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93화
미지의 적을 사로잡았을 때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 미지의 적이 가지고 있는 정보라 할 수 있다.
어째서인지 에반젤린은 제노엔들을 추적하는 데에 성공했고 놈들을 잡았다.
“그런데 어떻게 잡은 거지.”
두 명의 제노엔을 포획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쉬이 믿기지가 않는지 아벨이 의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그게 중요해?”
“그럼요? 이게 함정이 아닐 거라는 보장은 어디 있습니까. 막말로, 이놈들을 데리고 영지로 돌아갔다가. 사고라도 터지면요.”
아벨의 지적은 신빙성이 있었다.
“그……그런가?”
“잘 생각해요. 누님. 만약에 이놈들이 몬스터들을 대량으로 하인스에 풀어버릴 수 있다면, 여기서 일어난 사건이 하인스에도 일어나는 겁니다. 가끔씩 누님을 보면 빵을 나눠주던 빵집 아저씨도, 꽃을 팔던 꼬맹이도, 전부 병사들처럼 될 수 있다고요.”
이전의 그 참극을 봐왔던 그녀였기에 아벨의 한마디는 무겁게 내리 앉았다.
아무리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어도 그녀에겐 충격적인 장면이었던 만큼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누님. 이제 그만 여기서 손 떼세요. 나머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던 그녀가 눈을 부릅 떴다.
“아니, 한 곳 있어. 이 자식들이 무슨 짓을 해도 티오니스에 영향을 줄 수 없는 장소. 나를 제외하고 허락 없이 그 누구도 오갈 수 없는 장소.”
그녀가 다시금 눈을 부릅 떴다.
“륀느. 자백을 받아내는 거, 가능해?”
“륀느가 심문능력을 높게 평가.”
륀느가 바닥에 빠루를 내려놓은 뒤 그 뒤로도 기괴한 도구들을 꺼내 내려놓았다.
그러던 중 그녀의 손에 커다란 가마솥이 잡힌다.
“데이비 님에게 배웠다고 보고. 륀느가 기름 가마솥을 매우 높게 평가.”
아무래도 륀느는 데이비가 신수들을 들들 볶을 때 봤던 것들을 잘 이용하는 모습이었다.
* * *
이자들은 어째서 알고 있던 악마종보다 약했는지. 왜 에반젤린의 감지에 걸렸는지.
또, 이놈들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
그런 건 차차 알아내면 될 문제였다.
에반젤린이 선택한 장소는 다름 아닌 그녀의 레어.
차원의 틈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녀와 데이비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자의적으로 들어갈 수 없는 하나의 공간이다.
사로잡힌 제노엔들은 수많은 억제장치에 구속된 채 눈을 떴다.
“끄윽…… 여긴 어디지?”
눈을 떴을 때 그들이 본 것은 어두운 동굴 속이었다.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 동굴.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유일하게 잘 비치는 것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커다란 솥과 그 안에서 끓고 있는 어떤 기름 같은 액체.
그리고.
그 솥의 근처에 놓인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잠들어있는 작은 소녀였다.
“저년은?”
“알고 있다. 동족 중 하나가 저 괴물 같은 년에게 이미 하나 당했어.”
의자에 앉아있던 소녀, 륀느의 정체를 깨달은 제노엔들이 긴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젠장. 괴물에게 걸렸군. 대체 인간들 사이에 저런 괴물이 어디서…….”
“그녀의 정체에 대해선 이미 파르테논의 기억에서 본 적이 있다. 외모와 분위기가 조금 변하긴 했지만, 전장에서 보여준 그녀의 모습은 분명 백익이 분명했어.”
과거 삼신 전쟁에서 움직였던, 넬타리드의 처단부대.
그 처단부대를 맡고 있는 종족의 근본이며, 종족의 장. 륀느.
파르테논의 기억을 얼핏 연동하고 있는 동족들에게 그 기억은 조금 거리감이 있지만 명확하게 인지되고 있었다.
오래전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는 백익이 왜 이곳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온전한 상태는 아닌 것 같군. 백익이 수면이라니.”
“이것들을 풀 수 있겠나?”
“지금 우리 힘으론 불가능하다. 소환에 너무 많은 힘을 썼어. 일단 상황을 지켜보지.”
륀느가 고요히 잠들어있는 꼴을 보며 계획을 짜던 이들은 갑작스런 인기척에 몸을 굳혔다.
“무슨?!”
콰앙!!!
묶여있던 채로 제노엔 중 하나가 뒤통수를 짓눌려 바닥에 처박혔다.
“소환을 하느라 너무 많은 힘을 썼다라…… 너희, 힘이 무한하진 않구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스산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벨이었다.
“누님. 이 새끼들 깼습니다.”
“륀느. 언제까지 잘 거야. 일어나.”
그 말과 동시에 륀느가 고개를 숙이고 잠든 채로 대답했다.
“륀느. 수면상태가 아니라고 보고.”
“코까지 골아놓고 무슨 소리야. 일어나. 다 끓었어?”
“적당한 온도까지 끓었다고 평가.”
백익 하나가 아니었다.
제노엔들은 뭔가 상황이 좋지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윽고 쓰러진 제노엔의 눈앞에 한 여성이 다가왔다.
“환영해요. 당신들을 잡아내는 게 쉽지가 않아서 말이죠.”
등 뒤에 새하얀 날개가 빛처럼 돋아난 아름다운 여성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부디.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게 좋은 정보를 많이 뱉어주었으면 해요.”
“하…… 어쩌다가 너희 같은 어수룩한 것들에게 잡힌 건지…….”
“뭐라고?”
제노엔의 도발에 에반젤린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제노엔들은 자신이 있었다.
“우리를 고문해봐야 절대 원하는 정보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를 이곳에 데려온 건 너희 실수였어.”
마치 무언가가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 그 모양새에 레이나가 비웃음을 던졌다.
“어째서죠?”
“어째서긴. 하인스 영지라고 했나? 그곳에는 우리가 들어가기 힘든 방어 결계가 가득하지. 그래서 외부에서 밀고 들어가기엔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만, 내부에 동족들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렇게 말하며 쓰러진 제노엔의 몸에서 어떤 힘이 흘러나왔다.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후회해라. 멍청한 것들.”
마치 위협하듯 그의 몸 안에서 힘이 요동쳤다.
“뭘 하려고.”
“뭐긴. 외부에서 침입하기 힘든 하인스를 내부에서 붕괴시켜버릴 거다. 그 변이된 생명체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하지 않나? 바로 우리가 소환의 주체인 것을.”
공성전을 할 때 성벽이 단단해서 들어가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트로이의 목마처럼 내부로 침입해 내부에서 난동을 부리면 아무리 견고한 요새라도 오래 버티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위협에 아벨이나 레이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가능하겠냐?”
“뭐라?”
“소환해봐. 기다려줄 테니.”
숨기고 있던 사실이었다. 실제로 제노엔들은 현재 힘을 회복하기 전까지 괴물들을 더 만들어내 불러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당한 수의 동족들이 자신들을 희생해서 만들어낸 괴물들이다.
그렇기에 괴물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이들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문제는 소환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어째서……?”
소수라도 몬스터들을 불러내 시선을 끌어보고, 유리한 상황을 점지하기 위해서였건만. 어째서인지 늘 가능하던 소환이 되지 않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레이나 누님, 확실하죠?”
이에 아벨이 레이나를 향해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별거 없어. 어차피 너희들이 원하는 정보를 줄 것 같지는 않아서. 너희를 조금 떠본 것뿐이야. 그 괴물들. 차원 너머까지는 소환 못 하는구나? 아니면, 현재 소환할 수 없는 상태라거나.”
“뭐……뭐라고?! 이곳은 하인스가 아닌 거냐?”
빠악!!!
“커헉!”
“이것 봐라. 꽤 심하게 약화되어 있네.”
아벨이 스산하게 웃으며 제노엔을 짓밟았다.
“왜 질문을 네가 하는데.”
아벨의 손속은 생각보다 자비가 없었다.
“우리가 알아내고 싶은 게 많아.”
“하. 우리가 말할 거 같은가? 동족들이 우리를 구하러 오고 있을 거다.”
“안될걸?”
“뭐라고?”
제노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미안한데. 너희 동족들이 얼마나 잘났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여긴 못 와.”
절대로.
스산한 경고를 내뱉은 아벨을 만류한 건 레이나였다.
“이건 내가 할 일이야.”
“누님.”
레이나의 표정에 단호함이 엿보였다.
“이런 일은 좋은 의도라도 그리 좋은 과정이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누님.”
결국, 물러나는 그녀를 뒤로한 채 레이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대체 어떻게 그만한 괴물들을 만들어내는 거지?”
“말할 거 같나?”
그 물음에 레이나는 대답하지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륀느가 손에 들고 있던 빠루를 이용해 펄펄 끓고 있는 솥을 가볍게 두드렸다.
촤악!! 치이이이이익!!
그러자 솥이 크게 흔들리며 그 안에서 끓고 있던 기름이 바닥에 튀었고 끔찍한 소리를 냈다.
“어이쿠, 실수라고 륀느가 해명.”
전혀 실수했다는 기색이 아니었다.
당연히 힘이 약해진 제노엔들에겐 그 상황이 공포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펄펄 끓는 기름이 담긴 솥은 본능적으로 저기 닿으면 큰일 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그런 마당에 륀느는 마치 잘 보라는 듯 솥을 텅텅! 걷어찼고, 솥에 있던 정체 모를 기름을 그들의 근처에 끼얹었다.
치이이익!!!!
바닥이 녹아내린다.
그제야 제노엔들은 저것이 그냥 기름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대……대체 뭘 하려는 것이냐!”
겁에 질린 제노엔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 모습을 캐치해낸 레이나와 아벨이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처음 에반젤린이 저들을 납치할 때부터 느낀 문제였지만 이 두 놈은 그들이 알던 적들 이상으로 겁이 많아 보였다.
하긴, 한 종족에 모두가 뚝심이 깊은 놈만 있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걱정 마. 입을 열게 할 방법은 많아. 그래도 어이없는 희망을 품으면 귀찮아지니 한가지는 알려줄게.”
륀느가 기름을 퉁퉁 차는 걸 가리키며 아벨이 씨익 웃었다.
“이 차원은 차원의 틈 안에 있기 때문에 네 동족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너희를 구하러 오지 못해.”
그 말에 제노엔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기왕이면 쉽게 가자고.”
“우……우린 말하지 않는…… 끄아아아악!!!!”
겁에 질렸으면서도 쉬이 자존심을 꺾지 않는 놈을 보며 륀느가 솥을 가볍게 걷어찼고, 그중 몇 방울이 한 놈에게 튀었다.
어지간한 내성이 있는 녀석들이지만 역시 보통 기름이 아니라고 말하듯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튕기며 고통스러워했다.
당연히 그것을 보고 있는 그의 동족은 노기 서린 얼굴로 백익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엔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륀느가 실수라 명시. 하지만, 또다시 그런 눈을 할 경우.”
륀느가 발을 들었다.
“그땐 또다시 실수할 거라 공표. 륀느가 조준실력을 높게 평가.”
과거 악명높던 백익, 륀느의 뻔뻔함 자체는 바뀌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 * *
제노엔들의 공격은 언 듯 보면 정말 의미 없이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대처가 불가능하고 놈들의 공격을 제때에 발견하고 대처하지 못하면 엄청난 피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티오니스의 착각이었다.
제노엔들은 자신들이 차지해야 할 장소와 시선을 끌 장소를 구분하였다.
중부대륙의 남단. 친 팔란제국적 외교로 유명한 파르타스 왕국의 수도는 현재 생각지도 못한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망할! 화살 더 가져와!!!”
“의무병!! 의무병!! 여기 부상자가 너무 많다!!”
“으아아악!!”
물론, 괴물들이 국가와 장소, 시간을 가리지 않고 습격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른 국가의 상황과 달리 파르타스 왕국을 습격하는 괴물들의 수는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습격하는 괴물들의 수가 무려 5만.
전쟁에서 벗어나 군비를 축약하고 있는 현 대륙의 실정상, 5만의 군세가 갑자기 요새도 아닌 수도 성을 향해 진군하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거기에 문제는 또 있었다.
하인스 영지나 다른 여유가 있는 국가들이 전력을 순환하며 막아내고 있다 보니 현재 파르타스 왕국을 도와줄 곳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시선을 잡아끌기라도 하듯 맹렬하게 공격해대는 괴물들과 달리 그야말로 기습. 조금만 눈치가 빨라도 지금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대부분이 시선 끌기용일 뿐 진짜 목적은 과하게 전력이 투자된 파르타스 왕국의 수도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수도로 오는 길에는 많은 요새가 있건만, 어째서인지 이놈의 괴물들은 그런 요새의 저항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채 수도의 근처에 나타나 맹렬한 습격을 가했다.
당연히 수도방위군은 갑작스런 기습에 우왕좌왕했지만 필사적으로 막아내려 했다.
수성전의 이점을 살려 필사적으로 막아보지만, 그것도 사실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었다.
파르타스 왕국의 국왕은 직접 무기를 들고 전장을 지휘하며 이를 갈았다.
대체 왜?
이곳에 뭐가 있다고.
눈치가 빠른 그는 이 괴물들의 공격 방식에 이상함을 눈치챘다. 지금까지의 놈들의 전술을 생각하면 이곳 파르타스의 수도에 무리하게 나타나 이만한 수를 꼬라박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물론 인류 말살이라는 목표를 두면 무엇이든 납득이야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습격은 비효율의 극치가 아닌가.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이곳에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
계속되는 응전, 평야 너머로 끝도없이 몰려드는 검은 괴물의 군세를 보며 파르타스 국왕은 침을 꿀꺽 삼켰다.
“폐하! 피신하셔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한 시간도 채 버티지 못합니다!”
“병사들은…… 백성들은! 감히 지금 나에게 파르타스의 국민을 두고 도망치라 말하는 것이냐!!”
“폐하가 계셔야 파르타스가 있습니다! 우선은 안전을 도모하시고…….”
“닥쳐라! 죽어도 내 나라, 내 백성과 함께 죽겠다! 악마 따위에게 굴복할성싶더냐!!”
보기 드물게 민심이 좋았던 파르타스 국왕이다.
그는 도망칠 바에 끝까지 싸우겠다 말하며 검을 높이 들었다.
“듣거라 나의 병사들이여! 이곳의 뒤에는 우리의 자식들이! 우리의 동생들이! 우리의 부모가 있다! 고작 괴물 따위에게 겁을 먹고 물러난다면 저놈들이 노릴 건 우리의 가족일지니!! 검을 들어라! 짐이 앞장서겠다!!”
격분하며 소리친 그가 검을 들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작은 괴물 하나의 목을 날려버렸다.
“전군…… 검을 들어라.”
수성하는 병력은 고작해야 2천. 그에 반해 공성을 위해 몰려드는 괴물의 수는 무려 5만이 넘었다.
싸움이 될 수가 없는 상황. 그렇다고 원군을 바랄 수도 없었다.
이곳엔 괴물들의 움직임이 감지된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
부디 이놈들의 행동에 서린 이상함을 눈치채주었으면 좋으련만. 부질없는 희망일 뿐이었다.
파르타스의 수도 방위전은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개전 30분까지는 말이다.
“끄아아악!!”
“으아아악!! 죽고 싶지 않아!!”
처절한 전장은 어지간히 노련한 이들조차 참혹함에 눈을 돌리게 만들 정도였다.
콰아앙!!!
“서쪽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폐하! 더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이미 병사들의 절반이 죽었다.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는 이 배수의 진 상황 속에서 파르타스 국왕은 허탈한 마음을 품었다.
“대체…… 이놈들이 어찌하여 이곳을 기습했단 말인가…….”
오랜 시간 공을 들인 것 같은 기습에 기가 찰 따름이었다.
“설마…… 여신의 신물을 노린 것인가.”
그때 문득 파르타스 국왕은 오래전 왕자일 당시 모험을 즐기며 얻은 성물을 떠올렸다.
악마 놈들이 노릴법한 게 이나라에 또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다 소용없다고 느꼈다.
이제 곧 성벽이 모두 무너지고 개미 떼마냥 몰려오는 괴물들이 자신들을 찢고 씹어 삼킬 테니 말이다.
그런 절망 속에서도 그는 검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갑자기 나타난 이변에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도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새카맣게 몰려드는 괴물만 해도 질릴 법한데. 성의 내부에서 갑자기 엄청난 크기의 균열이 다수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저……저건 대체?!”
바깥에도 난리인데 안쪽도 난리?
이 끔찍한 상황 속에서 대체 어떤 희망을 품어야 한단 말인가.
허탈함에 주저앉아버린 국왕은 곧 성 내부에서 열린 균열에서 무언가가 나오는 것을 보고 눈을 부릅 떴다.
그것은 과거 인간이 전쟁을 벌였던 종족.
마족이 부리던 마수들이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닌 엄청난 수의 마수.
병사들은 앞에도 적, 뒤에도 적이라는 사실에 경악하며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마수들 틈 사이로 마족들과 함께 검은 군마를 탄 누군가가 천천히 나오는 게 보였다.
체격만 보면 그리 크진 않았지만 고위 마족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이 흔들리는 이 시점을 이용해 마족이 재침공을 시작한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저 괴물들은 마족들의 수작이었던 것일까.
과거 마족들이 물러갔을 때 놈들을 추적해야 한다던 이들을 말린 것이 후회되는 기분이었다.
그때 검은 군마를 탄 존재가 높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마수들이 절도있게 움직이고 고개를 돌리며 파르타스 왕국의 국왕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앞에도 적 뒤에도 적. 빌어먹을 상황.
이윽고 마수들이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한다.
완전히 햄버거마냥 양쪽으로 쌓여버린 이들이 절망에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찰나.
마족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라.”
두두두두두두!!!!
동시에 마수들이 일제히 지면을 박차며 성벽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양쪽에서 적들이 몰려옴에 따라 겁에 질린 병사들은 무기도 놓친 채 눈을 감고 몸을 웅크렸다.
두두두두!!!
하지만 그들이 생각한 결론과는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균열을 찢고 나타난 마족들이 인간들을 지나치며 검은 괴물들을 향해 정면으로 부딪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지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죽여, 저 추악한 놈들을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 버리라고.”
앳된 목소리로 군대를 괴물들과 정면충돌하게 만든 지휘관은 곧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국왕과 병사, 부관들을 향해 다가왔다. 투구 사이로 비치는 붉은 안광을 빛내며 물었다.
“뭐 하는 거지? 인간들은 멍청한 건가?”
“당신은 대체…… 마족이 아닌 건가?”
국왕의 물음에 지휘관은 투구를 벗었다. 동시에 긴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아름다운 외모와 마족 특유의 작은 뿔이 드러났다.
“…….”
“마족 맞아. 문제 있어?”
“마족이 왜 우리를…….”
“보면 몰라? 동맹이니까 도와주러 온 거잖아. 야!! 거기 언제까지 놀 거야! 당장 안 튀어나와?!”
그 말과 함께 찢어진 균열 속에서 엄청난 수의 검은 와이번들과 양손에 곡도를 든 서큐버스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공주님의 요청이다, 죽지 말고 싹 다 치워버려.”
인간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마족.
그 마족을 현재 이끌고 있는 알리타가 인간의 동맹군으로서 티오니스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마족에게 공주로 불리는 존재. 마왕 데이비의 딸, 에반젤린의 요청에 따라 아벨이 연 워프 균열을 타고 대륙 각지로 군대를 분산 파견했다.
제노엔들이 시선까지 돌려가며 반드시 손에 넣고자 했던 지역에는 어김없이 마족들의 군대가 나타나 인간들을 보호하듯 움직였다.
제노엔들은 경악하고 어이없어할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몰랐다.
생각보다 동족들 사이에 입이 싼 놈들이 있다는 것을.
병력이 쓸모가 없어진 제노엔들의 행동에 대한 선택지가 극단적으로 줄어들며 전쟁이 점점 가열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