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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328화 (1,328/1,559)

제 1328화

데이비가 잔재를 부지런히 회수하던 그 시각.

뮤트는 마치 혼이 나간 것처럼 수천 장의 종이를 써내렸다.

각기 다른 색으로 그려진 악보들은 하나같이 찢어지거나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는데 그런 풍경을 만들어낸 것이 뮤트라고 말하듯 그녀의 손은 각양각색의 잉크로 더러워져 있었다.

“…….”

마치 홀린 것처럼 악보를 써내리던 그녀가 그 자리에서 악보를 찢어발겼다.

“이것도 실패.”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리고 그녀의 얼굴은 피로에 찌들어 있었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기가 막히는군.”

“남이사 신경 쓰지 말고 본인 일이나 하세요.”

“그 결과가 데이비에게 더 잔인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텐데.”

“그걸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판단합니까.”

뮤트가 작업을 멈추고 짜증스레 묻자 하레스 또한 지지 않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고작해야 5분에서 10분? 지금 데이비 저놈이 비화의 기억을 읽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괴로워하는데 눈앞에서 다시 사라지는 걸 보면 잘도 버티겠군.”

“그걸 결정한 건 데이비입니다. 왜 내게 그럽니까.”

“그게 옳은 선택이었는지 의심이 들어서.”

“딱히 반대도 하지 않던 인간이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처음엔 같은 생각이었지만.”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비화의 잔재를 모을수록 데이비가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걸 보고 생각이 바뀐 것뿐.”

처음엔 이 결과가 데이비에게 조금의 구원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레스가 보는 데이비는 비화의 잔재를 모을 때마다 점점 망가지고 비틀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 와서 하긴 어려운 말이지만 이건 녀석을 더욱 망가뜨릴 가능성이…….”

“하레스.”

검신 하레스의 말을 끊은 뮤트가 조용히 그를 직시했다.

“오지랖은 적당히 부리는 게 좋습니다. 나는 바쁘니 돌아가세요.”

“하다못해 녀석을 한번 보기라도 했어야지.”

“보면 뭐가 달라집니까?”

뮤트의 물음에 하레스는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입을 다물었다.

“실례했군. 감정이 격해졌어. 당신은 예전부터 데이비에게 너무 무관심했으니.”

“내 성격이 이런 걸 어쩌겠습니까. 그보다 나가주시죠. 지금도 바쁘니.”

하레스가 떠난 이후 뮤트는 다시 악보에 집중한다.

“나는 빚지고 못 삽니다. 데이비. 네가 내 미련을 해결해줬으니 나는 너에게 책임지고 납득할 만한 결말의 길을 보여주겠습니다.”

음악을 듣는 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음유시인의 본질일 테니.

뮤트는 알고 있었다.

데이비는 계속해서 궁지에 몰려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의 입장에서도 따지고 싶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데이비가 잔재를 모으는 모습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버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를 저토록 괴롭게 방치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데이비. 우리에게 그동안 괴롭힘 당하면서 배운 깡이 있으면 절대 무너지지 마세요. 뭔가를 얻기 위해선 그만한 대가가 필요한 법이니.”

그녀는 대답 없는 여신에게 기도를 올리며 다시 혼이 나간 것처럼 손을 움직였다.

“최후, 그 최후의 순간에 네가 절망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그때 내가 네 빛이 되어주겠습니다.”

* * *

기억은 선명해지고, 더욱더 잔혹하게 다가왔다.

데이비와 페르세르크는 잔재를 회수할 때마다 그녀의 기억을 직접 보고 느꼈고 그럴수록 점점 표정이 어두워졌다.

비화가 태어나고부터 지금까지 겪어온 기억. 그중에서도 특히 아픈 기억들이 많이 잔재로 흩어진 것이다.

그중에서도 페르세르크가 정말로 힘들어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하아……. 하아…….”

비화의 기억을 회수한 뒤로 숨조차 제대로 못 쉴 정도로 괴로워하는 페르세르크를 말없이 보던 데이비가 움직인다.

“형?”

동시에 페르세르크 또한 뭔가 눈치챈 듯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굉장히 몰려 있어서인지 쉬이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정신력이 강한 고위 마법사라곤 하나 페르세르크의 모성애는 데이비나 이바노프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깊고 컸던 만큼 그 고통이 수십, 수백 배가 되었을 터였다.

“꿈도 꾸지 마. 어림도 없는 게야!”

그녀가 악을 쓰듯 소리치자 데이비는 피곤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망가지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데.”

“…….”

“비화도 중요하지만 내게 너도 중요하다는 걸 왜 몰라.”

“버틸 수 있어.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 말아. 데이비…… 제발…….”

페르세르크를 끌어당겨 품에 안은 데이비가 오열하는 페르세르크의 등을 토닥였다.

“미안하다.”

“데이비?!”

“원망은 나중에 들을게.”

툭!

가벼운 타격 소리와 함께 페르세르크가 그대로 실 끊어진 인형처럼 기절해 버리자 데이비는 천천히 그녀를 안아들었다.

“형. 나중에 진짜 많이 혼날 거예요.”

“한계야. 페르세르크는 더 이상 못 버텨.”

과거 데이비는 비화를 살리기 위해 과거를 다시 개변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폭주가 멈추고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에게 소중한 이가 비화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납득했다.

그에게 비화도 중요하지만 페르세르크를 포함한 다른 이들도 중요하다.

그렇기에 과거의 개변을 포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비화의 일로도 머리가 깨질 거 같은데 페르세르크까지 잘못되면 그땐 정말로 극단적인 선택을 할 거 같아서.”

그런 만큼 아무리 이유가 있다 해도 페르세르크를 이 이상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데이비도 버틸 자신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냉정하게 받아들였다면 충분히 버텼을 테지만 상황이 그를 그렇게 몰아넣었다.

“형은 참 좋은 사람이네요.”

“……좋은 사람? 이게?”

“적어도 제가 보기엔 그래요. 그러니까. 부디 제발 지금 그 마음을 잊지 말아주세요.”

“까불기는.”

기절한 페르세르크를 등에 업은 채 고요한 산길로 걸어 들어간 데이비는 커다란 균열 게이트 안으로 몸을 던졌다.

“여긴……. 몬스터가 있는 곳인가요? 지구는 신기하네요.”

“마굴에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배출구야. 이게 없으면 지구가 유지될 수가 없거든.”

“몬스터들이 주기적으로 이렇게 균열을 통해 나온다는 건가요?”

“그냥 소환되는 경우가 드물게 있고, 대부분은 이런 식이지.”

“그런데, 사람이 별로 없네요.”

“그리 선호하는 던전은 아니거든.”

비화의 마지막 잔재가 스며들어있는 장소.

바로 지구의 한 균열 안으로, 등급만 치면 A급에 달하는 균열이었다.

다만 이 균열의 경우 상시 균열에 가깝기에 무리하게 개체수가 늘어나지 않는 이상 폭주하는 일은 없었다.

“세상에…… 왜 싫어하는지 알겠네요…….”

균열 안은 끈적끈적한 늪지대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늪지대 안에는 기괴하게 생긴 파충류와 절지동물로 가득했다.

늪에서 빠져나온 이구아나 같은 생명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숨어있던 수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지네에게 물어뜯기며 절명하는 게 가장 먼저 보인 장면이었다.

“가자.”

“그런데. 악기로 인해 찾은 거 이 내부였잖아요. 이 안에서 비화의 잔재를 찾을 수 있나요?”

“직접 보면 찾을 수 있다.”

잠시 고민하던 데이비가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물방울들이 모여든다.

“엘라임.”

동시에 막대한 정령 마나가 요동치며 그의 앞으로 모여들었고 푸른 빛깔의 여성체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계약자……. 당신…….]

“아무 말도 하지 마. 엘라임.”

엘라임은 데이비의 감정에 제대로 노출된 듯 표정이 밝지 못했다.

“페르세르크를 좀 데리고 있어줘.”

[무리하지 마세요. 이런 점을 보면 당신이나 당신 스승이나 결국 똑같네요.]

그리 말하면서도 그녀는 기절한 페르세르크를 품에 안아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 내가 다 할 테니.”

엘라임과 이바노프는 끈적거리는 늪지대를 얼려버리면서 나아가는 데이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선택의 순간은 온다.

여신은 이바노프를 통해 데이비를 보고 있었다.

본래라면 그녀가 직접 보아야겠으나. 현재 여신은 어떤 이유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바노프를 찾아왔고, 세상에 흩어진 신의 조각을 품고 있는 극소수의 인간 중 하나인 이바노프에게 일부를 깃들게 해 데이비를 직접 보았다.

비화의 잔재를 찾는 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혐오스러운 절지동물들이 가득한 늪지대라곤 하지만 데이비가 걸어 나갈 때마다 주변 전체가 얼어붙는데 누가 그를 노리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계속해서 이동한 끝에 엘라임을 포함한 셋은 거대한 지네 한 마리가 똬리를 튼 채 곧 죽어가는 것처럼 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크네요…… 이곳의 왕인가요?”

지네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수 미터에 달하는 지네들과 달리 겉보기에만 해도 수십 미터는 되어 보였다.

놈의 주둥이는 어지간한 바위도 가볍게 베어버릴 만큼 날카로워 보였으나 겁이 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거대한 지네 괴물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얌전하군요. 그래서. 이놈을 찾아서 어떻게 할 건가요?]

“이놈은 이미 죽었어. 잔재 덕분에 목숨줄 붙이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이제라도 회수해야지.”

데이비가 페르세르크에게서 빼앗은 비화의 잔재 결정을 천천히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띄웠다.

스스로 떠오른 결정은 마치 마지막 조각을 원하듯 빛을 내뿜었고 지네는 그런 결정을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결정을 향해 아주 느릿느릿 움직이더니 날카로운 턱뼈를 뻗었다.

하지만 놈의 턱뼈가 향한 곳은 결정이 아니었다.

“…….”

마치 아빠를 그리워하는 아이처럼. 지네는 말없이 턱뼈를 이용해 데이비의 몸에 천천히 비볐다.

그리고 녀석의 눈동자에 총기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손을 쓰기도 전에 스스로 비화의 잔재가 빠져나와 결정에 스며들었다.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무너지는 지네는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다.

슬픈 기억은 아니었을 것이다.

슬픈 기억이었다면 미처 날뛰고 있었겠지만. 녀석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에 데이비는 착각했다.

이번 기억만큼은 그래도 좋은 기억이겠구나.

그래. 좋은 기억은 맞으리라.

이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본 잔재와 달리 이번 잔재는 데이비의 근본을 비틀어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잔인하다는 것을 말이다.

잔재가 결정에 스며들고 데이비에게 그 기억의 일부를 스며들게 한다.

왜 데이비와 페르세르크에게만 적용되는지는 이바노프도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데이비는 그 과정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억을 받아들인 데이비가 휘청거렸다.

“형!!”

[계약자!!]

평소의 데이비라면 절대 보여주지 않았을 약한 모습에 엘라임이 깜짝 놀라 소리친다.

하지만 데이비는 비틀거리며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뒤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 아아아아아아!!!!”

더러워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고개를 땅에 박고 오열하는 데이비로 인해 그가 품고 있던 힘들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그와 공명한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눈치챈 엘라임이 급히 물의 장막을 세웠지만 오래 버티진 못했다.

와장창!!!

[꺄악!!]

마치 얼음이 깨지듯 그녀의 물의 장막이 박살 나며 그녀가 튕겨져 나간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이바노프의 눈동자가 순간 오색으로 물들었고 그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듯하더니 튕겨져 나간 엘라임의 앞에서 다시 나타나며 데이비의 힘의 폭주를 막아내기 시작했다.

[인간?!]

“가련한 아이들은 착각을 하곤 하지.”

이바노프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절대 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좋은 기억이었기에 괜찮을 거다. 나쁜 기억이기에 슬프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정말로 그러할까?”

이바노프의 말에 엘라임은 떨리는 눈동자로 데이비를 바라보았다.

“신의 권능은 미래를 볼 수 없음이니.”

이바노프의 말이 이어질수록 그 존재가 누구인지 깨달은 엘라임은 정령임에도 불구하고 몸을 웅크려 이바노프에게 예우를 표했다.

[아아…… 위대한 신이시여…….]

“부디……. 자신을 잃지 말고 깨우치길 바라게 되는구나.”

나의 아이야.

여신의 의지가 이바노프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그저. 시련을 받아들인 데이비가 제발 이 시련에서 무언가를 얻어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 * *

슬픈 기억이 아니라면 이제야 비화의 좋은 기억을 볼 수 있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받아들인 비화의 기억은 그렇지 않았다.

기억의 조각에 담긴 것은 다름 아닌 비화의 바람들이었다.

고통을 받으면서 데이비를 위해 끝까지 버텼고. 아파하고 자신을 봐주길 바라는 영겁의 고통 속에서 그녀가 상상 속으로만 그려온.

이제는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그녀가 바란 미래를 말이다.

단순히 괴로워하는 장면에 내성이 생겼다고? 어림도 없지. 라며 마치 비웃음을 던지듯 비화의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은 내 정신을 뒤흔들어 놓았다.

마치 그동안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지금의 기억 잔재를 위한 밑밥이라도 되듯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이루어질 수 없기에 너무 아픈 기억.

지네가 행복해하지도 않고 미쳐 날뛰지도 않은 채 그저 천천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건 어쩌면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이루어질 수 없는 꿈.

그 꿈속에서 데이비와 비화는 너무도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바람 중 이루어줄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이와 비슷한 기억은 지금껏 그녀가 홀로 독백하는 것을 통해 보았지만 그녀가 그린 미래의 상상을 직접 직면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 고통 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보같이 비화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기에 영원히 꿈만 꾸다가 비참하게 사라져간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 아픔 속에서 나는 내면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느껴졌다.

스스로를 희생해. 신격인 네 모든 것을 건다면 비화에게 기회를 줄 수 있을지도 몰라.

이대로 비화를 보낼 수 없다고.

이대로 비화를 깨울 수 없다고.

그 끔찍한 고민의 끝에서 점점 스스로를 희생하고자 하는 집념이 강해진다.

동시에 데이비의 전신이 빛처럼 변하며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안 돼!!!!”

그때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퍼뜩 정신이 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들려온 목소리는 이바노프의 것도, 엘라임의 것도, 페르세르크의 것도 아니었다.

여신 프리아.

그녀의 슬픔이 담긴 외침이었다.

아주 낮지만 가능성이 존재한다. 스스로를 희생하겠는가.

마치 내면에 있던 신격과 그 근본인 신력이 질문을 하듯 물어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백색의 공간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떨고 있던 데이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야 앞에는 새하얀 형체가 그에게 묻고 있었다.

-너를 희생하여 그 아이에게 기회를 주겠는가.

다시금 물어오는 질문에 데이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자신이 희생하면 낮은 확률이긴 하지만 비화에게 기회를 줄 수 있다.

그렇기에, 희생한다는 의지만 표명하면 될 일이었다.

이윽고 데이비의 입에서 그의 의지가 흘러나왔다.

“희…….”

하지만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어떤 감각이 그의 등에서 느껴졌다.

“절대 안 돼……. 가지 말아……. 그대가 사라지면 본녀는 어찌하라고!”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까지 파고든 페르세르크의 처절한 갈망에 데이비가 입을 다물었다.

“그대가 떠나면, 비화가 살아난들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고개를 돌려보았으나 페르세르크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감촉과 목소리는 데이비의 귓가에 정확히 닿았다.

-희생하겠는가?

“아니.”

천천히 고개를 든 데이비의 눈동자.

붉은 눈동자의 일면에 오색이 깃들었다.

동시에 그의 내면에 있던 신격이 목소리를 낸다.

-희생의 아픔과 무게. 슬픔. 그 모든 것을 인지한 신격이여. 마지막으로 묻겠다. 선택은 되돌릴 수 없다.

그 물음에 데이비는 조용히 답했다.

근본적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희생을 하여 비화를 살릴지. 희생을 하지 않고 비화를 그렇게 떠나보낼 것인지.

강제로 양자택일을 강요하지만 그것은 함정이나 다름없었다.

극한의 슬픔의 안개 속에 가려진 제3의 답변이 마치 요동치듯 빛을 발한다.

데이비가 비화로 인해 잊고 있었던 근본적인 그의 신념.

“나를 태워 그 아이에게 기회를 준들. 그것이 정녕 옳게 된 희생인가?”

그 물음에 신격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빛을 내뿜었다.

-신격이 가진 희생의 무게. 슬픔, 또한 일방적인 희생이 가져다주는 변화를 인지하였다면. 그 근본적인 진리에 도달했음이니.

“…….”

화아아악!!!

주변이 모조리 깨지듯 부서져나간다.

멍한 시야 너머로 이바노프가 오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그의 앞에 서있는 게 보였다.

이바노프지만. 이바노프가 아니었다.

여신.

그것도 아바타가 아닌. 잠든 여신이었다.

-권능을 내려 받을 자격을 증명하였음이니.

“여신님.”

-그 권능의 이름을 부르라.

“……희생의 권능.”

이바노프는 천천히 다가와 데이비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진실을 원하는가.

어딘가에서 이바노프를 통로 삼아 막대한 힘의 흐름이 데이비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네가 희생하고자 한 가련한 아이는.

데이비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아직 소멸하지 않았다.

오로지 여신만이 온전히 알고 있고, 유일하게 일말의 눈치를 챈 뮤트를 제외하고 아무도 몰랐던 어떤 사실이 이바노프를 통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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