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35화
감정을 지닌 첫 번째 신.
여신의 상위권능 폭주로 인해 태어난 초월적인 존재.
물론, 여러 가지로 설명할 길은 있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여신의 자리라는 게 절대 좋은 자리가 아니라는 것.
비화는 현재 그녀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하늘거리는 새하얀 날개옷을 가볍게 흩날리며 손을 부드럽게 허공에 휘젓고 있었다.
단순 헛짓거리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녀의 앞에 반짝이는 빛무리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싫어…….”
비화의 울먹거리는 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여신으로 소생되면서일까. 한층 성스럽게 변해버린 그녀의 울음은 언 듯 보면 굉장히 가녀려 보이게끔 만들었다.
“언제까지 이딴 걸 해야 하는 건데…….”
물론, 입에서 나온 단어의 선정은 제법 거칠기 짝이 없다.
“비나 눈이나 내리자고 내가 눈을 뜬 게 아닌데…….”
그녀는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옆에 있는 이의 눈치를 살폈다.
찰싹찰싹!
무표정한 얼굴의 아름다운 존재.
창조신 프리아 여신이 가느다란 작대기를 신전의 기둥에 찰싹찰싹 두드렸다.
제대로 안 하면 혼날 거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아 해요! 한다고! 하면 되잖아!”
그제야 만족한 듯 프리아 여신이 회초리를 내려놓고 팔짱을 끼자 그녀는 울먹거리며 다시금 손을 휘저었다.
마음 같아선 다 때려치우고 중간계로 내려가서 가족들과 만나 이야기나 나누고 싶지만, 데이비의 권능 사용 미숙으로 인해 여신이 되어버린 그녀인 만큼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나 제약이 존재했다.
처음엔 좋았지.
데이비보다 상사라고 그를 들들 볶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분명 온전한 신격도 아닌 신의 위계에 있는 비화라곤 하지만 정작 신격인 데이비에게 간섭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었다.
결국, 리턴도 없이 거대한 의무를 떠안아 버린 비화는 당장 여신이고 나발이고 필요 없으니 다 가져가라 외쳤지만 돌아온 것은 프리아 여신의 엄한 가르침뿐이었다.
무엇보다 비화의 속을 뒤집어 놓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존재 자체였다.
비화는 단순히 검의 자아가 아닌 여신으로써 소생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녀는 신의 영역에 있는 여타 영웅들처럼 쉬이 중간계에 현신할 수가 없다는 소리였다.
특수한 케이스인 여신 프리아를 제외한 이곳에 묶인 존재는 세상에 함부로 현신하거나 간섭할 수 없는 만큼 데이비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시 중간계로 내려간 상황이었다.
“나…… 진짜 못 내려가요?”
권능을 이용해 특정 차원에 발생하는 막대한 폭우를 억제하던 비화가 물었다.
“아빠랑 약속했어요. 같이 밥도 먹고 놀러도 가자고.”
여신은 그저 비화를 응시한다.
“나…… 못 내려 가는 거예요?”
갈 수야 있겠지. 영웅들보다 더 손이 많이 가겠지만 아주 짧은 시간 현신할 수 있으리라.
물론, 그것도 대부분의 힘을 봉한 상태로.
그렇기에 비화는 더욱 속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난 이런 걸 바란 게 아니란 말이에요…… 왜 하필 내가…….”
그 말에 여신은 천천히 다가와 울먹거리는 비화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심신이 천천히 평온해지는 듯한 착각이 인다.
“위로만 하지 말고 뭔가 해결책을 달란 말이에요! 대체 내가 뭘 얼마나 잘못했는데!”
그동안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데. 구원을 받자마자 또다시 멀리서 지켜만 봐야 한다니.
이만큼 억울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이 이렇게 벌어진 것을.
그래도 일단은 데이비라도 가끔씩 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가.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 * *
“이걸 이야기를 해야 하나…….”
비화의 일과는 별개로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말해야겠지. 숨겨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음이니.”
“맞아요. 아버지.”
비화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이라고 해봐야 페르세르크와 초단이가 전부인 만큼 나머지 이들에게도 알려주어야 할 필요는 있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숨기지 말고 전부 이야기하면 되는 게야. 비록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비화가 다시금 어떤 생명을 얻은 것은 사실이니까.
“그보다 비화가 정말로 내려올 수 없는 건가요?”
초단이가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비화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문제지만 정작 그녀가 신의 영역에서 나올 수 없는 신이 되어버린 것도 문제인 만큼 초단이는 이쪽에 더욱 초점을 두는 듯했다.
“아예 내려오지 못하는 건 아니야. 아마 짧은 시간 조금씩은 현신시킬 수 있겠지.”
아무리 감정이 있는 신격이라도 신은 신인만큼 중간계에 현신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여파를 불러일으킬 터.
우치처럼 특수한 케이스가 아니라면 멋대로 내려오는 것도 쉽지 않으리라.
“그 부분에 관해선 우선 내가 좀 더 생각해볼게.”
사실 비화가 여신이 되어버린 건 결국 내 탓이었으니까.
방법이 없는 것을 어쩔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넬타리드나 타나토스같이 제약 덩어리 신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마 여신이 새로운 형태의 신을 만들기 위해 비화라는 첫 케이스를 용인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신의 영역에서 내가 불러주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비화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순 없었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하인스 영지라.
건물은 조금 전이라도 본 느낌이지만 체감상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동안 내가 연락 없이 잠수를 타는 바람에 걱정했을 이들을 위해서라도 얼른 돌아가야 하리라.
“서방님?”
나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유리아와 에이리아였다.
다리안과 아벨을 데리고 있던 그녀는 나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나더니 허겁지겁 달려와 그대로 내 품에 안겨들었다.
“어딜 갔다 오신 거예요!”
평소답지 않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면 그동안 얼마나 걱정시켰는지 안 봐도 알만한 상황이었다.
“미안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편지 한 장만 남기고 가면 기다리는 사람은 뭐가 되는 건가요…….”
평소라면 떠나기 전에 이야기를 하고 떠나는 편이었던 만큼 이번엔 에이리아도 상당히 걱정이 컸던 모양이었다.
자세한 근황에 대해선 전혀 이야기 한 바가 없으니까.
“은공. 다녀오셨어요?”
“그래. 별일은 없었고?”
“왜 없었겠어요. 은공께서 갑자기 사라지신 덕분에 아주 난리도 아니었죠. 게다가 에반젤린 아가씨가 어찌나 걱정을 하던지…….”
유리아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에반젤린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보다 더 빨리 비화라는 존재를 눈치챈 에반젤린은 그녀로 인해 혹여 내게 큰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크게 걱정했다는 모양이었다.
“나머지는?”
“다들 안에 계세요. 전부 부를까요?”
“그래. 불러줘.”
유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이후 나는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에이리아가 진정할 때까지 다독여준 뒤에야 다른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실상 묵묵히 기다린 이들을 제외하곤 대부분 나를 상당히 걱정해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성이었던 것은 다름 아닌 레이나였다.
그녀는 내게 종속된 존재인 만큼 내 감정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는데 비화로 인해 내 멘탈이 실시간으로 갈려 나가면서 그녀도 크게 영향을 받은 듯 보였다.
“조금만 늦었어도 사고가 터져도 제대로 터졌을 거야. 말리는 것도 한계가 있는 데다가 갈수록 나도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
일리나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툭툭 쏘아붙이며 나를 노려보았다.
“할 말 없어?”
“미안하다.”
“말로만?”
그녀가 내 멱살을 잡고 올려다보다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두 사람 당장 차원 찢고 찾으러 가려는 걸 겨우 말린 참이에요.”
에반젤린이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감정에 동조된 레이나가 미쳐 날뛰고 거기에 영향을 받은 일리나 또한 서서히 동조하기 시작한다.
본래라면 두사람을 말렸어야 할 페르세르크가 따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니 아마 그 두사람을 말릴 이가 없었으리라.
“그보다 아빠. 그거, 대체 누구예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그때였다.
내 옆으로 공간이 찢어지며 하늘거리는 날개옷을 입은 검은 머리카락의 예쁜 소녀가 비명을 지른다.
“아빠! 나 살려줘! 진짜 죽을 거 같아!”
비명을 지르며 내게 손을 뻗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찰나. 균열 너머에서 무언가가 비화를 다시 쑥! 하고 끌고 들어가 버렸다.
“꺄아악! 싫어! 싫다고! 에린아 살려줘어어어!!”
그야말로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모두가 벙찐 얼굴로 사라지는 균열을 바라본다.
“어…… 음…….”
“방금…….”
“후…… 이렇게 된 거 이야기할게. 첫째 딸. 비화야.”
“첫……째요?”
“그게. 좀 복잡하게 되긴 했는데, 홍단이 청단이보다 사실상 먼저 태어난 아이야.”
나는 그 이후로 비화에 관한 이야기를 천천히 그들에게 털어놓았다.
* * *
비화의 삶은 빈말로라도 좋은 삶이었다고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삶에 대한 기억을 직접 본 입장에서 볼 때 그녀의 삶은 고통과 슬픔의 연속이었으니까.
직접 본 이도 그렇게 느낄 텐데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면 다른 이들이라고 반응이 다를까.
에이리아는 비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눈시울을 붉혔고 일리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에반젤린은 멍하니 무언가를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비화의 탄생부터 그녀가 겪어온 불합리한 모든 일들이 그들에겐 마치 똑같은 공범자가 된 것처럼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 듯했다.
“그럼 그 아이…… 비화는 이제 괜찮은 건가요?”
“실은 그것 때문에 조금 고민이네. 조금 전에도 봤으면 알겠지만…….”
잠시 말을 끊은 내가 레이나를 바라본다.
“레이나, 봤으면 알겠지?”
“네. 여신님을 뵈었을 때와 같은 감각이네요. 혹시. 비화는 여신으로 부활한 건가요?”
“맞아.”
그 말에 주변에서 어두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미 신적인 존재가 어떤 제약을 안고 있는지는 여기서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그럼…… 못 만나는 거예요?”
“그 정도로 심하진 않지만, 이 방법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
“왜 이런 이야기를 안 하고 있었던 거야?”
일리나가 서운함을 담아 물었다.
“네게 우리는 고작 그 정도야?”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아니면 뭔데!!”
그녀가 울분을 토해내며 내게 화를 냈다.
“우리도 걱정될 수밖에 없잖아. 에린이는 자기 언니에게 생긴 문제 때문에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잤고 우리는 네가 언제 돌아오나 다치진 않았나 계속…….”
말을 하던 그녀가 결국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하자 페르세르크가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다 고개를 떨구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원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려 했던 일이야.”
“왜?”
“지금이야 상황이 잘 풀렸다지만 만약 비화를 그렇게 떠나보냈으면?”
“…….”
“너희는 그 충격을 감당할 자신이 있어?”
잘 풀렸으니 이 정도지 만약 초창기 비화가 소멸했다고 판단됐을 때 이 일을 이들이 알았다면?
아마 일리나나 에이리아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래서 알리지 못했던 거야. 페르세르크가 나를 찾아온 건 단순 우연이었고.”
“…….”
결국, 일리나는 한발 물러났다.
“다음번에도 숨기면 진짜 죽여버릴 거야.”
서러움을 담아 그녀가 웅얼거렸다.
“내게 언니가 하나 더 있었다니…….”
에반젤린은 아직 혼란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모양새였다.
“그럼 그 흑귀 사건도 비화가 일으킨 거야?”
“그래.”
“어째서?”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만 크게 신경쓸 문제는 아니야. 지금 중요한 건.”
신이 되어버린 비화를 어떻게 중간계에 머무를 수 있게 만드냐였다.
내 고민에 에이리아가 손을 살짝 들었다.
“저기 서방님. 우치 님이 중간계에 크게 문제없이 장기간 체류하시지 않으신가요?”
우치도 영혼만 남은 영웅이다.
다만 다른 이들과 달리 우치는 중간계에 오랜 시간 체류할 수 있는 특수한 케이스이기도 했다.
“실은 나도 그쪽을 고민하고 있는데. 그 양반이 워낙에 뜬금없는 양반이라.”
그냥 잡아서 물어야 하나.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다른 영웅과 달리 우치는 신의 영역에서도 잘 나타나지 않고 자기 필요할 때만 뜬금없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구미호 비연과 한바탕 엮인 뒤로 그 경향이 심해졌던 걸 생각하면 찾는 것도 쉽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그를 어떻게 잡아야 할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찰나.
뒤쪽에서 허공이 찢어지며 도포에 장대를 어깨에 걸친 사내가 나타났다.
“짜잔! 이 몸 등장…… 어?”
느긋한 얼굴로 나타난 우치가 당혹성을 내뱉었다.
“야 표정이 왜 그러냐?”
“잘 왔네요. 마침 형에게서 좀 알아볼 게 있거든요.”
내 말에 우치는 뭔가 불안함을 눈치챈 듯 슬금슬금 물러났다.
“저기. 데이비? 형이 아무래도 좀 바쁜 일이 있는 거 같으니…….”
“얘들아. 잡아.”
그 말과 함께 일리나와 레이나가 섬광과도 같은 속도로 우치의 양쪽을 점한 뒤 그의 팔을 마치 범죄자를 잡듯 낚아챘다.
“으악! 이 미친것들이 뭐하는 짓이야!!”
하여튼 이 양반은 절대 양반은 못되리라.
비화를 장기 체류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또 도망치게 둘 생각은 없었다.
순식간에 제압당한 우치에게 다가간 내가 물었다.
“형. 비화 상태 알고 계시죠.”
“비화? 아…… 음. 알고는 있지. 그런데?”
“형처럼 장기간 중간계에 문제없이 체류시킬 방법이 있을까요?”
내 물음에 그가 피식 웃었다.
“음…… 일단 비화 그 아이를 대신해서 그 아이의 일을 할 만한 녀석들이 필요한데. 나야 저승이 하나로도 충분하지만, 비화가 담당하게 된 일은 본래 프리아 여신이 담당하던 일이야. 못해도 반신격 스무 명 이상은 있어야 할걸.”
그의 말에 나는 잠깐 고민했다.
그러던 찰나.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여신이 만들어낸 반신격.
비화의 일을 떠넘기기 아주 좋은 제물들이 하나 존재한다.
“형.”
“어……어?”
“제노엔 아직 잠들어있죠.”
여신이 창조한 실패한 세계의 영혼들.
악마종화 되었었던 파르테논을 포함한 다수의 반신격들이 떠오른 내가 말한다.
“그놈들. 언제 깨울 수 있어요.”
내 말에 우치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와. 너 이 나쁜 새끼.”
일을 죄다 저승이 하나에게 떠넘기고 도망 다니는 형만 할까요.
내 말에 우치는 괜히 떨떠름해졌는지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여신님께서 언젠가 그들이 할 일이 있을 거라고 해서 조금 신경 써서 정화는 끝내놨지. 비화 그 아이가 가서 깨우기만 하면 될거다.”
여신이 제노엔들을 소멸시키지 않고 정화시킨 건 혹시 이때를 위해서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