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26화
어마어마하게 넓은 지하 연구시설은 수많은 각종 설비로 가득했다.
물론, 그중 제대로 가동하는 건 단 하나도 없이 먼지만 앉아있지만 말이다.
“몇 번 와봤나 보네.”
“예 뭐…… 그렇죠. 이곳에 중요한 실험자료들이 있다고 들었어요. 비록 인도적인 실험은 아니었다곤 해도 희생당한 이들이 억울하진 않아야죠…….”
이바노프는 낡은 지도 하나를 꺼내 먼지 앉은 테이블 위에 올린 뒤 간단한 브리핑을 했다.
“지금 저희가 있는 곳이 중앙 로비에요. 비록 전기가 다 끊어졌다곤 하지만 들어갈 방법은…….”
이바노프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문제없겠죠?”
“그놈은 어디 있는데.”
“마침 제가 가려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에요.”
미로처럼 빽빽한 지하 시설의 길을 손가락을 짚은 채 주욱 밀고 나가던 이바노프가 거대한 공동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멈췄다.
그리고는 뭔가 두려운 것이 떠오른 듯 몸을 잘게 떨며 말했다.
“세상에 별별 일이 다 있다곤 생각했지만 그런 생명체는 처음 봤어요. 애초에 그걸 생명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두려움보다는 안타까움이 서린 목소리였다.
“제가 가려고 하는 곳은 이 홀 아래에 숨겨진 지하 자료실이에요. 그곳에 가면 중요한 자료들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너는 안내를 하고, 나는 그 괴물을 처리하고?”
“현실적으론 그렇게 하는 게 맞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괴물을 죽일 수 있을는지…….”
이바노프는 내가 놈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해왔다.
“그 정도로 강하나?”
“아뇨. 강한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사실 제대로 판단이 되지 않는 것도 있고. 다만…… 아니다. 직접 보시는 게 이해가 빠를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녀석은 길을 안내했다.
내부는 미로처럼 얽히고설켜 있었지만, 이바노프는 마치 제집처럼 거침없이 진행해 나갔다.
이미 한차례 와봤던 곳이기 때문일까.
이바노프의 움직임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이동 경로는 생각 이상으로 오래 걸리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생각보다 돌아가네. 비켜.”
“뭐……뭘 하시려고!”
“바닥 잘라버리고 내려가게.”
내가 홍단이를 뽑아 들자 이바노프가 기겁하며 나를 말렸다.
“자……잠깐만요! 안 그래도 폐허가 된 곳이라 지지기반이 약해요! 자칫해서 바닥을 잘라버렸다가 그대로 무너지면 원하는 걸 찾지 못할 수도 있어요!”
이바노프의 필사적인 만류 때문일까.
나는 검을 내려놓은 뒤 다시 걸어 나갔다.
“빨리 가자.”
“저기…… 무슨 일이 있는 거죠?”
가만히 멈춰선 채 그가 물어왔다.
“지금 형의 모습을 보면 엄청 다급해 보이거든요. 예전이랑 좀 많이 달라서.”
역시 눈썰미가 좋은 이바노프는 내 상황을 눈치챈 듯 보였다.
“그…… 괜찮으세요?”
“아니. 안 괜찮아. 그러니까 빨리 가자.”
그 대답에 이바노프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최대한 빨리 가볼게요. 뭘 찾으시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꼭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평소라면 고맙다라고 한마디 했을 텐데. 이번엔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곳도 결국 RC 바이러스 관련 시설인 겐가?”
지금까지 유르기안에서 본 시설과는 조금 다른 디자인 때문인지 페르세르크가 의문을 담아 이바노프에게 물었다.
“아뇨, 처음엔 RC 바이러스 관련 연구시설인 줄 알았는데. 조금 달라요. 이곳에서 연구한 건 다른 무언가가 분명하죠. 아직 확인한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제가 확인한 요소만 보면…….”
이바노프가 그리 설명하며 앞장서던 도중 걸음을 멈췄다.
“잠깐만요. 여긴 출입 통제 시스템이 있어요. 관련 인물이 아니면 철저하게 통제하죠.”
이바노프가 나를 안내한 곳은 천장이 엄청나게 높은 금속제 통로였다.
빛 한점 들어오지 않던 시설이지만 어째서인지 이곳은 새하얀 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통로의 길이는 어림잡아 100여 미터. 아무것도 이렇다 할 이상한 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바노프. 여기에 뭐가 있나?”
“아! 잠깐만요! 여긴 진짜 위험해요. 어떤 미친놈들이 설계했는지 모르겠는데 만약에 멋대로 발을 들이밀어서 압력센서를 건드리면…….”
달칵…….
그그그그그그극!!!!!
“벽면이 좁혀져 와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바노프가 중얼거렸다.
이미 우리가 들어온 통로는 잠겨버렸고 벽은 계속해서 우리를 쥐포로 만들 것처럼 좁혀져 들어왔다.
“아니 그걸 왜 멋대로 밟아요!!”
“조용히 좀 해라. 왜 이렇게 소란이야.”
“소란 안 피우게 생겼어요?! 지금 벽면 들어오는 거 보여요?! 저기 가해지는 힘이 수만 톤이에요! 보통 인간은 물론, 어지간한 프레스 기계도 그 정도로 강하게 누르진 않는다고요!”
그의 외침대로 강한 힘이 밀고 들어온 건 사실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좁혀져 오는 속도가 상당히 느리다는 점이었다.
“아…… 망했다……. 난 이제 죽을 거야…….”
좌절하는 녀석을 보며 내가 물었다.
“이거 강제로 막으면 어떻게 되지?”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요. 막는 것도 불가능하거니와 설사 막는다면…… 뭐……. 이곳은 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하면, 본녀가 해야겠구나.”
“예?”
내 어깨에 앉아있던 페르세르크가 가볍게 뛰어내리며 몸을 본래의 크기로 되돌렸다.
이에 이바노프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보다 내게 괜찮은 게 맞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별문제 없을 거야.”
“저기요. 압력 수만 톤이면 진짜 엄청난 힘이거든요?”
“무식하게 힘 싸움을 하는 건 본녀의 취향이 아니거늘.”
담담하게 말한 그녀는 한 손으로 땅에 짚은 뒤 양쪽 벽이 서서히 좁혀져 옴에도 느긋한 표정으로 마기를 끌어 올렸다.
딱히 그동안 페르세르크가 이렇다 할 힘을 내비친 적은 거의 없지만 그녀는 한때 마왕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법 실력 또한 경지는 높지 않아도 그 정교함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쩌적!!
이윽고 눈을 감고 있던 페르세르크의 붉은 눈동자에 푸른빛의 기류가 한순간 꼬리를 늘어뜨리듯 일렁였다.
동시에 바닥에 닿은 그녀의 손을 시작으로 주변 전체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으……으아악!!”
갑작스레 퍼져나가는 엄청난 냉기에 화들짝 놀란 이바노프 녀석이 내게 달려오자 나는 녀석의 어깨에 손을 뻗은 뒤 마나를 흘려 페르세르크의 마법 영향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페르마프로스트(영구동토)]
쩌드드드득!!!
마치 냉기가 살아있는 것처럼 바닥을 시작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닥치는 대로 얼리기 시작하자 기계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법이 아닌 기계인 만큼 막대한 냉기에 구동 부분만 얼어붙어도 그 자리에서 자멸하리라.
쩌저적!! 쩍!!
막대한 냉기에 노출된 벽면이 강하게 진동하며 흔들림을 낳기 시작하자 이바노프의 얼굴에 겁이 서렸다.
하지만 곧 벽면이 완전히 얼어붙어 버리며 더 이상 전진을 하지 못하게 되자 그의 얼굴에 황당함이 서렸다.
“저기…… 이게 가능해요?”
“뭐해. 가자.”
주변 전체를 엄청난 냉기로 얼려버린 페르세르크가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축소시킨 뒤 내 어깨에 다시 올라앉았다.
“아…… 아…… 네.”
압력센서의 회로 또한 얼어붙어버린 것인지 더 이상 방해는 없었다.
이바노프는 멍하니 내 뒤를 따라 불안하게 주변을 둘러보다 허겁지겁 속도를 올렸다.
* * *
이바노프가 처음 말했던 괴생명체가 있는 지하 홀에 도착하는 데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지름만 2백 미터는 훌쩍 넘어 보였고 쉬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깊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어둠에 가려져서 안 보이는 거예요.”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심연의 구덩이 속을 보며 내가 묻자 이바노프는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꾸했다.
“아니. 보고 있는데. 아무것도 없다고.”
“네? 그럴 리가요. 분명 얼마 전에 이곳에 왔을 땐 분명 있었는데?!”
당황한 그가 제 몸만 한 가방에서 발광봉을 꺼내 부러뜨렸다.
그리고는 어둠밖에 없는 구덩이 속으로 몇 개나 던졌다.
그렇게 발광봉이 한참을 내려갔을까.
툭…… 투툭…….
한참 후에 바닥에 떨어진 발광봉의 소리에 함께 이바노프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그럴 리가. 분명 봤는데…….”
본래 괴물이 있었어야 할 깊은 심연 속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잠깐만요! 분명 놈이 어딘가에 숨은 걸 거에요!!”
“됐어.”
“잠깐만요! 정말 거짓말이 아니에요! 진짜! 진짜 봤다니까요!”
녀석이 거짓말한 것에 대해 내가 실망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이바노프는 필사적으로 상황을 변호하려 했다.
하지만 페르세르크와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지하를 향해 뛰어내릴 뿐이었다.
“자……잠깐만요! 저도 같이 가요!!”
내가 뛰어내리려 하자 이바노프가 황급히 내 다리를 붙잡았고 나는 염동력으로 녀석을 띄워 올린 채 계단을 무시하고 그대로 낙하했다.
후우웅…… 탁!!
빛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이다.
하지만 나와 페르세르크의 눈에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 잘 보였다.
“저건가?”
“네? 뭘 보고…….”
우리와 달리 어둠 속이 잘 보이지 않는 녀석을 위해 수십 개의 라이트 마법을 띄워 올리자 거대한 구덩이의 바닥이 환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워오…….”
동시에 한쪽 구석에 늘어진 무언가를 발견한 이바노프의 표정이 파리해졌다.
“저게 저렇게 작은 게 아니었는데.”
우리가 발견한 것은 사람보다 두세 배 정도 커 보이는 살덩어리였다.
다만, 온몸에 융털 같은 것들이 돋아나 있었고, 그 융털의 끝에는 징그러운 눈동자들이 달려있었다.
단순히 끔찍한 비주얼만 놓고 봐도 손에 꼽을 정도로 징그러운 형체.
마치 갓 태어난 아기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는 그것은 갑작스런 빛에 온몸을 비틀더니 기괴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으우에에엥!! 으우에엥!!
마치 갓난아기가 우는 것 같은 끔찍한 사운드였다.
“데이비. 이거 맞아?”
“맞네. 비화의 잔재가 들어가 있다. 이바노프.”
“네……네?!”
“이놈 지금까지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나타났다고 했지.”
“네.”
그럼 맞네.
비화의 잔재가 스며들면서 놈이 깨어난 것이다.
다만 괴성을 지르며 점점 커지기 시작하는 놈의 모습은 겉보기에도 절대 좋은 기억이 담긴 잔재를 먹은 게 아닌 듯했다.
아기가 우는 듯한 기괴한 소리를 내며 점점 커지기 시작한 녀석은 이내 엄청난 크기로 불어났다.
고작해야 2~3미터 정도 하던 크기가 순식간에 수십 미터로 늘어난 것이다.
그럴수록 몸의 융털들도 늘어났고 그 끝에 달린 징그러운 눈도 보였다.
그리고. 놈의 얼굴 부분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마치 사람의 입 같은 입이 쩍 벌어지기 시작했다.
“유르기안의 인간들은 대체 뭘 만든 거야.”
“그걸 알아내려면 이놈이 지키고 있는 저 뒤쪽 구멍으로 들어가야 해요. 하지만 저는 이놈 때문에 전혀 들어가지를 못해서…….”
이바노프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제가 생명체가 아닌 거 같다고 그랬죠? 형도 보면 알겠지만…….”
“그래. 생명체가 기본적으로 가지는 모든 요소가 없네.”
이바노프는 그동안의 조사를 통해 녀석이 일반적인 생명체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지만 지금 내 눈에 비친 놈의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끝없이 탐욕을 갈구하는 괴이처럼 말이다.
오래전 그런 괴물을 보고 뭐라 했던가.
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페르세르크의 표정이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파랗게 질린 게 보였다.
다른 건 강해도 유별나게 촉수형태의 생명체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였다.
덕분에 자주 놀린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들지 않는다.
“어쨌든 내가 찾는 놈이 맞으니 비켜. 금방 치울 테니.”
“자……잠깐만요. 저 괴물을 처리하신……. 아……아니에요. 하긴 그 벽도 얼려버리는 분도 계시는데…….”
한숨을 내쉰 이바노프가 천천히 물러났다.
“그래도 조심해요! 저놈 기이한 힘을 써요!”
그말과 함께 괴물의 입이 쩍 벌어지며 기이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 일반적인 인간이 어둠 속에서 저런 괴물을 마주한다면 기괴한 울음소리와 저 끔찍한 생김새에 기절해버려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끔찍한 형태를 지닌 괴물을 향해 한 발 내디딘다.
한 손에 홍단이, 또 한 손에 청단이가 모습을 드러냈고 다시금 빛에 휩싸이며 한 자루의 검으로 변했다.
청적색의 장검은 내 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제각각의 색을 번뜩였고 괴물은 그런 나를 한입에 먹어치우려는 듯 끔찍한 융털을 꾸물럭 거리며 내게 뻗어왔다.
“아……안돼요! 직접 닿으면!”
서걱!!!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놈의 촉수들이 잘려나갔다.
순식간에 체액을 흩뿌리는 녀석의 입에서 마치 아파하는 아기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귀가 쩌렁쩌렁 울리는 끔찍한 울음소리에 나는 가볍게 바닥을 박차듯 놈에게 파고들었고 녀석은 그런 나를 휘감기 위해 눈이 달린 촉수들을 다시 뻗어왔다.
한두 개도 아니고 겉보기에도 수백 개에 달하는 촉수들이다.
일일이 잘라내기보다는 단번에 그어버리는 게 맞으리라.
[초중검]
[태산쪼개기]
나를 향해 밀고 들어오는 촉수를 그대로 무시한 채 놈의 본체에 시야를 고정한 내가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내리그었다.
쩌억!!!
순간적으로 섬광이 번뜩인다.
그리고, 번개처럼 내리꽂힌 압도적인 중량의 검이 놈의 몸체에 닿았을 때였다.
마치 직접 겪은 것처럼 어떤 장면이 보였다.
검은 무언가에 휘감긴 채 검은 공간에 주저앉아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는 비화의 모습이 비쳤다.
-아빠는 곧 날 찾아줄 거야. 그땐 지금까지 겪은 거 다 투정도 부리고 위로도 받아야지.
마치 홀로 스스로를 위로하듯 그녀가 중얼거린다.
-지금이야 모르지만 언젠가 알겠지. 아빠가 바보도 아니고 이상한 점도 눈치 못 챌 리가 없는데.
그녀는 계속해서 내가 그녀를 발견해줄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아빠, 진짜 너무 아팠어요. 그러니까 이거만큼 꼭 보상해줘야 해. 엄청 투정 부리고 게으름피울 테니까, 아빠가 해주는 밥도 먹고, 같이 놀러도 가고, 밤에 같이 게임도 하고…….
당장은 발견하지 못해도 언젠간 알아줄 거라는 믿음과 함께 비화의 괴로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런 웃음도 잠시. 그녀를 잠식하고 있던 검은 힘이 그녀를 더욱 조이기 시작하자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이를 악물고 힘이 폭주하지 않도록 버티던 그녀의 입에서 결국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 왜 몰라? 날 왜 몰라봐요? 잠깐만요! 이건 아니잖아! 잠깐만! 아아아악!! 아파! 그만! 그만!!
하지만 초단이의 힘을 마구잡이로 끌어내는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시야에 비친 나는 거대한 어떤 존재와 싸우고 있었다.
상당히 여유로워 보이는 얼굴.
일방적으로 유린하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정작 비화는 웃을 수가 없었다.
끔찍한 고통이 점점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아빠!! 제발 내 말 좀 들어줘요! 제발! 나 너무 아파…… 너무 아파요. 제발……. 날 좀 발견해줘…… 이제, 그만 아프고 싶어.
-아악!! 아파요! 제발! 그만 사용해요! 너무 아프단 말이야!!
초단이의 힘을 끌어낼수록 비화가 고통을 받는다. 그럼에도 정작 나는 그녀의 목소리는커녕 힘을 쓰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제발…….
자아가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그녀의 의지가 수십번이고 기절했다가 깨어나듯 점멸했다.
그런 괴로움 속에서도 비화는 끝내 초단이와 내가 폭주에 휘말리지 않도록 계속해서 정신을 각성시키며 제 힘을 제어해 초단이가 폭주하지 못하게 했다.
지금 내게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이 내 전신으로 밀고 들어왔다.
비화의 잔재를 흡수하면서 그녀의 기억 일부를 본 건 사실이지만 이놈이 보여주는 환각은 달랐다.
지독한 현실감과 함께 마치 내가 그녀가 된 것처럼 그 절절한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포식의 힘과 심연의 힘이 충돌한다.
그 힘의 여파가 초단이와 청단이 홍단이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막기 위해 홀로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비화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우욱!”
결국, 내 검은 놈의 몸을 베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중간에 멈춰버렸다.
완전히 잘려나가지 못한 녀석은 끔찍한 괴성을 내지르며 내게서 물러나 벽면에 처박혔고 막대한 지진을 일으킨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숙였다.
“아…….”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이 지독한 감정에 노출된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이 괴물의 고유적인 힘이 바로 그것인 모양이었다.
놈이 지닌 끔찍한 기억을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에게 덧씌워 체험하게 만들고 있다.
비화가 이런 괴물은 아니지만, 비화의 잔재를 먹으면서 그 기억이 동화된 것이다.
녀석이 깨어나고 끔찍한 울음소리를 토해낸 건 비화가 가진 그 아프고 괴로운 기억이 시발점이 되었을 터.
생각 이상으로 지독한 비화의 기억에 내가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그리고 페르세르크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주저앉아버렸고, 상황을 모르는 이바노프는 비화의 기억에 노출되기가 무섭게 손을 덜덜 떨면서 주저앉은 채 내게 물었다.
“형…… 이거…… 이거 대체 뭐에요?”
“…….”
“형!! 이게 대체 뭐냐구요!!”
그는 이 괴물과 싸워본 적이 없으니 이렇게 기억에 동화된 적이 없을 터. 그도 처음 느껴보는 이 지독한 슬픔과 아픔에 패닉이 온 듯 보였다.
아직 어린 소년이고 감정이 냉정하지 못한 이바는 그 자리에서 속에 든 것을 게워내며 괴로워했다.
이바노프가 그 지경인데 그 대상이며 부모인 페르세르크와 내가 느낀 감정은 어떻겠는가. 너무 끔찍했다.
동시에 허망한 감정이 내 전신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아기 울음소리만 내던 괴물의 눈동자 일부가 내게 닿는다.
그리고. 끔찍한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아……빠…….
이 개x식이 지금 비화를 흉내 내고 있다.
실제로 놈의 인간처럼 생긴 입은 입꼬리를 끔찍하게 끌어올린 채 비웃고 있었다.
마치 네가 이 기억의 대상이구나. 그래. 나를 죽일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놈의 힘은 정신계통의 힘이리라.
이런 기억 하나하나 평생을 잊을 수 없는 내게는 극히 치명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마치 비화처럼 내게 말을 하던 괴물이 몸을 기우뚱한다.
내가 베다 말아버린 부분은 이미 빠르게 수복되고 있었다.
-이게 아닌가아……
내가 더 무너지지 않고 휘청거리고만 있자 녀석이 도발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녀석의 그런 비웃는듯한 웃음 속에서 내가 입을 열었다.
“이바노프 반.”
“…….”
이바노프는 끔찍한 기억에 패닉이 온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안한데. 자료 찾는 건 못 도와주겠다.”
그말과 함께 이바노프와 페르세르크를 감싼 반투명한 막이 생겨난다.
그리고.
손을 높이 든 내가 보랏빛이 일렁이는 적안을 번뜩였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눈치챈 녀석이 몸을 비틀며 내게 말한다.
지능이 없는 게 아니었다.
녀석은 상상 이상으로 지능이 높았다.
-나 죽일 거야?
-나 이렇게 괴로운데 날 죽일 거야 아빠?
-그거 쓰면 나 죽어……. 아빠 나 이렇게 버릴 거야?
마치 공격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녀석이 정을 호소한다.
그러면서도 녀석의 거대한 입꼬리는 계속해서 내려오지 않고 지독한 웃음을 담고 있었다.
실제로 녀석의 도발은 효과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마법을 멈출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절대 잊지 않았다.
비화는 내가 어리석어 이미 소멸했고, 놈은 그저 비화의 잔재에 동화되어 그녀의 기억을 가지고 내게 흉내 내는 것뿐이라는 것을.
그런 거지 같은 짓을 하는 괴물을 향해 내가 섬뜩하게 씹어뱉었다.
“넌 비화가 아니야 이 개x끼야.”
선을 넘지는 말았어야지.
[초월 서클 흑마법]
“울티마.”
순간적인 빛이 번뜩였고 이내 소리와 빛이 완전히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렇게 한참을 지났을까.
마치 바닷물이 빠져나간 부분에 다시금 몰려드는 것처럼 막대한 빛과 소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행성을 붕괴시켜버린 붕괴 최고위 흑마법이지만 그 범위를 극도로 압축시켜 놈에게 일점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법이 끝났을 때 남은 것은 지하 시설도, 폐허가 된 도시도 아니었다.
수십 킬로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크레이터.
그 깊이는 지하 시설보다 더욱 깊게 패며 있었다.
괴물의 시신은 흔적도 없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극도의 분노로 인해 일대 전체를 지워버린 나는 녀석이 사라지면서 빠져나온 비화의 잔재를 회수할 생각도 못 한 채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한 손으로 바닥을 미친 듯이 내리쳤다.
“데이비! 그만해!!!”
이후 페르세르크가 마법의 후폭풍에서 빠져나온 듯 내게 달려와 내게 매달려 강제로 행동을 멈췄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도 처절한 슬픔이 묻어있었다.
“정신 차려. 그대는 비화의 아빠야. 그대와 본녀가 잘못을 한걸 참회하고 싶으면 여기서 무너지면 아니 될 터!”
나와 비슷하게 끔찍한 슬픔에 가득 차 있으나 그녀는 끝내 정신줄을 꽉 붙잡았다.
그런 그녀의 외침에 나는 천천히 멍한 기억 속에서 천천히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채 울음을 터뜨리며 괴로워하고 있는 이바노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미안하다. 이바노프, 이런 기억을 보여줘서.”
“크흑…… 흐으윽…….”
서럽게 울던 그가 내게 물었다.
“대체…… 대체 뭐에요 저거? 저 괴물이 품고 있던 기억……. 그거 형이잖아요…… 대체…….”
“우선은 여길 벗어난 뒤에 말해주마…….”
의도하지 않게 비화의 기억을 알게 되어버린 이바노프는 한동안 끔찍하고 슬픈 기억에서 쉬이 헤어나오지 못했다.
페르세르크가 결정을 통해 비화의 잔재를 회수한 뒤로도 한참 동안 우리 셋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돌아가자…….”
그저 묵묵히 내가 중얼거리는 한마디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가장 끔찍한 사실은 유르기안 대륙의 비화의 잔재는 아직 하나 더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압도적으로 비화의 슬픈 기억이 많은 만큼 이건 지금껏 겪은 것 중에서도 극히 괴로운 시련이나 다름없었다.
여신은 어쩌면 이걸 내게 보여주고 내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지켜보려던 것이 아닐까.
아이가 소멸했으나 그동안 그 아이가 겪은 괴로움을 직접적으로 보도록.
단순히 아이가 소멸했다는 이유만으로 슬퍼하지 말고 똑바로 외면하지 말고 비화의 아픔을 직접 확인하라는 무거운 뜻.
어떤 의미에선 정말로 잔인하다고 생각된다.
“아직…… 여기 잔재가 하나 더 남아있다.”
“……그걸 또 찾으려는 건가요?”
이 촉수 괴물을 제외하고 이렇게 지독한 기억의 동조를 일으키는 존재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렇지 않다고 해도 쉬이 잔재를 회수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돕게 해주세요. 내가 도울게요…….”
이바노프는 괴로운 표정을 억지로 누르며 내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보다 더 괴로운 게 형이니까. 내가 돕게 해주세요.”
녀석의 말에 나는 조용히 침묵했다.
그때 이바노프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아! 쌍둥이 골렘!!”
그의 외침에 나와 페르세르크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안돼…… 폭발에 휘말린 건가?!”
이바노프의 명령을 받고 쌍둥이 골렘은 폐허가 된 도시를 누비며 자료를 찾고 있었다.
그런 도시를 내가 울티마로 지워버렸으니 사실상 쌍둥이 골렘은 파괴된 셈이었다.
이바노프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맡겨둔 디셉티콘 편대의 골렘이다.
비록 이렇다 할 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부숴버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놔 진짜…….”
내가 짜증을 담아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