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18화
길가 벤치에서 잠들었다는 이야기 때문에 잔뜩 혼이 난 에반젤린의 입장에선 억울한 일이지만 솔직히 전날 이야기를 듣다가 밖으로 나간 것도 사실이었고, 그 이후에 졸려서 잠든 것처럼 기억이 모호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어제 길거리에서 잠들었다지 뭐에요.”
-방장…… 밖에서 자면 입 돌아가…….
-겁도 없이 밖에서 자고 있었다고? 누가 위험한 짓 하면 어쩌려고.
-범죄자 쉑들도 방장은 안 건드림.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다고 해도 너무 부주의했음. 세상에 미친놈이 얼마나 많은데.
“님들처럼요?”
-광역 딜 자제 좀 ;;
-이걸 이렇게 딜을 박네.
“어쨌든. 오늘은 방송을 길게 못 해요. 좀 피곤해서…….”
방송 자체는 평소처럼 흘러갔다.
애초에 컨디션이 영 아님에도 불구하고 의무적으로 켠 방송이었던 만큼 준비된 컨텐츠를 진행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자잘한 게임과 대화를 이어나가던 도중이었다.
-방장. 뉴스 들었음? 이번에 테러범으로 잡힌 그놈 죽었다고 함.
“네?”
분명 알프랜드에서 제압당한 그는 한국 정부 측에서 신변을 인계받아 취조를 위해 데려갔었다.
아직 그에 대한 재판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니고, 아직 제대로 된 조사가 이어지기에도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 짧은 시간에 그가 죽었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인터넷 뉴스화면을 켜자 여러 기사가 올라와 있는 게 보였다.
“이게 대체…….”
-살해당했다고 함.
-칼로 한참 벤 흔적이라고 하는데 너무 격하게 베어버려서 경찰도 혀를 내둘렀다고 하던데.
생각지도 못한 범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에 방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물론, 수많은 사람을 죽이려던 사이코패스 테러리스트에 불과하지만, 이 방에서 할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야. 방장은 아직 아가야. 이런 거 막 말해주면 안돼…….
“괜찮아요. 그보다 더한 것도 많이 봤는걸…….”
-그래도…….
“괜찮아요. 생명을 죽일 때 느끼는 거부감은 다 똑같아요. 사람이든 몬스터든……. 그래서 아빠는 늘 그렇게 말해요. 생명을 거두는 과정에서 망설임은 버릴지라도 죽은 생명에 대한 무게는 잊지 말라고.”
그는 그것을 업이라고 칭했다.
영혼에 새겨지는 무게.
적어도 에반젤린 또한 그 무게가 상당하고, 데이비는 그보다 억겁은 무거운 무게를 짊어지고 있으리라.
“여러분도 잘 들어요. 착하게 안 살면 나중에 죽고 나서도 고달파져요.”
-응, 어차피 미신이야.
-아무리 신이 실존한다 해도 그것까지 진짜일라고.
물론, 영혼의 강을 모르는 이들에겐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마음에 들진 않지만, 테러범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댈 뿐 더 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할게요.”
-에바~
-에바~
-에바~
-삼진 에바로 방송연장…….
“응. 안돼요. 그럼 내일 봐요.”
-유치한 성정답게 속내도 옹졸한…….
삑!
왕사슴 님께서 밴 당하셨습니다.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괜찮아 방장…… 방장도 어른이 되면 마음이 넓어질 거야, 원래 애들은 자기 우선적으로 살…….
“야! 너 어디 살아!!”
-ㅌㅌㅌㅌ
-ㅌㅌㅌ
그새를 못 참고 그녀를 놀리는 시청자들을 향해 씩씩거리던 그녀는 이런 말다툼 자체가 지치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얼마나 자애롭고 마음이 넓은데.”
-그게 마음이 넓은 거라고? 옹졸한 게 아니고?
-세상에……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품고 있구나…….
-원래 실력 있는 예술가들은 하나같이 또라이라잖음.
“니들 다 쫓겨나고 싶어요?”
결국, 예정했던 방종보다 10분이 더 걸렸다.
방송을 끈 그녀는 가볍게 기지개를 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테러범에 대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현아와 연희가 머무르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
그때 에반젤린의 날카로운 후각에 무언가 비릿한 냄새가 잡혔다.
“피 냄새?”
아주 잠깐 맡은 것이라 착각이라 여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기시감이 강하게 들었다.
피 냄새가 향하는 곳으로 가봤지만 뭔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어라? 에린이 왔구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벌리는 현아를 향해 그녀가 쪼르르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아이구 우리 귀여운 조카. 오늘은 무슨 일로 왔어?”
“그냥 놀러 왔어요. 아빠는요?”
“아…… 일이 있어서 잠깐 어디 갔어.”
티오니스로 향한 게 아니라면 그 일이라는 게 뭔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아…… 그 테러리스트…….”
“알고 있었구나?”
“방송 중에 뉴스를 봤거든요.”
“아이구, 장하다. 누굴 닮아서 이리 똑똑한지. 새언니 닮은 건가?”
“헤헤.”
곧 죽어도 데이비 칭찬은 하지 않는 현아였다.
“마침 초단이도 와있으니까 같이 과자라도 먹을래? 마침 과자 굽고 있었거든.”
“안 바쁘세요?”
“몰랐어? 나 휴가 중이야. 기왕이면 나도 젊게 취미생활도 즐겨야지.”
생각해보면 현아도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젊은 부총수라 불리는 존재가 그녀가 아니던가.
실제로 파티 같은 곳에서 그녀의 인기가 상당하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기도 했다.
“왔구나?”
이미 소파에 앉아 과자를 야금야금 먹으며 영화를 보고 있던 초단이가 고개를 돌려 옅게 웃어준다.
“뭘 봐?”
“첩보영화.”
“아. 최근에 개봉했다는 그건가?”
“응. 예전에 만든 건데. 사고가 터지고 해서 개봉 못 하다가 이번에 완성했데.”
익숙하게 초단이의 곁에 앉으려던 그때였다.
“언니.”
“응?”
“어디 긁혔어?”
“아니?”
“…….”
고개를 갸우뚱하며 초단이를 보던 에반젤린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 초단이에게 다가가 코를 킁킁거렸다.
“얘……얘가 왜 이래!”
“이상하네. 내가 몸이 좀 안 좋은가 봐.”
“무슨 일이길래.”
“아니. 요즘 후각이 영 이상해서. 자꾸 이상한 냄새가 맡아지네.”
눈을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떨어뜨린 그녀가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착각인가 봐.”
“그래? 아빠는 바쁘신가 봐. 오늘 같이 밥 먹으려고 티오니스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우리끼리 가야 할 거 같아.”
“응…… 근데 아빠?”
“응? 아아, 나도 좀 친근하게 부르고 싶어서. 아버지는 너무 딱딱하잖아.”
해맑게 웃는 초단이에게서 또다시 기시감이 느껴진다.
“이상하네…….”
“왜 그래?”
“아니. 잠을 잘못 잤나 봐…….”
아무리 생각해보려 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에 천천히 고개를 돌린 에반젤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끙끙거렸다.
“아…… 멀미가 이상하게 자꾸 나네…….”
“간단히 먹고 푹 쉬어야겠어. 오늘은 여기서 쉬어. 차원이동에 부담이 갈 수도 있으니.”
“응…….”
머릿속에서 자꾸 무언가를 깜빡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결국 알아낸건 없었다.
그녀는 보지 못했다.
돌아선 초단이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는 것을 말이다.
* * *
피칠갑이 된 취조실.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도 절 때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개판이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피 냄새에 악의가 느껴지는 겐지…….”
내 어깨에 올라앉은 페르세르크는 손등으로 코를 가린 채 인상을 찌푸렸다.
“발견됐을 땐 어떻게 되어있었습니까?”
“실은 취조를 위해서 그를 잠깐 이곳에 불러왔었습니다. 그러다가 잠시 중요한 용무로 인해 10분 정도 자리를 비웠어요.”
“취조하는 대상을 놓고 10분간 자리를 비웠다고요?”
“그게 감시 카메라도 있고. 여기 보시면 미러도 장착되어서 보는 사람도 있어서 문제는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착각이었다.
그리고, 한국 정부 국정원에서 데이비에게 조사를 요청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고작 10분. 10분 만에 미러와 카메라를 무력화시키고 침입. 그리고, 그 짧은 시간 안에 이토록 참혹하게 대상을 살해…… 단순한 살인은 아니겠죠.”
“네. 감지해본 결과 막대한 마나가 감지되었습니다.”
국정원 요원의 설명에 나는 한 손으로 턱을 어루만졌다.
목적이 무엇일까. 그의 입을 막기 위해서? 일반적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데이비. 이거, 증오범죄야.”
“알아.”
“증오범죄…… 확실히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위장일 수도 있다는 게 저희 생각입니다.”
“위장?”
“네. 이렇게 증오범죄인 척해서 본래의 의도를 가린 거죠. 실제로 이 정도로 은밀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암살자라면 지구 내에서도 몇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기술이 워낙에 뛰어난 탓에 아무리 한국의 국정원이라도 단서를 잡아내는 게 쉽지 않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데이비. 우선 기억부터 읽어보아야겠구나.”
“그래야지.”
우선은 이곳에 있는 대지의 정령의 기억부터 읽어봐야 할 듯싶었다.
어설픈 위장은 노아스의 힘으로 얼마든지 붕괴시키고 기억을 재현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이윽고 기억을 읽기 위해 정령 마나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음?”
“데이비?”
“기억이 지워져 있네. 정령계통의 힘을 쓰는 건가?”
“노아스를 불러야겠구나.”
“그래야지. 죄송한데. 조금 흔들릴 수 있으니 주변에 있는 것 좀 잡아주세요.”
“네? 아 네!”
당황한 요원을 뒤로한 채 땅에 손을 짚는다.
동시에 정령 마나가 요동치기 시작했고 주변에 막대한 힘의 울림이 퍼져나갔다.
쿠구구구구궁!!!!!
대지의 정령왕. 첫 번째로 계약한 정령왕이자 가장 든든한 정령이기도 했다.
내 부름에 따라 모습을 드러내는 정령왕 노아스는 막대한 흔들림을 유발했다.
“적당히 흔들어.”
그그그그그그…….
지진이 난 것처럼 한참을 뒤흔들던 흔들림이 일순간 거짓말처럼 멎어 들었다.
그리고. 대지가 뒤틀리며 손바닥만큼 자그마한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더럽게 안 부르는군. 계약자.]
“널 부를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 없는 게 좋은 거 아닌가?”
[간간이 부르라고 말했을 터인데.]
“됐고. 일단 여기 지워진 기억 좀 복구해보자.”
내 말에 노아스는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정령왕은 정령왕인지 녀석은 순식간에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약자.]
“찾았어?”
[기억이 없다.]
“뭐?”
의외의 대답에 내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기억이 없다니. 복구가 안 되는 건가?”
[그게 아니다. 마치 통째로 삼켜진 것처럼 기억이 없다. 없는 걸 복구할 순 없는 법. 이건 마치…….]
“마치?”
[네놈이 가진 그 포식능력 같군.]
그 한마디에 내 뒤에 있던 요원이 흠칫하는 게 보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듣지 않아도 뻔했다.
“설마…… 그를 죽이신 겁니까?”
“그랬으면 굳이 여기 와서 노아스를 꺼내지도 않았겠지요.”
“하지만…… 당신을 속일 정도의 각성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그렇게 말하던 요원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실언했군요. 죄송합니다.”
“의심할 수 있다는 건 이해하지만 적당히 하세요.”
[복구의 차원이 아니다. 네놈의 포식 능력이 분명해.]
노아스의 설명에 나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그를 테러범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거기까진 상관이 없는 데 문제는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포식의 힘을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각성자의 각성 방향이야 여럿이라곤 하지만 다른 힘도 아니고 포식의 힘을 각성한 각성자가 있다?
그걸 내가 모를 리가 있나.
“다른 단서는?”
[없군. 너무 깔끔할 정도로 흔적이 지워져 있다.]
정령의 기억이 지워졌다면 직접 단서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그놈. 시체 좀 볼 수 있습니까?”
“예? 하지만…… 알겠습니다. 상부에 요청하고 안내하겠습니다.”
요원은 어차피 그냥 두어봐야 얻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어디론가로 전화를 했고, 이내 나를 영안실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덜컹! 소리와 함께 냉동 처리된 시체 안치소의 문이 열린다.
새하얀 천으로 뒤덮인 사내의 시신이 드러나자 페르세르크와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이게 뭔…….”
“세상에…….”
“왜……그러십니까?”
뒤따라온 요원은 둘이 반응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는 듯 했다.
하지만, 나와 페르세르크의 눈에는 시신에 남겨진 흔적들이 너무 훤히 보였다.
“데이비.”
“……포식이다.”
세상에 오로지 나만 가지고 있어야 할 힘이 그의 몸에서 남아있었다.
“경계 레벨 좀 올리시죠. 잘못하면 대참사가 날수도 있겠네.”
“한데, 어째서 이곳의 흔적은 다 지우지 않은 것일까.”
페르세르크의 의문은 타당했다. 취조실의 흔적은 완벽하게 지웠으면서. 정작 시신에 남은 흔적은 상당량 보인다.
이런 경우 해답은 하나뿐이었다.
“우발적 범행으로 인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거나. 시간이 부족했거나.”
양쪽 모두 포함된다는 느낌은 시신에 남은 검상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거. 검의 흔적이 마구잡이로 벤 거야. 자기 분에 못 이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