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69화
세상을 밝히는 광휘.
물론,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이 광휘는 프리아 여신의 것인지 넬타리드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넬타리드가 지구를 버렸다며 떠들던 사람들은 신의 기적을 목도하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희생된 사람들까지 되돌리긴 했지만. 그가 마지막을 불태워 피워올린 기적의 불씨는 많은 이들을 다시 수렁에서 건져냈다.
“이제야 만나주십니까? 그동안 한 번도 안 나타나시더니.”
여신은 묵묵히 세상을 내려다본다.
“넬타리드가 이렇게 소멸할 거라곤 생각 못 했었는데.”
비록 그로 인해 피해를 많이 본 것도 사실이지만 나는 그가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번 일로 많은 이들을 죽였지만, 그 이상으로, 아니 수천수만, 수억 배에 달하는 인간을 살려온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의 끝은 조금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여신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던 태블릿이 반짝였다.
[괴로워하는구나, 그는 어떻게 되었을 거 같니?]
“소멸했겠지요. 다만.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닙니다. 당신이라면 더 좋게 그를 보내주는 방법도 있었을 겁니다.”
그 물음에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성역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겠지. 하지만, 오랜 시간 노력해온 아이의 부탁마저 외면하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니?]
“여신님…….”
[넬타리드는 너무 소중한 아이였어.]
감정이 생겼기에 이런 결단을 내린 것일까. 본래의 그녀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행동이다.
이후 그녀는 천천히 나를 데리고 이동했다.
그녀의 본신이 잠들어있는 심층.
그곳에서 그녀는 어떤 작은 빛무리를 꺼냈다.
“그건 몽환 세계입니까?”
단순 몽환 세계라고 하기엔 그 안에 서린 힘이 섬뜩할 정도로 짙다.
[완전히 다른 평행선.]
“평행세계요?”
내가 아는 평행세계와는 다른데?
[기적이 만들어낸 하나의 작은 세계.]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넬타리드가 바란 것은 신녀 프리아의 곁을 지키는 것이다.
[이안의 것들은 모두가 거짓이며 진실.]
“뭡니까 그 두루뭉술한 설명은.”
[너는 진짜니?]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겠죠?”
[하지만 이 안에 있을 이들에게 너는 가짜야.]
“하하. 재밌네요. 그냥 그렇게 느낀다는 겁니까? 아니면…….”
내 물음에 그녀는 또 다른 구슬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내 눈이 부릅 뜨여졌다.
“설마…….”
[이쪽은 지금 네가 있는 곳.]
단순히 비유를 한 셈이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를 것이 없다고.
단순한 평행선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도 알겠고.
미래에서 온 아벨이 돌아가면서 그곳과 이곳이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그녀가 만들어낸 저 평행선 또한 서로가 진짜 일터다.
“그럼 미래에서 온 아벨도 그런 겁니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벨이 온 미래는 이미 존재하는 미래였고 갈라진 가지가 되었지만 지금 그녀가 만들어낸 것은 다시금 만들어진 가능성이었다.
“……그래도 끝내 조롱받는 삶은 아니네요.”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그쪽은 자신들이 진짜이고 나는 이쪽이 진짜이다.
어느 쪽이든 거짓이며 진실.
어쩌면 이게 진짜 차원이동이 아닐까.
이만한 힘이 감히 놀랍지만, 여신의 존재를 생각하면 새로울 건 없었다.
[본래 이렇게 거대한 이동은 절대 허락하지 않아.]
하지만 넬타리드는 예외의 상황을 만들었다.
“그럼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넬타리드가 사라지면 지구의 시스템이 붕괴하는 건 당신이 잘 알지 않습니까.”
지금이야 기적이 발현되어 동결되어있지만, 이걸 그냥 두면 훗날 재앙이 된다.
이에 그녀는 천천히 손을 펼쳤고 그녀의 양손 위로 빛무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군가가 누워있었던 것 같은 요람이었다.
“그건?”
[후임.]
* * *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거대한 힘이 서린 에너지 구체들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바쁘게 손짓을 하던 청년이 고개를 돌린다.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넬타리드?”
-맞습니다. 넬타리드라고 합니다.
청년의 모습은 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싸워오던 넬타리드와 동일했다.
풍기는 힘 또한 동일했다.
“어떻게 여기에…….”
-아. 설명이 늦었군요. 미안합니다. 저는 전대 넬타리드께서 소멸하기 전 남겨놓으신 신의 의지 파편입니다. 단순 파편이었지만 프리아 여신께서 저를 요람에서 완전한 신으로 탈바꿈시켜주셨지요.
새로이 태어난 신.
넬타리드나 비화처럼 신이 된 케이스가 아닌 태생부터가 신으로 존재하는 자.
그의 악수를 받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과연 눈앞에 있는 넬타리드 mk2는 넬타리드와 같은 길을 걸을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놈이 더 커서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죽여야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뭔가 떠오른 듯 어떤 구슬을 꺼내 바라본다.
-흐흐…….
마치 귀여운 딸을 보는듯한 아버지의 헤픈 미소.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보자 그는 구슬을 보여주었다.
-어떠십니까? 귀엽지 않습니까? 제 성녀입니다.
그가 보여준 것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는 아가사의 모습이었다.
“…….”
-저는 지구를 참 좋아합니다. 하지만 혼자선 모든 변수를 감당할 정도로 완숙한 신이 아닙니다.
그가 내게 말했다.
-그러니 부디. 제게 많은 도움을 주십시오.
그말과 함께 내게 남아있던 넬타리드의 성흔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저는 당신에게 성흔을 내릴 역량이 되지 못하니까요.
과거의 넬타리드는 몰라도 지금의 넬타리드는 감정이 풍부하다. 마치 비화처럼 말이다.
“그렇게 하자고.”
그가 미소를 짓는다.
그때였다.
허공이 찢어진다.
이곳은 넬타리드의 성역. 이곳의 주인인 그와 그가 초대한 나를 제외하고 들어올 수 있는 이는 프리아 여신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기척은 아니었다.
이것은…….
“넬타리드 이 개x끼야!!!”
쩌어어엉!!!
허공이 찢어지며 튀어나온 비화가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곧바로 그의 몸에 드롭킥을 박아넣었다.
-커헉!
같은 신이기 때문일까.
넬타리드는 곧바로 튕겨 나가 수차례를 굴렀다.
그리고 그렇게 쓰러진 넬타리드의 위에 비화가 마운트를 하듯 올라앉아 주먹을 들었다.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 아빠?”
열이 뻗쳐 주먹을 휘두르려던 비화가 놀란 얼굴로 자신의 팔을 막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만해. 이놈은 그놈이 아니야.”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이놈이 넬타리드가 아니면…… 어?”
그제야 넬타리드가 그녀가 알던 그 존재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흠칫 놀라는 그녀였다.
“너…… 뭐야?”
“자, 자 비화야. 일단 진정하고 넌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아…… 아빠?! 자, 잠깐만요!”
버둥거리는 비화를 둘러멘 나는 넬타리드를 슬쩍 바라보았다.
어색한 웃음을 내비치며 천천히 일어난 그가 고개를 숙였다.
-비화 선배님.
“뭐야.”
-여신으로써 체통을 지키셔야 합니다. 후배를 아껴주셔야지요.
“너, 너 이새!”
“됐고 따라와 이 지지배야.”
“꺄악!”
버둥거리는 그녀를 뒤로한 채 나는 피식 웃었다.
넬타리드는 신적인 존재들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지구와 피조물을 지킨 존재.
그리고 그런 그의 의지에서 태어난 이번대의 넬타리드.
아무래도 마냥 온화하다곤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참. 전대가 남겨놓은 전언이 있습니다.
“뭔데.”
-꽃이 지고 하늘이 높아질 때.
“…….”
그의 목소리에 묘한 힘이 서려 있는 게 보였다.
-신령의 운명을 지닌 신자(神子)가 자신의 운명을 거스를 단 한 번의 기회를 얻는다.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내 말에 그는 쓰게 웃었다.
-아직 저로선 전대의 안배를 모두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꼭 전해야 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선배님은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응? 나? 나 뭐.”
-별거 아닙니다.
* * *
미친 천사들은 모두 구원을 받은 듯 사라졌다.
그리고 넬타리드의 기적은 미친 천사를 심어 안정시켜야 했던 불안정한 존재들을 모두 안정적으로 만들었다.
한때 넬타리드가 지구를 버렸다며 많은 논란이 인 건 사실이지만 신의 기적을 목도하여 세상이 구원받은 시점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떠한 악마가 세상을 흔들려 했고, 보다 못한 넬타리드가 직접 나서서 모든 이들을 구원했다.
진실은 다르지만 무슨 상관이랴.
결과적으로 일이 잘 풀린 덕에 넬타리드 교단에 크나큰 타격을 입는 것은 피했는데.
넬타리드의 후계로 태어난 신은 이전의 넬타리드와 달리 상당히 감정이 풍부한 편이었다.
여러 면에서 비슷하고 다르지만 가장 비슷한 점을 꼽으라면…….
상당히 지구를 사랑한다는 사실일까.
넬타리드가 멍청이도 아니고 자신의 후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진 않았을 터.
여신의 말에 따르면 현재의 넬타리드는 과거의 넬타리드가 자신의 힘을 대량으로 심어 만든 그의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이름은 같으나 다른 존재.
믿어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믿어야지. 별수가 있나.
다만 감정이 있기 때문일까.
상당히 장난기가 있는 편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비화와 자주 투닥거리는 모습이었다.
갓 태어난 신출내기 신 두 명이 투닥거리는 모습은 참 우습기 그지없다.
“야 임마! 한 수 물려!! 실수야 실수!”
-어허, 왜 그러십니까. 인간들의 말 중에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낙장불입이라고.
“그건 인간 기준이고!”
독특하게 생긴 체스판을 놓고 인상을 쓰고 있는 비화와 그런 비화를 보며 실실 웃고 있는 넬타리드.
과거라면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다리를 꼬고 앉아 두 녀석이 노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떤 생각이 들었다.
“넬타리드 mk2.”
-저는 그런 이름이 아닙니다.
“됐고. 네 선대가 박살 내놓은 차원의 틈새는 어쩔 거야. 확산은 막았지만 그냥 두면 저거 고름된다.”
내 말에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씩 정화하고 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화는 넬타리드가 내게 신경이 끌린 순간을 이용하여 사특한 웃음을 짓고 체스판의 말을 슬쩍 바꾸고 있다.
“흐헤…… 흐헤…… 흐헤헤헤.”
저 지지배는 누구를 닮아서 저러는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복구할 겁니다. 당신들이, 그리고 제 선대가, 여신께서 다져놓으신 이 땅에서 신으로 태어났다면 응당 그에 걸맞는 모습을…… 아니 선배님!! 뭐하시는 겁니까!
“아…… 아니야! 나…… 난 아무것도 안 했어!”
-웃기지 마십쇼! 수를 물리는 것도 모자라서 죽은 말을 은근슬쩍 올리다니요! 제 신력은 언제 뚫고 바닥을 정리하신 겁니까!
“야! 너 선배한테 말버릇이 왜 그래! 죽고 싶어?!”
-아니 말 돌리지 마세요! 여기 이거 이거! 전부 제자리에 돌려놓으세요!
“싫다! 꼬우면 네가 돌려놓던가!”
-지금 제가 힘을 얼마나 많이 분산시켰는데 선배님을 무슨 수로 이깁니까!
“그럼 이대로 가던가~”
-이익!?
“에베베~에베베베베!”
깐죽거림이 가히 놀라울 정도다.
비화가 저런 성격이었나.
둘의 행동거지를 보던 나는 스스로를 치유하고 있을 초단이를 불러냈다.
“아…… 아버지…….”
“괜찮아?”
“네. 신력을 넣어주신 덕분에 거의 다 치유했어요…….”
지친 듯 초단이의 머리카락이 힘없이 떨어졌다.
내가 아공간에 넣어준 막대한 신력을 흡수하여 스스로 수복하곤 있다지만 그 속도가 느렸다.
“미안하다.”
“저는 아버지의 검이에요. 이런 것조차 못한다면 그건 제 본질을 흐리는 거니까요.”
홍단이와 청단이었다면 아프다며 엉엉 울었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도 그러했다.
넬타리드와의 싸움이 끝난 뒤 초단이를 불렀을 때 나온 것은 여기저기 멍이든 채 내 품에 안겨 엉엉 우는 두 아이였으니까.
“비화가 빠져나가면서 공백이 커졌어. 넬타리드가 노린 건 그 틈이겠지.”
“네…….”
“당분간은 스스로 힘을 회복할 수밖에 없으니 나서지 말자.”
뭐 초단이를 휘두를 일이 얼마나 되겠느냐마는.
“네…….”
힘없이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주자 그녀의 표정이 뾰로통하게 번졌다.
“하지 마세요. 머리 헝클어져요…….”
“그래.”
“그런데…… 비화는…….”
“야! 그거 안 놔?!”
-싫습니다. 선배님도 그렇게 하시는데 저라고 못할 건 뭡니까!
아이 두 명이 싸우는 것처럼.
신력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체스판의 말을 마구잡이로 놓으며 싸워대는 저것들을 보고 있으니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비화는 울드보다는 체스를 좋아하는 편이구나.
문득 흥미가 돋아 비화에게 말을 건다.
“비화야. 아빠랑 한 판 할까?”
내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를 멍하니 보더니 피식 웃는다.
“아빠. 체스 개 못하시잖아요.”
비화.
나와의 체스 전적 255전 254패.
1승.
아벨도 그러더니 피가 이어져 있지 않은데도 이것들은 남매가 분명하다.
빠직 소리를 내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비화가 후다닥 도망쳐 넬타리드의 뒤로 숨었다.
“야! 후배! 어서 아빠 막아!”
-시…… 싫습니다! 누굴 죽이려고! 제 선대도 못 버틴 걸 제가 맞으면 한 방에 훅 가는 거 모릅니까?!
“야! 선배가 끌려가는 걸 보고 있을 거야 어?!”
-어서 와서 이 성질 더러운 선배님 빨리 데려가십시오!
투닥거리는 그녀들을 보며 내가 한 발 한 발 내디딘다.
그때였다.
우우웅…… 우웅!!!
페르세르크의 연락을 받기 위해 만들어놓은 강화 연락 아티펙트가 맹렬하게 울린다.
“음?”
의아한 연락에 내가 받자 페르의 얼굴이 수정구 안에 비쳤다.
“페르세르크?”
-데이비. 지금 어디야.
묘하게 화가 난듯한 표정을 보며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눈치를 보던 비화나 넬타리드. 그리고 초단이까지 슬금슬금 다가왔다.
“무슨 일인데?”
-에반젤린 이 기지배를 잡으러 가고 있는게야.
주변풍경을 보니 바다를 가로질러 날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에반젤린을? 뭐 사고라도 쳤나?”
“하여튼 에반젤린 그 기지배는 허구한 날 사고를 치지.”
-선배님이 하실 말씀입니까?
“입 닥쳐 넬타리드.”
뭔 사고를 쳤길래 척 봐도 저렇게 화가나 보이는 것일까.
내 의문에 그녀는 금방 대답을 해주었다.
-에반젤린이 게임에 과금을 좀 많이 한 것 같더구나.
“흐음…….”
그래서 잡으러 가고 있는 것일까.
에반젤린은 진즉에 눈치채고 튄 것이고.
아마 미식연구회가 알렸겠지.
예전이라면 나도 동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저기 페르세르크. 이제와서 하는 이야기라 좀 웃기긴 하다만…… 에반젤린도 이제 어느 정도 사리 분별을 할 줄 알잖아.”
아무리 에반젤린이 어리다고 해도 그녀의 정신은 이미 어느 정도 성숙해져 있다. 그렇기에 마냥 옭아매는 게 옳은 일인지 조금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뭐라고?
한창 메가로드리아를 타고 날아가던 페르세르크의 이마에 실핏줄이 돋는 게 보였다.
“게다가 이제 스스로 돈도 버는 아이한테 돈 쓰는 것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하기도 좀 그래서.”
-하…… 데이비 지금 그 애가 얼마를 썼는지 모르는 모양이로구나.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데. 무슨 일인데. 얼마나 썼길래.”
애초에 용돈이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니고 방송으로 자기가 돈을 버니까 그 돈을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까지 통제하는 건 역시 너무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던 참이었다.
적당히 풀어서 스스로 제어할 줄도 알아야지.
-그래. 그대 생각이 옳다 여겨 얼마 전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겠다 말하기도 했지.
“그랬어? 으흠. 그런데 뭐 얼마나 썼다고.”
-석 장.
“30만 원? 에이 뭐 그 애가 광고 들어올 때 쓰는 돈이 얼만데.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 주자.”
비화에게 적당히 좋은 친구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던 찰나였던 만큼 나는 기분 좋게 그녀를 다독였다.
하지만.
-30만 원? 웃기는군.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한 달 사이에 3억을 박았어. 이 머저리야. 고지서 숨겨놓은 걸 찾았으니 벌써 한 달은 지난 게지. 그 망할 사행성 게임에서 그 애가 혈맹의 행동대장이라던데, 하…….
“…….”
초단이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틀어막았고.
비화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경악했다.
넬타리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에반젤린 이 기지배 어디 있어.”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반젤린이 한 달에 벌어들이는 수익은 대부분 고아원 같은 곳에 기부된다. 그것을 제외하고 그녀가 벌어들이는 수익은 한 달에 2천만 원 정도.
엄청난 돈이긴 하지만 그녀의 구독자를 생각하면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에반젤린이 돈이 없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근 1년 반 동안 번 돈을 고작 한 달 만에 무분별하게 게임 속에 처박았다는 말에 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자기가 벌어들이는 돈 이상으로 과감하게 돈을 쓰라고 가르친 바가 없다.
아마 옆에서 누군가가 살살 꼬드겼겠지. 자존심이 한창 강한 에반젤린은 거기에 홀랑 넘어갔을 테고.
“거기 어디야.”
-태평양 한복판인 것 같은…….
쩌억!!
문을 강제로 열어젖힌 내가 으득으득 소리를 내며 손가락 마디를 꺾었다.
그리고는 넬타리드의 성역에 있는 신성한 기둥을 가볍게 후려쳐 부숴버렸다.
-으악! 그걸 부수시면!
손가락이 파고들어 간 기둥은 거대한 크기가 무색하게 내 손에 잡혀 붕붕 돌아간다.
“어우야…… 난 무서워서 안 되겠다.”
“넬타리드, 이거 빌려 간다. 아, 그리고, 비화야.”
“어…… 네, 넵!”
바짝 군기가 든 채로 벌떡 일어나는 비화가 나를 본다.
“가서 현아한테 말해. 에반젤린 앞으로 된 카드 싹 다 정지시키라고.”
티오니스에서 온 신분이기에 독특하게도 에반젤린은 여러 혜택을 가지고 있다.
카드도 그중 하나.
뭐가 됐건 이 정신머리 없는 기지배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