건이었다.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막대한 신성력을 내뿜어 그의 힘에 저항하고 토펜느 부주교를 정화시키던 성물이 완전히 악마종의 힘을 끊어내 버리자 로암이 황급히 달려들어 검은 단검을 토펜느에게 찔러넣으려 했다.

“아……안돼! 이렇게 무너질 순 없다!”

다급히 외치는 로암의 검이 그에게 닿으려던 그 순간.

콰앙!!!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새하얀 토끼가 그의 몸을 제압해 바닥에 처박아버렸다.

뀨.

생긴 것 답지 않은 울음소리를 내며 빨간 눈동자를 굴리는 토끼를 보며 악마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귓가에 무언가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거봐. 여신은 결국 우리를 버렸다니까. 네놈이 끝까지 믿고 기다린 여신에게 우리는 버려지는 폐기물일 뿐.]

익살스러운 말투가 그의 뇌리를 휘저어놓았다.

이에 일리나가 검을 휘둘러 놈을 끝장내려던 그 순간.

악마종의 몸 안에서 엄청난 양의 붉은 안개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안갯속에서 흘러나온 연기의 형체가 일리나의 검을 정면으로 막아내며 그녀의 공격을 상쇄시켰다.

-어떻게…… 분명 죽었을 터인데…….

그 모습을 본 악마종 또한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엔 뇌리에 울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선전포고를 하는듯한 울림이 사방에 퍼져나갔다.

-편히 가게, 나의 동족, 우리를 버린 여신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이제 우리가 이어받도록 하지. 자, 고마움을 모르는 배부른 피조물들과 전쟁의 때가 밝았다.

-아아, 여신이시여, 보고 계시나이까. 당신의 아들딸들이 돌아왔소.

그 목소리와 함께 악마의 몸에서 대량의 무언가가 빠져나와 하늘 저편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몸 안에 오랜 시간 숨어있었던 것처럼 그 형체들은 일순간 그의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사라져버렸고. 홀로 남은 악마는 공허하고 죽어가는 눈으로 무릎을 꿇은 채 힘없이 웃었다.

-아아…… 나의 동족들, 그곳에 있었구나. 그곳에서 오랜 시간 나를 통해 슬픔을 겪고 원망해왔구나.

그리고는 데이비를 향해 말했다.

-여신의 실패작인 우리가 네놈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네놈이 우리를 죽일 수 없는 이상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을 다 불러 모아야 할 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 우리의 목표는 이미 이루어졌음이니…….

후련함과 슬픔이 서린 목소리였다.

-아아, 여신이시여 보고 계시나이까. 당신이 버린 아들딸들의 최후를.

몸 안에서 모든 것을 빼낸 악마종은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듯 천천히 쓰러지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승리를 환호하지 못했다.

그들의 목소리에 서린 절규와 슬픔. 원한. 그리고 회한이 무겁게 마음을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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