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31화
비화는 쉬이 마음을 열지 않았다.
물론, 아침 식사만큼은 참석하고 있다지만 식사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가 끝나는 즉시 자리를 떠서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는 현실이지만 그 사실이 참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멈춰있을 순 없는 법.
비화의 상처가 가득한 마음을 품기 위해 그녀가 바랬던 것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해주고자 결심하지 않았던가.
“절 위해서 준비했다고요?”
정원에 앉아 꽃을 구경하던 비화에게 직접 구운 빵을 내밀자 그녀가 싸늘하게 쳐다본다.
비화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일부러 차림까지 모양냈지만, 역효과였던 모양이었다.
“아빠가 직접 만든 거야, 한 개 먹어볼래?”
부드러운 물음에 그녀는 말없이 빵을 바라보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언가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깨달은 게 있는 듯 흠칫 놀랐다.
무의식적으로 빵에 손을 뻗으려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내가 들고 있던 쟁반을 손으로 쳐냈다.
고소한 향을 풍기던 빵이 바닥을 구른다.
스스로 하고도 놀랐는지 비화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시선이 파르르 떨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다만, 오래가진 않았다.
과했다는 자책감보다 나에 대한 원망이 아직은 더 컸던 그녀는 애써 독한 말을 내뱉으며 차가운 조소를 흘렸다.
“어쩌죠? 나는 먹을 생각이 없는데.”
“비화야.”
“개수작 부리지 말아요. 이제와서 이러는 거 진짜 너무 역겨우니까. 이제 돌아가세요. 더는 보고 싶지 않으니. 그리고, 아빠라고 말하지도 말아요. 내 안에 부모는 다 죽었어.”
그말과 함께 비화는 등을 돌려 떠나버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나는 말 없이 바라보았다.
말없이 서 있다가 천천히 몸을 숙인 나는 바닥에 떨어진 방을 천천히 들었다.
빵 같은 거, 제대로 만들어본 경험은 많지 않지만, 비화가 좋아할까 싶어 며칠간 고생해서 연습한 결과물이었다.
그 과정에서 페르세르크와 먹어치운 실패작 빵만 해도 상당한 수가 되리라.
비록 대가 없는 사랑을 주기로 했지만, 아예 진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비화는 나를 증오한다기보다는 원망과 스스로의 자책감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라는 것을 안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도 마음이 많이 아프구나…… 저 빵도 비화가 그리 먹어보고 싶어 하던 것이거늘.”
“손이 많이 떨리더라.”
가능성이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어서 너를 방치했다. 그 말만큼 무책임한 것도 없지.”
그렇기에 나는 이 일에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비화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배경 속에서도 이렇게 올곧은 천성을 품고 있어 주었으니 말이다.
나는 비화가 독한 말을 내뱉기 전에 보인 그 표정과 손 떨림을 기억했다.
* * *
지독한 인간들!
비화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기가 막혀 했다.
“아니, 배알도 없어? 이렇게 구는데 왜 화를 안 내?”
당혹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됐을까.
이곳은 그녀가 만들어낸 심상 세계였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이전의 자신이 만들어낸 세상으로 현재의 그녀에겐 짜증을 유발하는 장소였지만 그래도 뭐 봐줄 만은 하네, 라는 생각은 드는 장소였다.
이곳에서 혼자 산다고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소멸했어야 할 자신이 어째서인지 다시 유예가 생긴 만큼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다가 사라질 작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소생시키려는 데이비와 페르세르크의 의도를 알았지만, 원망만이 남은 그녀에게 그런 시도는 역겨운 위선으로 보일 뿐이었다.
이제와서? 이미 늦었어.
속으로 그리 생각한다.
수천 수만 번 되뇌며 그들에게 어떤 정도 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그 사실은 지금도 변치 않는다.
하지만.
독한 행동으로 그들을 밀어낼 때마다 비화의 마음도 마냥 편치는 않았다.
“멍청하기는, 그저 말을 걸어주고 신경 써준다고 마음이 흔들려서는…….”
이건 아니다. 이대로는 좋지 않다.
마치 자신이 저들의 행동거지에 가볍게 놀아나는 더러운 기분까지 들었다.
비화에게 있어서 데이비는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 위선자.
아마 그녀에게 잘해주는 것 또한 그녀의 힘을 원하거나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서 일터.
그 사실을 곱씹으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영주성의 뒤켠에 있는 고요한 연무장으로 향했다.
근본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크게 터치를 하지 않는 두 사람은 아예 여기 눌어붙을 생각인지 전혀 돌아갈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처음엔 어떻게든 쫓아 보내려 했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없지만 당장 그녀에겐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그런 답답한 마음을 지우려 연무장에 다가간 그녀의 손에 검백색의 검이 쥐어진다.
초단이의 형태가 아닌 비화의 고유형태.
그녀는 검이며, 초단이의 내면에 있는 자아지만 사실 데이비에게서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초단이와 조금 다른 케이스로 진화해왔다.
그 탓일까.
지금은 본래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그녀의 힘은 초단이에 버금가는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오랜 시간 힘을 길러온 청단이 홍단이의 자아에서 융합된 게 아닌 짧은 시간 막대한 힘을 받아들이면서 진화한 형태였다.
사박…… 사박…….
아무도 없는 고요한 연무장의 분위기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애초에 이 심층세계가 만들어진 지도 오래되지 않았고 두 사람이 오기 전에는 그녀 혼자뿐이었으니 말이다.
누군가와 대화하지 못하는 외로움 따위는 이미 그녀에게 있어서 태생부터 함께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볍고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연무장에 올라선 그녀가 천천히 기수식을 잡았다.
바보 같은 초단이와 다르게 비화는 데이비를 지켜보며 그의 전투방식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모두 익히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움직임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우우웅…… 우웅!!!
검이라서 그런가. 검을 휘두르면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그녀의 마음속이 명경지수가 되며 고요하게 변했다.
눈을 감고 있던 그녀의 내면에 잡념이 완전히 사라지며 천천히, 그리고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검 끝이 허공을 수놓았다.
이렇다 할 요란스러운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짧나? 싶을 정도로 직관적이지만 그 검 끝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퍼져나가는 파장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겉보기엔 검기의 색도 평범하고 이렇다 할 힘이 느껴지지 않지만 누군가가 그녀와 적대하고 있다면 막대한 중압감을 느끼게 만드는 기이한 검술이었다.
쩍!! 쩌억!!
그녀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괴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언가가 찢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녀의 검이 지나간 공간이 수복되지 않고 서서히 벌어져 나갔다.
수복의 억제.
그리고. 폭주.
그녀의 검에 찢어진 허공은 수복되는 힘을 억제당하고 점차 크게 폭주하며 벌어졌다.
단순 억제와 폭주 정도로 여기기엔 그녀가 품고 있는 힘의 한계는 섬뜩할 정도로 높았다.
특히 상대가 강할수록 막대한 효과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베어서 부수는 것이 아닌 근본적인 구조에 간섭하는 것이니 말이다.
비록 지속시간을 짧을지라도. 그것이 생명체에 한하는 문제라면 지속시간은 사실상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 효과가 오래가지 않았던 탓인지 점차 벌어지던 공간들이 일정 시간 후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갔지만 다시금 그녀가 험을 휘두를 때마다 허공이 찢어지고 갈라진다.
그렇게 한참을 휘둘렀을까.
대부분의 잡념이 사라졌으나 하나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
혼란스럽다. 괴롭다. 이런 상황. 달갑지 않다.
뭐가 됐든 짜증이 난다.
그 짜증은 쉬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그녀의 잡념이 사라진 무의식까지 차지하며 그녀를 화나게 만들었다.
결국, 그녀의 검 끝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였지만 불청객 둘 때문에 최근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런 짜증을 털어내려 해도 쉬이 털어지지 않는 탓에 그녀의 검 끝이 끝내 그녀의 통제까지 벗어나 멋대로 터져나갔다.
그때 그런 그녀의 거슬리는 심기에 무언가가 잡혔다.
무언가가 숨어있다.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른 그녀는 대상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뒤늦게 눈을 뜬 그녀의 찰나의 시야에 익숙한 인영이 놀란 얼굴로 서있는게 보였다.
“자……잠…….”
페르세르크는 손에 간식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마침 샌드위치가 땡기던 참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물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마치 수년의 시간이 흐른 것 같은 싸늘함과 함께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페르세르크가 이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면 단순히 다치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원망해도 이렇게 죽여버릴 생각까지는 없었던 그녀가 움직이려던 찰나.
쉬리리릭!!! 쩌어어엉!!!
어디선가 나타난 데이비가 그녀가 쏘아 보낸 검기를 대신 받아낸 뒤 맨손으로 튕겨내 버렸다.
촤악!!!!
물론, 그녀가 가진 힘은 데이비에게 가장 위험한 힘인 만큼 상당한 여파를 남겼다.
“데이비!!!”
붉은 피를 흩뿌리며 멈춰선 데이비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멋대로 일부의 힘이 억제당하고, 일부의 힘이 폭주한다.
마치 가열된 가열로에 냉각이 되지 않는 기계처럼 그의 상태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고 데이비는 자신의 부상도 신경쓰지 않은 채 필사적으로 자신의 힘을 억눌렀다.
저대로 폭주하면 데이비는 물론 페르세르크와 비화도 휩쓸려버릴 테니 말이다.
무방비한 상태로 공격에 노출된 페르세르크와 그런 그녀를 위해 자신의 상태도 고려하지 않고 몸을 내던진 데이비.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패닉에 빠져있던 비화.
셋의 대치는 그리 길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으며 데이비가 억지로 그녀의 힘을 제어해 억누르고 자신의 평정을 되찾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팔은 상처로 인해 큰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그냥 두었으면, 아니 그라면 이 폭주의 여파로 생긴 힘을 비화 쪽으로 되돌릴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페르세르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비화 그녀를 밀어냈어야지.
눈동자를 파르르 떨며 할 말을 찾지 못하던 비화가 황급히 소리쳤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악을 썼다.
“하……하! 꼴좋네. 여기 있으니까 그런 꼴이나 당하는 거야.”
자신이 말하고도 흠칫 놀랐지만, 비화의 빈정거림에 데이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숨을 짧게 골랐다.
이제 화를 내겠지.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하다. 오히려 홀가분하게 그를 원망할 수 있으니까.
데이비가 그녀를 미워해 준다면, 소멸하는 그 순간까지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더러운 기분을 느낄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데이비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비화에게 다가왔다.
욕설이라도 내뱉을까.
혹은 폭언이라도 뱉을까.
자신의 실수로 인해 페르세르크와 데이비 둘 중 하나가 방금 죽을뻔한 사실은 변치 않는다.
페르세르크는 데이비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고 데이비 본인은 자신의 목숨에 상당히 집착이 강했다.
화를 낸다면 그에 맞받아치고 그들을 내쫓으면 될 일이었다.
“어?”
하지만 데이비의 행동은 달랐다.
한쪽 팔에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다가온 그가 멀쩡한 팔을 뻗어 비화를 품에 끌어안았다.
“괜찮아. 이건 실수야. 나는 괜찮고, 페르세르크도 괜찮아. 자책하지 마.”
마치 겁먹은 아이를 달래는 듯한 데이비의 말투.
그녀는 머릿속에 생각해둔 수십 가지의 단어들이 모조리 사라진다.
멍청이가 아닌가.
방금의 것은 그녀의 명백한 실수였다.
잡념이 가득한 채로 무리하게 힘을 휘두르다가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는 페르세르크를 죽일뻔했다.
다행히 데이비가 막았지만 급하게 막는 터라 그에게 큰 부상이나 후유증이 남을 가능성도 있었다.
비화가 품은 힘은 가진 힘의 가짓수가 많은 데이비에게 그야말로 상극의 힘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페르세르크가 죽을뻔했음에도, 그 본인조차 죽을뻔한 것도 모자라 후유증이 남았을 게 분명했음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괜찮아. 괜찮아 그러니까 떨지 마.”
오히려 그녀가 패닉에 빠질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비화는 혼란스러움을 담아 그를 밀쳐내며 소리쳤다.
“대체 뭐 하는 건데?! 괜찮냐고?! 지금 장난해?! 죽을뻔했잖아! 화를 내란 말이야! x발 호구도 아니고 이게 뭐하자는 건데!! 동정심을 유발하는 거야? 아니면 또 역겨운 위선이야?! 말해보라고!!”
격성을 토해내며 그녀는 해서 될 말과 안 될 말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악을 써댔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데이비는 천천히 다가왔다.
“오지마…… 오지 말라고!!!”
겁에 질린 비화가 뒷걸음질 쳤다.
그냥 두면 그녀의 근본을 부정당할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괜찮아. 비화야.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된 거야.”
위선? 저 미소가 정말로 위선일까.
아니면.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여유일까.
그럴 리가.
그라면 후유증을 해결할 수 있을지라도 당장은 아닐 것이다.
그 예시로 부상당한 그의 팔은 회복은커녕 그 여파로 잘게 떨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신격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검이라니 대단한 검이 아닐 수 없다.
여유가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왜 화를 내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왜……왜 그러는 건데? 왜 이제와서 이러는 건데!!”
그녀의 격한 외침에 데이비는 도망치려는 비화를 한쪽 팔로 끌어안은 채 말했다.
“미안하다.”
그가 내뱉은 한마디는 비화를 더욱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지금 사과해야 할 건 그가 아니다. 그리고, 그가 미안하다 말하는 건 지금의 일도 아니었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너를 혼자 두어서 미안해.”
그의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에 비화는 결국 오열하며 그를 밀쳐냈고, 도망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떠난 뒤 이를 악물고 한쪽 무릎을 꿇은 데이비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힘을 억제한다.
“데이비!!”
뒤늦게 깜짝 놀란 페르세르크가 그에게 뛰어왔다.
“다친 곳은?”
“지금 본녀를 걱정할 때가 아니지 않은가!”
“괜찮아. 이 정도는.”
“후유증이 남을지도 몰라…….”
“그것도 괜찮아. 비화나 네가 안 다쳤잖아. 그거면 된 거야.”
“데이비…….”
“비화에게 가봐. 많이 놀랐을 거야. 겉으론 차가운 척해도 천성이 착한 애야. 아무리 기억의 일부가 사라졌어도 비화가 변하는 건 아니니까.”
데이비의 미소에 페르세르크는 자신의 무력함에 오열했다.
그리고, 도망친 비화는 그런 두사람을 멀리서 지켜보던 비화는 복잡한 심경으로 몸을 돌렸다.
그렇게 연무장에서의 사고가 있었던 날 이후.
비화는 처음으로 아침 식사 중에 입을 열었다.
“눈싸움이라는 거…… 참 재밌다던데.”
그녀의 중얼거림에 데이비와 페르세르크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비화야?”
“착각하지 마세요! 그냥……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니까! 소멸되기 전에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거기도 하고!”
“비화야.”
데이비가 진지하게 말하자 비화가 움찔하며 물러났다.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이렇게 요구하는 건 너무 뻔뻔했나.
가족끼리 대화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있어야지.
비화가 긴장감을 애써 억누른 채 데이비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당장 만들어줄까? 어때. 식사 끝나고 아빠 엄마랑 같이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자.”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의 미소였다.
그 미소는 몇 번이고 봤다.
하지만 이번 미소는 비화의 마음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원망에 한줄기 금을 내는 결과를 낳았다는 걸 그녀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