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09화
안 그래도 꽤 유명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더욱 유명해져 있었다.
초단이는 멍한 얼굴로 시현이 보여준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거 보여? 아니 의도한 건 아닌데. 네가 부른 노래가 네 노래로 등록은 되어있었거든. 그런데 이게 어…… 음…….”
“…….”
“걱정 마. 네 실력을 의심하는 이는 없고, 지금 난리 난 것도 처음만 그렇지 시간이 지나면 다시 흐지부지될 테니까. 널 귀찮게 하는 요소는 없을 거야.”
음악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들려주는 건 좋지만, 이정도로 과한 관심은 초단이로서도 얼떨떨했다.
하루아침에 반짝스타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물론 영상 투고사이트 덕분에 이미 한껏 유명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번 영상 투고로 인해 더욱 많은 인기를 끈 것도 사실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반응이 좋다면 기분이 좋을 수밖에.
초단이는 자신의 연주에 자신감이 어느 정도 붙었는지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시현이 뮤트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곡은 총 10곡으로 그중 하나만 공개했을 뿐이었던 만큼 많은 이들의 기대를 더욱 한몸에 받았다.
물론, 이 사실이 달갑지 않은 이도 있었다.
“브레디. 경고하는데. 괜한 짓 하지 마라.”
“아버지.”
“파고들면 불리한 건 이쪽이다. 네 부탁을 들어주긴 했다만, 티오니스 성자가 끼어 있다면 여기서 발을 빼라.”
“아버지!!”
“계산적으로 생각해라. 여기서 네가 욕심을 부려본들 돌아오는 게 없다.”
“박시현 그놈이 없으면 상당히 힘든 거 아시잖아요!”
“그러기에 잘 구슬렸어야지!”
빌어먹을 박시현.
대체 그놈이 왜 티오니스 성자와 함께 하는지 솔직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렇다 할 접점이 있었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 그로썬 의문스러웠다.
브레디에게 있어서 그의 뒷배를 담당하는 재단과 그가 장악한 오케스트라단은 그의 명성을 위한 하나의 활로였다.
그중에서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가장 큰 공헌을 세우고 있는 것도 시현이었다.
그래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그를 묶어둔 것까진 좋았지만 그가 갑자기 이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버릴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망할…….”
구심점을 잃어버린 이상 이제 그에게 큰 메리트가 남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박시현의 행보를 방해하고 그를 다시 이곳으로 끌고 들어올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끼어든 것이 티오니스 성자였다.
익히 들려온 소문만 하더라도 그가 괜히 건드렸다가 초토화 당할 수 있는 상황이기에 그도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망할…….”
그가 골머리를 싸매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던 중 그의 눈이 반짝인다.
“어?”
붉은빛과 본래의 색을 번갈아 반복하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치 홀린 것처럼 허겁지겁 집을 뛰쳐나갔다.
그가 찾아간 이는 다름 아닌 주변의 이웃이었다.
“오. 브레디. 오랜만이구나. 그래. 요즘은 잘 돼 가고?”
자신을 향해 살갑게 인사해주는 노파를 본 브레디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반짝였다.
동시에 노파의 눈이 흐리멍덩해졌다.
“명령을…….”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에 그는 겁을 먹은 듯 주춤거리며 그 힘을 풀었다.
그의 눈에 보인 자신의 능력의 약점은 단 한 명을 상대로 지배가 가능하다 했다.
단 한 명.
“말도 안 돼…… 이렇게 각성해버린다고?”
그의 입가에 혼란과 환희가 뒤섞였다. 이 힘이 정말로 자신에게 내려진 게 맞다면. 신께서 자신에게 이런 기회를 주었다면. 이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뿐이었다.
티오니스 성자에게 거는 미친 짓을 할 순 없었다.
그렇다면 이 일의 원흉에게 걸면 되지 않는가.
“박시현. 넌 시발 절대 내 손에서 못 벗어나.”
* * *
역경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준비는 차곡차곡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국제 음악협회는 무슨 이유인지 시현에게 가해져 있던 모든 페널티를 회수해버렸다.
발을 뺀 것이다.
덕분에 방해요소가 사라진 시현은 이런저런 경로를 이용해 각국에 스케줄을 잡았다.
“자. 준비는 이만하면 된 거 같아요. 이제 중요한 걸 해야죠.”
시현이 의견을 넌지시 던졌다.
“비록 드림팀이긴 해도 모두가 만족할 기억을 남기기 위해 이름을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곳에 모인 이들은 이미 자신들의 사그라지고 있던 열정에 불을 지핀 이들이었다.
평소에 잘 모이기도 힘든 이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시너지도 시너지이지만 그들이 가장 경악하는 것은 다름 아닌 초단이와 데이비, 그리고 뮤트의 존재였다.
셋의 존재는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자극이 되었고, 그럴수록 자극에 더욱 빠져든 그들은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상상력과 기술을 동원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까.
의도하지 않게 스케일이 커져 버린 감이 없잖아 있었기에 시현은 멤버들을 모아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예정대로 진행하되 지원을 해주는 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 공연을 하는것이었다.
딱히 이래나 저래나 상관없는 이들이 전부였기에 거부하지 않았고 결국 시현은 쥴리아나의 도움을 받아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다.
그 연습과정에서 초단이는 단의 멤버들과 굉장히 친해진 모습을 보였다.
기본적으로 싹싹한 면도 있고 애교도 있었던 탓인지 그녀를 보고 모여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그녀에 대한 호감에 이어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에 더욱 빠져든 듯 마치 그녀를 손녀 대하듯 매우 잘 대해주기도 했다.
“후우…….”
긴장한 듯 초단이가 숨을 고른다.
“긴장돼?”
“네. 엄청요. 설마 뉴욕까지 와서 연주를 할 줄은 몰랐어요.”
“여길 시작으로 몇몇 국가를 빠르게 돌 거야. 그리고, 마지막엔 네가 바라던 대로 한국에서 할거고.”
“네.”
초단이가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답해오자 데이비가 그녀를 다독이듯 말했다.
“괜찮아. 얼마나 왔는지는 대충 감이 잡히긴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 넌 이미 수억 명 앞에서 네 노래와 연주를 선보인 거야.”
비록 호평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네!”
“그래. 원 없이 연주하면 돼, 아빠가 도와줄게.”
그녀의 등을 떠밀며 내보낸 데이비는 말없이 자신의 악기를 조율하고 있는 뮤트를 바라보았다.
“후회 안 하세요? 어렵게 얻은 기회인데 스포트라이트도 못 받고.”
“까불지 마세요. 메인 센터 같은 건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내게 있어서 음악이라는 건 나름대로 세상과의 소통방식이고 탐구 방식이에요.”
그 과정에서 따라오는 부차적인 명예 같은 건 알바가 아니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며 뮤트는 데이비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고맙네요. 빈약한 미련이긴 해도, 비록 내가 원하던 멤버는 아니었을지라도 당신 덕분에 옛날의 향수가 떠올랐으니.”
그녀가 옅게 웃었다.
그리고는 데이비의 정강이를 가볍게 걷어찼다.
“어서 가세요. 뒤따라갈 테니.”
“뭐. 괜찮으시다면야.”
거대한 강당은 어둡기 그지없었지만 그 안에 모인 이들의 수만 봐도 답이 보일 정도였다.
애초에 컨셉 자체가 클래식 오케스트라가 아니었다.
새로운 도전을 한답시고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기본적인 대중가요를 섞은 느낌의 연주였던 만큼 아마 청중의 반응은 기본적으로 고요함과는 거리가 멀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너무 많이 왔는데. 내보인 거라고 해봐야 고작해야 영상 두 개뿐이었는데.”
물론, 악단에 참가한 이들이 하나하나가 쟁쟁하게 이름을 날리던 거장들이며 현재 빌보드를 한껏 휩쓸어버린 전항도 있으니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초단이는 자신의 악기를 내려다보며 긴장감을 천천히 해소시키고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어둡던 내부가 밝아진다.
동시에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원래 이렇게 될 일이었나?
의문과 황당함에 초단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시에 생각 이상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인 탓인지 그녀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빳빳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긴장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를 포함한 모두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초단이는 마음을 바꿔먹었다.
점잖고 웅장하며 고요한 오케스트라 연주만을 해오던 일부 인원들도 이 같은 풍경은 익숙지가 않은지 놀란 기색을 내비쳤지만, 몰랐던 바도 아니었다.
애초에 추구한 음악 자체가 그런 고고하고 고요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이윽고 가장 먼저 운을 뗄 초단이를 의식한다.
본래라면 지휘봉을 들었어야 할 시현이었지만 현재는 그 또한 자신의 악기를 들고 있었다.
마치 웅장한 오케스트라처럼 연주하되 많은 사람들에게 와닿을 수 있는 가요를 섞은 건 하나의 실험이나 다름없었다.
아예 이런 장르가 없었다곤 못하지만 적어도 이정도의 멤버가 모인 것은 잘 없으니 말이다.
이윽고 초단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입을 연다.
데이비가 걸어둔 증폭 마법으로 인해 그녀의 아름답고 청아한 목소리와 그녀의 가야금 소리가 이질적이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기다렸다는 듯 일부가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연주는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강당 전체를 휘감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영상으로만 듣던 것과 달리 직접 귀로 들려오는 음악에 놀라워하며 집중한 채 집중했다.
강제로 집중하여 듣게 만드는 아름다운 선율은 곧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연주를 하던 데이비와 뮤트가 서로 시선을 마주함과 동시에 악단 전체에 신비로워 보이는 빛의 가루들이 흩날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타난 빛의 가루들은 곧 반투명한 요정처럼 모습을 형상화시켰고 마치 춤을 추듯 내부 전체를 흔들었다.
신기하고, 아름답고, 몽환적인 공연 속에서 사람들은 침묵한 채 첫 곡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영상으로 한번 나왔던 노래였다. 빌보드를 쓸어버린 그 노래이기에 완전히 처음 듣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듣는 이들에겐 마치 새로운 것을 듣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놀라운 기교는 없었다. 튜닝의 끝은 수정이라고 말하듯 아름다운 미성으로 흘러나오는 노래는 언뜻 들으면 중독성이 느껴졌고 언뜻 들으면 가슴을 웅장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성공리에 첫 음악을 끝마친 초단이가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짧게 숨을 고르며 걱정 어린 감정을 내비쳤다.
처음에 비해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찰나.
곧 귀가 찢어질 듯한 함성과 박수 소리에 그녀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이런 걸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빠와 함께 연주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그녀의 노래를 듣고 이리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녀의 마음속에서 뭔가 싱숭생숭한 것이 흘러넘치는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관중은 상관없이 자신의 연주와 합주 자체에 만족한 듯 멤버들의 얼굴에 환희가 서린 게 보였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그동안 준비해온 것은 여럿이었고 처음과 조금 다르게 흘러가긴 했지만, 초단이는 더욱 기뻐하며 다음 노래를 준비했다.
준비된 것 중 일부만을 이곳에서 선보이는 것임에도 상관없었다.
그날 이곳에서 있었던 영상이 퍼져나가며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아 이루었다.
* * *
“나머지도 차트 휩쓸고 있는데. 이게 의외로 중독성이 있다네요.”
“노래나 소설이나 결국 기승전결은 똑같아요. 잘 쓴 소설이 인기를 끄는 것처럼.”
성공리에 연주를 끝마치고 샴페인을 따며 즐거워하고 있는 사람들을 멀리서 보던 데이비가 뮤트에게 말을 걸었다.
한 명 한 명이 대단한 사람들이고 밖에서는 호랑이 교수라 불릴 정도로 엄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그들은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기뻐하고 있었고 푼수 같은 옆집 아저씨처럼 껄껄 웃어댔다.
아마 초단이가 은연중에 만들어낸 분위기 이리라.
“만족해요?”
“그럼요.”
무덤덤하게 말하지만,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끌어 올려져 있었다.
“솔직히 이대로 성불해도 이제 걱정이 없어 보여요.”
사실 초단이가 아니더라도 이런 기회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던 데이비였다.
그 과정을 초단이가 만들어버리긴 했지만, 결과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으리라.
“다행이네요. 그런데 성불은 안 됩니다. 해야 할 일 많으시잖아요.”
“알고 있으니 좀 닥쳐줄래요?”
“한잔하시죠.”
데이비가 와인잔을 내밀며 씨익 웃었다.
호텔의 홀을 빌리는 비용정도야 문제가 될 건 없었으니까.
데이비의 제안에 뮤트는 담담한 얼굴로 데이비를 보다 옅게 웃었다.
그리고는 그의 잔에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고작 열 살 남짓하던 꼬맹이가 참 많이도 컸네요.”
“거참 언제적 이야기를 하시나.”
“그런데. 한 명이 안보이네요.”
“그러게요. 정작 이 모든 걸 계획한 놈이 안 보이네.”
정작 이 모든 것을 준비하기 시작한 시현이 보이지 않았다.
* * *
“X발. 물러나.”
시현은 긴장한 얼굴로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반대편에서 휘청휘청 걸어오는 사내는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내 곁에 있으면 너도 흥할 수 있고 나도 흥할 수 있다고. 왜 자꾸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드는 거야.”
“꺼져 이 미친 새끼야! 징그러운 표현도 집어치우고!”
“흐흐흐흐. 이건 다 네 잘못이야. 미스터 박.”
그렇게 말한 브레디의 눈이 붉게 번뜩였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눈치챈 시현이 황급히 도망치려 했다.
브레디의 연락을 받고 혹시나 싶어 밖으로 나온 게 잘못이었다.
“너 여기서 손대면 절대 곱게 못 끝날걸?”
“아니, 걱정 마. 그 누구도 네가 변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개소리!”
“평소의 너처럼 가는 거야. 대신. 조금만 바뀔 뿐. 약속할게. 네 공연을 방해하진 않아. 하지만 처음에 말했듯 내 명예의 발판을 만들어줘야겠어.”
브레디의 광기 어린 미소에 시현은 저항하려 했지만 이내 얼마 가지 않아 공허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아…….”
이제 시작인데. 짧지만 순회공연이 끝나 초단이가 좋은 기억을 가지고 돌아갈 때까지만이라도 이런 일에 당하면 안 되는데.
빌보드니 뭐니 이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처음 약속한 대로 시현은 초단이와 함께 예정된 순회공연을 한번 돌 것이고, 그 후에 미련 없이 단을 해체할 생각이었다.
다른 이들 또한 같은 의견이었고. 하지만.
여기서 이 지독한 놈의 생각대로 돌아가면…….
그 숭고하고 순수한 의도가 검게 변질되리라.
그러면 안 되는데…….
순수한 목적으로 모인 음악에 다른 지저분한 것들이 섞이면 안 되는데.
시현의 의식이 점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