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88화
악마종의 몸에서 대량의 무언가가 빠져나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붉은 하늘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상황의 종식을 선언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귀가 있는 이들은 전부 들었기 때문이었다.
악마종과 같은 무언가들이 대량으로 튀어나와 전쟁을 선포하며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담고 있던 악마종 하나의 존재는 이제 중요치 않았다.
스르릉…….
쩌억!!!
뒤늦게 일리나가 검을 휘둘러 빠져나가던 검은 형체 중 일부를 베어버렸으나 이미 많은 수가 사라진 후였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은 깊게 둘 것도 없었다.
악마종이 본디 티오니스에서 온 놈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코오나…… 코오나 누님!!”
그때 내 귓가에 다급한 아벨의 외침이 들려왔다.
실제로 아벨은 코오나와 함께 이곳으로 돌아왔다가 붉은 안개에 휘말렸다.
아벨은 금방 찾았지만, 코오나는 그러지 못했다.
시공간을 왜곡시키는 그 안에서 코오나가 사라져버렸으니 아벨이 당황하는 건 당연했다.
악마의 존재를 먼저 깨닫지 못했을 땐 사고에 휘말려서 혼수상태가 되더니.
이제는 시공간의 왜곡에 빠져든 모양새가 아닌가.
주변을 둘러보다 절망하는 아벨의 모습에 에반젤린은 현 상황을 모름에도 우물쭈물하며 눈치를 살폈다.
“안돼…… 안돼! 안돼!!”
급기야 아벨은 이성을 놓았는지 황급히 일어나 고신전의 잔해를 뒤져보려 했다.
아마 시공간에 빠진 게 아니라 무너진 고신전의 일부 어딘가에 매몰되었기를 차라리 바라는 느낌이었다.
조금 다칠지라도 아예 찾지 못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그만큼 아벨은 자신의 몸조차 돌보지 않았다.
“제발…… 제발 대답해줘요!”
필사적으로 잔해를 뒤지는 그의 행동에 에반젤린이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만해 멍청아! 여기 그녀는 없어!”
“놔! 어떻게 보호했는데! 내가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왔는데!!”
“아벨!!”
“한 번이면 충분해 두 번은 잃을 수 없습니다!”
눈시울이 충혈된 채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잔해를 파헤치던 그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아아…….”
결국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켜준다고 약속했는데…… 이렇게…….”
다른 방법을 썼음에도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슬픔이 그를 잠식했다.
미래에 그와 코오나가 어떤 연을 맺었는지는 모른다.
사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조합이기에 더욱 당혹스럽긴 했지만, 한켠으로는 아벨이 나쁘게 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씁쓸함이 몰려왔다.
자세한 정황은 모르지만, 아벨의 그런 슬픔을 느낀 것일까.
그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운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당연히 상황이 궁금한 이도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결국 참지 못하고 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널 찾는다고 저러고 있나 봐.”
내 대답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저를요?”
“그래. 아벨과 함께 휘말…… 너 뭐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무난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코오나가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코오나를 발견하지 못한 아벨은 허탈함을 숨기지 못한 채 슬퍼할 뿐이었다.
텁!
이에 나는 코오나의 등을 떠밀었다.
“가서 달래줘라.”
“저 사람 대체 누군가요?”
“누군지도 모르고 따라온 거냐?”
“적어도 같은 편인 건 알고 있었어요. 이번엔 저도 도움이 되려고 같이 따라온 것 뿐이긴 한데…….”
내게 대답하던 코오나는 갑작스레 충혈된 눈으로 벌떡 일어나는 아벨을 보고 흠칫 놀랐다.
“아……아아……”
동시에 아벨이 신음을 흘리며 휘청거리더니 후다닥 달려와 그대로 코오나를 끌어안았다.
“아…… 다행이다……. 아아…….”
그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코오나가 그를 밀어내려 한다. 그러면서도 내 눈치를 살핀다.
왜 나를 봐.
마치 이건 아니라고, 오해라고 말하듯 눈동자가 미친 듯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코오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벨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 꼭 끌어안고 침묵했다.
이에 내가 대신 물었다.
“어디 있었던 거야.”
“그게…… 신전 근처에서 안개에 휘말리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갇혀서…….”
그건 알고 있었다.
“빠져나온 건가?”
“해태가 알려주는 대로 걷다 보니…….”
“아…….”
생각해보니 코오나를 사역인으로 거두고 있던 게 시간의 용 아비트였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때의 잔향이 남아 해태가 시간의 균열 틈 사이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다행이네.”
다행히 휘말렸던 코오나도 되찾았다.
당장 죽어버린 악마종의 몸에서 빠져나온 놈들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놈들도 당장 대륙을 침공할 순 없으리라.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성기사단에게 포박된 로암 사제와 토펜느 부주교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죠?”
“나도 모릅니다. 다만, 저놈이 행한 의식이 성공하기라도 했는지 저런 놈이 다량 쏟아져 나왔어요. 대륙 어딘가에 둥지를 틀고 전쟁을 준비하겠죠.”
이 사태의 원인은 이 두 놈에게 있다.
겁에 질린 채 와들와들 떨고 있는 로암 사제와 정신이 나가버린 것처럼 멍하니 있는 토펜느 부주교를 보던 내가 물었다.
“나를 성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더니. 그래서 이런 일을 저질렀나?”
“…….”
“네 덕분에 조용히 끝날 일이 대륙급 전쟁으로 번졌다.”
무감각한 내 목소리에 토펜느 부주교의 몸이 흠칫 떨렸다.
“자세한 일은 성국 내에서 조사할 거예요. 그보다 리나 성녀님은 괜찮으신가요?”
“네에……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데에…….”
리나 성녀는 리나 성녀 나름대로 풀이 죽은 기색이었다. 애초에 나를 증언하기 위해 따라왔다곤 해도 그녀 또한 성흔을 지닌 공식적으로 두 번째 성흔 보유자였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 풀이 죽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성녀님을 모셔라! 성기사단은 죄인을 압송하라! 그리고 저기 쓰러진 괴물을 봉인하여 이송하라!”
뒤늦게 성기사단이 투입된다.
“저 시체는 그냥 둬도 됩니까?”
“가져간다고 별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알아서 처리하라 하세요. 일단은 좀 쉬고 싶네요.”
진실을 요구하는 에반젤린의 시선도 한몫하지만. 나는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여신을 만나야겠습니다.”
“만나도 다를 건 없을걸?”
“그렇다고 그냥 손가락 빨고 있을 수는 없죠.”
교구장의 의상 위로 후드를 덮어쓰고 있던 다프네가 후드 자락을 살짝 올렸다.
“그래서. 저놈은 왜 살려 준 겁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저놈, 죽일 거야?”
“뭐, 내가 손댈 필요 있습니까? 성국의 입장에서 저놈은 엘리트 가문이고 뭐고 국가 전복을 노린 중죄인이 되었는데. 가만히 둬도 이단심문관들이 아주 이를 박박 갈 겁니다.”
당장 이단심문관들이 들이닥쳐서 그를 처형하라 외칠 것이다.
“네가 나서면 살릴 수는 있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로암도 그렇지만 토펜느 부주교 하나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는데.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놈이 의식을 진행한 덕분에 일리나를 불러온 것은 잘된 일이지만 그 결과로 놈의 몸 안에 숨어있던 것들까지 튀어나왔다.
단호하게 답해주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말리지 않을게. 여신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 * *
단순히 헤탄 왕국에서의 일로 시작된 국제회의는 이제 단순히 소왕국 하나의 스케일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성국을 뒤집어엎은 존재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되는 존재가 상당수 전쟁을 선포하며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이 상황에서 더 이상 하인스 영지나 데이비 올 라운을 물고 늘어질 수 있는 이가 없음은 분명했다.
로암 사제와 토펜느 부주교는 곧바로 성기사단에게 포박되었고 개편된 이단심문회쪽으로 넘어갔다.
뭐라 해도 이번 사태는 배교, 말 그대로 이단 그 자체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가장 먼저 피해를 본 것은 헤탄 왕국. 그 뒤로 오랜 시간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성국이다.
당연 이번 사태가 끝나지 않았음을 직감한 삼제국과 수많은 국가가 긴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영지로 돌아와 상처에 붕대를 감고 있는 아벨을 멀찍이서 보고 있던 에반젤린이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쟤가 미래에서 온 아벨이라는 거잖아. 코오나 언니 때문에.”
코오나 본인에게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아벨이 지금 요람에서 자고 있는 갓난아기라는 사실이나 이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녀가 나중에 아벨과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렸다간 어떻게 변해버릴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코오나도 아벨이 아벨일 뿐 다른 것에 대해 알진 못했다.
“완전히 폭풍전야네…… 이게 무슨 상황이람…….”
에반젤린은 아벨이 팔을 걸치고 기대고 있는 테라스로 걸어 나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누님.”
“…….”
에반젤린은 괜히 머쓱해진 기분을 숨기며 그의 옆 난간에 몸을 살짝 기댔다.
비록 지구 쪽에서 오래 생활하고 있다곤 하지만 이곳은 그녀의 집이었다.
“그놈들. 헛소리를 한 건 아니겠죠.”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아벨이 옆에 놓인 와인잔을 꺼내 들었다.
“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서 술을 마시는 거야!”
“제가 성년이 넘었는데요.”
담담하게 대답하는 아벨의 모습에 에반젤린이 인상을 찡그렸다.
“내 동생이 어쩌다가 누나 말에 토를 달게 된 거지…….”
절로 웃음이 나오는지 그가 킥킥 웃어 보였다.
“돌아가기 전에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세상일이라는 게 쉽지 않은가 봅니다.”
“언제까지 남아있을 수 있는데?”
“길어야 하루에서 이틀이겠죠.”
그 후에 아벨은 돌아가야 한다.
“그때부턴 정말로 지금 어떤 결과가 나오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질 겁니다.”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코오나 누님을 그 지경으로 만든 놈이 사라졌으니 혼수상태에 빠지진 않겠지만.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나쁜 미래가 올 수도 있을 겁니다.”
그의 얼굴에 침울함이 감돌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손을 대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 넌 잘한 거야. 그놈을 그냥 두면 뭐 미래가 달라질 거 같아?”
에반젤린의 독려에 그가 쓰게 웃었다.
“한잔 받으실래요. 누님?”
“나 아직 성년 아니거든?”
“아, 그러네요. 워낙에 한결같은 분이셔서…….”
“그놈들. 악마종과 같은 조건이면 아버지가 어떻게 할 수 없겠죠?”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 방송하다 이게 뭔 난리람…….”
에반젤린이 어깨에 앉은 레인보우 슬라임을 콕콕 찌르며 투덜거렸다.
“아, 누님. 미래에 방송 망하십니다.”
“뭐?!”
“구라에요.”
퍼억!!
망설임 없이 아벨의 엉덩이를 걷어차 버리자 그 막대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가 난간 아래로 튕겨 나가 떨어져 버렸다.
“장난칠 게 있고 없는 게 있지.”
“후우…… 성격 불같으신 건 똑같네요. 게임 못하시는 것도.”
“야. 나 잘하거든?”
“허. 그러세요? 근데 누님.”
“왜.”
아벨 올 라운.
게임에 상당히 관심이 많은 일리나와 같이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물론, 방송을 하는 에반젤린 또한 많은 게임을 하는 만큼 기본적인 피지컬은 좋은 편이었다.
그러면 무엇하랴.
에반젤린 올 라운과 아벨 올 라운의 대전게임 전적은 간단했다.
283전 142승. 141패.
“풉…… 개 못하시던데.”
뿌드득…….
다만, 아벨은 에반젤린의 성격이 얼마나 불같은지. 오히려 끈이 풀려버린 성질머리는 미래가 더 온순하다는 걸 몰랐다.
“어…… 어어? 누님? 잠깐만요! 저 지금 환자인데 브레스는!!”
콰아아아앙!!!
망설임 없이 아벨을 향해 브레스를 냅다 갈겨버리는 에반젤린이었다.
* * *
영주성에서 두 아이가 투덕대고 있던 그 시각.
나는 신의 영역에서 여신을 만나러 왔다.
전쟁이 발발한 이상 피해는 반드시 생긴다. 그리고, 그 피해 범위가 내가 참전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여부만으로 엄청난 차이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사실 이번 행동에 다프네의 목적이나 여러 부분에서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존재했다.
다프네는 토펜느 부주교를 죽이는걸 달갑지 않게 여기는 듯 보였다.
관점의 차이라고 그녀 나름대로 자비를 베풀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나선들 나서지 않은들 그놈을 살릴 방법은 없다.
굳이 나서서 살리고 싶지도 않고.
저벅…… 저벅…….
내가 천천히 신의 영역 내부로 걸어 들어가자 저 멀리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는 여신의 아바타가 보였다.
“여신님. 대체 무슨 약속을 했길래 이렇게 귀찮은 제약에 걸려있는 겁니까.”
내 물음에 여신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녀의 품 안에 있는 원 형태의 작은 영혼 조각 때문이었다.
“저, 저 X놈이 왜 여기 있어.”
[앞으로의 일에 이 아이의 도움이 필요할 거야.]
“아……아이고 혈압…….”
[과거에…… 티오니스와 심연이 만들어지기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니?]
“들어나 봅시다. 일단.”
차오르는 혈압을 애써 억누르며 나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전에. 나는 저거랑 협력 못 하니까 치웁시다.”
내가 그녀의 품에 안겨있는 영혼 조각을 냉정하게 쏘아보며 일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