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48화
비화는 처음 에반젤린의 방송에 나타났을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느꼈지만. 처음 방송을 해보는 사람 같지 않은 수준의 사운드를 채웠다.
적당한 농담으로 재미를 돋구고, 화려한 실력으로 화면을 채웠다.
“내 감각인데. 분명 저기 들어가면 신나게 몰이 사냥당할 거야. 소리 들리지? 이건 m4시리즈 소리고, 이건 스나이퍼류. 또 샷건 소리도 들리네.”
-아니. 소리가 구분이 되는 건 맞는데. 대체 귀가 얼마나 좋은 거임…….
-이게 단순히 귀가 좋다 정도로 판단이 되나? 무슨 절대음감임?
-팩트, 진짜 잡고 정교하게 들어야 구분 가능하지만 일반적으로 총소리 난무하는 곳에서 두 개 이상 섞이면 사실 구분하기 어려운 총이 대부분이다.
“바보 아냐? 이걸 왜 몰라?”
-기만…….
-기~만.
“됐고. 저쪽은 위험해 보이고, 전투 가능지역이 대충 이쪽 방향이니까…….”
잠시 고민하던 비화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형을 살폈다.
“제외지역으로 나가야겠다. 하필 마지막에 이러네…….”
-네?
-선생님. 지금 제한구역 드가면 디지게 아픈데요?
-죽으려고?
-좋은 방법이긴 한데 너무 멈.
“그냥 들어가면 내가 뭔 짓을 해도 못 이겨. 계산은 완벽해.”
그렇게 말하며 주의 깊게 주변을 살핀 그녀는 풀 hp 상태에서 회복 키트를 사용한다.
그리고. 고개를 까딱이며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하더니 미련 없이 내부로 뛰어들었다.
금지구역은 시간이 지날수록 플레이어에게 들어오는 데미지가 늘어나는 만큼 엄청난 피격 데미지가 들어왔지만 엉기적거리며 회복을 하던 비화의 캐릭터가 회복을 마치는 그 순간. 그녀가 맹렬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타다당! 탕! 탕!
멀리서 들려오는 총격 소리를 확인하며 빠르게 내달린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미끄러지듯 안전지대로 다시 들어왔고 준비해둔 회복 키트를 사용했다.
“거봐 된다고 했지?”
-아니 이런 거 보긴 봤는데. 너무 과감한데?
-저게 어떻게 계산이 되누…….
-미친 실피 남은 거 보소 ㅋㅋㅋㅋ 한 대만 맞았어도 골로갔다 이건.
“가끔씩은 목숨 걸고 도박도 해봐야지.”
회복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녀는 벽면을 타고 올라간 뒤 총을 쏘느라 그녀의 접근도 눈치채지 못한 이의 머리에 대고 라이플을 드르륵 긁어버렸다.
“오. 얘 방어구가 박살 나 있었구나.”
남은 적은 하나.
상대는 이미 죽어버린 시체의 방어구가 박살 났다는 메시지를 받았었는지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방금까지 자신과 싸우던 유저가 죽었다는 사실은 모르는 듯했다.
비화가 막타를 빼앗은 뒤 기절해있는 유저를 대신해 그 유저인 척 구라를 쳤기 때문이었다.
회복 소리는 들리지 않으니 무조건 이겼다고 판단한 그가 진입한 그 순간.
비화는 미리 준비해둔 수류탄을 까 휙 던진 뒤 그대로 라이플을 들고 계단에서 뛰어내렸다.
뒤쪽에 수류탄. 앞쪽에 비화.
상대는 급히 수류탄을 피해 비화와 정면 싸움을 하는 선택을 내렸다.
방어구가 박살 난 이상 무조건 자신이 이긴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어서 옵쇼!”
그가 맞이한 것은 방금전까지 싸우던 유저가 아닌 풀 방어구에 완벽 대비 중인 비화였다.
드르륵!!
상대는 캐릭터의 생김새가 다르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듯 보였지만 이미 비화의 탄환은 그의 머리통을 긁은 후였고 결국 최후의 1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야. 점수 달다.”
-무친년…… 무친년 무친년…….
-진짜 하는 짓이 핵 같아서 나 같아도 의심하겠다.
-저게 어떻게 핵이 아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경이적이네…….
-그런데 마지막 유저 닉……저거 강산 부계 아님? 아마 티어 올린다고 맹돌진하고 있었던 거 같은뎈ㅋ
-그러네 ㅋㅋㅋㅋㅋ
-속보, 방송하던 1군 프로게이머 오열 ㅋㅋㅋㅋ
클립 영상이랍시고 한 남성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끙끙 앓는 모습이 화면에 드러난다.
[아니, 쟤 그때 걔 아냐? 아니 니가 왜 여기 또 있어요!!!]
과거 한번 당해본 전적이 있던 강산은 비화의 아이디가 과거 에반젤린의 아이디로 털었던 그 비화라는 사실을 깨닫고 비명을 내질렀다.
-아니 쟤는 전에도 비화한테 털리지 않음?
-그땐 방장 아이디로 털렸지 ㅋㅋㅋㅋ
애꿎은 희생자를 만들어냈다지만 정작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자. 보여줄 건 다 보여줬고, 이제 방송 꺼도 되지?”
-어허. 이렇게 끈다고??
-엄마…… 여기 너무 추워…….
-우주사출 멈춰!!
“아니 원래 목적이 핵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 그런 건 모르겠고~
-아 한판으로 어떻게 아냐고~
결국, 비화는 입을 삐쭉이면서도 짜증스레 다시 매칭을 돌렸다.
“그래…… 몇 판 더하자…….”
-극
-락
-극
-락
-끝나고 질문 타임도 ㄱㄱ?
“그런 건 내 동생 방송에서 하시고.”
게임만 할거라 못을 박았다지만 시청자들은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비화는 그 후로도 종횡무진 자연 재해마냥 게임을 휩쓸고 다녔다.
-여기 다이아 티어 아니었음?
-왜케 일방적임?
-저격러 개많넼ㅋㅋ
놀라운 점은 그녀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려던 인간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성적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은 많았지만, 근본적인 피지컬이 너무 달랐다.
-ㅋㅋㅋ 저격러 개같이 오열 ㅋㅋㅋㅋ
저격러의 수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사실 매판 저격이 성공할 리도 없거니와 티어 대가 도저히 사람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제 매칭 잡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네…….”
-올라갈수록 더 심해져.
“그럼 적당히 접을까…….”
그녀가 중얼거리며 마우스를 딸깍이자 반응이 찰지게 들어왔다.
-네?
-이만한 재능을 가지고 접는다고?
-기만…….
“아니. 난 즐기려고 하는 거지 어디 올라가려고 한 게 아니잖아.”
-부계 쓰면 되지.
“부계는 무슨…… 아, 이거 다른 모드도 있잖아. 그거나 해봐야겠다.”
그렇게 몇 판을 더 휩쓸고 나서야 비화는 만족한 듯 물었다.
“이제 만족해? 나 참, 이게 뭐라고 해명하고 있는 건지.”
-아직 더.
-부조케…….
-더 가져와!
“웃기지 마! 안 해! 그만! 할 만큼 했잖아!”
-응, 아니야.
-아니 여신님이라면서 기도도 못 들어줌?
“기도는 얼어 죽을!”
열이 뻗친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 방송 여기까지!”
-오늘?
-다음에도 한다 이거죠?
-믿겠읍미다.
“아……아냐! 말이 헛나온 거야!”
당황하듯 소리치고는 방송을 꺼버리는 비화였다.
“세상에…… 방송을 5시간이나 한 거야? 미쳤나 진짜…….”
스스로 자괴감에 한숨을 내쉰 그녀의 곁으로 몇 마리의 고양이들이 빛을 흩뿌리며 다가왔다.
그녀에게 종속된 제노엔. 조율의 사도들이었다.
“아…… 벌써 갈 시간이네…….”
인사도 못 하고 가게 생겼네.
다만, 방송의 여운이 짙게 남아 괜히 그녀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어휴…… 됐다. 됐어.”
재미는 있지만, 에반젤린처럼 푹 빠져들기엔 조금 미묘했다.
물론, 그녀가 가진 특유의 재능 섞인 방송에 매료된 이들은 그렇지 못했지만.
* * *
-비화 방송 언제 켜어어어어!
-그거 해명용 방송이라 계획 없다 했다…….
-안돼!!!
-엄마…… 여기 너무 추워…….
-이 패턴……어디서 많이 본 거 같다…….
-설마, 그 용박이 총수…….
-방장!
순식간에 에반젤린이 용박이의 총수가 되어버린 이 심연 끝자락에서 인간들은 비화가 다시 방송을 켜주길 바랐다.
-아니 방장은 푼수 같은 맛이 있는데. 그 언니도 똑같음.
-맛이 조금 순한 맛이냐 매운맛이냐인데. 둘 다 사운드 채우는 실력이 처음부터 초보라고 보기 힘들지.
-거기에 실력까지 좋으니…….
에반젤린은 그림 쪽으로, 비화는 압도적인 실력 면에서.
어떤 측면이든 비화 또한 방송을 하면 꽤 성공할 케이스라는 건 분명했다.
본인이 원치 않지만 말이다.
-진짜 안 와?
-비화 방송 켤 때까지 숨 참는다! 흡!
-이미 뒤진 시체입니다.
-아니 방송 켜라고! 말라 죽는 꼴 보고 싶어!!?
그러거나 말거나. 정작 사람들이 기다리는 비화는 지구의 시스템에 간섭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네…… 넬타리드가 없는데 왜 이게 멀쩡하게 돌아가지.”
넬타리드가 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가 존재함으로 인해 이 지구의 복잡해진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단순한 문제가 아닌데 이거…….”
어딜 어떻게 봐도 넬타리드가 없이 지구가 현재 시스템을 멀쩡히 굴리고 있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무리 없이 몇 시간이고 강신해 있을 수 있는 것도 이상하고…….”
에반젤린의 레어가 그나마 부담이 덜하고 힘의 대부분을 봉인했다고 하지만 신이 된 그녀가 문제없이 몇 시간이고 강신해있는 건 기본적으로 이상했다.
한참을 고민해보지만 결국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니. 나한테 맞을까 봐 도망치는 거 치고 뒤처리가 너무 정교한데…….”
넬타리드는 침묵했고, 그가 사라짐으로 인해 생겼어야 할 문제는 멀쩡히 돌아가고 있다.
이대로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엔 미묘한 감이 너무 많았지만 끝내 그녀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데이비가 이 상황에 대해 알 것 같지는 않고, 그나마 유일하게 정보를 알고 있을 법한 존재인 태초신이자 자애의 여신인 프리아 여신을 찾아갔지만, 그녀는 어째서인지 모든 출입을 금하고 성역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결국, 속이 터지는 건 비화였다.
알든 모르든 데이비에게 매달려 그의 조언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넬타리드는 네가 완전히 각성하면 문제없이 강신할 수 있을 거라 말했지.”
“그건 들었지만,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해요?”
“상식적으론 불가능하지.”
담담하게 말한 데이비가 초콜릿을 내밀자 비화는 그것을 입에 털어 넣고는 오물거렸다.
“그런데요?”
“그런데 네 상황도 상식적으로 설명이 되냐?”
애초에 비화는 지금까지는 없던 새로운 형태의 신이었다.
감정을 지닌 신.
직접적으로 세상을 조율하는 여신.
그야말로 비화는 여러 면에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둘이 같은 선상에 놓는 건 시기상조라는 거지. 힘을 대부분 억제했다고 해도 네가 강신할 수 있는 건 네 특성이 그런 것뿐이야.”
“그럼 넬타리드가 사라졌는데도 지구가 멀쩡한 건요?”
그 물음에 데이비는 잠시 고민하듯 침묵했다.
“아빠?”
그렇게 한참을 침묵하던 데이비는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지 프리아 여신이 대신 관리해주고 있는 건지도.”
그 말에 비화는 문득 정말로 그럴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생의 권능을 양도하기 위해 여신의 본체 일부를 각성시킨 여신의 아바타.
그녀가 가진 힘이라면 지구의 조율 정도는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프리아 여신이 넬타리드의 일을 대신해주고. 넬타리드는 그 기회를 이용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라고 볼 수 있는 건가요?”
“가능성은 있지만 확실한 건 아니야. 지칠 대로 지쳐서 이제 황혼기에 들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고.”
데이비의 추측은 가능성은 있었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결국, 더 모호해져 버린 상황.
데이비의 집무실을 빠져나와 묵묵히 걷던 도중 비화는 문득 저 멀리서 아장아장 걸어 다니며 놀고 있는 다리안을 볼 수 있었다.
귀여운 남동생. 에이리아와 데이비에게서 태어난 장남.
말없이 그를 지켜보던 중 문득 이상한 게 그녀의 시야에 비쳤다.
“어라? 저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