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30화
“이거 놔요!!”
격렬한 외침과 함께 한 여성이 주변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놓으라고!”
“진정하세요. 제발!!”
“지금 어떻게 진정해!”
“일단 진정해요. 당신까지 그러면 어떻게 해요!”
천족이자 데이비의 종속인 레이나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주먹을 부서질 듯 강하게 쥐었다.
“그 사람이 힘들어하잖아요……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는데요…….”
결국, 주저앉아 오열하는 그녀의 모습에 유리아는 굳은 얼굴로 곁을 보았다.
“륀느. 당신은 괜찮나요?”
“…….”
륀느의 경우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리 심기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레이나와 같은 케이스가 아니기에 그녀 정도로 동요하지는 못하는 것이었다.
“일단 기다려봐요. 선생님이 연락을 해온 만큼 잘 하고 계실 거에요.”
요시아 프랑소스는 좌절하고 있는 레이나를 다독이며 조심스레 말했다.
“생각해봐요. 선생님이 어디 가서 다치고 올 사람도 아니고…… 저희가 나선다고 도움이 될까요? 그런 게 가능했으면 선생님은 이미 저희들을 이용했을 거예요.”
그럼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들의 도움까지는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정확히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기에 그런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데이비의 변화에 민감한 레이나였던 만큼 그녀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당장 데이비를 찾아야 한다며 난동을 부리는 그녀를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후……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지…….”
연락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잠수를 타버린 데이비였다.
처음엔 행방불명이라더니 이번엔 대체 어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걱정하는 이들의 마음을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것인지.
요시아는 괜히 불만스러운 느낌이었지만 걱정을 지울 순 없었다.
고작해야 선생과 제자의 관계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자신도 모르게 데이비라는 존재에게 과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습게 다가오는 요시아였다.
“후우…….”
요시아 프랑소스의 한숨이 깊어졌다.
그리고, 그런 네 사람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이비는 현재 비화와 마주하고 있었다.
마치 어떤 구원의 기회를 얻은 마음을 품은 채 말이다.
비화의 심상 세계에 들어간 데이비의 변화까지는 아직 전달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에 의해 차단된 것인지는 레이나도 알 길이 없었다.
* * *
비화의 적대감 어린 시선만 놓고 보면 아직 그녀는 내가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왔는지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실을 그녀에게 알릴 생각도 없었다.
현재의 비화는 나에 대한 원망을 빼고 모두 저당 잡혀 있는 상황.
그런 만큼 당장 이를 세우며 덤벼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비화…… 비화구나…….”
페르세르크와 비화는 초대면이다.
정확히는 페르세르크에게 있어서는 그러했다.
하지만 그녀는 초면에 그녀를 알아보았고 그녀를 끌어안기 위해 뛰어갔다.
하지만.
“오지마!! 꺼지라고 했지!!”
그녀의 격한 외침과 함께 충격파가 다시 터져 나온다.
그 때문에 페르세르크의 몸이 주춤거렸지만, 그녀를 완전히 밀어내진 않았다.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페르세르크를 노려보던 비화는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내뱉은 뒤 몸을 돌려버렸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나와 페르세르크는 잡지 못했다.
“데이비…….”
“이미 알고 있었잖아. 비화는 괴로운 기억만 남아있어. 우리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가 없지.”
내 말에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가녀린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어찌하여 이런 걸 보여주는 겐가…… 대체 왜…….”
“페르.”
“이건…… 너무 잔인하지 않는가!”
절규하듯 그녀가 소리쳤다.
예상은 했으나 그 충격이 더 컸던 것은 어쩔 수 없는 듯 보였다.
말없이 페르세르크를 다독인다.
이곳에 온 뒤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 세계는 비화의 의지대로 만들어지는 공간이었다.
하인스 영주성의 형태를 하고 있는 건 그녀의 심층의식의 영향이리라.
희생의 권능으로 비화를 소생시키고자 했으나 권능은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닌 가족을 향한 그녀의 믿음과 희생을 대가로 가져가 버렸다.
그 때문에 나에 대한 악만 남은 그녀는 마지막에 와서 소생을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원망만 남은 그런 비화의 마음을 변화시켜 그녀가 소생할 의지가 생기게끔 해주는 것.
하지만 나는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페르세르크.”
내 부름에 주저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던 페르세르크가 눈물 고인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여신이 했던 말 기억해?”
희생의 권능은 단순한 등가교환이 아니라고 했던 말.
그 말은 어쩌면 지금의 상황에 새기라고 전해준 말이 아니었을까.
“그럼 데이비. 대체 뭘…….”
“뭐가 됐건. 시간은 있으니까. 우선은 천천히. 우리가 원래 해줬어야 했던 것들부터 돌려주자.
* * *
아무 일도 없이 하루가 지났다.
비화는 데이비와 페르세르크에게 꺼지라 말했지만, 그녀로썬 두사람을 쫓아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기억도 드문드문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아침이 밝고 새들의 지저귐 소리가 들려온다.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침대에서 일어난 소녀는 졸린 눈으로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천천히 켰다.
그리고는 아름다운 정원이 내비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씨 좋네.”
담담하게 중얼거린 그녀는 실크로 된 이불을 걷어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멍한 얼굴로 복도를 향해 나아갔다.
“날씨는 좋고…… 고요하고…… 오늘은 낮잠이나 푹 잘까.”
휘적거리며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모습을 보이던 그녀는 문득 코에 묘한 냄새가 잡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향기.
그 향기에 이끌리듯 주방으로 향한 비화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이게 무슨…….”
처음 보는 엄청 많은 음식들이 식탁에 놓여서 그녀의 식욕을 크게 자극했다.
물론, 비화에게 있어서 음식이라는 것은 단순 먹는 취미 이외에 쓸 일이 없었다.
하지만.
비화에게 있어서 음식이라는 존재는 단순히 맛을 위해 먹는다는 그런 개념을 넘어선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는 내면에서 지켜만 보아야 했기에 단 한 번도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던 음식들이다.
물론, 최근에 그런 음식을 먹었다는 기억은 있지만,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는 희미한 기억만이 있었다.
“왔어?”
그때 그녀를 상념에서 끌어내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비화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도 그럴 것이 커다란 접시를 양손에 들고 주방으로 걸어들어오는 남성 때문이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저 이 음식들을 먹어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여 있던 그녀의 식욕이 한순간에 증발했다.
싸늘해진 눈으로 데이비를 노려보던 비화가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돌아선 그녀의 앞엔 데이비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얼굴 앞에 접시를 내밀었다.
당장이라도 먹어보고 싶은 맛있는 향기가 나는 음식이 코앞에 들이밀어진 탓에 그녀의 판단이 흐려진다.
“아직 식사 안 했지? 와서 앉아. 양은 많으니까 먹고 싶은 만큼 먹으면 돼.”
데이비가 어서 앉으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웃어주자 비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와장창!!!!
그리고, 그녀의 손이 순간적으로 접시를 후려쳐 날려 깨뜨려버린다.
“비화야…….”
“내가 꺼지라고 했던 말 못 들었어? 나는 당신하고 할 이야기가 없어.”
퍽!!
어깨로 데이비를 거칠게 치고 지나가 버리는 비화를 데이비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데이비…….”
뒤이어 밀차를 밀고 들어오던 페르세르크가 우울한 얼굴로 그를 부르자 데이비는 빙그레 웃는 얼굴 그대로 대답했다.
“첫술에 배부를 수야 있나. 다시 없을 기회야. 만약 잘못되면 우리는 비화를 평생 볼 수 없어 페르세르크.”
“그렇겠지.”
“기억이 없어도 비화는 비화지. 그러니까 기회가 있을 때 놓치지 말자.”
그동안 해주지 못한 것들.
전부 해주는 거다.
데이비가 하고자 한 것은 그것이었다.
“비화는 먹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그렇게 먹고 싶어 했으면서…….”
그동안 비화의 잔재를 흡수하면서 많은 기억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엔 비화가 정말로 바랬던 것들도 보았다.
그중엔 가족끼리 모여 이렇게 식사를 하는 것도 포함되어있었다.
아무리 데이비와 페르세르크에 대한 악감정만 남은 비화라도 천성이 변한 건 아닐 터.
기억이 자아의 정신에 영향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근본적인 것은 변치 않으리라.
“괜찮아. 시간은 많아.”
첫날은 실패해도, 계속되다 보면 언젠가 그녀가 받은 상처들에 조금이라도 딱지가 앉지 않을까.
불가능하다면 될 때까지.
데이비는 그럴 생각이었고, 페르세르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데이비는 여러 가지로 그녀를 자극하지 않았다.
대신 아침 날이 밝으면 꼭 그녀를 유혹하듯 음식을 만들어냈고 그녀와 함께 먹기를 권했다.
당연히 비화는 그럴 때마다 상을 엎어버리든지 싸늘하게 노려보고 떠난다든지 했지만, 데이비와 페르세르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나흘째 되던 날부터는 그녀가 생활하기 편하도록 여러 면에서 준비를 해주던지 도움을 주려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비화의 입장에선 짜증 나고 귀찮은 이들이 자꾸 들러 붙어있으니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어떻게 하면 돌아갈 건데?”
결국, 오일째 되던 날. 비화는 데이비에게 제안을 했다.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하건 다 소용없어 내게서 뭘 얻어내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대로 소멸할 거야.”
“그게 네 선택이라면 그리해.”
“…….”
“대신. 그 전까지만이라도 같이 식사라도 해줬으면 한다.”
데이비의 말에 비화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만 바랄 뿐이야. 한마디도 하지 않아도 돼. 그냥 먹고 일어나도 돼. 맛없다고 투정을 부려도 괜찮아.”
데이비가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빠는 그런 비화라도 사랑한다.”
복잡한 심경이 든다.
데이비를 향한 원망은 명확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 자체가 그녀의 천성 상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좋아. 식사…… 까짓거 같이해줄게. 대신. 이주 뒤엔 떠나. 그 이상은 나도 못 봐줘.”
그녀의 말에 데이비는 그저 고맙다며 웃어 보였다.
그날 이후 비화는 짜증이 서린 얼굴로 아침 식사에 참석을 했다.
대부분의 대화는 데이비와 페르세르크의 대화뿐이었고 나머지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식사 내내 비화는 짜증스레 두사람을 노려보았고 깨작깨작 음식을 씹어 삼켰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며 화를 낼 법도 하건만, 재수 없을 정도로 음식 자체는 맛이 있는 편이라 투정을 부리지 않고 꼭꼭 씹어 삼킬 뿐이다.
드르륵!
“다 먹었어? 디저트도 있는데.”
“속이 거북해서. 그보다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바깥에 당신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이들이 있지 않나?”
“너도 똑같이 사랑해.”
“말이나 못 하면. 역겨울 정도로 거짓말은 능숙하네요.”
차갑게 쏘아붙인 그녀가 쾅! 소리를 내며 주방 문을 닫고 나가버리자 페르세르크와 데이비의 시선이 서로 닿았다.
“이거 이기적인 거 알지?”
“이제와서 이런 행동을 한다고 해서 과거의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닐 테지.”
페르세르크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뭐라도 해줄 수 있다는 건 너무 기쁜 일이로구나…….”
페르세르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비화가 약속한 건 2주였다.
하지만.
한 달, 두 달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비화는 버릇처럼 식사자리에 나오고 있었다.
바깥에선 고작 몇 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