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91화
파르테논이 타나토스의 잔재를 읽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여부는 사실 불확실한 점이 너무 많았다.
정령계에 떠오른 타나토스의 잔재는 영락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기에 파르테논이 다시 재회한 타나토스의 몰골은 비참하면서도 속이 시원했다.
-영락한 꼴이 우습군.
여신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말하며 복수를 제안하던, 그 간사하고 교활한 신.
어떤 변수도 용납하지 않기 위해 제노엔들이 가진 약속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종족을 바꿔버린 존재.
증오스럽지만 당시의 그는 타나토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동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했고, 지금의 파르테논 또한 선택을 했기에 죽었으며, 선택을 했기에 한때 적이었던 데이비와 손을 잡았다.
-듣고 있는가. 심연의 신이여. 죽어간 동족들이 빛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면, 나는 그 어떤 존재와도 손을 잡을걸세.
-당신은 나를 좋을 대로 이용했지. 후회는 하지 않네. 하지만. 당신이 나를 이용했듯. 나 또한 당신을 이용해도 불만은 없을 터.
파르테논이 타나토스의 힘이 응집된 세 번째 달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 * *
데이비가 정령계로 떠나고 나흘이 지났다.
예정시간이 상당히 길었던 만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악마들의 선전포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존재들의 출현과 그들의 선전포고는 대륙을 혼란에 빠뜨렸다.
가장 심각한 것은 정보의 부재였다.
그들이 어떤 존재이며,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는지, 또 어디에 포진해있는지, 또 공격한다면 어느 정도의 규모나 위험성을 지니고 있으며 언제 공격을 해올지.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다.
당연히 국제연합에서는 혼란이 일었다.
단순히 허풍이라고 여기기엔 헤탄 왕국의 모습과 성국의 이번 사태가 그들의 존재가 가지는 위험성에 대해 입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변절자 때문이오!”
성국의 사제. 로암과 토펜느 부주교.
그들은 현재 말 그대로 악마에게 영혼을 판 변절자로서 몰매를 맞고 있었다.
실제로 성국의 지하 감옥에 갇힌 로암 사제는 괴성을 내지르며 현 상황에 대해 악을 쓰고 있었고 토펜느는 마치 죽어버린 것처럼 어떤 삶의 의욕도 내비치지 않고 있었으니 말이다.
일부에서는 그들을 고문하여 그 악마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한다 말했지만 어째서인지 성국에서는 적법한 절차 후에 처벌을 내릴 것이라는 대답만을 내놓았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대륙에서 가장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니고 있는 존재인 성자 데이비 올 라운에게 도움을 요청해 그들을 처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데이비 올 라운 본인은 이번 일에서 직접 나서지 않는 것으로 많은 이들의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이 사태에 대해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것은 바리스였다.
라운 왕국의 대표로서 국제연합 회의에 참석한 바리스는 고요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실시간으로 떠들어대고 있는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신진세력으로 새로이 나타난 이도 있지만,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켜온 이들도 보였다.
“그러니까! 성국에서 이토록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우리도 똑바로 협조할 수 없소!”
“지금 그렇게 자존심이나 내세우면서 싸울 때입니까? 적이 전 대륙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과거 있었던 리치나 마족과의 전쟁을 벌써 잊으셨소?! 적의 수준을 알 수는 없으나 만약 그때와 비슷하다면 지금 대륙은 크나큰 위기에 처한 것이외다.”
“그러니 성국에 잡혀있는 그 변절자 놈들을 고문해서!!”
“그보다 성자 데이비는 어찌 참석하지 않은 것이오! 그의 힘이 있다면!!”
계속해서 싸우는 이들을 보며 바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형님은 이번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으십니다.”
“뭐……뭐요?! 하면 어찌 그들을 막으라고?”
그 물음에 바리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벤타 왕국의 대신. 하나 묻겠습니다. 저희 형님이 벤타 왕국의 가신입니까?”
“무……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형님께선 이 전쟁의 악화를 막기 위해 개인적으로 움직이고 계십니다. 자세한 내막은 기밀이라 알려드릴 수 없으나 전쟁을 막기 위해 형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비록 이곳에서 가장 어린 바리스였지만 녀석이 풍기는 분위기는 주변을 흠칫하게 만들었다.
“대륙을 위해 노력하고 계신 형님께 그저 매달려서 도움만 바라고 있다라…… 이걸 라운 왕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겠습니까.”
“그……그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너무 곡해하십니다.”
라운 왕국이 과거에야 소왕국이었다지만 지금은 하인스 영지의 여부로 인해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반면 벤타 왕국은 이렇다 할 것이 없는 소왕국에 불과했다.
“하면, 하인스 영지에서 나서지 않으면 이번 전쟁은 기존의 전력으로 대비해야겠군.”
바리스의 말에 팔란의 황제. 살리반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한 사람에게 의존한 방비의 결과가 이렇다니…….”
아무리 제국의 황제라곤 하지만 그는 데이비라는 인간이 지닌 힘의 여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직감으로 보건대, 이번 사태가 과거 리치나 마족과의 전쟁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는 직감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 생각의 근거가 되는 요인은 바로 콘타스 대제가 먼저 알려온 정보 때문이었다.
그의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콘타스의 대제는 직접 참석하지 않고 통신 수정구를 통해 자신을 투영한 뒤 팔짱을 끼고 오만하게 발언했다.
“우선 우리는 현 상황에 대해 적들이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놈들의 공격 경로가 어느 쪽인지조차 알 수 없지. 하지만 최근 우리 콘타스의 정보부대가 흥미로운 정보를 물어왔다.”
“흥미로운 정보?”
“그래. 최근 전의 대륙의 서부에서 지금껏 본 적 없던 기괴한 생명체들이 대규모 이동하는 현상이 발견되었다더군. 이에 관한 자료는 그곳으로 보낸 짐의 전령이 보여줄 것이다.”
콘타스 대제의 신호와 동시에 바깥에서 누군가가 입장했고, 콘타스 제국의 정복을 입고 있는 사내는 정중하게 대제를 향해 예를 표한 뒤 아티펙트를 국제연합 회의장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약초꾼들이 발견한 괴물들의 정보를 조사하러 갔던 전사대가 확인한 정보입니다.”
이윽고 아티펙트에서 제법 화질이 좋은 장면이 출력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이들이 모두 굳은 얼굴로 침묵했다.
몬스터?
아니었다. 아티펙트에 출력된 모습은 몬스터라고 하기엔 너무 기괴하면서도 일관된 어떤 생명체들이었다.
“저런 생명체들이 어디서 저렇게 나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상태를 볼 때 놈들의 공격 경로는 세 곳으로 추정되지. 서부의 명국과 그리고 우리 콘타스 제국. 마지막으로 지금은 엉망진창인 서남부 지역의 소왕국들이지.”
그가 오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이 정도까지 들었으면 알겠지만, 현재 가장 위험한 지역은 서남단지역의 소왕국들이다. 따라서 짐은 이번 전쟁의 양상에 따라 중부대륙과 동부대륙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서남단의 왕국들을 지원하기를 요청한다.”
그의 제안에 그나마 직접적인 공격 대상이 되지 않은 동부와 중부의 국가 요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이쪽에서 1만의 병력을 지원하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감소 증세가 심각한바. 따라서 병력의 파견은 어려우나. 군수물자를 어느 정도 지원하겠소.”
전쟁터의 배경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중부와 동부의 왕국들은 대부분 그리 생각했고, 적어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하기 전까지 함부로 병력을 빼내지 않았다.
그들의 이기심보다는 나름의 계산이 깔려있었다.
그렇게 서로 눈치를 보며 지원할 병력과 물자에 대해 의논하고 있을 즈음.
콧수염을 어루만지고 있던 한 국왕이 바리스를 향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한데. 라운 왕국의 국왕께서는 따로 병사를 내놓지 않으시오? 듣자 하니 라운 왕국은 최근 하인스 영지 덕분에 상당히 부유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흐음…….”
거슬리는 콧수염을 쓸어넘기는 그를 보며 바리스는 데이비가 늘 말하던 인간불신이 어떤 것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라운 왕국에선 군대를 파견하지 않습니다.”
그 말에 주변에서 술렁였다.
“그래요. 뭐, 병력을 파견하기 힘든 사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현재 한창 주가를 달리고 있는 라운이 이렇게 소심한 대응을 하는 것이 달갑지 않다는 느낌도 있었다.
대놓고 이야기하는 이는 없었지만 말이다.
“하면 전쟁물자를 지원하시는 겁니까? 물론, 그동안 성자 데이비 올 라운 대공이 그동안 대륙을 위해 노력한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오. 따라서 나는 라운 왕국의 결정을 지지…….”
“아뇨. 전쟁물자도 파견하지 않습니다.”
바리스의 선언에 주변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아니. 라운의 국왕께선 농담이 상당하시군요.”
“농담이 아닙니다. 군대도, 물자도 따로 파견하지 않습니다.”
농담 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 바리스의 단호한 대답에 일부가 침묵했다.
“자세한 설명을 요구해도 괜찮겠나. 라운의 국왕.”
이에 가장 먼저 노기를 드러낸 것은 콘타스 대제였다.
“그동안 데이비 올 라운이 해온 일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번 사태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그였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보이지 않고 라운에서도 도움을 주지 않겠다니.”
화가 난 듯 말하지만, 일부는 눈치챘다. 대제가 흥미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실제로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예. 뭐. 설명이 애매하긴 했네요. 저희 라운 왕국에선 현재 병력을 파견할 여력이 없습니다. 다만 형님께서 남기신 간언을 채택하여 일부를 파견할 생각입니다.”
군대도 물자도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
“설마…….”
“하인스 영지의 전력의 일부를 파견할 생각입니다.”
대륙에는 내로라하는 국가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절대로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곳이 바로 하인스 영지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영지민의 수가 극소수였던 영지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곳은 그야말로 대륙 최대 전력. 대륙의 최대 비대칭 전력이 모여있는 곳이기도 했다.
“하면…… 하인스 영지에서 대체 누가…….”
“자세한 것은 아직 하인스 영지에서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습니다만. 이 정도의 전력 파견으로도 일반적인 군대 이상의 도움이 될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인스 영지의 전력, 그것을 누가 거부할까.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이에 콘타스의 대제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파견은 언제쯤 가능하지? 하인스 영지의 전력이라면 서남단왕국 뿐만 아니라 우리 제국에서도 도움을 좀 받고 싶군.”
“언제쯤이라. 말에 어폐가 좀 있군요.”
“음?”
“이미 출발했습니다. 놈들도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말과 함께 회의실 문이 급히 열리며 누군가가 뛰어들어왔다.
“급보입니다!! 핫산 왕국의 국경 요새에서 대규모 몬스터로 추정되는 생명체들이 진군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합니다!! 또한, 콘타스 제국의 국경과 명국. 중부대륙의 팔란 북부……!”
이어지는 보고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본래 예상했던 라인은 개나 줘버린 듯 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정도로 중구난방으로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도 본래 대로라면 서부대륙에 전력을 몰빵하려던 계획을 무산시켜버릴 만큼 대륙 각지에서 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다.
* * *
서대륙 서남단 대숲을 끼고 있는 소왕국 핫산의 외곽 요새. 칼리움 요새에서는 상당수의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무기를 들고 침입자들과 맞서 싸웠다.
침공의 예고를 받긴 했으나 설마 자신들의 일일까.
그렇게 생각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렇게 뒤통수를 얼얼하게 두들겨 맞아보니 정신이 아찔할 수밖에 없었다.
칼리움 요새에 주둔하는 병사는 사실 고작해야 500여 명이 전부였다.
이것도 낡은 요새에 비하면 굉장히 많은 편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꼴에 마경과 겹친 장소인 터라 500명이나 파견되어있던 곳이었다.
당연히 마경의 몬스터들이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기에 장비의 보급도 엉망이었고, 그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인원배치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곳에 오는 병사들이나 장교들도 그것에 대해 알고 있었고 딱히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그런 칼리움 요새의 현실이 당장 때려죽이고 싶을 만큼 화가 나는 요소로 다가왔다.
“부장님!!! 놈들이 서쪽에 들이닥치고 있습니다!! 낙후된 장소라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지원이 더 필요합니다!”
“젠장 이 적은 인원을 어떻게 더 쪼개라는 말이냐!”
고작해야 오백.
반면 밀려오는 저 괴이하게 생긴 괴물들의 수는 무려 수천에 달한다.
-샤아악!!!
“끄아아아악!!!”
그들은 현재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성벽에 붙어 끊임없이 활을 쏘던 한 병사가 밑에서 올라온 기다란 혓바닥에 휘감겨 그대로 추락한다.
많은 몬스터들을 봐온 그들이지만 단언컨대 지금 요새의 성벽을 두드리는 저 미친 괴물들이 뭐하는 놈들인지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생긴 것부터가 일반적인 생명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뒤틀린 그것들은 하나같이 두려움을 모른 채 공격을 퍼부었다.
아무리 죽이고 또 죽여도 계속해서 밀고 오는 놈들의 움직임에는 지친다라는 단어 따윈 존재하진 않았다.
아군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적의 수는 아직도 한창 건재하다.
대체 이런 괴물들이 어디서 생겨났고 어떻게 감시를 피해 이곳까지 왔는지 이들이 알 수가 없었다.
“끄아아악!!”
“엄마!! 엄마! 죽기 싫어!”
오줌을 지리며 도망치다가 성벽을 기어 올라온 기괴한 생명체에게 한입에 삼켜져 버리는 병사의 무기가 힘없이 성벽 아래로 떨어진다.
거대한 진흙에 뒤덮인 괴물처럼 생긴 그것은 닥치는 대로 병사들을 향해 손을 뻗었고, 그대로 삼켜버렸다.
이미 성벽 위는 난장판이 되어있었고 병사들과 성벽을 기어 올라온 괴물들이 뒤섞여 아비규환이 되어있었다.
“젠장! 물러나지 마라! 이곳이 뚫리면 곧바로 수도로 향하는 길을 내주게 된다!! 물러서지 말란 말이다!!”
전략적 요충지인 것은 사실이지만 설마 마경의 몬스터가 성을 함락시키기나 할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껏 살면서 이토록 많은 괴물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 이들로썬 현 상황이 끔찍할 뿐이었다.
요새의 동쪽 벽을 지키고 있던 백부장 가스트는 피가 흥건히 묻은 롱소드를 늘어뜨린 채 넋이 나간 얼굴로 요새를 둘러보았다.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계속되는 굉음과 함께 무너지는 일부 성벽.
사방에서 튀는 피와 끔찍한 비명.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 의심부터 드는 크기를 지닌 괴물까지.
왕실에 지원요청을 해본들 소왕국의 병력에 많은 것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근처 왕국과 계속되는 분쟁으로 인해 국력이 쇠할 대로 쇠약해져 있었기에 추가 지원군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이곳이 뚫리면 몬스터들은 곧장 수도로 향할 터.
수도의 그 멍청한 돼지들은 절대 이 괴물들의 진격을 막을 수 없으니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다만 백부장인 그가 모르는 상황이 있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게 이곳 하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제노엔들은 대체 어떤 방법을 쓴 것인지 생전 처음 보는 대규모의 몬스터들을 만들어내 대륙 곳곳에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반면 그런 와중에도 정작 그들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괴물들의 공세만 이어지고 있는 상황. 기습적인 타격에 이미 함락당한 요새도 존재했고, 지금 이곳처럼 함락 직전인 요새도 존재했다.
이미 휘하의 병사 대부분이 죽었고 물러날 곳도 잃어버린 상황.
그 상황 속에서 백부장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천해의 요새라 불리던 칼리움 요새의 불패 전설도 이렇게 어이없이 무너지는구나.
허망함이 앞서 그를 향해 다가오는 괴물들을 향해 검을 들어 올린 그가 다리를 덜덜 떨었다.
아무리 각오해도 죽음이 두렵지 않을 순 없었다.
-끄우어어어엉!!!!
거대한 원숭이? 혹은 사슴? 생긴 것이 도저히 무언가 하나라고 표현하기 힘든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그를 향해 덤벼든다.
이미 대부분 부하들도 죽었고, 그도 이제 죽음을 맞이할 터.
하다못해 이 상황을 수도에 전했으니 그 멍청한 돼지들이 도망이라도 칠 시간 정도는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곧 다가올 끔찍한 고통에 대비하듯 눈을 감았다.
서걱!! 스캉!!!!!
그때였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그의 귓가에 울려퍼지자 멍하니 있던 그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놀란 듯 눈앞을 바라보았다.
백은의 거검을 든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이 그에게 등을 보인 채 서있는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백색과 푸른색이 섞인 활동하기 좋은 디자인의 복장 곳곳에 붙은 금속 파츠들은 그녀가 기사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고고하게 서 있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던 백부장이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당신은…….”
하지만 여인은 대답 대신 한 손을 귀 쪽에 가져다 대고 말할 뿐이었다.
“도착했어요. 보고대로 이놈들 일반적인 몬스터는 아니네요. 일단 정리부터 하죠.”
그 말과 함께 그녀의 검이 번뜩였다.
대륙에서는 하인스 영지에 많은 소문이 돌고 있다. 뜬구름 잡는 소문들도 무성하지만, 호사가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하곤 한다.
하인스 영지엔 상상을 초월하는 전력이 모여있다고.
물론 알만한 사람을 제외한 이들은 그래 봐야 과장일 뿐이라며 헛웃음을 쳐왔었다.
실제로 하인스 영지에서도 소드마스터급 존재가 일부 있으니 그들이 오는 것이리라고.
다만 하인스 영지가 보유한 전력은 데이비를 제외하고도 너무 말이 안 된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기습적으로 시작된 전쟁답게 제대로 준비된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중부대륙의 테프리스 왕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규모의 적들의 습격이 시작되면서 엄청난 사상자가 단시간에 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적들의 수뇌부는 역시 보이지 않았지만, 단순히 밀고 들어오는 정체 모를 괴물들만으로도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작동합니다! 원군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칼리움 요새에 비해 상황은 좋다고 하지만 끝도없이 몰려드는 크고 작은 괴물들과 성벽만 한 사이즈의 괴물들을 보면 있던 전의도 모조리 상실하게 할 만큼 두려운 장면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곳이 뚫리면 엄청난 피해를 볼 거라는 것은 분명했던 만큼 이곳을 지키는 병사나 장교들도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들의 포격이 계속되고 궁수들은 손이 찢어져라 화살을 날려댔다.
하지만 점점 밀려 나갔고 이미 외성은 놈들의 육탄돌격에 무너진 후였다.
내성까지 밀려 결사의 항전을 하던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지원군이었다.
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이 대공세에서 누가 지원군을 보내겠는가.
실제로 왕실에서도 지원병력을 준비하되 크게 기대하지 말라는 답변이 왔다.
여기서 막아내지 못하면 엄청난 사상자가 나올 터.
착잡한 마음으로 지원군이 와봐야 얼마나 오겠냐고 생각하고 있던 장군은 곧 지원 병력으로 몰려올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허겁지겁 뛰어나갔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현 상황에서 지원군은 그만큼 달콤한 과실이었으니까.
“하인스 영지…… 하인스 영지에서 오는 지원군이 분명합니다! 왕실에서 분명 그리 전갈을 보냈었습니다!”
그 한마디가 그의 기분을 하늘 끝까지 끌어올렸다.
대륙에서 그 유명한 성자가 직접 온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자신들은 살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곧 나타날 성자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게이트가 활성화되면서 나타난 것은 그의 예상을 뒤엎었다.
붉은 머리칼의 젊은 청년과 푸른 머리칼의 청년.
단 두 명.
장군이 알고 있는 성자는 아니었고, 더더욱 이들이 강해 보이는 존재라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 그대들은…….”
“아. 반갑습니다. 하인스 영지에서 지원 왔습니다. 루델라이트라고 합니다.”
자신을 루델이라고 소개하는 청년의 대답에는 어떤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익스퍼트 상급의 기사인 장군이다. 눈앞의 청년들이 딱히 뛰어나 보이진 않았다.
하인스 영지에서 지원이 온다더니. 처음 보는 애송이 두 명이라니.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만큼 장군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가질 않았다.
“보다시피 지금 상황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혹여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온 거라면 당장 퇴각을…….”
“루델. 내가 이겼으니 넌 밖에 나가.”
하지만 두 청년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당연 답답해진 건 장군 쪽이었다.
“이보시오! 지금 고작 단 두 명이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닌…….”
짜증이 치솟아 격하게 소리치려던 장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붉은 머리 청년, 루델이 담담하게 말한다.
“알았으니 닥치고 있어라. 인간.”
적당히 낮은 음성이다.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하는 말치고는 너무 건방지기 그지없었지만 장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한마디와 함께 온몸의 신경이 끊어진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 음.”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하는 장군을 지나친 루델은 싸움이 한창인 외벽을 보다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성벽의 난간에 가볍게 올라섰다.
“겉보기에도 추악하네.”
“이……이보시오! 지금 밖은 위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벽에서 뛰어내려 버리는 루델을 보며 장군이 입을 쩍 벌렸다.
미친놈이 아닌가!
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저 괴물들의 파도 속에 뛰어들면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거늘.
그렇게 생각했던 장군은 곧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어야 했다.
한없이 추락하던 루델의 몸에서 빛이 한차례 번뜩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장군이 본 것은 루델이 아닌 처음 보는 새빨간 비늘을 지닌 거대한 드래곤이었다.
처음 보는 존재였으나 드래곤이라고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그가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하늘로 다시 날아오른 루델의 입에 거대한 열기가 모여들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불지옥을 강림시키는 불의 기둥이 대지를 그어버리며 불태우기 시작했다.
“하인스 영지의 지원군?”
하인스 영지 하면 데이비 왕자라고 생각했었다.
고작 지원군이라면서.
고작 지원군이 저런 존재라고? 그럼 다른 곳에 간 지원군들은 대체 뭔데?
그런 생각이 든 장군은 문득 루델이라던 저 드래곤과 편하게 말하던 푸른 머리칼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자도 드래곤인가.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성벽 내부로 기어들어 오는 괴물들을 본 푸른 머리칼의 청년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단순한 새끼.”
동시에 그의 몸이 빛에 휩싸였고. 장군은 그날 두번째 드래곤을 목격할 수 있었다.
* * *
대륙 곳곳으로 퍼져나간 하인스 영지의 지원군에 대해 들은바 있는 이들은 지원군이라고 해봐야 소드마스터급 존재들이 아닐까 그리 생각했다.
괜히 호들갑이라고.
하지만, 몬스터에 비견될 정도로 많은 새하얀 토끼의 파도나 두꺼운 두 다리로 버티고 선 채 몬스터들을 손으로 찢어발기는 거대한 흑룡, 붉은 지룡 그 외에도 크기의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4족 보행형 흰수염 고래. 그 외에도 정령사들이 보고 눈물을 흘릴 법한 존재인 정령왕까지.
처음 보는 마법인 그림자를 이용해 몬스터들을 대량으로 찢어발겨 버리는 소녀의 존재는 하인스 영지의 저력이 소문으로도 과장이 아니라 오히려 과소 평가당하고 있었다는 걸 절절히 실감했다.
저런 존재가 득시글거리는 영지? 대륙 전체가 덤벼도 하루아침에 몰살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파워 밸런스가 일방적인 것도 정도가 심하게 벗어난 모습이었다.
하나하나만으로도 일개 소왕국을 능히 멸해버릴 수 있는 존재들의 출현은 그토록 경이적이었다.
그리고. 동부대륙의 남단에 위치한 도시국가에 두 명의 남녀가 나타났다.
“야. 아벨. 너 몸도 안 좋은 놈이 자꾸 싸돌아다닐래?”
“누님이나 돌아가시죠. 저는 이놈들 처리 못 하면 돌아가질 못하니까 싸우는 겁니다만. 누님은 아버지께서도 절대 참전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야. 그거 과보호야. 집 지키는데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어. 나 이미 휴방 공지까지 다했거든?”
에반젤린과 아벨 또한 부모 몰래 영지를 빠져나와 참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