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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302화 (1,302/1,559)

제 1302화

에반젤린 올 라운에게 그림이라는 건 하나의 소통 방식이며, 자신을 가꾸는 취미이기도 했다.

오래전 그녀는 영웅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성장을 하면서 마냥 바보같이 영웅이라는 단어에만 매달리지는 않게 되었다.

바보 같고 어리다고.

물론, 기회가 생긴다면 망설임 없이 움직이는 천성은 변하지 않았지만 바보같이 영웅에만 심취해 있는 건 부끄러워하게 된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찾아온 새로운 목표는 바로 그림이었다.

딱히 세계 최고의 그림쟁이가 되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정말 원하는 걸 모두 그릴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을 쌓는 것.

그것이 그녀가 바라는 것이었다.

“음…… 날개가 조금 엉성하네요.”

대체 이게 무슨 그림인지 알아볼 수 없는 낙서를 보며 에반젤린은 망설임 없이 캔버스의 일부분을 손바닥 아래쪽으로 푹 찍은 뒤 짓뭉개듯 비볐다.

-????

-날개요? 대체 어디가 날개인데요?

시청자들이 보고 있는 건 형태도 잡히지 않은 물감과 흑연이 뒤섞인 낙서일 뿐이다.

-난 지금 방장이 뭘 보고 그리는 건지 모르겠음.

-솔직히 유튜브에 저런 식으로 그림 그리는 사람이 있긴 한데 방장 그림 그리는 디테일 정도 뽑는 건 본 적이 없다.

세상엔 천재가 많고 그들 중 일부는 에반젤린처럼 신기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더러 존재한다.

하지만 에반젤린의 그림은 미묘하게 달랐다.

“여기…… 이렇게 하고…… 여길 이렇게 하면…… 됐다. 이제 좀 만족스럽네요.”

에반젤린의 그림 방송은 대개 태블릿을 쓰거나 캔버스를 번갈아 가면서 쓰곤 했지만, 이번만큼은 컴퓨터가 아닌 직접 그리고 싶다는 기색을 내비치는 그녀였다.

그리고 시작된 게 이 그림이었다.

그녀의 취향에 맞는 드래곤을 그려보겠다는 조금 엉뚱한 발상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자…… 그럼 밑그림은 끝났네요.”

-띠링! 내 눈 옹이구멍 님이 5,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오늘 처음 방송 보러 온 건데, 선생님 제 눈이 잘못된 건가요? 밑그림이라고 하기엔 그냥 낙서밖에 안 보이는데요?

“아하 내 눈 옹이구멍 님 후원 감사해요. 낙서라니요. 밑그림이잖아요. 여기가 날개. 여기가 몸체.”

-어허, 신입 이해하려 들지 마. 방장 그림 그리는건 아무리 봐도 이해 범주를 넘어갔음.

-이것이 드래곤족의 스케치???

당혹스러워하는 이들을 뒤로한 채 에반젤린은 이제 본 그림을 그리겠다며 붓을 들었다.

“자. 이제 제대로 작업해볼게요. 오래 기다리느라 지루했죠?”

말은 저리하지만 생각보다 시청자들이 지루해할 이유는 없었다.

생각보다 그녀의 방송 감각이 좋은 탓인지 오디오가 비는 구간이 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방송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짜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이기도 했다.

-어?

이윽고 에반젤린이 서서히 밑 색 위에 제대로 된 스케치와 채색을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캔버스와 똑같은 하얀 물감과 지우개를 이용해 지울 곳은 살짝 지우고 덧씌울 곳은 덧씌운다.

그러자 처음엔 낙서에 불과했던 그림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그림의 구도는 커다란 신전에 앉아있는 한 드래곤의 모습이었다.

에반젤린처럼 두 개의 뿔이 돋아나 있었고 날개는 2쌍이었다.

“흐음…… 여긴 이렇게. 음 좋아.”

집중하기 시작했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녀의 드로잉을 보며 시청자들의 반응이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

-뭔데. 뭔데 실감 나는데.

-아니 원래 여기 방장 그림 이렇게 그렸음?

-그림을 시켰더니 마술을 부리고 있네.

-아니 튜브에서 본게 편집이 아니라고?

새로이 유입된 이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늘 그녀의 방송을 챙겨봤던 이들은 왠지 모를 뿌듯함을 드러냈다.

-이게 우리 방장이다 이 말이야.

-아 드래곤의 그림 실력은 세계제일!!!

-미친ㅋㅋㅋ 볼 때마다 진짜 감탄밖에 안 나온다. 웬만해선 작업하는 거 오래 못 보는데 질리지가 않음.

그렇게 그림이 서서히 완성되기 시작했다.

에반젤린이 그리는 그림은 도저히 물감과 흑연으로 그렸다고 느끼기 어려운 사실감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새하얀 비늘을 지닌 드래곤의 형태가 서서히 갖춰진다.

다만, 용의 생김새 자체는 흔히 알려진 드래곤들과는 조금 달랐다.

“여긴 이렇게 해야죠. 매번 이해할 수가 없었다니까.”

그녀가 붓을 든지 약 10분.

경이적인 속도로 뚝딱 그림을 완성해낸 그녀는 곧 용의 한쪽 눈에 동공을 가볍게 찍었다.

“이걸로…… 끝. 와…… 내가 그렸지만 진짜 귀엽다…….”

대체 어디가?

드래곤의 취향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이 튀어나와야 했다.

하지만 채팅창은 의외로 조용했다.

“음? 왜 그래요?”

평소처럼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신명 나게 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 조용한 채팅창을 보며 에반젤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기요? 혹시 내 목소리 안 들려요?”

-들려…… 들려 방장.

-근데 이거 가만 보니까 방장 본체하고 조금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음…….

“뭐야. 반응들이 왜 그래요? 완성했어요. 이것도 제 채널과 카페에 올려놓을까요?”

-꼭 그래 주십쇼 방장!

-이번엔 진짜 좋다!!

“이상하네. 반응들이 뭔가…….”

갑작스런 반응은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묘한 얼굴로 채팅창과 그림을 번갈아 보던 그녀는 그림을 촬영한 뒤 캔버스를 치웠다.

그리고는 가볍게 물을 만들어 손을 씻어내고는 환하게 웃었다.

“자.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할게요.”

* * *

과거 화룡점정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화룡의 그림을 그리던 그림쟁이가 마지막에 용의 눈을 그려 넣자 용이 살아나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도 흔히 들을 수 있다.

물론, 그건 과장된 묘사로 알려져 있지만 정말 잘 그린 그림.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담기면 마치 착각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던가.

왜 이런 주제를 들먹이고 있는가 하면 에반젤린의 신변을 다시 지키기 시작한 보팔레빗의 분신체 하나가 그녀의 채널에 대한 소식을 전해왔기 때문이었다.

대륙 회의를 진행하기에 앞서 잠시 짬을 냈건만 별의별 일을 다 겪는다.

“얘는 그림을 그린다더니 무슨 짓을 한 거야.”

평소라면 웃긴 이야기를 나누거나 에반젤린의 방송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시청자들이다.

하지만 현재 팬카페는 물론, 기본 채널까지도 그녀의 이야기보다는 다른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난 용박이가 아니야 미친놈들아…….

-살다 살다 파충류가 예뻐 보이긴 처음이네. 진짜…….

-츄라이 츄라이…….

-내가, 내가 어쩌다가…….

“내가 살면서 여러 이상 성욕자들을 보긴 했지만 이건 좀…… 문제가 있는데.”

다른 이의 방송이면 차라리 덜하지. 에반젤린의 방송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녀는 겉보기엔 사춘기 때의 소녀로 보이지만 실제나이는 아직 다리안과 동갑이었다.

그런 만큼 이런 주제에 관해선 아무리 정신 나간 시청자들이라도 자제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는 게시판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말박이 차박이 내가 여럿 봐왔지만 그건 그렇게 부르는 총칭이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으나 원인은 알 것 같았다.

에반젤린의 레어로 대뜸 쳐들어간 나는 그녀가 보관해둔 드래곤의 그림을 보고 나서 이해할 수 있었다.

“매혹?”

“음? 아빠 언제 온 거에요?”

내가 레어에 와있다는 사실에 놀란 듯 상어 모양의 잠옷에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온 에반젤린이 말했다.

“음? 아 그 그림. 어때요? 잘 그렸죠?”

“그래. 너무 잘 그렸다.”

드래곤의 그림은 지금까지 그녀가 그린 어떤 그림 이상으로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 그려도 너무 잘 그렸어. 거기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까지 깃들어버렸네.”

이쯤 되니 게시판이고 방송을 보던 시청자들이 왜 그렇게 된 건지 이해가 됐다.

“에린아.”

“네?”

“네 그림 때문에 네 시청자는 물론, 그림을 본 이들이 죄다 매혹 상태에 빠진 모양이다.”

차라리 인간이면 덜하지.

하필 드래곤에게 빠지다니.

덕분에 에린의 방송이 여기저기서 뜨거운 감자가 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는 걸 아직 그녀는 모르는 듯 보였다.

“이거 태워도 소용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이미 걸린 매혹을 어떻게 할까.

독한 마음 품으면 그냥 그림 한 장으로 수많은 인간들 취향을 바꿔놨다고 해도 상관없겠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에린아. 우선 채널에 올린 이 그림 다 내려.”

“네? 시…… 싫어요! 그래도 진짜 열심히 그린 건데!”

“그래. 너무 잘 그려서 문제야.”

“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내 말에 에반젤린이 떨떠름하게 새하얀 용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너무 잘 그려진 게 문젠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지 저 그림 보고 인간들이 단체로 매혹 상태에 들어갔다고.”

“진짜 취향대로 그린 건데…….”

이전과 달리 그림 한 장으로 대혼란을 일으켜버린 에반젤린에게서 붓을 빼앗아야 하나 고민이 강하게 들었다.

아쉬운 표정으로 그림을 보던 에반젤린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그림을 내려야 했다.

에반젤린은 방지포를 이용해 그림이 놓인 캔버스를 감싼 뒤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 *

이미 퍼져나갔다곤 하지만 에반젤린의 그림을 영상을 통해 그 자리에서 직접 본 이들이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클립이나 다른 방식을 통해 뒤늦게 접한 이들의 상태는 그나마 나았다.

“푸훕…….”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 나는 자리에 앉아있다가 채신머리없이 쿡쿡 웃어댔다.

웃기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떻게 되먹은게 그림 한 장이 다수의 인간을 매혹한단 말인가.

차박이에 말박이에 아주 별의별 이상 성욕자를 많이 봤지만 진지하게 용을 보고 두근거리는 미친놈들이 나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실제로 이 때문에 인터넷상에선 에반젤린이 새로운 독을 풀었다며 사방팔방으로 비명을 질러대는 이들이 다수 늘어난 상황이었다.

동시에 여러 인간들의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모여들었다.

긴장한 이들의 표정.

당황한 이들의 얼굴.

또는 이 새끼는 뭐 하는 짓이지? 라는 표정까지 담겨있다.

“데이비 왕자. 아니 이제 대공이지. 데이비 대공, 왜 웃지?”

팔짱을 낀 채 방금까지 마족의 대표로 온 알리타와 말싸움을 하던 콘타스 대제가 약간 불쾌함을 담아 물었다.

하여튼 젊은 양반이 간도 크기 그지없다.

“아닙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웃긴 상황이 생각나서.”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린 채 어이없는 대답을 해주자 알리타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마왕이면서, 마왕인 양반이 자신에게 다 떠넘기고 혼자 멀찍이 구경이나 하고 있냐는 시선이었고,

일부는 내 웃음에 혹시 모를 의미를 담아 경계한다.

반면 나를 잘 알고 있는 일부는 내가 정말로 웃긴 일이 생각나서 웃었다고 판단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비 대공. 아무리 그래도 지금 대공은 라운왕국의 대표로서 와있다는 걸 자각했으면 하는군.”

“미안합니다. 어디까지 했죠?”

“…….”

콘타스 대제가 뭐 이딴 놈이 다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대공. 하…… 아니다 말해봐야 짐의 입만 아플 뿐. 마족의 대표. 우리의 요구조건은 변하지 않는다. 종전협정에 따른 우리의 요구사항은 총 다섯 가지. 마족의 군비를 지금의 10분의 1로 줄일 것. 추가적인 무기 개발에 착수하지 않을 것. 그리고 배상금으로 미리 고지한 양의 배상을 할 것. 너희 마족들이 있는 지역에 대해 공개하고 무역로를 개방할 것. 마지막으로 마왕의 공식적인 사죄다.”

“욕심이 너무 과한 거 아니야?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

“웃기지 않나? 이런 상황에 마왕이라는 작자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니. 그리고 아무리 대표라지만 너무 예의가 없군.”

“적어도 홀른의 예의를 마족에게 강요하지 마.”

“웃기는군. 지금 이곳은 인간 진영이다. 그리고, 너희는 종전 협상에서 그리 유리한 입장이 아닐 텐데. 패배자들이.”

“뭐라고?!”

쾅!!!

대제의 물음에 알리타가 격분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동시에 콘타스 대제의 곁에 있던 두 명의 호위가 일제히 곡도를 뽑아 들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었다.

콘타스 대제는 시종일관 알리타를 압박하며 그녀를 몰아세웠다.

아무리 아스타로트의 손녀이며 현 마계를 이끄는 존재라 해도 알리타는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다.

어릴 때부터 제국을 이끌어온 콘타스 대제의 뻔뻔함과 돌직구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으리라.

당장이라도 싸움이 터질 것 같은 상황.

이 상황은 벌써 이틀째 이어지고 있었다.

에반젤린의 그림 사고가 터지기 하루 전의 이야기였다.

자잘한 협상은 잘만 하더니 정작 중요한 협상 상황에 와서 이렇게 흔들릴 줄이야.

나는 이 상황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다 문득 에반젤린의 상황이 다시 떠올랐다.

“푸훕!!”

그리고 나도 모르게 웃음을 다시 터뜨렸고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다.

“데이비 올 라운 대공…… 짐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것인가? 왕자의 주도하에 이곳의 이들이 모두 모였다. 그런데 정작 대공의 행동은 대체 뭐지?”

콘타스 대제의 노기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하하 미안합니다. 딸아이가 사고를 좀 쳤는데 웃긴 일이 터져서요.”

“뭐…… 뭐라?”

대제의 표정이 험악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글쎄 들어보십시오. 들으면 웃길 테니. 딸아이가 드래곤의 그림을 그렸는데 말입니다. 그 그림이 얼마나 잘 그려진 건지 그걸 본 사람들이 드래곤과 사랑에 빠진다지 뭡니까.”

최대한 이들이 이해할 수 있게 돌려 말하긴 했지만 사실 이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대공은 협상에 참여할 준비가 안 된 듯하군. 미안하지만 퇴장해주게. 이 일은 라운왕국에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대제의 말에 살리반 황제는 혹여라도 내가 꼭지가 돌아서 엎어버리지 않을까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쿡쿡 웃어대던 나는 천천히 웃음을 거둔 채 말했다.

“아아 죄송합니다. 딸아이가 너무 기특해서 말이죠. 그래요. 뭐…… 협상 중이었죠.”

“대공. 짐은 분명 퇴장하고 다음에 다시 참가하라 하였네. 지금까지 충분히 대공의 억지에 놀아나 주고 있건만. 이 이상 짐을 농락한다면 협상이고 뭐고 당장 돌아가도록 하지.”

대제는 내게 호의적이지만 생각보다 공적인 면은 분명 존재했다.

그리고 지금 내 행동은 분명 국제연합의 공적인 처우에 확실히 반하는 행동이었다.

이에 나는 억지로 미소를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국제연합의 입장이 현재 마족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죠. 반대로 마족들이 요구한 버려진 땅을 달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고요.”

“그렇지.”

마족이 요구한 것은 간단했다.

종전 협상 이후 인간과 마족 사이에 분쟁 금지. 그리고 대륙 서남단의 버려진 땅들을 양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면 협상이 진행될 턱이 없었다.

이에 나는 담담하게 해결책을 놓았다.

“그런데 그거, 국제연합에 필요한 요구사항입니까?”

“뭐라?”

“저는 조금 더 멀리 보고 제안하고 싶네요. 마족은 마족 특유의 기술과 문화가 있습니다. 다만 마족들이 있는 땅은 인간들의 대륙으로 넘어오기 위해선 여러 요소가 필요하지요.”

정확히는 그런 것도 필요 없지만 말이다.

“그래서 버려진 땅을 요구하는 겁니다. 인간과 교류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니까요. 적어도 이 부분에선 서로 의견이 일치하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배상 문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마족은 전범 종족이다.”

“예 그랬죠. 하지만 전쟁을 일삼은 자들은 전부 현 마왕에 의해 숙청되었고, 지금의 마족들은 전쟁을 반대하던 이들입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마족이 인간과 전쟁을 벌였냐는 것이겠지.”

대제의 반박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돌려 말해도 마족이 인간을 선제 타격한 사실은 변치 않아요.”

“그러니 배상 문제…….”

“배상 문제는 서로 윈윈하는 쪽으로 가죠. 현재 마족들이 있는 땅의 자원들은 티오니스 대륙을 좀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프로마티아 강철이나 마족들의 땅에서 자라는 식용 동물들의 가죽, 뿔, 고기나 젖. 그 외에도 그곳에서만 자라는 특수한 시약 재료나 약초도 존재합니다.”

싸움 중에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내 제안에 대제가 팔짱을 꼈다.

“계속해보라.”

“길게 보시죠. 당장 배상금을 받아낸다면요, 뭐 실제로도 불가능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마족이 굳이 인간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인간들은 마족이 있는 위치를 모르니 반격을 걱정할 필요도 없죠. 그런 마당에 굳이 손해를 봐가면서 화해할 이유?”

절대 없지.

“그렇다면 마족은 어째서 화해를 바라는 것이지?”

“증오의 연쇄를 끊어버리고 사이좋게 지내고자 하는 현 마왕의 의도니까요. 알지도 못하는 수천 년 전의 증오를 품고 싸울 이유가 사실상 있습니까?”

“그렇다고 하기엔 마족은 전쟁을 일으켰다.”

“8 서클에서 9 서클의 경지를 지닌 초대리치, 닉스.”

내 대답에 데오르트 황제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는 초대리치 닉스라는 존재를 레이나를 통해 들은 바가 있었다.

“수천 년간 마족을 조종해온 또라이들이 존재했으니까요. 그들에게 놀아난 마족들은 그저 이용당한 겁니다.”

그 말에 대제가 한 손으로 턱을 어루만졌다.

반면 린디스의 데오르트 황제는 이놈 봐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장인어른은 눈치가 너무 빨라서 문제였다.

“그러니 서로의 자원과 교류를 조약으로 일정 기간 고정하고 서로 필요한 것들을 교환하는 겁니다. 그에 따른 가치 조율은 따로 해야겠지만요.”

다만 선제 타격한 문제는 있으니 적어도 5년에서 10년 정도는 마족이 조금 손해 보는 장사를 해야 할 것이다.

“향후 5년 정도. 마족은 피해 국가에게 더욱 싼 값에 자원을 양도해주면 됩니다. 적어도 배상금처럼 크게 부담이 되진 않겠지요.”

언 듯 보면 마족의 등골을 빼먹는 느낌이지만 상관없었다.

앞서 언급한 일부 자원들은 마족들이 있는 땅 깊숙이 방대하게 매장되어있고 딱히 마족들의 삶에는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반대로 마족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그런 것들을 주고받아 낼 수 있다면 그 또한 어느 정도 이득이 되리라.

“얼굴 붉히면서 싸워서 얻어낸 배상금. 그거 국제연합에 돌아가면 당장은 이득이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의 배분으로 싸움이 터질 겁니다.”

누가 더 많이 챙겨가는가 하고 말이다.

정작 피해국가들의 입장에선 이쪽도 저쪽도 달갑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들도 자신들의 왕국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선 상당한 양의 자원이 필요한 게 사실이었다.

증오에만 매달려있기에는 국가를 운영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는 배상보다는 차라리 장기적인 자원의 수급이 더 이득이었다.

“마족의 군비는…….”

“그 점에 대해선 뭐…… 마왕과 제가 협약했습니다. 마족과 인간 사이에 불화가 생길 경우. 저와 마왕이 동시 개입하겠습니다. 공평하게 개짓거리를 하는 쪽을 여신께 맹세코 후회하게 만들어야지요.”

다른 이도 아니고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협상 이후에 쓸데없는 호작질을 부리면 직접 박살 내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그 대상이 마족이건 인간이건.

언뜻 보면 안심되는 제안이지만 그들 모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데이비 대공. 언제부터 마족과 이렇게 긴밀한 관계가 되었지?”

그 물음에 나는 그들에게 조금 잔인한 이야기를 내뱉었다.

“여신의 계시,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만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물론 계시는 반쯤 거짓이었다.

“자애의 여신께서는 오래된 증오에 묶여 이유 없는 피를 흘리는 그분의 자식들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족도 여신의 자식이다. 이걸 말하고 싶은 건가?”

“정확히 수천 년 전 마족은 인간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어요. 하지만 초대리치 닉스를 포함한 몇몇 마족과 인간들이 벌인 일이니까요.”

나는 돌려서 말했다. 계속된 전쟁은 그때 욕심을 부려 전쟁을 일으킨놈들의 손에 놀아나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애초에 마족들이 내놓은 조건은 제가 이미 마왕과 협상을 마친 후에 내놓은 결론들입니다. 당장은 조금 손해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마족들도 제법 이득일 테니.”

이후 나는 그들의 의견을 다시 물었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군.”

“우리 팔란은 과거 마족과의 전쟁에서 최전선에 섰습니다. 그렇기에 마족을 쉬이 믿을 순 없지만, 데이비 대공의 말대로 장기적인 이득이 된다면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지요.”

어차피 받아들이지 않아도 이득이 없다면 이득이 있는 쪽을 택하는 게 옳은 일일 테니까.

팔란의 황제 살리반이 찬성표를 먼저 던졌다.

국가의 입장은 개개인의 입장과는 다르기에 개인감정이 묻어나선 곤란했다.

물론 여기서 찬성표를 던진다고 결정 나는 건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의중을 파악할 순 있으리라.

이후.

“어차피 배상을 받아낸들 린디스에서 얻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허나 적어도 뒤통수를 칠 존재가 사라지는 건 나쁘지 않겠군.”

린디스 제국에서도 찬성표가 나왔다.

성국의 대표는 여신의 이름까지 나온 마당에 마냥 거부할 수 없었기에 마지못해 찬성표를 던졌다.

이후 다른 제후국에서도 여러 찬반이 나왔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콘타스 대제뿐이었다.

“대제. 결단에 시간이 필요하십니까?”

내 물음에 대제는 나를 보다 눈을 감았다.

“아니, 처음부터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다.”

이전에 메테오를 띄워놓고 그들을 설득한 것부터 이미 협상의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마족 측은?”

“……우리는 종전에 찬성하는 입장이야. 더 이상 전쟁은 의미가 없으니.”

결국 과반수 다수결에 의해 국제연합과 마족의 종전 협정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손바닥 안이라고 결국 연합이 원하는 것은 이미 내가 마족들과 어느 정도 조율을 해놨던 만큼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그때였다.

대제가 말없이 알리타를 보다 말했다.

“한가지 짚고 갔으면 하는군.”

“뭡니까?”

“종잇조각에 믿기엔 조약의 가치가 너무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다.”

“확실한 보증수표가 필요하다는 거네요.”

내 대답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서 연합의 왕국 중 누군가가 마족과 혼인 동맹을 맺어 그 연결 끈을 만들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

그의 말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콘타스 대제는 이런 인간이었다. 결혼을 상당히 정치도구로 많이 이용하는 편이었다.

물론 겉으론 그럴 뿐 그렇게 정이 없는 인간은 아니지만 말이다.

“왜요. 대제. 이 말괄량이라도 부인으로 들이실 생각입니까?”

“뭐? 야! 미쳤어?!”

알리타가 불같이 화를 내며 내게 역정을 부렸다.

하지만 대제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보였다.

“뭐. 필요하다면 해야겠지. 하지만 그보다 더 적합한 인물이 있지 않나.”

그가 피식 웃으며 나를 본다.

이 인간 이거 설마…….

“데이비 왕자. 멋대로 인간을 대표해서 마왕과 협상을 했으니 책임도 같이 져야지.”

“대제.”

나는 웃는 얼굴로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협상 회의장의 창공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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