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68화
헤라클래스의 힘을 흉내 내려다가 독자적인 일격이 만들어진 건 제법 이득이지만 그것만으로 넬타리드를 처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살이라는 단어가 그리 쉬운 단어는 아닐 테니까.
“파괴에 이어 타나토스. 거기에 너까지.”
벌써 셋에 달하는 신과 반목하고 있는 이 상황이 우스울 따름이다.
물론, 지금 눈앞에 있는 악신 넬타리드는 앞서 생각한 둘과는 다르다는 생각이지만.
-크윽?! 커헉!!
“하나 묻자.”
생각지도 못한 한방에 치명상을 입은 넬타리드가 주춤거리며 물러나자 나는 한 발 내디디며 질문을 하려다 말았다.
관두자.
이걸 물어본들. 무슨 소용이겠나.
비화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려주는 아티펙트는 아직 침묵상태.
시간은 조금 더 있다.
-커헉…… 쿨럭…… 그 공격…… 네 가족의 것인가?
“헛소리야. 윈리나 바리스는 이런 걸 할 줄 몰라요. 타냐나 에오니샤는 더더욱.”
-내가 말하는 건 그들이 아니다. 프리아.
헤라클래스의 힘이더냐.
그가 말했다.
“용케 알고 있네. 그의 생전에는 이만한 힘은 없었다는걸 알 텐데.”
헤라클래스는 회랑의 최연장자였던 만큼 회랑에 합류한 다른 영웅들도 모르는 과거가 분명 존재했다.
-적어도 그가 회랑에 있던 것도 모르진 않으니…… 하지만 단순히 파괴력만 올린 것보다 더 지독하군…… 쿨럭!
그래. 태초의 포식자가 극도의 시너지를 끌어내어 신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것이니까.
그럼에도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이거, 생각보다 효과가 더욱 크다.
“이 정도면…….”
-여신에게 통할 거라는 오만한 생각이라도 했는가.
“그럴 리가. 일단 세 가지를 정정하자고, 첫째. 그건 절대 불가능하다. 둘째. 나는 그녀의 성자이며 그녀는 나를 지켜주는 존재다. 마지막으로 셋째. 나는 그렇게 공멸할 생각 따윈 없어.”
그러니까 새로운 신이 나타나서 미쳐 날뛰지 않는 이상 멸신은 오로지 그에게 처음 사용하고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힘이 되리라.
프리아 여신의 소멸은 이 모든 세상과 법칙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오롯이 절대적이며, 전능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적어도 부모에게 칼을 들이미는 패륜을 저지를 순 없지.”
-크흐흐 그런가. 그렇겠지, 이 지경이 되었음에도 나는 그녀를 미워하며 증오하고, 동정하니까. 참 가엾은 신이로다.
그를 방치하면 비화가 위험하고, 그 또한 내게서 도망칠 힘을 잃은 듯 보였다.
“혓바닥 그만 놀리고, 서로 가진 패를 다 털었으면 이제 끝장을 봐야지.”
내 말에 동조하듯 그의 전신에 폭발적인 신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개 생명체라면 노출되는 순간 온몸이 가루가 되어버릴 정도의 위압.
그 덕분에 이미 만신창이가 되고 오염된 차원의 틈새는 더 이상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이에 나는 다시금 조금 전 익힌 힘을 끌어내려다 멈칫했다.
이게 왜 잘 안 나오지?
터어엉!!!!
그때였다.
순식간에 파고든 넬타리드가 극도로 압축된 힘을 고스란히 내게 처박아 넣으려는 듯 팔을 휘둘렀다.
그의 공격 범위 바깥으로 몸을 피해 보지만 애초에 신력으로 이루어진 공격이 단순히 치고받는 개념으로만 이루어져 있을 리가 없었다.
파스스스스…….
순식간에 부상을 입어 운신이 불편하던 내 팔이 회색빛으로 변한다.
-제아무리 신체화라 할지라도 이것에 무사하진 못할 테지.
천천히 내 몸을 석화시키듯 잠식하는 회색빛 무리를 털어내 보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렇다면 신력은?
역시나 회색빛의 잠식을 막을 수는 없는지 속도만 느려질 뿐 결과는 같았다.
이에 나는 태초의 포식자. 그 힘을 팔에 강제로 둘렀다.
모조리 씹어 삼켜라. 배탈 나도 책임은 안 진다.
효과는 굉장했다.
게걸스레 회색빛 무리를 먹어치우는 놈의 힘은 억제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이상의 진행은 막았다.
하지만.
조금씩 회복하던 팔을 다시 못 쓰게 된 건 뼈아픈 손실이었다.
쾅!!! 카가가가각!!!
뒤이어 넬타리드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공격을 퍼부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소멸시켜버리기 위한 공격들이다.
나에 대해 잘 아는 만큼 넬타리드의 공격은 상당히 위협적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파괴보다 덜 잔혹했다.
“천성은 어디 안 가네.”
-뭐라?
촤아아악!!!
순식간에 그의 복부를 걷어차 짓누르기가 무섭게 미리 만들어둔 대여섯자루의 기검들이 이기어검의 힘을 이용해 날아들며 그의 몸을 꿰뚫었다.
일반 생명체라면 치명상에 가까운 공격. 하지만 넬타리드는 곧바로 반격해 들어왔다.
내가 한쪽 팔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파고 들어와 검을 휘두른 것이다.
거의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그의 공격을 막아낸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콰직!!!
‘아 맞다.’
늘 그렇듯 초단이를 써온 나는 안일하게 기검의 강도와 초단이의 강도를 착각하는 실수를 낳아버렸다.
뒤늦게 깨닫고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곤 하지만 부상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감이 좋군…… 그 아이를 쓰지 않은 시점에서 무기를 맹신하지 말…….
쩌어어엉!!!
내 스스로의 실수에 대한 분노 때문일까. 아니면 아까부터 쉬지 않고 말을 걸어오는 그에 대한 분노 때문일까.
나는 부상을 억지로 무시한 채 다시 파고들었고 그의 몸에 공격을 때려 박았다.
하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양 넬타리드는 내가 사용하던 검술을 고스란히 베끼듯 휘둘러 들어왔다.
“염병…… 진짜 어디까지 베낀 거야.”
방금 그가 사용한 검은 독고준의 마령검이었다.
수차례 충돌이 이어진다.
시간을 끌지 않기 위해선 큼지막한 한방 한방을 잘 노려야 했다.
물론 그럴수록 넬타리드의 움직임 또한 나를 따라 더욱 정교하고 날카롭게 변했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틈을 만들 수 있는 한방을 만들어내는 수밖에.
기검으로 만들 수 있는 검술 중에 괜찮은 효능을 지닌 게 분명 존재할 터. 현재 그의 수준을 생각하면 낮은 번호 대의 마령검은 효과가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나는 조용히 검을 쥔 손을 가볍게 풀었다가 다시 움켜쥐며 자세를 잡았다.
양다리를 적당히 벌리고 거대한 그레이트 소드를 어깨에 짊어진 듯한 형태.
물론 기검의 날은 얇았기에 어깨와 검날의 거리는 제법 멀었지만 상관없었다.
이윽고 내 전신으로 가지각색의 기류들이 폭발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며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령검 85초식]
[극귀 병합 합격진]
[천무귀살]
과거 마계에서 고대 마수를 베어버릴 때, 이실디와 함께 사용했던 검이 내 손에서 홀로 펼쳐진다.
한발 한발 점차 빠르게 내디디며 엄청난 속도로 쇄도해 들어간다.
합격진을 홀로 펼치는 건 사실상 미련한 짓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검술을 택한 것은 그의 버릇을 보았을 때 유일하게 아주 잠깐의 틈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몸을 도약하며 날아오른 내 몸이 찰나의 순간 임계점을 넘고 다시금 그에게 낙하하기 시작하자 그 또한 거대한 기검을 만들어 내게 카운터를 칠 준비를 하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박!!!
그때였다.
오염된 차원의 틈이 일그러지더니 이내 고름이 터지듯 내 뒤쪽 공간이 터져나가며 변수가 등장했다.
허공에서 낙하하는 나를 중심으로 양쪽에서 푸른색과 금빛의 섬광이 엄청난 속도를 내며 부드러운 곡선형태로 넬타리드를 향해 파고들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저것들이 진짜.
갑작스런 두 존재의 난입에 흠칫 놀란 넬타리드가 두 섬광을 제압하기 위해 힘을 발현했지만 내 몸에서 뻗어져 나온 신력이 마치 거대한 팔처럼 응축되며 그의 힘을 강제로 잡아 멈추게 했다.
홀로 펼쳐야 하기에 불안전한 합격진이었지만 두 존재의 도움이 있다면 그런 문제는 사실상 없는 것과 다름없다.
천무귀살은 단순히 합격진이라 하여 80번대에 들어선 검이 아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극한의 완성형태를 띠는 검술이다.
-하…….
순간, 넬타리드의 입에서 허탈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완전히 파훼하기엔 늦었다 여긴 것일 터다.
이에 그는 최악을 버리고 차악을 택했다. 가장 위험한 일리나와 내 검을 우선적으로 막고 이실디의 검을 몸으로 받아낸다는 전략이었다.
허공에서 낙하하는 나와 바닥에서 빠르게 파고드는 셋이 일순간 교차하며 무수한 수의 검로를 만들어냈다.
서걱!!!
순식간에 일리나의 시공격검과 내 검이 그의 방어를 부서뜨리며 그의 몸에 꽂혀 들어간다.
치명적이라고 하기엔 방어로 인해 완전한 타격이 불가했다.
그나마 덜 치명적인 이실디의 검은 저항 없이 그의 몸을 꿰뚫었다는 게 다행일 것이다.
물론 그 대가는 가볍지 않았다. 나와 다르게 지상에서 위로 튕기듯 쏘아져 올라간 이실디와 일리나가 내상을 입은 듯 입에서 피를 토해낸다.
-이런 거로 나는 죽지 않…….
격하게 소리치던 그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까지 회색빛 무리로 인해 사용하지 못하던 내가 강제로 팔을 움직여 기묘한 힘을 응축시키고 병합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게 뭔지 잘 알고 있다.
천무귀살은 애초에 틈을 만들기 위한 미끼였을 뿐이었고, 넬타리드는 보기 좋게 거기에 낚여 아주 찰나의 틈을 내게 보였다.
아마 팔을 쓰지 못한다고 생각했기에 안심한 것일 테지만 나는 생각보다 터프하게 팔을 강제로 움직여내는 데에 성공했다.
[투신 헤라클래스 식(式) 멸격]
[태초의 포식자]
[복합일격]
[멸신]
뒤늦게 방어를 해보려 하지만 아주 찰나의 틈은 그에게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멸신의 힘이 그의 몸에 꽂히며 그의 존재 대부분을 씹어 삼켰다.
* * *
고요함이 주변을 감싼다.
두 번의 멸신으로 인해 그가 받은 치명상은 이제 회복으로 되돌릴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싸움은 끝이 났고, 넬타리드는 소멸을 앞두었다.
그 덕분일까. 팔을 잠식하던 회색빛의 빛무리는 더 이상 유지할 힘을 잃고 서서히 흩어졌다.
“결국, 이 지경이 됐네.”
누가 예측이나 했을까, 유일한 동맹이나 다름없던 신인 넬타리드가. 결국, 이렇게 내 손에 죽게 될 줄은.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끙끙거리던 일리나의 내상을 치유한 뒤 그녀의 뺨을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꺄악!! 아파! 아파! 아파아!!!”
“아프라고 당기는 거다. 니가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어?”
“아악! 미안! 미안해!”
내가 그녀들을 돌려보냈음에도 미련한 두 사람은 다시금 돌아온다는 선택을 했다.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무모한 것도 사실이었다.
“넌 나중에 돌아가서 봐. 혼을 내줄 테니.”
“기왕이면 밤에…… 꺄아악!!!”
다시금 뺨을 당기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내게서 빠져나간 뒤 후다닥 도망쳐 거리를 벌렸다.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어, 잠깐만 자리 좀 비켜줘.”
“위험한 건 아니겠지?”
“이미 소멸 직전이야.”
내 말에 이실디와 일리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흐흐, 너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곳을 찾아내 균열을 열었다라. 저 아이도 참 대단하군.
마치 임종을 앞둔 노인처럼 힘겨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너무도 후련한 목소리였다.
-할말이 있다고 했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
“왜 악신인 척을 한 거야.”
진짜 악신이라면 나를 죽이기 위해 비화를 뼛속까지 이용했을 텐데. 그는 끝내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결국 그러지 않았다.
-뭔가 착각하는 듯 크윽…… 하군……. 나는 네가 말하는 악신이 맞다.
그는 공허한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오염된 차원의 틈새는 계속해서 붕괴했지만, 우리가 있는 이 공간만큼은 계속해서 변하지 않았다.
이유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누군가가 공간을 동결시키고 있다는 건 조금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말없이 침묵하던 넬타리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거 알고 있는가. 지구에서 벌어진 오래된 대전쟁 중 상당수는…….
“네가 일으킨 거겠지. 정확히는 네가 의도한 대로.”
-그렇다…… 효율과 실리, 질서를 중히 여기는 것이 신이지. 전체를 위해 일부를 희생시키는 짓도 서슴지 않는 존재. 신격에 이르러있던 태초의 진조가 신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저주를 받은 건 그것에 반발했기 때문이라더군.
과거의 넬타리드는 효율을 따졌기에 아무렇지 않게 그런 결정을 내렸다. 다수의 생명체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나를 이렇게 만든 여신이 미웠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동정이 가더군. 감정을 얻었음에도 흔들려서는 안 되는 태초신의 존재가.
그렇게 말한 그가 고개를 돌려 내 뒤에 나타난 존재를 응시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프리아 여신.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공간이 붕괴되었으나 이곳만큼은 멀쩡한 이유가 그녀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을 이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천천히 다가온 아름다운 여신.
그녀는 감정이 없는 얼굴로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고 반쯤 사라져버린 넬타리드를 품에 안았다.
프리아 여신의 등장에 놀란 이실디와 일리나의 시선이 이쪽으로 닿는다.
-여신이시여. 어찌하여 내가 이런 일을 벌일 걸 알면서도 침묵했습니까.
[…….]
-이제 나도 죽을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까.
딱딱한 신의 목소리가 아닌 감정이 서린 한 존재의 씁쓸한 질문이었다.
-끝까지 대답하지 않으시는군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당신이 내 모든 선택을 존중한 것을 뒤늦게나마 알았으니.
그때. 여신의 눈에서 투명하고 맑은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저거 수집하면 완벽한 신의 눈물방울…….
나는 이 불경한 상상을 멈추기 위해 스스로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자애로우면서 잔인한 존재……. 미워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이. 그리고 가장 가여운 존재.
어쩌면 지금 가장 괴로운 건 프리아 여신이 아닐까.
그녀도 넬타리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감정을 깨우쳤기에 넬타리드 이상으로 괴로울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것이 전지전능이기 때문에? 그건 아니었다.
아마 책임 때문일 터.
그녀가 망가지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라는 것은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너무도 무거운 책임감.
그 책임감은 일개 이성과 감정을 지닌 존재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무게였기에 신이라는 존재는 감정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넬타리드의 힘없는 미소에 여신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여신의 눈물을 본 넬타리드는 씁쓸하게 웃으며 바스러져 가는 자신의 양손을 모았다. 그리고 천천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아…… 신이시여. 이 못난 존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프리아 여신의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부디 바라옵건대…… 이 못난 존재를 절대 용서치 마옵소서. 또한, 이 못난 존재로 인해 고통받은 이들에게 다시 한 번. 소중한 기회를 주옵소서.
그의 기도가 지속되자 여신은 끝내 오열하기 시작했다.
으…… 으으…… 으으으…….
억눌린듯한 오열. 그 슬픔 속에서 여신은 천천히 그의 손을 꼭 잡았다.
1만 년이다. 감정을 얻게 된 여신에게 있어서 자식이나 다름없는 하나의 신이 이렇게 소멸하는 것이다.
이내 내 몸 안에 있던 희생의 권능이 미친 듯이 공명하는 게 느껴졌다.
“읍?!”
동시에.
완전히 활성화된 희생의 권능은 넬타리드의 모든 것을 삼켰고 이내 내게 어떤 장면을 보여주었다.
미친 천사들이 일제히 각성자의 몸에서 빠져나온다. 그 수는 무려 수백.
놀라울 정도의 숫자였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각성자들에게서 빠져나온 천사들은 기괴한 형태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의 형태들을 하고 있었고 그들은 말없이 자신들의 각성자들을 지켜보다 조용히 소멸하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런 미친 천사들이 빠져나온 각성자들은 자신도 그 대상임을 알면서도 멀쩡한 자신들의 모습에 의아해하다 신의 기적이라며 소리쳤다.
마치 세상의 시간이 되감기 되듯 허공에서 빛무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부서진 세상의 흔적들이 복구되고 미친 천사로 인해 크게 다친 수많은 인간들이 일제히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시작한다.
조용히 기도를 올리던 넬타리드는 이번엔 나를 향해 말했다.
-그것만큼은 알고 있으라. 내가, 그리고 여신이 저들을 각성자의 몸에 넣은 것은 그들의 불완전한 존재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지키기 위해서?
내가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내자 그는 끌끌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비화가 보았던 괴로워하던 목소리. 구해달라던 목소리는 스스로를 구해달라는 것보다. 그들이 깃들어있던 각성자들을 도와달라는 처절한 기도가 아니었을까.
박지훈 같은 악인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선인들도 있었다.
뒤이어 미친 천사들이 빠져나가면서 힘을 잃었던 이들 상당수의 각성자들이 가지고 있던 힘이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한다.
죽은 이들은 돌아올 수 없겠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웠다.
그리고 복구가 되기가 무섭게 지구의 시스템들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넬타리드가 존재하기에 유지되던 시스템들이 하나둘씩 동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다음 대의 신이 태어나기까지 시간을 벌려는 것 같았다.
-나를 대신할 존재가 곧 태동할 것이다. 나와 달리 온전하고, 더욱 온화한 존재일 테지. 그는 성녀 아가사를 보살피고 나보다 더 지구를 사랑하리라.
“그럼 비화는?”
-그 성질 고약한 꼬마가 될거라 생각하는가. 자식에 대한 애정이 과하게 비틀려있군.
“이 개x끼가?”
내 욕설에도 그는 껄껄 웃더니 이내 공허한 목소리로 작게 웅얼거렸다.
-하아…… 프리아…… 다시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구나.
장난스레 마무리한 넬타리드는 완전히 침묵했다.
그의 죽음에 여신은 천천히 고개를 떨구며 가녀린 어깨를 떨었고 그 모습을 보던 일리나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작게 울었다.
이실디는 뭔가 복잡한 표정이었다.
“기적 참 대단하네.”
나는 착잡함을 담아 입술을 달싹였다.
소멸에 이른 신이 마지막으로 올리는 기도. 그 기도는 어떠한 기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침묵하던 넬타리드의 남은 부위가 모두 바스러지듯 천천히 흩어져 소멸했다.
* * *
잠에서 깨어난다.
멍한 얼굴로 누워있던 한 청년은 자신의 곁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흠칫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넌…….”
“더 자도 될 텐데.”
예쁘고 청아한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은 예쁜 꽃으로 만들어진 목걸이를 그에게 걸어주며 해맑게 웃었다.
“이히히 잘 어울린다.”
1만 년은 더 되었을 텐데.
그 오래된 기억임에도 너무도 선명했다.
장난스레 만들어준 꽃반지의 보답이라며 가져다주는 여성.
본래라면 그는 절대 볼 수 없었어야 할 장면이었다.
이 목걸이를 선물 받기 전 그는 신으로 변하며 완전히 달라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치 그가 겪어온 모든 것은 사실 꿈이며 그가 알던 것 또한 그저 꿈일 뿐이라고 말하듯 너무도 자연스러웠고 평화로웠다.
“설마…….”
그제야 청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자신에게 벌어진 어떤 기적을 눈치챌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그동안 해주지 못했던. 그토록 갈망했던 것을 행동에 바로 옮겼다. 바로 여성을 품에 강하게 안은 것이다.
“다시는…… 다시는 놓지 않을 거다…….”
“자, 잠깐!”
본래라면 하늘을 미친 전쟁으로 인해 검게 변해있어야 했건만. 이곳은 너무도 평화롭게 느껴질 정도로 하늘이 푸르렀다.
종족전쟁. 신들의 전쟁이 이곳에선 벌어지지 않은 것인지.
과거로 돌아간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것은 그토록 그가 보고 싶어 했던 미래나 다름없었다.
여신도, 전생 후의 존재인 데이비도 아닌. 정말로 그가 보고 싶어 했던 여인.
신녀 프리아, 그녀가 그의 곁에 있다.
과거회귀, 혹은 평행선, 그 어떤 것과도 달랐다.
이런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는 것은 그가 가장 잘 알았다.
-스스로 용납 못 할 짓을 하면서도 세상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온 네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며. 속죄일지니.
마치 누군가가 말을 하듯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부디. 그곳에서는 영원토록 행복하기를.
그는 소리 죽여 몸을 간헐적으로 떨었다.
“프리아.”
“아이 참……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
당혹스러워하는 여인, 신녀 프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그렇게 한참을 오열했다.
신녀 프리아를 위해 신이 된 존재. 넬타리드의 황혼은 따스하고 포근하며 평화롭게 결말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