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57화
땅거미가 지는 시각. 신라 길드와 배승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한들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간다.
하지만 그 상황이 본인에게 적용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잡히면 곧바로 구속 조치가 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음에도 박지훈은 검은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숨기며 은밀하게 이동했다.
각성자라는 힘은 그에게 큰 영향력을 주지만 그의 힘 특성상 여기서 힘을 잘못 발현했다가 감지계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힘조차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약속장소로 나갔다.
인적이 드문 항만.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고 경비하는 이들조차 보이지 않는 어둑어둑한 항만에 들어선 그는 컨테이너 사이에 조용히 서 있는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배승우.”
그의 입에서 분노 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배승우는 그의 압박에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검을 하나 던져주었다.
“뭐하자는 거지?”
“너와 내 일에 다른 사람을 더 말려들게 할 생각은 없어.”
“…….”
박지훈은 배승우를 노려보며 천천히 검을 집어 들었다.
무난한 품질의 검이었다.
“그렇게 티오니스 성자의 딸을 이용하고 내 아버지까지 이용해놓고 말은 잘하는군.”
“똑바로 말해. 이 일을 시작한 건 너야.”
배승우는 천천히 자신의 검을 뽑아 들고는 말했다.
“너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간의 인생이 박살 났을 거 같나.”
“웃기는 소리! 일면식도 없는 인간들을 끌어들이는 건 집어치워라.”
“그래. 그걸 들먹여봐야 무슨 소용이야. 중요한 건 네가 내 인생을 박살 내버렸다는 건데.”
그는 검을 빙그르르 돌리며 물었다.
“하나 물어보자. 박지훈.”
“…….”
“대체 왜 그랬냐.”
배승우의 물음에 박지훈은 차갑게 웃었다.
“대체 내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만만해서 X새야.”
“뭐?”
“네까짓 놈이 X나 만만해서 그랬다고.”
박지훈은 검을 뽑아 들고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를 쫓는 이들이 감지라도 하면 골치 아프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이질적이며 독특한 마나가 흘러넘친다.
박지훈의 힘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가 그거뿐이냐?”
배승우는 침착한 표정으로 마나를 끌어 올려 자신의 힘을 증폭시키며 물었다.
“없어 개X끼야. 있어도 말해줄 거 같아?”
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자신의 유희를 위해 배승우와 정민아의 사이를 박살 내놨다는 걸 모를 순 없으니까.
그래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아주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적어도 네가 이번에 당한 일로 네가 피해자들에게 했던 게 어떤 짓인지 깨닫길 바랐다.”
“개소리하지 말고 덤벼. 난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으니까.”
그가 검신에 황금빛의 기류를 머금었다.
“겁도 없는 새끼. S급이 됐다고 세상이 만만해 보이지? 미안하지만 너랑 나는 계열부터가 달라.”
“그렇겠지. 나는 S급이라도 버퍼계통이고 너는 직접 전투계니까.”
배승우는 S급이지만 버퍼였고 박지훈은 S급이 내정된 A급이었다.
“속 시원하게 한판 붙자. 널 뭉개버리기 전에 널 패지 않으면 나도 속이 안 풀려.”
“후회하지나 마라.”
파앙!!
카아아앙!!!
두 사람의 검이 그대로 충돌한다.
놀란 것은 박지훈이었고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는 것은 배승우였다.
“너…… 어떻게…….”
경악한 박지훈의 물음에 배승우는 순간적으로 검을 비틀어 쳐내고 그대로 파고들었다.
“경험은 비슷하네. 하드웨어의 싸움인가?”
“똑바로 말해! 대체 네가 어떻게 이런…….”
“놀랐어?”
배승우는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공포도 긴장도 서리지 않은 그저 담담함.
착한 성정으로 사람을 공격하는 것에 굉장히 큰 망설임을 가지고 있는 배승우가 이렇게까지 날카로운 공격을 해온다는 것부터 이미 그가 내린 결단이 얼마나 무거운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러다가 목 날아가.”
카아앙!!
섬광처럼 날아든 배승우의 검이 박지훈의 검을 강하게 쳐낸다.
‘이런!’
순간적으로 자세가 흐트러진 박지훈이 식은땀을 흘렸다.
성격이야 어떻건 그는 A급 각성자였다. 그것도 s급이 내정된.
그런 만큼 전투에 확실한 경험은 필수불가결이었다.
반사적으로 꼴사납게 몸을 날려 검을 피해낸 박지훈이 허겁지겁 기어가듯 굴러 검을 집어 들었다.
카앙!!!!
하지만 뒤이어 날아오는 검에 다시 한번 그의 손에 쥐어진 검이 크게 휘청거렸다.
“빌어먹을! 대체 뭐냐고!”
육체능력으로는 자신이 분명 앞서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싸움이 되지 않고 있었다.
경험으로 밀어붙이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몸이 이전처럼 쉬이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만만해서. 그냥 심심하다는 이유로 그랬다고.”
촤악!!
“꺼……흑?!”
순식간에 뜨거운 감각이 퍼져나갔다.
박지훈은 자신의 왼손의 손목 힘줄이 잘려나간 것을 확인하고 비명을 질렀다.
붉은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온다.
손목의 힘줄을 자른다는 건 동맥이 잘려나가는 것과 같았으니 말이다.
“끄아아아아악!!!!”
촤악!! 촥!!
하지만 배승우의 검에는 자비가 없었다.
그는 나머지 손목의 힘줄도 잘라버렸고 뒤이어 왼 다리의 아킬레스건도 잘라버렸다.
이제 그는 제대로 물건을 쥘 수도, 똑바로 설 수도 없는 지경이 되었다.
물론 그전에 과다출혈로 죽을 상황이었다.
“사……살려줘! 살려줘!!”
죽음이 코앞에 닥쳐오면 사람은 본성이 드러난다고 했던가.
그가 어떻게든 터져 나오는 피를 막아보려 버둥거리지만, 배승우는 조용히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넌 지금 죽으면 안 돼. 살아서 네가 부숴버린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껴. 그게 내가 네게 하는 복수다.”
그말과 함께 그는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힘으로 뜯어낸 뒤 그에게 던졌다.
파아아아악!!!
동시에 새하얀 백광의 빛이 터져 나오며 박지훈을 감쌌고 이내 그의 출혈을 강제로 멎게 했다.
신성력이 담긴 회복 아티펙트였다.
어찌나 강한 회복력이 담겨있었는지 아티펙트가 부서지면서 내뿜은 빛은 피를 흩뿌리며 죽어가던 박지훈의 정신을 강제로 지상에 잡아 두었다.
“비……빌어먹을!”
그말과 함께 그가 악을 쓰듯 다시 소리 질렀다.
“대체 뭐야! 뭘 어떻게 했길래 네까짓 게 나를!”
“궁금해?”
그말과 함께 배승우는 몸에 있던 장비들을 하나하나 빼기 시작했다.
힘이 약하니 장비의 힘이라도 빌려야지.
배승우의 대답에 박지훈은 더욱 화가 난 듯 악을 써댔지만, 그는 몰랐다.
현재 배승우가 두르고 있는 아티펙트의 총 개수가 100가지가 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죽여!! 죽이라고 이 개새끼야!!”
“하나 정도는 남겨줄게.”
양팔의 힘줄과 한쪽 다리의 아킬레스건이 잘렸다.
신체의 재생은 어지간한 각성자론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사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배승우는 쓰러진 박지훈에게 다른 아티펙트를 사용했다.
-커스.
파스스스…….
박지훈의 상처에 저주가 깃들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면 회복마법으로도 재생할 수 없도록.
“안돼…… 안돼!!!”
비명을 내지르며 그가 몸을 미친 듯이 펄떡였다.
그리고는 급히 배승우에게 달려들 듯 몸을 던진 뒤 입으로 승우의 바짓가랑이를 팔로 끌어안고 소리쳤다.
“미안해! 내가 어리석었어. 제발 살려줘…… 제발…….”
“말했잖아. 죽이진 않는다니까. 물론, 죄는 치러야지. 다만 그 몸으론 일반적인 교도소는 힘들겠네.”
담담하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가버리는 그를 다시 부르는 박지훈이었다.
“제……제발! 이렇게 사과할게! 내가 괴롭힌 인간들에게 가서 전부 사과할게! 그러니까 제발!”
“추한 새끼.”
“아아아아악!!!”
자신에게 남은 미래가 끔찍하고 암담한 미래라는 것을 직감한 그가 절규하듯 소리 질렀다.
처절한 비명이었지만 아무도 그의 비명을 듣지는 않았다.
아마 날이 밝으면 그를 발견한 이들에 의해 발견되리라.
“한번 선택하면 돌이킬 수 없어. 이걸로 끝이야?”
“이제는…… 다 털어내야지…….”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비화의 옆에 있던 유리아가 손뼉을 가볍게 쳤다.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초단이가 걱정스레 그에게 말했다.
그동안 남을 해쳐본 적 없던 배승우가 이렇게 철저하게 한 인간을 망가뜨렸으니 그 거부감이 얼마나 클지는 예상할 수 없었다.
“괜찮아.”
그가 웃었다.
“힘들 때 우는 건 삼류나 하는 짓이지. 힘들 때 담담하게 하는 건 이류가 할 짓이고. 그리고 힘들 때…….”
“고기를 먹으면 육류인가요? 그럼 고기를 먹으러 가죠.”
“푸흡…….”
문득 끼어드는 유리아의 개같은 드립에 에반젤린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웃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비화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시선을 돌리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아……아니 숨을 잘못 쉬었나 봐.”
어색하게 손사래를 치며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지만 이미 들은 뒤였다.
“비화 취향이 대단하구나.”
“괜찮아. 고기 먹으러 가면 되지.”
한참을 절규하는 박지훈을 무시한 채 돌아서서 가려던 찰나였다.
문득 떠오른 듯 에반젤린이 비화에게 물었다.
“저놈은 그냥 둬도 돼?”
“각성자의 힘의 근원을 흩어놨어. 생각보다 너무 약해져 있길래 살짝 건드리긴 했는데. 얼마나 약해질지는 모르겠네.”
비화의 말에 에반젤린은 뭔가 찜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아!!!
저 멀리 박지훈이 있던 장소에서 시커먼 빛이 뒤섞인 엄청난 두께의 힘의 파장이 미친 듯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고 이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거…… 뭐야?”
빛의 기둥이 사라진 곳에선 기형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도 몰라.”
비화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쉬이 믿기지가 않는지 거대한 원형 띠가 수십 개 중첩된 형태의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중앙의 핵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원형 고리가 천천히 움직인다.
단순 그것만이라면 이렇게 섬뜩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 고리 띠의 면에 헤아리기 힘든 숫자의 눈이 달려 있다면.
저 존재가 절대 우호적인 존재라는 느낌을 받을 수 없을 터였다.
-구오오오오오오!!!!!!
거기에 그것도 모자랐는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괴물은 천천히 날아오르기 시작했고.
앗 하는 순간 눈동자들에서 엄청난 빛을 모아 대며 근처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저……저게 뭔데?!”
“낸들 아냐!”
비화가 한 손을 뻗어 괴물에게 신력을 방출한다.
하지만 괴물은 마치 신력에 익숙하다는 듯 비화의 힘을 받아냈다.
“신이 만든 실패작…… 미친 천사…….”
그리고. 순간적으로 힘이 충돌하며 어떤 동화현상을 일으켰는지 비화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뭐……뭐?!”
“넬타리드가 어떻게 각성자들을 그렇게 많이 발현시켰는지 알 거 같네…….”
비화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