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27화
“너무 깔끔하게 지워져 버렸는데요? 여기 표면을 보면 이 표면 너머를 기준으로 남은 게 단 하나도 없어요. 마치 깔끔하게 도려낸 것처럼.”
연구 자료를 위해 이 도시에서 목숨 걸고 탐사를 하던 이바노프였다.
그런데 그 폐허가 날아가 버렸으니 허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보다 정말 대단하네요……. 설마 도시 전체를 완전히 소멸시켜 버릴 줄이야……형은 정말 대단하면서도 놀랍네요. 사람 맞아요?”
“사람……이지.”
잠깐의 뜸 들임에 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쨌든…… 형의 힘이 이 정도일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하지만 이바노프는 그리 말하면서도 나를 타박하지 않았다.
그 또한 그 기괴한 생명체가 방출한 기억의 동화에 같이 휩쓸리면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흔적이라도 남아있을까 싶었는데…….”
이바노프의 우울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온 것은 단순히 연구 자료가 날아갔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었다.
비화를 조롱한 괴물을 향한 분노가 폭발하면서 일대 전체를 날려버리면서 애꿎은 쌍둥이 골렘까지 휩쓸려버린 것이었다.
이에 괜히 찔리는 마음이 들어 그에게 무어라 말하려 할 때쯤 이바노프가 갑자기 엎드리듯 몸을 웅크리고 좌절하기 시작했다.
“내 쌍둥이 골렘이……. 쌍둥이 골렘이…….”
오랜 시간 녀석의 신변을 지켜주던 골렘들이었던 만큼 애착도 강했던 모양이었다.
“거……. 미안하게 됐다.”
“괜찮아요……. 저도 이렇게 화나고 슬픈데 형이면 오죽하겠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쌍둥이 골렘도 나를 지켜주려고 내어주신 거니까.”
그리 말하지만 우울한 기색을 지우진 못한다.
“그런데…… 제가 본 게 대체 뭐죠?”
말해준다 대답하긴 했지만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했을까.
나는 체념하듯 중얼거렸다.
“부모 사랑 한 번 못 받고 죽은 딸아이의 기억.”
그 설명은 사실 이바노프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걸 내 입으로 직접 확인받은 이상 그가 생각하는 사실이 현실로서 확실해진 셈이었다.
“그 비화라는 아이가 형의 아이였나요? 그런 것치고는 너무 성숙해 보이던데.”
“있었어. 그리고 비화는 내 손에서 태어난 자아야.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
“아……. 미안해요.”
연금술사로서 만들어진 존재에 애착을 품는 건 이바노프도 마찬가지인 터라 금방 이해하는 듯했다.
유르기안과 거래를 하는 과정에서 에반젤린이나 다리안 혹은 아벨이나 청단이 홍단이에 대해선 알고 있었지만 비화에 대해선 그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저…… 형. 제가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요. 형도 정말로 몰랐던 거고.”
“몰랐으면 그 애가 받은 고통이 사라지나.”
그걸 자기 합리화한다는 것은 내 아버지, 크리아네스 올 라운 국왕과 똑같은 짓을 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 그걸 평생 짊어지시겠다는 건가요?”
“그래야지.”
“형!”
그가 내 양팔을 붙잡고 올려다본다.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요. 지금 이렇게 잠깐만 있어도 사람이 미쳐 가는 게 보이는데 그걸 평생 짊어지겠다고요? 더구나 다른 사람 이상으로 기억이 또렷한 완전기억 능력자가?”
그의 물음에 나는 똑같이 이바노프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바노프 반.”
“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속죄다.”
그게 부성이고 모성이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형의 기억을 지우라 말하고 싶네요. 아직 확실한 건 없지만 가능성이 있다면 제가 노력해서라도 찾아낼 수 있어요.”
그는 조금 전 내가 본 기억을 간직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비화라는 그 아이에게 미안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니에요!”
그가 한탄했다.
언뜻 들으면 냉정해 보일 수 있지만 그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도 스스로 관리가 안 되어서 감정이 줄줄 새는 터라 주변인들이 눈치를 챌 정도였으니 말이다.
“망각은 축복이라고 하죠. 형은 그런 의미에서 저주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복동생인 에오니샤도 완전기억 능력에 가까운 힘을 지니고 있지만 나와는 엄연히 달랐다.
이바노프의 말대로 나는 특정한 이유로 봉인하거나 지운 기억을 제하고는 모든 기억을 실시간으로 기억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당연 기억이 생생할수록 그에 대한 감정이 희석되는 건 굉장히 어려웠다.
“그만. 이바노프,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본래는 이런 걸 보여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하…… 알겠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마음이 바뀌면 말해줘요. 제가 아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도와줄게요.”
우울한 기색을 애써 접으면서도 찜찜한 구석이 가지 않는지 그는 폐허가 되어버린 지역을 벗어나면서도 그리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본래라면 파묻힌 자료나 쌍둥이 골렘의 잔해를 찾아야 하지만 예상대로라면 울티마가 터지면서 거대한 원형으로 도시 전체를 아예 지워버렸으니 흔적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미련하게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 속에서 찾아낼 수도 없는지라 이바노프는 가방에서 꺼낸 나무들을 이용해 묘비처럼 바닥에 꽂아 넣은 뒤 글귀를 새겼다.
내용은 대략적으로 쌍둥이 골렘의 묘라는 뜻이었다.
“꽃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울적하게 중얼거리며 그가 돌아섰다.
“가요. 아직 찾아야 할 게 하나 더 있다면서요. 이곳 지리는 제가 확실히 잘 아니까 제가 안내할게요.”
이바노프 반.
생각보다 귀찮은 오지랖이 넓다.
* * *
뮤트의 악기가 과부하 상태에 빠져든 탓에 다시금 사용하기 위해선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 탓에 데이비는 황야의 한복판에서 적당히 천막을 치고 야영을 택했다.
가방에서 간이 천막을 꺼내 설치한 그는 휴대용 난로와 침대를 세팅했고 페르세르크와 데이비에게 뜨거운 차를 내어준 뒤 홀로 천막을 빠져나왔다.
폐허의 연구 자료를 얻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지만 애초에 단순 호기심으로 시작한 탐사였던 만큼 지금은 은인이나 다름없는 데이비가 더 신경이 쓰였다.
괜히 곁에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아 자리를 비켜주었건만 정작 나오니 그로서도 뭘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쌍둥이 골렘이 폭발에 휩쓸려버린 것도 제법 울적했고 말이다.
그때 이바노프의 시야에 무언가가 잡혔다.
“음? 저게 뭐지?”
달밤 아래 어둑한 황야 저편을 보며 눈을 몇 차례 비볐다.
시력이 꽤 좋은 편이라 자부하지만 저 너머에서 오는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쓴 무언가가 잘 보일 리가 없었다.
괜한 경계심에 한 손을 뒤로 숨기고 호신용 도구를 손에 쥔다.
그리고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천천히 다가오는 이를 향해 말했다.
“멈추세요. 누구시죠?”
이런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 저런 차림의 행인이 있다? 말이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섬뜩한 것은 이 고요한 황야에 그 인영의 주변으로 마치 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잔뜩 굳은 얼굴로 경계하고 있던 이바노프는 이윽고 천천히 다가온 로브의 인영의 모습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천천히 다가온 이는 여성이었다.
그것도 경악스러울 정도로 신성하며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누구시죠? 탐험가십니까?”
이바노프는 일부러 데이비가 들리게끔 목소리를 키웠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데이비와 페르세르크는 근처 천막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의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윽고. 검은 로브를 쓰고 있던 여인이 천천히 손을 뻗는다.
그러자 그녀의 손 위에 무언가 작은 코어 같은 것들이 두 개 쥐어진 게 보였다.
“이건?!”
그녀는 어서 가져가라는 듯 그것을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디셉티콘 편대의 쌍둥이 골렘.
정확히는 이바노프의 목숨을 지켜주고 탐사를 도와주던 쌍둥이 골렘의 핵이나 다름없었다.
인공지능이 스며들어있고 대부분의 정보가 저장된 곳.
사실상 저게 그 쌍둥이 골렘의 코어가 맞다면 저것만으로도 두 쌍둥이 골렘을 다시 복원하는 게 가능했다.
“이걸 대체 어디서…….”
그녀는 대답 대신 한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동시에 마법을 거의 모르는 이바노프조차 확연히 느낄 정도로 푸르고 청명한 막이 주변을 휘감았다.
그리고 마치 일대 공간 전체가 그녀의 영향 아래 놓인 것처럼 일렁이며 변화를 일으켰다.
-아이야.
이바노프는 자신의 손으로 눈을 비볐다.
착각한 게 아니라면 그녀는 허공에 글자를 만들어내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양손에 골렘의 코어를 꼭 쥔 채 그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은…… 대체 누구시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눈을 마주했을 때 본능적인 감각이 그의 머릿속에 스쳤기 때문이었다.
말없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를 향해 이바노프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창조주를 향한 피조물의 본능적인 예우였다.
그리고 이바노프의 입에서 아주 천천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잘 나오지 않으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몸을 파르르 떨면서도 억지로 억눌렀다.
“대체 그에게 왜 이런 괴로운 시련을 안기시는지 물어도 될까요.”
이바노프는 머리가 좋았다.
그런 만큼 눈치가 빨랐고, 눈앞의 여인이 데이비가 말하던 여신이며 이번 일을 주도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그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 아니 이건 경우에 따라 다르겠네요. 비화라는 아이가 그럴 거 같진 않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형은 엄청나게 나쁜 부모니까요.”
하지만.
“그렇지만……. 이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잔재라고 했나요? 그걸 수복하는 일에 데이비 형이 지금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제일 잘 아시잖습니까.”
이토록 위태로운 데이비는 본 적이 없다.
그와의 연이 그리 길진 않지만 그래도 간혹 만나며 안부를 주고받던 사이가 아닌가.
그런 이바노프의 시선에 데이비가 이토록 위태로워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이 일을 선택한 건 데이비였다. 그리고 데이비의 잘못을 놓고 따지자면 비화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음에도 데이비는 현실에 안주하여 비화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잊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이바노프는 진실을 알면서도 투정을 부리듯 질문을 던졌다.
자기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때 기억이 동화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슬픈데, 그 본인들은 얼마나 괴롭고 절망스러울까.
그런 그의 질문에 여신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몸을 엎드리고 있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끝을 타고 푸른 빛 가루들이 그의 몸 안에 스며든다.
동시에 이바노프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마치 무언가 어떤 진실을 전해 들은 것처럼 말이다.
“그게……. 사실인가요?!”
* * *
이바노프가 천막으로 들어온 뒤 천막 안은 이렇다 할 대화 없이 침묵으로 이어졌다.
숨 막히는 침묵이 어색하지만 그는 마치 생각을 정리하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6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뮤트의 악기에 힘이 모여들고 다시 연주가 시작된다.
이바노프는 조금 복잡한 표정을 애써 숨긴 채 묵묵히 연주를 진행하는 데이비를 바라보았다.
여신에게 전해 들은 어떤 진실은 그가 알고 있는 것과 조금 달랐다.
그리고, 그녀는 그 문제에 대한 어떤 키워드를 이바노프에게 넘겼다.
뮤트의 악기가 제 성능을 발휘하자 금방 위치를 특정해낸 데이비는 곧바로 페르세르크와 이바노프를 대동한 채 엄청난 속도로 목적지에 도달했고, 비화의 잔재에 동화되어 있는 개체를 찾을 수 있었다.
처음 지하 시설을 조사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였다.
“세상에…… 석상에 잔재가 깃들어요?”
정체 모를 붉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반쯤 부서진 신상에는 이렇다 할 장치가 되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마치 스스로 눈물을 흘린 것처럼 붉은 자국이 눈가에 묻어 있었다.
“…….”
대답하지 않고 석상을 바라보던 데이비가 입을 연다.
“둘 다 물러나.”
“어림도 없는 소리.”
페르세르크는 물러나지 않겠다며 완고한 의지를 표했다.
“……이바노프.”
“괜찮아요. 그 괴물처럼 특수한 케이스가 아닌 이상 제게는 영향이 없는 거 같으니.”
나름대로 정론인 만큼 데이비는 페르세르크에게서 잔재의 결정을 받아 석상 안의 잔재를 빨아들였다.
생명체가 아니기에 회수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형.”
비화의 기억을 엿본 탓일까.
데이비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본 이바노프가 이를 살짝 깨물었다가 물었다.
“…….”
“아니에요.”
말끝을 흐린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저기……. 그 비화라는 아이의 잔재를 회수하는 거.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네가?”
“네. 끝까지 같이 갈고 싶어요.”
이바노프의 의외의 결정에 데이비는 조용히 그를 지켜보다 고개를 저었다.
“감정에 동조되면 네가 감당하기 힘들 거다.”
“아뇨. 괜찮아요. 이 찜찜한 감정을 털어내고 싶은 것도 있고, 본능적인 호기심 같은 것도 있고.”
이바노프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따라가야 합니다. 그에게 아직 할 수 없는 말을 곱씹는다.
그가 비화의 아픔을 품고 어떠한 자격을 품을 그때를 위해서.
“형.”
“음?”
“옛 고서에 그런 말이 있어요. 큰 힘에는 자격이 필요하다고.”
“갑자기 뭔 쉰 소리야.”
“그냥 그렇다고요.”
데이비는 강한 존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완벽하지 않았다.
잠든 여신이 아직 품고 있는 어떤 권능을 물려받기에는.
여신은 어떤 의미로든 데이비를 참 사랑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질투가 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