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21화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나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야 했다.
눈앞의 초단이, 아니 초단이의 몸을 쓰고 있는 또 다른 자아의 말대로라면 나는 그녀를 만들어낸 주제에 그녀를 방치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아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를 알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을 테니까.
결국, 그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던 건 내 안일한 판단이었다.
“내 존재를 전혀 예상 못 했다는 거짓말은 하지 마. 아빠는 내가 신검보다 마검에 가깝다고 했을 때 얼마든지 추측해낼 수 있었어. 하지만 홍단이 청단이 그 꼬맹이들에게 정신이 팔려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겠지.”
그것도 사실이라 할말이 없다.
“아하하핫! 결국, 대답 못 하네? 하긴, 아빠도 얼마나 놀랐겠어.”
그녀를 부르려 해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물은 건 단순한 물음이 아니었다.
네게 그걸 물을 자격이 있는가 묻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이렇게 들켰으니 다 끝이네…….”
“끝은 무슨 끝이야.”
“그래도 짧지만 참 좋은 꿈이었다. 그치?”
그 말과 함께 그녀가 몸을 돌렸다.
“참. 자고 있는 멍청이는 곧 돌아갈 거야. 아빠와 작별하는 건 여기 있는 나고.”
그말과 함께 가볍게 몸을 튕겨 내게서 도망치는 그녀의 속도는 일전 초단이가 보여주던 속도를 상회하고 있었다.
아마, 그동안 내가 그녀에게 불어넣은 마나를 쓰지 않고 전부 저축해놓았을 터.
당장의 저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지금 저 아이를 잡아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발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멈춰 있을 것인가.
적어도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여기서 저 아이를 떠나보내는 순간. 다음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잠깐만!!”
결국, 나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그녀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리고 단단한 H빔을 밟으며 빠르게 그녀를 따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쩌어엉!!!
하지만 돌아온 것은 그녀의 엄청난 검격이었다.
붉은색의 검기는 그 두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얇았고 그 선이 길게 이어지는 라인은 그 어떤 것도 제약을 받지 않고 모조리 잘려나갔다.
홍단이의 생자를 베는 권능.
비록 저 아이가 초단이와 홍단이, 청단이는 아니라지만 놀랍게도 셋의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포식의 힘.
어쩌면 그 힘을 이용해 세 아이의 힘을 먹어치우면서 자신의 것으로 녹여낸 것이 아닐까.
물론, 그에 걸맞는 다른 힘이 없다면 엄청난 공복의 광기에 노출될 텐데 어째서 그녀는 멀쩡한 것일까.
“쓰읍!”
쩌어어엉!!!
단단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헬릭시윰제 창인 롱기누스를 이용해 막아낸다.
막대한 충격이 손끝으로 저릿하게 전해져 오며 당장이라도 놓칠 것 같은 무거움이 전해져왔다.
이런 막대한 힘을 내뿜는 이를 상대로 부딪힌 건 얼마 만이던가.
일리나의 검은 무겁지만 날카롭기에 막아낸다는 개념이 먹히지 않는다.
반면 다른 이들은 이만한 화력을 낼 수가 없다.
즉.
온전히 나와 비슷하며, 나와 정면으로 충돌 가능한 것이 저 아이라는 소리였다.
“일단 거기 좀 서봐!”
내 외침에 비스듬히 무너지는 건물의 옥상에 올라 서 있던 그녀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의 손엔 검은색으로 살짝 변질된 청적색의 기검이 쥐어져 있었다.
“더 이상 할 이야기 없어.”
“그렇게 가면 어떻게 할 건데.”
“할 이야기 없다고 했잖아.”
누구 마음대로.
그녀는 나와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그건 그녀의 결정일 뿐 내 결정은 아니었다.
그렇게 도망치며 검을 휘두르는 아이와 내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 * *
데이비의 실종.
흑귀를 잡으러 갔다던 데이비의 소식이 끊어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공사장에는 깔끔하게 부서진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현장 속에서 사상자 또한 발견됐다.
“아빠, 어디 간 걸까요…….”
데이비의 실종 소식은 기다리는 이들에게 큰 충격을 전해주었다.
“괜찮을 거야. 데이비를 해칠 수 있는 이가 이 세상에 몇이나 남아있겠어.”
“그래도 없는건 아니잖아요.”
에반젤린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매번 술 냄새난다며 싫다 싫다 해도 소중한 가족이었던 만큼 에반젤린도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연락도 안 돼, 흔적도 엉망진창, 정작 바로 잡았어야 할 흑귀도 잡히지 않았다.
문제는 그 흑귀가 포식의 힘을 다루고 있다는 페르세르크의 증언이었다.
상대가 위험한 힘을 다루고 있다고 하니 걱정이 될 수밖에.
그런 마당에 데이비가 실종되고 난 후 흑귀가 부산 근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데이비가 놓쳤다.
데이비가 실종됐다.
섬뜩한 가설이 머릿속을 오갈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예정대로 돌아오기로 한 그가 사라졌으니 속이 바짝바짝 탈 수밖에 없었다.
“대체 흑귀의 정체가 뭐길래.”
아닐 거다 하면서도 속으로 불안함을 애써 지우지 못한 에반젤린이 난장판이 된 공사판 대지를 툭툭 걷어찼다.
사방에는 경찰과 복구 인력으로 정신이 없는 마당이지만 일리나와 에반젤린 그리고 륀느를 제지하는 이는 없었다.
“엄마는 연락이 없어요?”
“데이비가 돌아올 시간이 지난 후로 곧바로 나간 뒤로 연락이 없어. 아마 개인적으로 찾고 있겠지.”
페르세르크는 데이비가 돌아오기로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곧바로 개별적인 수색에 나섰다.
그리고, 일리나와 에반젤린 또한 다른 방향으로 와있는 것이었다.
“데이비 님의 체취 발견.”
그때 코를 킁킁거리던 륀느가 난장판이 된 현장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간다.
“어……어어?! 거기 위험하니까 지금 들어가시면!”
그극!! 그그그그극!!!
복구에 한창 중이던 인부 하나가 급히 륀느를 말리지만 륀느는 난장판이 되어 쌓인 H빔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리듯 우그러뜨리며 성큼성큼 들어가 버렸다.
“워메…… 저 작은 몸에서 어데 저런 힘이 나온데야…….”
기겁한듯한 인부의 중얼거림은 허공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데이비의 체취 흔적을 찾았다며 난장판이 된 안쪽으로 들어간 륀느가 피가 말라붙은 흔적을 발견했다.
“발견. 륀느가 탐색능력을 높게 평가.”
“누구 피지?”
륀느는 조용히 쪼그려 앉아 바닥에 말라붙은 작은 혈흔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검지손가락으로 말라붙은 피를 가볍게 문지른 뒤 입에 넣어버렸다.
“지지! 륀느 지지야! 당장 빼!”
하지만 륀느는 조용히 눈을 감고 침묵했다.
“데이비 님의 것으로 추측.”
“말도 안 돼…… 아빠가 다쳤다고?!”
경악한 에반젤린이 중얼거렸다.
데이비가 걱정이 된다고 해도 패닉에 빠지지 않은 것은 그가 죽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데이비가 죽으면 페르세르크도 죽는다.
페르세르크가 죽으면 데이비 또한 죽는다.
그것이 두 사람 사이의 계약이었다.
물론, 디메리트 밖에 없어 보이는 이 계약은 반대로 상대를 지켜주는 역할도 하고 있는 편이었다.
이 계약을 다르게 해석하면…….
데이비가 살아있는 한 페르세르크는 죽지 않는다. 또한, 페르세르크가 살아있는 한 데이비는 죽지 않는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그 진실을 아는 이들의 입장에선 데이비가 죽지는 않았을 거라는 굳은 믿음은 깔려 있었다.
“언니는 데이비의 위치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으니까 찾아간 것 같은데.”
“그럼 바로 찾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 흔적이 방해를 받고 있나 봐.”
계약 덕분에 데이비와 페르세르크는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느낄 수 있으나 현재 그 링크에 혼선이 와있다고 했다.
생명의 끈은 이어져 있되 추적이 불편한 상황인 것이다.
“어쨌든 그 흑귀라는 녀석이 아빠를 위협할 정도로 굉장히 위험한 녀석이라는 건 분명하네요.”
“알았으면 돌아가. 이 일은 륀느와 내가 할 테니까.”
“싫어요. 나도 싸울 줄 알아요.”
“엄마 말 들어, 지금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나 해?”
일리나와 에반젤린이 옥신각신 싸우기 시작했지만, 륀느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데이비의 실종 소식을 아직 레이나가 접하지 못한 것은 다행이리라.
아마 그녀가 알았다면 눈이 돌아가서 그를 찾아다닐 테니까.
륀느는 침착하게 데이비의 흔적들을 살폈다.
“롱기누스의 흔적. 이것은 초단의 흔적.”
륀느의 푸른색 눈동자 안에 문자와 숫자 같은 것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녀는 흔적들을 하나하나 구분하며 싸움이 어떻게 벌어진 것인지 머릿속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하지만 곧 오류에 부딪혔다.
적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분석한 것이었다.
“초단의 검기와 롱기누스의 흔적이 뒤섞인 것을 발견. 이론상 불가능.”
“초단이 언니가 아빠랑 싸우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초단이도 데이비와 함께 사라졌지만 그야 초단이는 데이비의 무기로써 함께 하니 그가 사라지면 그녀도 함께 사라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현재 흔적들을 조사해볼 경우, 흑귀에 대한 흔적은 일절 찾아볼 수 없다고 판단. 유일한 흔적은…….”
근처에 조금씩 느껴지는 포식의 잔재뿐이었다.
“아씨 진짜! 아빠는 사람 걱정하게 어딜 간 거야!”
짜증스레 투덜거린 에반젤린이 근처의 일그러진 철골 구조물을 걷어찼다.
터엉!!!
문제는 그녀가 보통 인간의 경이를 예전에 뛰어넘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콰르르릉!!!
가볍게 걷어찬 철골이 일그러지며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어있던 거대하고 무거운 H빔 하나가 그대로 낙하해 에반젤린의 머리에 추락했다.
“꺄악!!”
“에린아!”
륀느의 분석에 집중하고 있던 일리나는 갑작스런 에반젤린의 비명에 깜짝 놀라 그녀에게 뛰어갔다.
에반젤린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쪼그려 앉은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괜찮아? 안 다쳤어?”
보통 인간이라면 그 자리에서 쥐포가 되어버렸어야 했으나 에반젤린에게 이 정도 H빔의 낙하는 크게 위협적이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
끙끙거리던 그녀가 그대로 굳어버린 채 눈을 부릅 떴다.
파르르 떨리는 손이 절로 주먹 쥐어진다.
“에린아?”
“기억났다…….”
그녀가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안돼…….”
“안돼?”
“이건 잘못됐어…… 한참 잘못됐다고!”
초단이 안에 있던 누군가에 대한 진실도 진실이지만 그녀와 접촉했을 때 에반젤린이 느낀 어떤 사실을 꼭 알려야 했다.
너무 늦어버리면 평생을 후회할지도 모를 어떤 사실을 말이다.
* * *
공사장부터 시작해서 그녀는 정말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나는 그런 그녀를 갖은 수단을 이용해 따라붙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절대 접근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가 아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내 발목을 묶고 그 틈을 타 도망쳤다.
오랜 시간 내게 제일 잘 맞았던 무기는 사실상 청단이와 홍단이, 그리고 초단이였다.
그런 초단이의 안쪽에서 그것을 보고 모두 받아들인 아이의 실력은 소프트웨어가 불안전한 초단이와는 달리 경험 면에서 압도적으로 높았다.
콰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대지를 박차며 도망치는 그녀는 지치지도 않는다는 듯 내게 손을 뻗었다.
[디스펠]
동시에 그녀의 마법이 펼쳐지기도 전 내 디스펠 마법이 그녀의 마법을 틀어막는다.
하지만 그것 정도는 이미 예측했다고 말하듯 이중 삼중으로 방해마법들이 쏟아진다.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빠른 마법들인 만큼 강제로 디스펠 하는 쪽이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잡는 데에 무리하게 힘을 가할 수도 없었다.
“왜 이렇게 자꾸 쫓아와!”
“일단 내가 잘못했으니…….”
“아빠가 뭘 잘못했는데?”
순간적으로 말문이 틀어막힌다.
그리고, 그렇게 말문이 틀어막힌 나를 비웃듯 그녀는 검기로 허공을 찢어버린 뒤 그 틈사이로 도망쳐버렸다.
뒤늦게 쫓아가 보지만 그녀는 다시 워프 마법으로 자리를 벗어난 후였다.
대체 어디까지 쫓아가는 것일까.
결국, 그녀를 쫓아 도착한 곳은 익숙한 섬이었다.
빛나는 나비들이 발견되는 섬.
과거 나비 여제 찬드라, 아니 점순이가 처음 나타났을 때 함께 모습을 드러낸 섬이었다.
본래라면 미 항모병단에서 정박하며 조사를 이어나가던 섬이었으나 현재는 거의 대부분이 철수한 상황이기도 했다.
점순이가 이쪽으로 넘어오면서 사실상 주인 없는 섬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하아…… 하아…….”
아무리 날고 기는 경험을 가졌다 해도 초단이의 힘의 총량이 나를 넘어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본적으로 그녀의 힘이 적은 편은 아니라지만 나를 통해 경험을 쌓아온 것인 만큼 그녀 스스로 쌓아 올린 게 아니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나와 대치 중이던 그녀가 급히 다시 워프 마법을 발현했다.
[디스펠]
물론, 그녀의 마법은 내 마법인 만큼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순식간에 그녀의 마법을 디스펠 했지만, 그녀도 만만찮았다.
우우우웅!!!
순식간에 그녀의 주변으로 여러 개의 워프 마법진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저것들 중 하나만 똑바로 발현되어도 성공할 터.
나는 빠르게 마법진들을 시야에 담아 분석한 뒤 엄청난 속도로 디스펠 해나갔다.
[디스펠]
[디스펠]
[디스펠]
[디스펠]
와장창!!!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다수의 마법진들이 부서져 나갈수록 마법의 난이도가 점점 고도의 집중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이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것에 놀라울 지경이다.
이윽고 마지막 남은 마법진을 디스펠하려던 그 순간.
[디스…….]
[디스펠]
그녀의 입이 작게 오물거리더니 디스펠을 읊조렸다.
챙그랑!!!
그리고, 그 짧은 틈에 내 디스펠 마법을 역 디스펠로 방해해버린 그녀는 워프 마법진을 타고 도망가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도망가려 했다.
“악!!”
하지만 마법이 완성되었음에도 그녀는 도망치지 못했다.
워프 마법 자체를 감싸듯 일대 영역의 무색의 장막이 그녀를 튕겨냈기 때문이었다.
“x발 진짜!!”
확실히 그녀는 기본적으로 나긋나긋한 초단이와는 성격이 정반대였다.
마치 동전의 이면처럼.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욕설에 반사적으로 소리치자 그녀가 나를 한껏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기검을 만들어 장막을 베어버리려 들었다.
아무리 신력으로 펼친 덫일지라도 청단이의 강화된 권능은 그것마저 찢어 가를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당연히 그냥 두면 도망칠 테지만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흐읍!!”
카아아앙!!
힘을 끌어모아 일검에 베어버리려던 그녀의 검이 내가 내지른 롱기누스의 창날에 막혀 한차례 크게 출렁거렸다.
이미 수차례 틈을 보인 그녀였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틈의 연쇄 속에서 그녀의 허점을 정확하게 파고든 나는 그녀의 힘을 강제로 억눌렀다.
그녀는 나에 대해 생각 이상으로 잘 알았다.
하지만, 초단이와 다르다 할지라도 그녀와 같은 것을 봐온 아이인 만큼 그 행동거지를 유추하면 반대로 녀석의 행동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초단이 보다 조금 더 격하게. 초단이 보다 조금 더 난폭하게.
그러한 전제를 깔고 들어간 시점에서 녀석의 수는 이제 훤히 보이는 꼴이 된 것이다.
결국, 추가적으로 도망치지 못한 그녀가 주춤거리며 물러난다.
그 얼굴엔 당혹감이 서린 게 보였다.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움직이지 않은 탓일 터.
나는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하며 그대로 몸을 날리듯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그녀를 제압했다.
“이거 놔!!”
다리를 버둥거리며 내게서 빠져나가려 힘쓰는 그녀는 마치 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거칠었다.
“놓아주면 또 도망가려고? 어림도 없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파악!!
“읏!”
그 자리에서 손에 흙을 움켜쥐고 내 얼굴에 뿌려버리는 그녀의 행동에 내가 짧게 신음했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절대 안 된다고 말했더니 진짜로 흙을 뿌리는 인성은 누구를 닮은 것인지.
순간적으로 힘이 빠져나가는 틈을 놓치지 않은 녀석이 다시 도망치려 하자 나는 그대로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아빠 말 좀 들어!!”
결국, 폭발해버린 내 외침에 그녀가 악을 썼다.
“늦었어!! 이미 너무 늦었다고!”
아마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힘이 문제인지 초단이의 인격이 강해서인지 그녀는 끝내 자신의 존재를 내게 알리지 못했다.
악을 지르며 내게서 벗어나려 외치는 그녀였지만 어째서인지 처음처럼 과격한 공격은 전혀 하지 않았다.
버둥거리던 아이의 힘이 점점 빠져나간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울음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흐윽…… 흑…….”
손으로 가린 그녀의 눈가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에 서린 처절한 서러움이 마치 날카로운 유리 파편처럼 온몸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갑자기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과 함께 온몸이 난자당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를 다독여야 했다.
그게 뒤늦게 알아본 부모로서의 책임이라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그녀는 한참 동안 도망치지 않고 서럽게 울어댔다.
혹여 이걸 틈 삼아 다시 도망치려는 것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정말로 서러웠는지 정말 원 없이 울었다.
이에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내가 내린 대답은 이것이었다.
“지금부터라도 알면 된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이름을 짓고, 이제부터 같이 놀러 가자, 가족끼리 웃고 떠들면서 밥도 먹고, 정 불편하면 내가 자아를 분리해서 다른 곳으로…….”
“언제까지?”
“뭐?”
“몇 주? 몇 달? 그것도 아니면 몇 년?”
“당연히 평생…….”
그녀의 원망스러운 시선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시선에 서린 것은 분명 원망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오래가지 않아 사라졌다.
종잡을 수 없었다.
화를 냈다가 애정을 갈구했다가.
하지만 그런 종잡을 수 없는 혼란이야말로 이 아이가 아직 미련을 가지고 있다는 청신호이기에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진짜 그래 줄 거야?”
“그래. 그동안 못 받은 거 전부 다 해줄게, 낚시도 같이 가고, 맨몸으로 캠핑도 같이 가자. 야생에서 과일 따 먹고 나무 깎아서 캠핑도 해보자.”
“난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
“괜찮아. 네가 아니면 내 손에 죽었을 놈들이야.”
알하자드에게 이미 놈들의 신상에 대해 전해 들은 나였다.
눈앞에 있는 이름도 받지 못한 아이가 죽인 이들 모두가 처음 살해당한 테러리스트와 같은 목적을 지닌 존재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일관적이었다.
자신들의 종교를 붕괴시킨 넬타리드 교단.
그리고 한국은 그 넬타리드 교단이 일어서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신성 그룹의 뿌리였다.
그들의 한국과 넬타리드 교단을 향한 분노는 상당했고, 그 결과가 이번 테러였다.
물론 저들 조직 내에서도 이건 미친짓이다 라고 말하며 반대하던 이들도 있지만 자기 목숨 아까운 줄 몰랐던 놈들은 한국으로 넘어와 테러를 준비했다가 그녀에게 피살당했다.
아마 이들에 대한 정보는 처음 살해당한 테러범에게서 얻어냈을 것이다.
“그러니까 괜찮아. 이제부터라도 그동안 못 받은 거…….”
내가 그녀를 다독이듯 말하며 손을 뻗었다.
이에 그녀 또한 내게 천천히 다가왔고, 떨리는 양팔을 들어 내 품에 들어와 안겼다.
이제 괜찮을 거다.
그녀를 그렇게 안심시키려던 찰나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스쳤다.
“아빠.”
“그래.”
“이거 보여?”
그녀가 천천히 떨어지며 오른팔을 내밀었다.
거기엔 빛의 가루 같은 게 팔에서 빠져나와 흩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그것이 무엇인지. 또 무슨 현상인지 알고 있던 내 눈이 부릅 뜨여졌다.
소멸의 전조.
영혼이 윤회의 강에 올라가는 것도 아닌 완전 소멸의 전조였다.
언젠가 내가 모든 생을 마치고 편히 눈을 감고자 할 때 찾아올 끝.
뒤가 없는 영원한 수면.
“너?!”
“미안해.”
힘없이 웃는 그 아이의 미소와 함께, 녀석의 혼은 가루가 되어 내 눈앞에서 허망하게 흩어져간다.
“너무…….”
“기다려! 지금 뭐하는……!”
“늦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발뒤꿈치를 들어 내 이마에 제 입을 맞추고는 예쁘게 웃었다.
초단이와 다른 느낌의 미소였다.
“그냥 끝까지 화내려고 했는데, 아빠가 그렇게 잡는 거 보니까…… 마지막까지 원망할 수가 없네…….”
그렇게 가버리면 평생 괴로워할 거잖아.
“아빠, 끝까지 이름도 없으면 너무 서운하잖아.”
“기다려봐! 내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내 이름. 비화라고 지어주면 안 될까?”
그 뜻은 버드나무 꽃.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의 혼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난 후 기절한 초단이를 품에 안은 채 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아이는 끝내 내게 자신의 상태를 말하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고 왜 이런 상황에 놓였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초단이를 품에 안은 채 멍하니 하늘을 보던 나는 이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날 나는 돌아가겠다던 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