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70화
처음엔 단순 우연이었다.
에반젤린은 구독자의 수가 어마어마한 만큼 그녀에겐 많은 광고가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러던 중 한창 최근 신작 게임으로 유명한 한 게임에 대한 광고를 받은 그녀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요즘 여기저기서 맛만 보니 혀만 담그니 하는 소리가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같은 동료 스트리머인 절제나 친한 오빠나 다름없는 시우도 광고를 받았다고 하기에 같이 시작했다.
게임의 재미만 놓고 보면 사실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쟁 형식의 게임이라는 게 으레 그러하듯 극한의 경쟁심을 아무렇지도 않게 유도하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지르는 놈이 잘못이라 말해도 마땅한 해답 책을 찾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당연히 스트리머로써 상당히 익숙한 절제나 시우는 광고 분량만 깔끔하게 채운 뒤 곧바로 손을 놓았다.
절제의 입장에선 그렇게 취향이 아니었고 시우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끓는점이 생각보다 낮은 편에 속하는 에반젤린이 걱정됐던 두 사람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에게 말했다.
-괜히 빠지지 말라고. 정신 차리고 보면 그쪽 회사 사옥 하나 새워주고 있을 거라고.
특히 광고를 받은 게임은 무언가 패키지 하나를 구매하는데에도 10만 원 30만 원 우습게 터져나가는 게임이었다.
그래도 에반젤린이 그동안 해온 게 있는데. 그렇게 돈을 벌면서도 1~20만 원에 벌벌 떠는 그런 아이였으니까 별문제 없겠지.
안일함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에반젤린은 두 사람보다 광고기간이 길었고 나름대로 준비물도 많았기에 방송을 끄고서도 따로 준비해둘 게 많았다.
그렇게 방송을 끄고 홀로 숙제를 해나가던 중 그녀는 사냥터의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어떤 이들과 마주했다.
-아저씨. 길 좀 비켜주세요.
닉네임 토끼공주라는 우스꽝스러운 닉네임으로 활동하던 에반젤린은 대체 이 인간들이 왜 이러고 있지? 라는 생각에 말을 걸었고…….
그 자리에서 그 유저 두 명에게 살해당했다.
이런 PK 시스템에 어이가 없었던 그녀는 곧바로 그들을 다시 찾아가 항의를 했다.
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그냥 지나가려는 것뿐이다. 뉴비니까 좀 배려해달라.
떨어뜨린 아이템이 없으면 사냥이 힘들다.
하지만 그들이 돌려준 건 그녀의 자존심을 긁는 한마디였다.
-ㅋ 통제 중이니까 죽이지. 들어가고 싶으면 우리 혈맹 사이트에 가입해서 상담받으셈.
그리고 또다시 사망.
무기에 이어 갑옷도 잃어버린 그녀는 황당함에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망할 게임은 일단 광고. 즉 계약 숙제였던 만큼 할 건 해야 했으니까.
사실 이것은 게임사 직원 측의 노련한 함정이었지만 에반젤린은 그것을 몰랐다.
정확히는 에반젤린이 이런 자잘한 숙제조차 방송 중에 했다면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녀의 팬, 시청자들이 개떼마냥 몰려들어 통제고 나발이고 다 부숴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녀가 하는 이 게임은 그렇게 평이 좋지 않았고 그녀도 한두 시간 정도 광고 숙제용으로 돌릴 생각이기에 방송에선 따로 플레이하지 않으려 했다.
게임사 직원은 그녀가 방송 중에 이걸 하면 문제가 없을 거라 말했지만 대부분의 시청자가 바라지도 않는, 아니 정확히는 수상할 정도로 혐오하는 게임을 계속 붙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이 게임에 손을 대자마자 밀고 들어온 정체 모를 악질도 한몫했지만.
그러던 중 그녀의 눈에 비친 캐시 샵.
그곳에는 초보자용 장비로 드랍되지 않는 기본장비를 파는 것이 보였다.
그 외에도 종류는 많았지만 일단 무기와 갑옷이 필요했던 그녀는 광고비용으로 후원받은 3만 원 캐시를 이용하여 패키지를 구매했고 다시 그곳을 찾아갔다.
어차피 레벨도 낮고 아이템도 안 떨어뜨리니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은 물론 고레벨 장비로 그녀를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이에 그녀는 이 울화통을 풀기 위해 게시판에 가서 익명으로 글을 남겼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조롱뿐이었으며, 해당 혈맹의 사이트로 보이는 주소뿐이었다.
-걍 포기하세요. 거기 혈맹 개악질이라. 뉴비 배척 개심함. 뉴비 중에서도 돈 좀 쓴다 싶은 싹수 보이면 이리저리 베푸는 척하면서 흡수하고 아니면 싹 다 쳐냄. 그것도 아니면 걍 시간제로 대가 지불하고 들어가서 사냥하는 수밖에.
대체 뭘 대가로 요구하기에 이러는가 싶어 사이트에 들어가니 적혀있는 공지가 가관이었다.
-어차피 못 이겨요, 괜히 힘 빼지 말고 상담하세요. 한 시간 이용료 10만 원.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보호까지 해드립니다.
그때쯤이었을까. 에반젤린이 극도로 분노한 것이.
약속은 약속이니 끝은 봐야지.
이 사냥터만 털면 된다.
그러던 중 한 혈맹의 유저가 그녀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제공했다.
그냥은 못 이긴다고. 그러니까 캐시 샵에 파는 빛나는 용사의 장비 패키지라도 사보는 건 어떠냐고.
그녀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 유저가 뼛속까지 과금 유저라는 걸 몰랐다.
빛나는 용사의 장비 패키지. 10묶음 가격 119900원. 100원을 깎은 악랄한 가격에 그녀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구매를 했다.
여기서 두 번째 문제가 발생했다.
그녀는 레인보우 슬라임이라는 독특한 존재를 데리고 있다.
레인보우 슬라임은 주기적으로 그녀에게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주는 편이었고.
그렇게 첫 박스에서 그녀는 무려 0.000007% 확률의 최상위 특수 아이템을 손에 넣고 말았다.
보통 인간들이 수천만 원을 박아야 겨우 먹는 아이템인 만큼 그야말로 그녀의 전투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더 상위 던전에 가서 그것들을 털어버리는 데에 성공했다.
다행히 그곳은 통제구역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레벨을 올린 그녀는 초반 사냥터의 입구를 틀어막고 있던 악질 혈맹원들보다 더 강해졌고, 그들을 죽이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 숙제대로 퀘스트를 깨기 위해 사냥을 진행했다.
하지만. 혈맹이라는 단체는 보통 혈맹원이 당하면 눈이 돌아가서 떼거리로 몰려오는 습성을 많이 지니고 있다.
당연 사냥 중이던 에반젤린은 갑작스런 대규모 다구리에 당황했고 비명횡사를 당했다.
나중에 마무리 지을 두 번째 광고를 위해서 퀘스트를 깨야 하는데. 왜 자꾸 방해하는 거야.
급기야 그들은 그녀가 부활하는 지역까지 대기하고 있다가 무한 PK를 하기 시작했고 그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또다시 과금을 해 그들에게서 도망쳤다.
그러던 중 그녀와 충돌한 혈맹과 적대적인 한 혈맹의 도움을 받았고 그들의 혈맹에 가입하는 데에 성공해 도움을 받았다.
그래. 여기서 멈췄다면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 중인 두 혈맹은 눈이 돌아간 것마냥 미친 듯이 싸워대기 시작했고 에반젤린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광고 숙제를 위해 더욱 과금을 지르게 되었다.
그래. 잘 나오니까.
좀만 하면 되겠지.
아니었다. 이 망할 확률은 가히 살인적이었고. 그래도 나오겠지. 하면서 지른 패키지가 시원하게 망해버리자 눈이 돌아가 버렸다.
자신의 통장을 열고 잔고를 확인한 그녀는 이 정도면 광고비로 충당이 가능하다. 그래. 광고비까지만 쓰고 다시는 이런 광고 받지 말자.
그렇게 그녀는 수렁에 빠져들어 갔다.
광고비가 탕진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문제는 이 패키지 시스템에 독특할 정도로 애매한 구간마다 있는 천장 시스템 때문에 매몰 비용이 아깝다는 생각이 계속 들게끔 충동질했다.
그래. 조금 손해 봤다고 생각하자…… 아빠한테 혼나긴 하겠지만 약속을 못 지키는 건 아빠와 가족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괴롭히던 상대 혈맹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모두 즐겁자고 하는 게임에 이런 악질 같은 짓거리를 저지르다니.
그렇다고 현실 PK를 후려갈길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당하고 못사는 건 데이비를 닮은 그녀였다.
에반젤린은 자신의 돈을 조금 더 투자했다.
싸움은 점점 커졌고, 에반젤린은 이미 본래 의도까지 잃어버린 채 저도 모르게 점점 많은 돈을 질렀다.
장비, 액세서리, 특수장비. 무기. 그 외에 변신아이템, 탈것. 추가장비, 보석, 강화석, 방어석…….
가히 이 게임은 경이적일 정도로 많은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하나 개방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게 했다.
당하면 되돌려준다는 생각이 그녀를 점점 강하게 만들었고 어느새 자신의 혈맹원이 당했다 하면 다른 이들과 같이 눈이 돌아가서 같이 그 적대 혈맹을 박살 내버리는 시점에 이르렀다.
단순히 돈만 넣는 게 아닌 컨트롤까지 겸비한 탓에 그녀의 무력은 점차 높아져만 갔고 어느새 상대 혈맹에서도 만났다 하면 식겁하는 행동대장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한 달 동안 그녀는 무려 억 단위라는 돈을 쏟아부은 후였다.
문제는 자신이 얼마를 썼는지 전혀 감을 못 잡게끔 명세서 같은 것이 따로 고지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그 게임 내에서 에반젤린의 닉네임. 토끼공주는 가히 살인적인 존재가 되어있었다.
방송을 하지 않을 때 그녀는 틈만 나면 밀어붙였고 그녀의 혈맹원들과 점차 친숙해지면서 아저씨, 언니 하는 사이까지 되어버렸다.
그리고 대망의 고지서가 날아든 날.
에반젤린은 처음으로 거품을 물고 기절하는 경험을 체험했다.
기겁한 채로 게임을 곧바로 삭제해버리고 침대에 이불을 덮어쓰고 벌벌 떨던 그녀는 생각했다.
미쳤지. 완전히 미친 게 틀림없지.
이건 반드시 숨겨야 한다.
다행히 그녀 개인 카드를 쓰는 만큼 따로 그녀의 돈을 멋대로 감시하는 이는 없었다는 게 다행이었을까.
만약 다른 카드를 썼다면 바로 알하자드가 눈치를 챘을 터이고 바로 데이비가 알았을 테지만 이 카드는 그녀가 따로 사생활을 즐기기 위해 만든 카드였기에 그것이 쉬이 알려지진 않았다.
재빨리 자신의 통장을 털어 돈을 채워 넣은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모든 수를 사용하여 그것을 은폐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이 사라지는 듯했고, 처음에 걱정하던 에반젤린도 이제는 괜찮겠거니 하던 참이었다.
비록 돈을 엄청 쓰긴 했지만, 데이비가 혹여 나중에 돈이 부족하지 않게끔 그녀의 통장에 엄청난 돈을 넣어둔 전적이 있었기에 고지서가 밀리는 최악의 수는 피했다.
아니 이럴 줄 알았으면 한도가 있는 카드로 만들걸.
이렇게 쓸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들키는 것도 참 우연이었다.
복잡한 사태 이후 그녀가 걱정되어 찾아온 페르세르크가 그녀를 데리고 가기 위해 그녀의 레어를 찾았을 때.
그녀는 한창 자신의 캐릭터를 판매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불법이지만. 이런 거래가 성행하니까 조금 낮은 가격이라도 얼른 팔아치우라고. 네 계정 정도면 원금 회수는 할 수 있으니까 일단 더 늦기 전에 해결하자고.
탄식을 금치 못하는 절제와 시우의 도움을 받아 이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한창 핵과금을 준비 중인 한 핵과금 유저가 그녀의 계정을 3억 언저리에 구매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쳐서 급히 팔고 있던 참이었다.
본래라면 10분의 1도 못 건져야 정상인데. 레인보우 슬라임 덕에 미친 운빨을 타서 3억이되 그 수배. 수십 배 되는 스펙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가.
구매하는 입장에선 3억을 써도 반절도 못 올라간다는 사실을 잘 아는 이였고 빠른 거래를 원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페르세르크의 시야에는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그녀의 토끼공주 캐릭터를 보며 게임을 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게임, 그래. 좋아할 수 있지.
페르세르크는 딸아이가 열중하는 게임을 그저 말없이 부드럽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런데. 게임의 타이틀을 확인한 순간 섬뜩한 생각이 든 그녀가 물었다.
“에반젤린. 네 캐릭터니?”
“네!”
에반젤린은 위기도 눈치채지 못하고 원금을 대부분 회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긴장이 풀린 것도 사실이었다.
“비싸 보이네? 이건 무슨 장비인 게야?”
“아. 엄마! 잠깐만요! 이 사람한테 금방 팔구요!”
“오호…… 가만히 서 있는데 날개도 나오는구나.”
“그쵸? 이게 사람들이 뽑으려 하면 수천만 원은 우습게 질러야 한데요, 뽑으려고 내가 200…….”
말을 하던 에반젤린이 흠칫 굳어 고개를 돌린다.
캐릭터를 구매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채팅을 올리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치 귀신처럼 싸늘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페르세르크의 시선 때문이었다.
“이상하구나, 네 아빠한테 듣기로는 이 게임…… 돈을 쏟아붓는 만큼 강해진다 했을진대……. 구매 가격이 3억? 저 치가 미친 건 아닐 테고.”
“어…… 엄마 그러니까요…….”
“방금 이거 뽑으려고 200…… 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이 엄마가 잘못 알고 있는게야? 200원은 아닌 거 같은데…… 설마 200만 원?”
부드럽게 웃는데.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조졌다!
식은땀이 미친 듯이 흘러내린다.
“에반젤린 올 라운. 이거 얼마 쓴 건지 당장 말해.”
돈 쓰는 거로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섬뜩한 생각이 든 페르세르크는 곧바로 추궁하듯 물었고 에반젤린은 우물쭈물하며 아무 대답도 못 한 채 벌벌 떨어야만 했다.
이에 페르세르크는 곧바로 방을 나선 뒤 곧바로 현아에게 전화를 걸었고, 어렵지 않게 협조를 받아내 그녀가 얼마를 사용했는지 깨달았다.
당연히 현아 또한 에반젤린이 얼마를 썼는지 깨닫자마자 기겁했다.
게임에 돈 쓰는 건 그래, 괜찮은데. 자기 역량을 아득히 넘는 과금은 무모한 짓이다.
눈이 뒤집혀서 다시 에반젤린의 방을 찾았을 때. 겁에질린 에반젤린은 대뜸 도망친 후였다.
데이비는 미식연구회가 고자질했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우연찮게 발견한 셈이었다.
이후 페르세르크는 메가로드리아를 불러 온 뒤 날아올랐다.
이 겁도 없는 딸아이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버리기 위해서.
* * *
“나 어떻게 해! 나 어떻게 해!!”
발을 동동 구르는 에반젤린이 벌벌 떨었다.
-저기요. 거래하시다가 어디 가신 거예요.
-안 파세요?
-저기요?
이 사람이 진짜…… 지금 남 속도 모르고…….
스마트폰이 위치 탐색이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그녀가 허겁지겁 스마트폰의 전원을 꺼버렸지만 떨림이 가라앉지 않는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것일까.
도움이 필요하다. 지금 잡히면 페르세르크는 물론, 데이비나 일리나. 심지어 에이리아에게까지 호되게 혼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뿐일까.
평소에 착하기 그지없는 초단이나 에반젤린을 생각보다 귀여워해 주는 비화마저 그녀의 다리를 분질러 놓으려 들지 않을까.
“도움이 필요해…… 누군가의 도움이…….”
그녀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급히 그녀의 도주에 도움을 줄 사람이 필요했다. 시간을 벌고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 되팔면 원금을 되찾을 수 있다고.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자신이 생각해도 가능성이 낮은 행동거지지만 너무 겁이 난 그녀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알하자드? 안된다. 인자한 그였지만 그는 이렇게 무분별하게 감당하지 못할 플렉스에 제법 단호한 편이다.
그렇다면 누구? 미식연구회?
믿을 걸 믿어야지. 그 배신자 집단을 믿었다간 정신 차리고 보면 온몸을 꽁꽁 묶인 채 끌려가리라.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녀는 흠칫 놀라 눈을 떴다.
그래. 그 사람이 있다!
그녀는 소리 없이 레어로 돌아갔고, 레어의 힘을 이용해 티오니스로 다시 도약했다.
페르세르크는 지구를 찾고 있을 테니 지금은 티오니스로 튀어야 한다!
그 후 그녀는 반 현신상태로 등 뒤 허공에서 거대한 날개를 뽑아냈고 미친 듯이 날아올랐다.
그리 멀지 않다.
전에도 가봤지 않나.
미친 듯이 날아간 그녀는 이내 거대한 황궁을 발견하고 황급히 낙하했다.
“누…… 누구냐! 정체를 밝…… 여……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그…… 급해요. 기사님들!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외삼촌!!”
당황한 황실기사들은 에반젤린의 울먹거림에 급히 그녀를 안내했다.
이미 몇 차례 이런 식으로 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황제는 늘 바쁘다.
그렇기에 이렇게 다짜고짜 만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폐하. 에반젤린 올 라운 공녀가 들었습니다만…… 어찌할까요.”
“허어…… 지금은 국정 회의 중일세! 눈치도 없는가!”
제국의 대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반젤린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고 기사들은 귀여운 공녀가 저러고 있는 모습에 괜히 마음이 쓰렸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 급하게 날아와 황제를 찾는단 말인가.
그때였다.
“죽고 싶은가. 대신. 지금 내 손녀가 찾아왔는데. 뭐라?”
“그…… 그게 폐하…… 용서하여주시옵소서!!”
겁에 질린 대신의 목소리와 함께 엄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들라 하여라.”
근엄한 목소리.
이윽고 문이 열리자 에반젤린은 옥좌에 앉은 린디스 제국의 황제. 데오르트 알 린디스와 그의 곁에 있는 알버스 황태자를 볼 수 있었다.
“하…… 할아부지……. 외삼촌…….”
근엄한 얼굴로 에반젤린을 노려보던 데오르트 황제가 침묵한다.
그리고.
“아이고 우리 귀여운 손녀. 어서 오려무나.”
양손을 펼치며 환하게 웃었고 에반젤린은 엉엉 울며 그대로 뛰어가 그의 품에 안겼다.
비록 에이리아와 피가 이어지진 않았지만, 에반젤린이 다리안과 함께 어떤 존재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그는 귀여운 손녀를 정말로 아끼기로 유명했다.
“그래. 그래. 우리 손녀. 무슨 일로 예까지 온 게야. 할아비가 보고 싶어 온 게냐?”
방금까지 어마어마한 위압을 내뿜던 황제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모습이라 대신들이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알버스가 뒤에서 쓰읍! 소리를 내며 눈치를 주자 눈치껏 일어나 퇴장한다.
“폐하. 말은 똑바로 하셔야지요. 외삼촌을 보러 온 겝니다.”
“닥치거라 멍청한 놈! 이나라가 짐의 나라이거늘, 어찌 에반젤린이 너 같은 반푼이 놈을 만나러 왔다 생각하는 게냐!”
“폐하…….”
“할아부지이이!”
더욱 품에 파고들어 엉엉 우는 모습에 데오르트 황제가 눈을 부릅떴다.
“누구냐. 누가 우리 손녀를 이렇게 무서워하게 만든 거야. 누구냐! 감히 어떤 놈이!!!!”
엄마 아빠가요.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자신에게 유별날 정도로 잘해주시는 외할아버지로 인해 그녀의 긴장이 너무 풀려버린 게 문제였다.
그렇게 그녀는 한참 동안 데오르트 황제의 품에 안겨 울었다.
두 사람은 몰랐다. 소식을 전해 들은 에이리아마저 뿔이 잔뜩 난 채로 에반젤린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