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05화
데이비는 말없이 고개를 까딱이며 초단이의 가야금 연주 소리와 노래를 듣고 있는 뮤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생전에 그녀는 뮤즈, 혹은 뮤트라고 불렸는데 그 이름의 진위는 나도 알지 못한다.
“솔직히 듣고 놀랐습니다.”
“또 왜요. 뭐 받아갈 게 있다고 나를 찾아와요. 훠이훠이~ 줄 거 없으니 이제 가세요.”
뮤트의 귀찮다는 듯한 태도에 나는 어깨를 대강 으쓱여 보였다.
“아니 그렇잖아요. 전에 녀석이 현악기로 지옥문을 열었는데. 저렇게 변한다고?”
단순히 놀라는 수준을 넘어서 현재 영상에 투고된 초단이의 음악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내 의문에 뮤트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혼자 배우는 놈들의 단점이 뭔지 아나요? 자기가 뭐가 문제인지를 몰라요.”
그 한마디에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런 점에서 진짜 소름이 돋네. 어떻게 교정 두 번 해주니까 저렇게 변할 수가 있는 건지.”
그녀도 솔직히 황당함이 앞선 듯 보였다.
“교정 해준 거로 저렇게 역변한다고요?”
“근본적으로 악기연주라는 것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걸 바로잡아주었을 뿐. 그 이후에 내가 해준 건 연주 자체에 감정을 담는 것이죠.”
그녀는 작은 체구를 폴짝 일으킨 뒤 내게 다가와 내 복부를 툭툭 두드렸다.
“네가 부르는 노래는 그런 근본적인 문제를 한참 넘어섰지만.”
“아니 그걸 또 이렇게 까시네. 말했잖아요. 그래도 남들 듣기엔 무난한 편이라고.”
“남들이 듣기 무난해서 여기 작자들이 죄다 귀를 틀어막았나? 어디 가서 나한테 노래 배웠다고 하지 말아요. 그리고 지금이야 나아진 편이지 처음엔 진짜 내가 이 새끼를 가르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진짜 고민 많이 했어요.”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내 노래 실력이 꽤 좋아진 편이라는 점이다.
처음엔 영웅들을 겁먹게 만든 노래지만, 지금의 내 노래는 못 들어줄 정도는 아니라는 평이니까.
“아. 그리고, 신성력으로 덮어써 부르면 음색 보정을 받아서 아무도 몰라요.”
“데이비. 세간에선 그걸 사기라고 불러요, 이 사기꾼 자식아. 네 곁에 있는 정령들도 악기 연주할 땐 춤추다가 노래만 부르면 도망가는 거 몰라요?”
빈정거리며 말하지만, 그녀는 초단이의 역변이 꽤 흥미로운 듯했다.
“뭐랄까. 막혀있던 댐의 수로를 열었더니 재능이 폭발한 느낌. 오랜만에 가르치는 재미가 있네요.”
초단이가 뮤트에게 배운 것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의문스러웠다.
“제가 초단이 악기 교정해보려고 했을 땐 안되던데.”
타악기는 면을 찢었고 현악기는 지옥의 합창을 방불케 했다.
자신이 재능이 없다 생각하여 우울해져 있던 초단이는 결국 악기를 놓기까지 했다.
그런데. 저렇게 변한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다만 저건 시너지나 다름없어요. 가야금과 노래가 합쳐지고 내가 가르쳐준 것들이 녹아들어서 저렇게 미친 시너지가 나오는 거지. 지금도 타악기나 관악기 건반악기를 던져주면…….”
당시 느꼈던 지옥의 악기 세례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인가.
“물론, 장담하는데. 네 딸은 너보다 재능이 출중해요. 그것도 압도적으로, 그러니까 길어야 몇 달 안에 널 뛰어넘을 거예요.”
그 한마디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내가 뮤트에게 음악을 배운 것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도 초단이는 몇 달 만에 그걸 따라잡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자기의 문제점이 교정된 이상 다른 악기도 처음처럼 끔찍하지도 않을 것이고.”
“허…… 어이가 없네.”
“이게 보는 눈이라는 겁니다. 애송아. 니가 가르치는 거랑 내가 가르치는 거랑 같다고 봐요?”
저 반말과 존대가 섞인 얄미운 말투는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가르쳐준 게 확연히 녹아들 때까지는 사고 못 치게 하세요.”
듣는 귀가 많이 아프니.
그녀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단이의 역변에 대해선 노래를 직접 들었던 일리나도 상당히 놀란 기색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초단이가 자신이 원하던 취미를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자랑스럽다. 초단아.”
“헤헤. 아직 멀었어요. 뮤트 님 덕분에 제가 연주한 게 얼마나 미숙했는지 알게 된 걸요.”
초단이는 일반적인 생명체가 아니기에 보통 생명체가 보는 것과 다른 것을 보기도 한다.
아마 초단이가 만들어낸 지옥의 세레나데는 그것이 주요 원인이었으리라.
아무리 자아가 성장해도 경험은 단시간에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럼 간단하게 튕겨볼까?”
내가 간단한 타악기를 꺼내 들고 제안하자 초단이가 눈을 반짝였다.
“저 그럼 이걸로 해봐도 될까요?”
그녀가 이번에 꺼낸 것은 플롯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관악기로 높은 음역을 소화하기도 하는 악기이기도 했다.
“좋아.”
이후 그녀가 숨을 짧게 들이킨 뒤 숨결을 불어넣기 시작하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간단하게 박자를 넣어 면을 두드렸다.
두둥탁. 둥탁.
경쾌한 소리가 방안에 울려퍼지자 초단이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연주를 시작했다.
“…….”
연주 자체는 길지 않았다.
하지만 연주가 끝났을 때 나와 일리나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처음처럼 지옥문이 열리지는 않는데…….”
가야금 연주 영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너무 미숙했다.
그제야 보이기도 했다. 뮤트가 말한 나는 알아채지 못한 초단이의 나쁜 버릇의 존재를 말이다.
“말로 설명하기가 참 힘드네.”
“으음…… 괜찮은데 그래도? 엄청 좋아진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뮤트가 말하던 압도적인 재능이 맞는지 조금 의문스럽기도 했다.
“으음…… 역시 저는 재능이 없는 건가요?”
초단이가 우울하게 묻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충분히 잘해줬어.”
그래, 나쁘게 생각할 건 없었다.
재능이라는 게 꼭 시작부터 잘하라는 법은 없다. 어떤 계기를 시작으로 역변하는 것도 재능.
초단이는 후자의 케이스였다.
자신이 잘못 알고 있던 것을 바로잡은 거로 이렇게 변할 수 있다면 세상 그 누구도 악기를 못 다루지 않을 테니까.
“정말요?”
“그래. 몇 달만 지나면 나보다 잘하게 될거야.”
뭐, 누구한테 보여줄 것도 아니고. 무슨 상관이랴, 그렇게 생각했건만.
며칠 뒤에 에반젤린이 어떤 소식을 가져왔다.
* * *
에반젤린은 초단이의 과거 연주가 어쨌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러니까. 시우 오빠의 친척이 유명한 아티스트인데. 언니 영상 보고 난 뒤로 꼭 좀 같이 작업하고 싶다고 매달린다고. 어떻게 안 되냐길래.”
“받아들였어?”
“아뇨. 아직 받아들이진 않았는데…….”
그녀가 초단이의 눈치를 본다.
관악기를 이리저리 눌러보며 소리를 내고 있던 초단이는 뭔가 깨달은 듯 눈을 감고 플루트를 다시 불기 시작했다.
“미친.”
“세상에…….”
동시에 나와 일리나의 입에서 헉 소리가 났다.
절로 소름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찌릿하게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압도적인 재능이라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
변태 같은 감성이 있는 뮤트가 왜 초단이를 그렇게 가르치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은 전율이었다.
근본적인 문제점을 인지하고 자신의 연주를 몇 번 해본 것으로 또다시 진화라도 하듯 그녀의 연주가 변한 것이다.
처음엔 조금 미묘해도 무난한 정도였다면 지금은 척 들어도 어? 소리가 나올 정도로 변해 있었다.
“와…… 언니 플루트도 잘해?”
에반젤린이 놀란 듯 묻자 초단이가 깜짝 놀라며 플루트를 입에서 떼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 연습하는 거라…….”
“아빠도 같이 할 수 있으면 더없이 좋을 거 같다고 하던데. 싫다고 하면 거절하고 올게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민했다.
에반젤린의 제안은 조금 당혹스럽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마침 뮤트 쪽에서도 그런 기회가 있으면 잡으라고 했었으니.
“좋아. 해볼까? 그런데 에린이 너도 악기 좋아하는 거 있었냐?”
내 말에 그녀는 손가락을 탈탈 털며 씨익 웃었다.
“난 두드리는 악기는 다 좋아해요.”
제 엄마 성격 어디 안 간다더니.
에반젤린의 힘으로도 찢어지지 않는 튼튼한 타악기를 만들어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결과적으로 의도하지 않게 시우의 친척 동생 시현의 꿈이 이루어진 꼴이었다.
“어이쿠! 어서 오세요! 세상에! 이렇게 꿈이 이루어지다니! 아니 이럴 게 아니지! 어서 들어오세요! 누추하지만 일단 뭐라도 좀…….”
허둥지둥하며 반기는 젊은 청년을 보며 나를 안내해왔던 시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제 친척이 좀…….”
“괜찮아요. 원래 예술가들이 그렇잖아요.”
“저래 봬도 꽤 유명한 아티스트예요. 어릴 때부터 여기저기 각종 수상 경력도 있고. 사실 우리 집안에서 제일 잘 나가는 놈이기도 하죠.”
한때 탑티어급 프로게이머가 하는 말치고는 신빙성이 없지만 유명한 아티스트라는 건 부정할 기미가 없어 보였다.
밤새도록 작업을 했는지 부스스한 머리에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하하. 이렇게 바로 찾아와 주실 줄 알았으면 광이라도 좀 내고 준비를 했었어야 했는데.”
“괜찮아요. 그보다 제안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 혹시 괜찮으신가요? 혹시라도 마음에 안 드시면 제가 조율을 좀 하겠습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왜 이런 걸 원했는지.”
내 질문에 그가 마치 회상하듯 고개를 들었다.
“그때 봤습니다. 피아노를 연주하시던 그날이요.”
그의 말에 내가 흥미로움을 담아 탄성을 흘렸다.
“그때 느꼈어요. 이 사람이랑 작업 한번 할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다. 그래서 뻔뻔하게 시우 형에게 매달려서 좀 끈을 이어보려 했는데. 그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하하……. 그러던 차에 에반젤린 씨의 영상을 보다가 퍼뜩 깨달았죠. 그냥 넘기기엔 너무 아까운 실력 아닌가 하고.”
그가 말했다.
“승낙만 해주신다면 제 쪽에서 필요한 것들은 죄다 지원할 겁니다. 기술적이든 자원 쪽이든요.”
그가 손뼉을 쳤다.
“어떠신가요?”
“음…… 해보고 싶어요. 아버지.”
초단이는 그와 작업을 해보는 게 제법 흥미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좋은 경험도 될거 같고. 그럼 해보죠.”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그가 다시 없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뜸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마치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말이다.
* * *
초단이가 시현과 악기를 조율하고 있는 동안 나는 일리나와 시우와 함께 그의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세상에. 악기가 정말로 많네요.”
일리나는 신기하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그러게요. 저도 이 정도로 많은 줄은 처음 알았네요. 아 저건 알아요. 저거 그…… 그 뭐더라.”
“오카리나.”
“아 그래 오카리나. 어라? 성자님 오카리나 알고 계셨어요?”
“지구 문화는 생각보다 잘 아는 편입니다.”
내 대답에 시우가 신기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놈이 저래 보여도요. 작업에 들어가면 진짜 업계에서도 알아주는 미친놈이거든요.”
그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저놈 유학 시절부터 유명했어요. 또라이라고. 음악에 관련된 거면 위아래도 없는 미친놈.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날뛰는 놈인데…… 뭐라고 해야 하나, 실력이 좋다 보니 누가 뭐라 하지도 못하는 정도였죠. 제가 걱정하는 건…….”
혹여라도 작업에 들어가서 눈 돌아가 버린 시현이 괜히 초단이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 게 아닌지 걱정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지 일리나는 키득거리며 내 등을 두드렸다.
“그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라.”
“괜찮아요. 그런 건 익숙하기도 하고.”
또 궁금하기도 했다.
초단이가 개화한 저 말도 안 되는 재능을 봤을 때. 그는 어떻게 될지 하고 말이다.
막상 초단이의 재능에 대해 생각하니 괜히 콧대가 높아지는 기분이었다.
능력 있는 자식을 자랑하는 부모의 마음이 이러할까.
* * *
초단이의 재능의 무서운 점은 악기를 잘 다루냐 못 다루느냐가 아니었다.
곁에서 오랜시간 악기를 배워온 사람이 허탈하게 만들어버리는 성장 속도에 있었다.
“이게 무슨…….”
벙찐 얼굴로 시현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처음 초단이가 가야금이 아닌 그가 바라던 대로 다른 악기를 쓰겠다고 했을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가 초단이에게서 본 것은 기본적인 음악 감각과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천상의 목소리였다.
그렇기에 메인은 그 부분이고 그녀가 다른 악기를 써서 미숙하다면 살살 달래서 그녀의 장기를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다른 악기를 써봐도 되냐 말했을 때 조금 당황하긴 해도 어렵지 않게 수긍했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대금이라는 관악기를 집어 들었을 때 첫 번째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국악 전공인가? 보통 가야금과 대금이 둘 다 국악기라도 해도 둘 다 같이 전공하는 이는 잘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찰나. 푸푸 소리와 함께 초보들이 자주 내는 소리를 내지 못하는 꼴을 보며 그가 푸흡하고 웃고 말았다.
생각보다 소리를 내기가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플루트는 불면서 대금을 못 분다니. 둘 다 어렵긴 매한가지인데.
괜히 처음으로 악기를 배우는 초보가 생각나 그는 평소답지 않게 그녀에게 자세하게 대금을 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대금이야 그도 전공은 아니지만 기본 정도는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몇 차례 시행착오 끝에 점점 소리를 내게 되었을 때였다.
이변이 발생했다.
엉성하기 그지없는 소리를 내던 그녀가 몇 차례 같은 실수를 반복하더니 눈을 살짝 크게 뜨고는 탄성을 흘린 것이다.
“아. 이렇게 하는 거구나.”
그리고.
그녀의 손끝과 입술을 통해 대금에서 놀라운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방금 처음 불었다면서. 대체 이거 뭔데…….’
특별한 기교가 서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부는 대금 소리에는 마치 최면을 걸듯 사람의 마음을 쥐고 흔들어버리는 떨림이 전해져왔다.
천재.
섬뜩한 천재.
아티스트들이 절대로 함부로 접촉해선 안 되는 존재가 바로 눈앞에 나타난 꼴이었다.
흔히들 괴담처럼 옛날 유학 당시에 선배나 교수들이 우스갯소리로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재능. 너무 높은 벽 너머에 있는 이의 연주를 직접 들은 이들 중에는 자신의 연주에 끝내 만족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이들이 존재한다고 했던가.
어느 분야건 그런 존재들이 있겠지만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아티스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독약과 같았다.
모차르트를 질투했으나 끝내 넘어서지 못한 살리에리의 이야기처럼.
물론 진짜 내막은 전혀 다를 수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사안이기도 했다.
“그냥 헛소리로 치부했는데…….”
마치 그의 아티스트 경력을 모조리 부정하는듯한 절절한 소리에 그는 마른세수를 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그를 보며 연주를 하던 초단이가 깜짝 놀라 대금을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왔다.
핏발이 선 눈이 그의 손가락 틈 사이로 보인다.
“괘……괜찮으세요?!”
놀란 초단이의 질문에 그가 조용히 초단이를 시야에 담았다.
“한 번 더.”
“네?”
“이번엔 이걸로.”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다른 악기를 가져와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에 초단이는 조금 부담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저…… 이것도 처음인데…….”
“괜찮아요. 내가 잘 가르쳐줄게요.”
그렇게 말하며 기본적인 파지법부터 간단한 소리 내는 법. 그리고 악보를 쥐여준다.
이에 초단이는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다시 연주를 반복하기 시작했고 끔찍한 수준으로 연주되던 악기는 고작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무수히 겪어야 할 시간을 모조리 스킵해 버리는 경이적인 현상을 만들어냈다.
“와…….”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광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초단이 씨.”
그가 악기를 연주하던 초단이의 손을 꼭 잡았다.
“네……네?”
“저와 결혼합시다. 둘이 함께 하면 우린 진짜 역사에 이름을 남길 대작을 만들 수 있어요.”
빠아악!!
순식간에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의 머리가 돌아갔고, 그대로 풀썩 쓰러져 기절해버렸다.
“시……시우 오빠?”
“미안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이 미친 새끼…….”
이 상황을 데이비가 못 들었으니 다행이라며 시우가 안도했다.
그때였다.
쾅쾅쾅쾅!!
“미스터 박!! 당장 문 열어 이 씹어먹을 개자식아!”
어디선가 들려온 외국어가 요란스레 울려 퍼졌다.
시현의 작업실은 인적이 드문 곳이기에 따로 이웃이 찾아올 일도 없을 텐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정작 박시현은 기절해있었고 바깥의 방문자는 당장 문을 부숴버릴 기세를 내비쳤다.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 어?! 당장 문 열어!!”
악에 받친듯한 여성의 외침이 공허하게 울러 펴졌다.
“어쩌죠?”
“어쩌긴요. 문 열어야죠.”
“일단 저놈 깨울게요. 어휴 이게 무슨 난리인지.”
그리 말하며 바가지에 물을 퍼담은 시우는 가차 없이 시현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어버리며 생각했다.
설마…… 이 새끼 초단이와 작업하겠다고 세계적인 아티스트들 죄다 뒤통수 후려갈기고 혼자 도망 온 건 아니겠지.
아무리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젊은 천재 아티스트라고 할지라도.
한때 국뽕의 상징이라며 이름이 오르내리던 박시현이라도.
젊은 나이에 교수들까지 극찬을 아끼지 않고 대회에 나갔다 하면 상을 쓸어 담아온 놈이라 할지라도.
한때 지구가 멸망 직전의 위기를 겪어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이쪽 업계도 흔들린 탓에 새로운 신성들이 힘이 센 건 알겠는데.
설마 그런 미친 짓을 저질렀을까.
“아니 이 새끼는 진짜 했을 거 같다…….”
찬물을 뒤집어쓰고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시현을 게슴츠레 보며 시우가 물었다.
“야. 바른대로 말해. 밖에 저거 누구야.”
“어……어? 누구?”
“저기 밖에.”
“헤이!! 미스터 박!!”
악다구니 쓰는 목소리에 잠시 고민하던 시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제 잘난 맛에 사는 저런 반푼이들. 세계적인 아티스트도 뭣도 아니야. 지금 얘가 진짜지……”
시현의 시큰둥한 대답에 고개를 슬쩍 돌려 창밖을 본 시우는 뭔가 익숙한 인물이 화가 난 얼굴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쥴리아나…….
“설마.”
이놈이 초단이와 작업하겠다고 지금 같이 세계적인 아티스트 동료 하나를 물 먹였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