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17화
에반젤린은 한창 신이 나 있었다.
또래 친구보다 시청자라는 존재를 먼저 알아낸 그녀에게 있어서 아무리 흥미 요소라곤 하지만 어느 정도 절제를 해야 하는 방송과 달리 정말 편안하게 놀 수 있는 친구는 별로 없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따지면 아직 다리안이나 아벨은 어렸고 초단이의 경우 보통 데이비와 함께 다니거나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경우가 많기에 그녀로썬 사실 굉장히 심심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은 너무 어리고, 그렇다고 10대 정도의 이들을 만나기엔 사실 미묘한 구석이 많았다.
그런 점에서 절제는 그녀에게 가장 좋은 친구 중 하나였다.
그 때문일까.
친구와 놀러 왔다는 사실 때문에 처음엔 데이비를 미행하러 왔으나 어느 새부터인가 본인도 모르게 마냥 즐기는 데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절제 박승현이 들었으면 피를 토할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그녀였다.
다만, 사고는 한순간에 터졌다.
갑작스레 화약 냄새가 진동을 하더니 화약에 불이 붙었을 때 나는 특유의 독한 냄새가 퍼져나갔다.
이 정도 폭발은 이벤트나 어트랙션 따위가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냄새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녀는 이곳에 설치된 방어마법이 마치 막처럼 발현되며 폭발을 완전히 틀어막아 버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 놀랄 것도 없다.
이곳은 데이비가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다수의 마석을 심어놓았다.
어지간한 물리폭발로는 티끌 하나 영향을 주기 어려우리라.
그 때문일까. 폭발은 결국 불발이 되었고, 폭발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이가 무리수를 던져왔다.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누군가가 칼을 쥐고 그녀에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녀를 노리고 움직였다기보다는 가장 가까이 보이는 게 그녀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던 찰나에 절제가 몸을 날려 그녀를 보호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을 텐데.
고마움과 분노가 동시에 일었다.
일반인이면서 겁도 없이 나서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뒤엉켜 싸우던 절제가 그녀에게 빠르게 눈짓을 했다.
일단 피하라는 시선이었다.
딱히 이해 못 할 행동은 아니었다.
들키기 전에 도망가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몸을 숨기기엔 그녀의 성정이 허락하질 않았다.
갑작스런 소란 때문에 정체를 들켜버린 박승현의 곁으로 데이비가 다가간다.
괜히 다가가면 미행했다는 사실이 들킬 텐데…….
“아이 씨……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잠시 인파 속에 숨어있던 그녀는 이내 박승현의 속내도 모른 채 당당하게 제 아빠를 향해 다가갔다.
“아빠.”
“음? 에린아. 여긴 왜?”
“놀러 왔어요. 여기 아저씨랑.”
그 말에 데이비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다친 곳은 없고?”
“딱히 다칠 게 있나요.”
아무리 다칠 일이 없어도 걱정이 되는 게 부모의 마음이라던데. 괜히 속내가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단순히 놀러 온 것 치고는 둘이 모습이 굉장히 비슷하네.”
데이비가 슥 지나가듯 말하자 박승현의 표정이 검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이에 에반젤린이 피식 웃었다.
그와 데이트?
아, 그랬었지.
언제부턴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지만 사실 상관은 없었다.
“그냥 놀러 온 거예요. 괜히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요.”
그 말에 데이비가 적당히 맞장구를 쳐준다.
그제야 절제의 표정에 안도감이 서리는 게 보였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믿어줄게.”
이어지는 말에 그의 얼굴이 다시 검게 죽어갔던 것은 애써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 * *
대한민국 내에서 발생한 테러.
테러 활동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과거 격변의 시기를 지나면서 한국이 가진 안전하다는 이미지는 어느 정도 많이 퇴색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과거와 달리 한국이 넬타리드 교단과 티오니스의 교역 때문에 상당한 입지를 지니고 있는 만큼 선순환과 악순환을 동시에 가질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번일 같은 경우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이유 또한 존재했다.
“종교문제 때문에 마찰을 좀 빚었나 봐. 일단 넬타리드 교단이 한국에서 나온 기업과 깊은 연관이 있었으니까.
“무슬림?”
“뭐. 지들은 이슬람교도라고 하는데. 남들이 보기엔 그냥 구색만 쌓은 미치광이들이지. 다만, 이번엔 그들도 자신들의 일이 아니라고 발뺌을 하고는 있다고 하더라. 한 극단적인 신도가 독단으로 저지른 일이라는데, 뭐 믿을 가치는 없다고 봐.”
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설명해왔다.
즉, 신적인 존재가 실존하는 넬타리드 교단이 생기면서 기존의 종교들이 붕괴 현상을 일으킨 탓에 그에 따른 원한을 품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티오니스와 전면전을 하기엔 위험부담이 크니 그 교두보인 한국을 협박해 그 연결점을 끊으려 들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해서 고른 게 알프랜드라고? 내 소유라는 걸 알고 있으면 그런 짓을 하면 안 되지.”
데이비의 설명에 에반젤린은 딸기를 오물거리며 둘의 대화를 엿듣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두리안 톡을 전송했다.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대답해봐요. 별일 없죠?
간단한 상황조사를 받고 귀가했을 절제 박승현에게 연락한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어째 너랑 엮이면 이런 스펙터클한 사고가 터지냐?
“이 아저씨가?”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거지.
-모르겠다. 지칠 대로 지쳤으니까 난 며칠 푹 쉬련다.
뜻하지 않게 휘말려서 조사까지 받았으니 푹 쉬게 해주는 게 맞겠지.
그녀 나름의 변호 덕분에 큰 문제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를 휘말리게 한 것에 대해선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다음에 밥 한번 살게요.
-됐네요. 애들 코 묻은 돈 받을 생각은 없다. 나중에 배고프면 말해. 떡볶이 정도는 사줄게.
-아, 떡볶이는 저도 할 줄 알아요.
-네가 만드는 건 떡볶이가 아니고 생화학 무기야. 너희 그 미식연구회에서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면서.
“이 인간이?”
짜증이 일었지만 늘 자신과 투덕대는 그였다. 그런 그와의 투덕거림 자체가 생각보다 재미있었던 그녀는 방송을 마저 이어가기 위해 레어로 향하려 했다.
그때 가로등 불빛 아래로 누군가가 샤샤샥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게 포착됐다.
평소라면 무시했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세상에 청색과 적색이 저렇게 잘 어우러진 머리카락은 단 한 명 뿐이었으니 말이다.
“어디를 가는 거지?”
지금 이 시간에 혼자 돌아다닐 인물이 아닌데.
그녀의 의문에 동조하듯 어디선가 나타난 블랙 슬라임이 꾸물꾸물 기어서 에반젤린의 어깨 위에 올라앉았다.
그리고는 에반젤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검둥아. 언니 어디 가는 거지?”
물론, 말할 수 없는 블랙 슬라임이 대답할 리 만무했다.
보아하니 일반적인 용무는 아닌듯하고, 정작 아빠에게도 말하지 않고 어디론가로 향하는 느낌이었다.
대체 무엇일까.
조심스레 그녀의 뒤를 밟기 시작한 에반젤린은 그녀에게 혹여나 들킬까 마나를 억누르고 최대한 발소리를 죽였다.
사박사박…….
말없이 한참을 걸어가던 그녀는 곧 아무도 없는 조용한 길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어어?”
초단이가 순간적으로 엄청난 살기를 내뿜으며 가면을 쓰기 시작하자 반사적으로 뛰어나갔다.
“언니!!”
파악!!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초단이를 뒤에서 끌어안은 에반젤린은 조금 전 자신이 본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초단이가 화를 내는 경우도 봤고, 그녀가 가면을 쓰는 것도 봤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짙은 살기를 내비친 적이 있던가.
순간적으로 느낀 엄청난 살기에 온몸이 파르르 떨려오던 에반젤린은 자신의 떨리는 손을 제어할 생각도 못 한 채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초단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가면의 눈부분 틈 사이로 보이는 붉은색과 푸른색의 섬뜩한 안광에 흠칫 놀랐다.
“언니…… 맞지?”
왜 그녀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지금까지 봐온 초단이의 온화한 분위기와는 너무 다르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무섭지만 그렇다고 뿌리칠 순 없었다.
지금 초단이의 분위기는 마치 한 명이라도 걸리는 순간 아작내버릴 것 같은 서늘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기에 다시 그녀가 물었다.
“왜 그래. 나 무섭게…….”
눈물까지 그렁그렁해진 채로 그녀가 초단이를 조심스레 올려다보자 그녀가 조용히 에반젤린을 내려다보다 휘청거린다.
동시에 가면도 덩달아 사라졌다.
그녀가 가면을 발현시키는 트리거는 분노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가면을 꺼낼 정도의 분노를 어딘가에서 느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어디서 분노를 느꼈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많이 무서웠어?”
“괘……괜찮은 거 맞지?”
그 물음에 초단이가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리만치 탁하다.
“저기…… 언니?”
“응. 괜찮아. 별문제 없어. 그냥…… 아버지랑 같이 노는 게 방해를 받으니까, 조금 속이 착잡해서.”
착잡하다고 그만한 분노와 살기를 터뜨린다고?
에반젤린은 그제야 천천히 그녀의 몸을 놓고 한발 두발 물러났다.
“언니.”
“응?”
“누구야?”
“뭐?”
초단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겉면으로 보나 내면으로 보나 초단이가 분명했다.
하지만, 고대룡의 직감인지, 본능인지. 그것도 아니면 가족으로서의 감인지.
조금 전부터 계속해서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언니가 아니구나.”
“무슨 소리야. 에린아. 언니야.”
환하게 웃는 미소와 따스한 느낌은 분명한데.
이상하게 계속해서 본능은 그녀가 그녀가 아니라고 부르짖었다.
“거짓말하지 마. 언니가 아니잖아.”
그녀가 두려움이 서린 얼굴로 반사적으로 용신검 트와일라잇을 꺼내 들었다.
본능적인 경계였다.
겉면은 분명 초단이가 맞다. 누군가가 흉내 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초단이는 분명 처음 그녀가 가면을 썼던 상황 이상으로 무시무시한 살기를 숨기고 있었다.
“아…….”
그렇게 침묵하는 그녀를 향해 에반젤린이 쏘아붙이듯 물었다.
“그렇구나…… 언니 그때 이후로 계속 바뀌어있었구나.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너 누구야.”
그 말에 초단이가 혀를 살짝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그 뇌쇄적인 미소 또한 초단이가 품던 그런 느낌과는 달랐다.
“아…….”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에반젤린을 조용히 응시했다.
동시에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에반젤린이 급히 검을 들어 방어하려던 그 순간.
스르륵…… 쩌엉!!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초단이의 작고 흰 손이 가볍게 에반젤린의 복부에 닿았다.
그 움직임은 단순히 강한 힘에만 의존하던 초단이의 것과는 달리 너무도 노련했다.
마치…….
‘아빠…….’
데이비의 움직임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아……아하하. 이제 몸이 좀 익나 봐.”
그대로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른 에반젤린을 향해 기분 좋게 웃어 보인 그녀가 사박사박 걸어왔다.
“누구야…… 너…….”
힘겹게 다시 말을 걸어본다.
조금 전 그녀가 발현한 방어마법은 초단이와 접촉하면서 그대로 박살 났다.
딱히 청단이의 권능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이게 이렇게까지 순식간에 저항 없이 박살 날 문제였는가 하는 의문은 들지 않았다.
지금 눈앞의 초단이는 지금껏 그녀가 알던 것과는 다른 존재였다.
즉, 초단이가 지금까지 소프트웨어가 별로인 하드웨어 깡패 그 자체였다면.
지금의 초단이는 소프트웨어의 부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문제는 하나 더 존재했다.
“에린아.”
사랑스럽게 그녀를 부른 초단이가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듯 몸을 낮춘 뒤 검지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우리 착한 동생. 오늘 본건 다 잊는 거야. 알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대체 뭘 하려고!”
“쉿. 걱정 마. 내가 혹시라도 널 다치게 하겠니? 그냥…….”
잠시 침묵한 그녀가 서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밤바람에 아름답게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색이 언 듯 반전된 것처럼 보였다.
“모처럼 부녀간에 좋은 시간을 방해했잖아. 그런 사람들에게 조금만 복수할까 생각해봤는데.”
어떻게 할까?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물어오는 그녀를 보며 에반젤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안돼. 절대로. 누군진 모르겠지만 초단이 언니를 원래대로 돌려놔야 할 거야.”
“거참, 내가 초단이라니까…….”
“아니잖아! 거짓말하지 마! 이 가짜야!”
에반젤린의 발작적인 외침에 초단이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내리깔렸다.
“x발…… 이래서 안 나오려고 했는데…….”
그 한순간의 목소리는 너무도 처연하게 들려왔다.
“어?”
“여기서 본건 전부 잊어. 알았어?”
“누구 마음대로!”
“적어도 네 맘대로는 아닐 거야.”
그말과 함께 그녀의 손끝으로 검은 무언가가 쏟아져 나와 에반젤린을 한차례 삼켰다가 사라졌다.
그 무형무색의 힘은 어디선가 많이 본 적이 있는 느낌이었다.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워지는 그 힘이 말이다.
분석을 하려 해도 마치 기억이 드문드문 날아가는 것처럼 머리가 멍해지기 시작했다.
혼란 속에서 에반젤린은 결국 잠들 듯 까무룩 쓰러졌다.
그리고 그렇게 쓰러지는 에반젤린을 그녀가 조심스레 받아냈다.
“내 동생. 오늘 일은 전부 잊는 거야.”
데이비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포식으로 기억의 일부를 먹어치우는 기행까지 벌인 초단이는 그녀를 등에 업은 채 잠시 고민하다 다시 돌아가는 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다음에 하자…….”
기절한 에반젤린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내가 왜 여기서 자고 있지?”
“일어났니? 초단이가 업고 왔어. 얼마나 열심히 놀았으면 벤치에 앉아서 잠드는 거야.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어…… 엄마…….”
“어서 일어나서 씻고 밥 먹어.”
그녀는 전날의 기억을 전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주 한켠에 딱 한 기억만이 남아있었다.
처연하게 욕설을 내뱉던 초단이의 목소리가 말이다.
전후가 지워졌기에 이게 무슨 기억이지? 했지만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저 꿈을 꿨구나하고 생각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