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71화
에반젤린은 울먹거리며 눈앞에 놓인 과자를 입안에 쑤셔 넣었다.
“자자. 천천히 먹으려무나. 껄껄, 그래 맛이 있느냐.”
“네에.”
힘없이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데오르트 황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데오르트 황제에게 있어서 에반젤린은 사실 피 한 방울 섞인 적 없는 남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의 혈육인 에이리아에게서 태어난 아이도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그와 직접적인 혈육은 다리안 단 하나뿐이었다.
그렇기에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딸아이의 자식이라 해도. 결국, 그의 혈육은 에이리아가 낳은 다리안뿐이라고.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에이리아가 피가 이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사실 에반젤린은 티오니스의 귀족문화로 볼 때 어떤 쪽에서든 취급을 제대로 받기 어려웠다.
단순히 데이비가 시녀와 놀아나 아이를 낳아서 사생아로서 데리고 와도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는 마당에 사생아도 아니고 입양?
물론, 이런 이야기에 대해 자세히 아는 이는 극히 드물지만 제대로 알려지기만 해도 에반젤린은 참 피곤한 꼬리표를 뗄 수 없을 터였다.
실제로 에반젤린이 데이비의 피가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낸 어떤 한 라운의 귀족자제가 그녀에게 함부로 말을 내뱉었다가 어린 나이에 머리털이 하나도 남지 않고 증발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그렇다면 데오르트 황제에게 있어서 에반젤린은 그저 입양아인가.
미묘한 감이 없잖아 있다.
애초에 청단이와 홍단이부터가 기본적인 개념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는 것을.
“자자, 얼마든지 있으니 마음껏 먹거라. 좋아하는 딸기를 섞은 우유도 있단다.”
“아!”
눈을 반짝거리는 귀여운 손녀를 보며 데오르트 황제가 조심스레 물었다.
“한데. 대체 무슨 일이더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이리 할애비를 찾아온 것이야.”
어떻게 말해야 에반젤린이 상처받지 않을까. 고민 끝에 그가 질문을 던지자 에반젤린이 과자를 먹던 손을 우뚝 멈추고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아…… 아빠한테서 도망쳤어요…… 지금 잡히면 저 죽을지도 몰라요…….”
“네 애비가?”
“…….”
에반젤린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린다.
데오르트 알 린디스는 금방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에반젤린이 어떤 사고를 쳤고, 혼날까 봐 여기로 도망친 것이다. 참 맹랑하기 그지없다.
사위 놈이 또라이에 싸이코 같은 놈이라고 평이 자자하긴 해도 아무 이유 없이 자식을 혼내는 그런 무뢰배는 절대 아닐 터.
그렇다면…….
할아버지로서 손녀의 앞길을 위해 여기선 따끔하게…….
“걱정 말려무나. 제부가 무슨 짓을 하건 이 외삼촌이 지켜줄 터이니.”
“이…… 이놈이?!”
“폐하. 에린이를 그에게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허! 어림도 없는 소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손녀를 감히 누가 혼낸단 말인가!”
다른 황족들이 들었다면 게거품을 물며 각혈했을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였다.
이게 다 귀여운 손녀가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민에 빠졌다.
“한데. 데이비 그놈은 네가 여기 있는 것을 알고 있느냐?”
“아뇨…… 아직 몰라요. 하지만 금방 들킬 거에요…….”
“그래. 아무 걱정 말고 푹 쉬어라. 기왕 온 김에 며칠 정도 머무르다 가도 되겠구나.”
그의 제안에 에반젤린은 불안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그녀를 숨겨주고 도와줄 수 있는 건 그뿐이라는 생각뿐이었으니 말이다.
* * *
단순히 데이비뿐만이 아니라 페르세르크나 일리나까지 그녀를 찾고 있다.
에반젤린이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건 맞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아이를 몰아붙이면 쓰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알버스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선 에린이는 황궁 내에서 머무르게 하라. 다만 눈에 띄면 문제가 생기니 태양의 별관 쪽으로.”
“폐하. 그곳은 린디스 제국의 황족들만이 출입이 가능한…….”
“에반젤린은 짐의 피를 이어받은 손녀다. 하면 자격은 충분하겠지.”
“알겠습니다.”
다른 제국의 대신들이 들었으면 기겁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였다.
“괜히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으니 시중을 드는 이들은 모두 입이 무겁고 충성심이 깊은 이들로 배치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사정이야 뭐가 됐건 손녀가 도와달라고 와서 매달리는데 도와줘야지.
“하지만 폐하. 그것만으로 괜찮겠습니까.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그의 추적능력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지라…….”
“걱정 마라. 그곳은 린디스 제국 초기부터 오랜 시간 쌓여온 수많은 방어 마법들로 가득하니.”
제아무리 괴물 같은 사위라도 일부러 태양의 별관을 들쑤실 명분이 없거니와 들쑤신다 해도 에반젤린을 피신시킬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을 터였다.
“허어…… 제국 초기부터 황족의 피신처로써 이름을 알려온 태양의 별관이 단순히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니 웃긴 일입니다.”
“후우…… 어쩌겠느냐. 그놈이 그런 것을.”
뭐라 반박할 거리조차 없는 최고의 표현이 아닐까.
“폐하. 하인스 영지에서 데이비 올 라운 대공이 들었습니다.”
그때였다.
너무도 이른 시간에 찾아온 데이비의 소식에 데오르트와 알버스는 서로 바라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알버스. 그놈은 내가 잡아놓을 테니 얼른 에린을 그곳으로 피신시켜라. 그리고 전에 실험했던 은폐 장막도 같이 가동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뒷문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알버스를 확인한 데오르트는 짐짓 점잖을 떨며 홍차가 담긴 찻잔을 건드렸다.
그리고는 곧 들어온 데이비를 보며 느긋한 표정으로 손짓을 했다.
“오랜만이로군. 일단 앉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아직 데이비는 에반젤린이 이곳에 있다고 여겼기에 찾아온 건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괜한 의심을 줄 필요는 없었다.
“황족들에게 납품이 되는 고급 차라고 할 수 있지. 뭐, 이보다 더 고급 품종을 엘프들을 통해 받고는 있을 테지만, 한번 들어보게.”
“차향이 좋네요.”
조용히 차를 음미하는 데이비의 시선이 찻잔을 향해 내리깔린다.
“그래. 에이리아는 잘 지내고 있는가.”
시간을 끌어야 한다. 혹여 일이 틀어져 그가 의심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제국인데.
티오니스 최강국 중 하나인데.
그렇게 쉽게 황실 보안이 뚫려서야 쓸까.
단순히 에반젤린을 그로부터 숨겨주는 것도 이유지만 자존심에서 물러날 수가 없었다.
“예, 아픈 곳도 없고 건강하게 잘 있습니다. 본래라면 함께 왔어야겠지만…….”
“되었네. 바쁜 와중에 이리 찾아오는 게 쉬운가.”
“가족끼리 만나지 못하면 그것도 복잡한 일이지요. 그보다…….”
“아참. 실은 하인스 아카데미에 이번에 짐의 손녀가 하나 입학할 예정인데.”
“……청탁은 안 받습니다.”
“허허, 누가 청탁이라도 한다고 그랬나. 실은 그 손녀가 조금 성격이 왈가닥이라서 말이네. 마치 물가에 내놓은 것마냥 불안하기 그지없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브로치 하나를 데이비에게 건넸다.
“별건 아닐세. 혹시 나중에 그 아이가 하인스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위치에 걸맞는 모습으로 성장하게 되면 그것을 건네주게.”
“이건 뭡니까?”
“뭐긴. 제 아비의 유품이지. 못난 놈…… 제 아비보다 먼저 가다니…….”
괜히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신다.
“폐하.”
“사인은 사고사였네. 태어난 지 3년도 안 된 핏덩이를 놓고 제 부인과 유랑을 갔다가 산사태에 휘말렸다더군.”
한 치의 틈도 주지 않는다.
데오르트 알 린디스는 데이비가 에반젤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도록 계속해서 화제를 강제로 돌렸다.
그럴수록 데이비의 손가락은 점점 초조하게 찻잔을 두드렸다.
“황제로 살다 보면 참 적적한 법일세. 이런 이야기도 어디 가서 함부로 할 수 없지. 그나마 알버스 녀석이 들어주긴 한다만. 그놈은 이제 머리가 좀 굵었다고 상당히 뻔뻔해져서 말이야. 사위인 자네에게 털어놓는 것도 조금 다른 느낌이로군.”
껄껄 웃으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폐하?”
“기왕 온 김에 술이나 한잔 받게. 뭐. 음주 후 말을 몰면 안 되지만 자네는 괜찮겠지.”
“…….”
데이비의 눈이 가늘게 뜨여졌다.
“폐하. 혹시…….”
“아! 실은 숨겨놓은 이 술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거든, 자네. 이걸 아는가. 블루봉 500년산이네. 정말 구하기 힘든 것이지.”
동시에 데이비의 눈이 반짝였다.
“혹시 맛이라도 보겠나?”
“그…… 그럼 한 잔만…….”
‘흥, 어리석은 애송이 놈. 아직 네놈은 멀었다.’
속으로 낄낄대며 그가 비싼 와인을 꺼내 들었다. 비록 정말로 아껴온 물건이었기에 아쉽긴 하지만, 사위인 데이비와 함께 한잔하는 거라면 조금 아쉬워도 마냥 손해는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지금은 그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그렇게 생각하며 와인에 정신이 팔린 데이비를 속으로 비웃고 있던 참이었다.
“좋습니다. 감사히 잔을 받들겠습니다. 그 후에 에반젤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빙그레 웃는 그를 보며 데오르트 황제의 표정이 한순간 팍 찡그려졌다.
“에잉. 못난 놈. 이미 알고 있었나?”
“그렇죠. 이곳으로 왔다는 건 이미 보고를 전해 들었습니다.”
“미안하지만 에린이는 이곳을 거쳐서 더 북쪽으로 향했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네만. 자네. 대체 딸아이를 얼마나 몰아붙였기에 그렇게 겁에 질리게 한 것인가.”
“겁에 질려야지요. 아주 혼을 낼 생각입니다.”
그가 손을 휘젓자 허공에서 공간이 비틀리더니 하얀 기둥이 쿵!! 하며 떨어졌다.
“설마 그걸로…….”
“괜찮습니다. 이 정신 나간 딸아이 훈육하는 데엔 이것만 한 게 없을 테니까요.”
“어지간히 미친놈이로군. 좋네. 정보가 좀 더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걸 듣고 싶으면 짐의 이야기에 어울려야 할걸세.”
그의 말에 데이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어차피 시간이 지체될 뿐 에반젤린이 받을 미래는 변하지 않을 테니.
이후 데오르트 황제는 술잔에 와인을 따르며 자신의 이야기와 먼저 떠난 아들딸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자네는 참…… 크리아네스 올 라운 그놈의 아들치고는 아주 다르군. 어떻게 그놈의 밑에서 자네 같은 올곧은 능구렁이가 나왔는지…….”
“그렇습니까?”
“그래.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다만, 참…… 먼저 간 아들놈이 떠오르다니…….”
단순히 에반젤린에 대한 이야기에서 화제를 돌리려 했던 데오르트였지만 분위기 때문인지. 아무 말이나 하다 보니 얻어걸린 것인지.
점점 그런 것보다도 단순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짙어지고 있었다.
“어휴…… 바사스 놈이 자네의 10분의 1만 닮았어도 좋았을 것을…… 아들놈이나 손자놈이나 망나니가 따로 없으니…….”
* * *
태양의 별관.
에반젤린은 백색으로 화려하며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궁궐을 보며 옅게 탄성을 흘렸다.
황족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으로 일반적인 방계황족에게도 입장이 허가되지 않는 공간이라고 했다.
“이곳은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 제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높은 곳이라고 하지요.”
태양의 별관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주는 것은 검은 정장을 입은 노신사였다.
“그런데 이곳은…….”
“예. 본래라면 황족 이외에 충성심인 높은 관리인 몇몇을 제외하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린디스의 황족이 아닌데요.”
“허허. 폐하께서 윤허하셨습니다.”
“그래도 되는 거예요?”
“안될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나라의 법도가 곧 폐하이신데.”
참 미묘하지만, 절대왕정의 국가에 딴지를 걸어봐야 의미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내궁까지 안내해드릴 수 없는 점 부디 용서하시기를.”
“괜찮아요. 여기 있으면 괜찮은 거겠죠?”
에반젤린은 혹여나 들킬까 봐 손톱을 물어뜯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곳은 아무리 데이비 올 라운 대공이라 할지라도 명분 없이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허니 걱정 마십시오. 공녀님. 아. 그리고 의복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노신사가 손뼉을 치자 몇몇의 시녀들이 들어왔다. 그녀들의 손에는 적당히 평범한 드레스가 쥐어져 있었다.
“공녀님의 복장은 현재 이곳에서 너무 눈에 띕니다. 혹여나 정보가 새어나갈 수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집안에서 편하게 입고 있어도 티오니스와 지구의 문화는 다르다. 그렇기에 현재 에반젤린의 옷은 수수해 보여도 이곳에선 조금 괴리감이 드는 복장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드시지요. 공녀님. 아, 그리고 수행할 인원들을……”
“괜찮아요. 제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어요. 필요하면 부를 테니 모두 돌아가셔도 괜찮아요.”
“하지만…….”
“이건 제 고집 때문에 생긴일이잖아요? 그러니 더 이상의 폐는 사양할게요.”
에반젤린이 시녀들을 따라 들어가자 노신사는 허허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따뜻한 시선으로 에반젤린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부디. 편안하게 즐기시기를.”
이곳에서 감히 그녀를 해할 존재는 없을 테니까.
다만 마냥 그렇지 않다는 건 뒤늦게야 알 수밖에 없었다.
* * *
황족 벨류아드 알 린디스.
그는 귀족파에서 지지하는 황족인 바사스 알 린디스의 아들로 린디스 제국의 황족이기도 했다.
물론, 황족이라곤 하나 곧 황궁을 떠나야 하는 운명이기도 했다.
“저하. 여기 들어가도 괜찮은 겁니까?”
“무슨 상관이야. 내궁도 아니고 고작 외곽인데. 태양의 별관이 황족만 출입이 가능하다곤 하지만 지금까지 문제없었잖아? 그리고 너희들은 내게 충성을 다하는 심복이야. 심복 한둘 정도 대동하는 거야 뭐…….”
“헤헤. 감사합니다요.”
“저희는 언제든 충성을 다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습죠.”
들키면 경을 칠일이긴 하다.
하지만 이나라의 황제이자 벨류아드의 할아버지인 데오르트 황제는 사실 몇 년간 이곳에 관심을 두지 않은 지 꽤 되었다.
지금까지 거의 들킨 적도 없거니와 들키더라도 황족의 권한을 이용해 그들의 입을 막으면 될 일이다.
사실 황자 바사스 알 린디스의 아들인 벨류아드는 린디스 제국내에서도 유명한 망나니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망나니라는 생각을 단연코 해본 적이 없었다.
이게 정상이잖아. 문제없잖아.
그가 가진 생각이었다.
실제로 현재 그와 함께 있는 이들은 질이 나쁜 이들로 벨류아드가 야행을 나가 만난 용병 출신의 사내들이기도 했다.
겉으로는 멀쩡한 인재 등용이랍시고 그들을 가까이 둔 벨류아드는 이미 몇 차례 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제 수하들과 함께 술을 마신 전적이 있었다.
“참. 하늘도 무심하십니다. 폐하께서도 너무하시지요. 저하 같은 총명하고 영특한 분을 어찌 그리 멀리하시는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게 다 바사스 황자께서 큰일을 도모하려 하시는데 이해해주지 않으시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문제를 대물림하여 벨류아드 저하께 고스란히 연좌한다는 건 저로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허. 그래도 이나라의 폐하이시다. 입을 조심히 하거라.”
“낄낄. 예, 명심하겠습니다요.”
겉으론 타박하지만 벨류아드도 사실 같은 생각이었다.
심복들은 익숙하게 벨류아드에게 아부를 떨며 그의 신임을 더욱 세웠다.
본인만 인정하지 않는 망나니 기질은 상관없었다. 그의 신임만 얻는다면 그들은 평생을 놀고먹을 수 있는 권세와 돈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쯧…….”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별거 아니다. 요즘 궁에 수인 연놈들이 보이는 게 영 달갑지 않아.”
“쉬…… 쉿! 조심하셔야 합니다. 저하. 혹여라도 그 이야기가 세어나가면 문제가 될 소지가 있습니다요.”
“그래…… 그렇겠지. 지금은 할아버지의 시대이니. 하…… 황태자로서 아버지가 발탁되었어야 했거늘…….”
바사스와 알버스는 유명한 정적 관계이기도 했다.
사실 그렇기에 벨류아드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알버스 황태자가 아닌 그의 부친인 바사스가 황태자였다면 벨류아드 또한 황제의 자리에 오를 자격을 얻었을 텐데.
바사스 알 린디스는 술에 취하면 간혹 그런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그리고, 황제라는 자리에 욕심이 있는 벨류아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너희들은 황제의 자리가 좋아 보이느냐?”
“어…… 어어! 저하. 말씀을 조심하셔야 합니다요!”
“되었다. 여기 누가 온다고 그러느냐. 나는 말이다. 저 황좌라는 게 참 탐이 난다.”
“끄응…….”
심복들은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하는 벨류아드가 혹여 문제를 일으킬까 두려워했지만 그를 말리지 못했다.
괜히 말리다가 신임을 잃는 순간 그들의 말로는 뻔했으니 말이다.
“황좌에 오르면 모든 것이 나의 것이겠지. 이 황궁의 모든 것이. 금은보화. 산해진미. 그리고 이 황궁의 여인들까지도.”
대놓고 위험한 발언을 하지만 더 이상 말릴 수 없음을 깨달은 그들은 이 이야기를 듣는 이가 없겠거니 생각하며 조심스레 맞장구쳤다.
“물론, 벨류아드 저하께서 황좌에 오르신다면 린디스 제국은 태평성대를 누리겠지요. 더없이 발전하고, 강국으로써 발돋움 할 겁니다.”
“그렇지요.”
“그래…… 그래. 지금의 제국은 이상해. 비천한 수인 연놈들을 대우해주는 것도 웃기지만 그 수인에게서 태어난 비천한 황녀가 시집을 간 하인스 영지에 너무 고개를 숙이고 있지.”
“그…… 그렇습니까요.”
“물론, 하인스의 성자가 대단한 존재라는 건 알고 있다만, 그래도 우리는 제국이 아닌가. 제국의 황제가 고작해야 일개 왕국의 대공에게 겁을 먹다니. 쯧쯧…….”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가 잔을 들어 올렸다.
“에잇. 되었다. 이런 이야기는 술맛 떨어진다. 술이나 들 거라. 적당히 마시고 오늘은 계집들이나 원 없이 품도록 하자꾸나.”
“예, 저하. 제가 아주 물이 좋은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낄낄거리며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킨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취기가 상당히 오른 것이다.
그러던 중 그는 문득 멀리 보이는 정원에 앉아 꽃을 구경하고 있는 작은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음?”
“저하?”
“가만히 있어 보거라.”
그는 흐릿한 시야로 꽃밭을 구경하고 있는 검은 머리의 소녀를 조용히 시야에 담았다.
그러던 중 그녀의 머리 위에 돋아난 작은 일직선의 뿔 한 쌍을 보며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은 황족이 오는 곳이거늘. 저년은 무엇이란 말인가.”
“예. 아…… 글쎄요. 저희들도 처음 보는…….”
“뻔하지. 폐하의 사생아겠지. 괜히 정치적으로 시끄러울까 봐 이곳에 데려다 놓은 것일 테고.”
그가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심복들이 그를 부축했다.
“놓아라. 귀찮다.”
“저하.”
심복들은 괜히 그가 그녀와 엮이다가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기는 건 아닌가 염려했다.
하지만 술에 취한 벨류아드는 그런 건 신경쓰지도 않았다.
“여봐라.”
이윽고 그가 에반젤린에게 말을 걸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벨류아드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아름답다. 너무도 예쁘다.
수인을 비천하게 여기는 벨류아드라 말했지만, 첫눈에 홀딱 빠진다는 게 이런 것일까.
“무슨 일이시죠?”
에반젤린이 조심스레 되묻자 벨류아드는 딸꾹질을 하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놓치기 싫다. 저것은 황족일까. 그렇다면 손대기 어렵겠지만.
“너는 린디스의 황족이더냐? 처음 보는 얼굴이구나.”
그의 물음에 에반젤린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뇨. 황족은 아니에요. 황태자님의 은혜를 입어 잠시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어요. 곧 돌아갈 거에요.”
에반젤린은 괜히 외삼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그의 호칭을 부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데오르트 황제의 이름을 거론하기에도 미묘한 부분이 있기에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벨류아드의 눈에 순간 기쁨이 서린다.
“호오…… 황태자께서? 하면 황족이 아닌데도 이곳에 있었다는 소리로구나.”
“그렇죠?”
“말을 조심하시오! 이분이 뉘신 줄 알고!”
황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심복들은 호가호위를 하듯 에반젤린에게 소리쳤다.
귀족가의 영애라도 지금의 에반젤린 같은 말투는 충분히 명분을 세울 수 있는 정도라 판단한 그들이었다.
“누구신데요?”
“이분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되었다. 어린 것이 뭘 알겠느냐.”
나이 차이도 거의 안 나지만 벨류아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는 이나라의 황손, 벨류아드 알 린디스다.”
“에린이라고 해요.”
에반젤린이 담담하게 대답하자 그가 낄낄 웃었다.
성도 없는 평민이었구나. 하면 일이 더 편해지지.
그의 심복도 같은 생각인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짓는다.
황제도 아니고 황태자라면 굳이 쫄 것도 없는 일이다. 벨류아드의 부친이 가진 힘이 황태자와 비슷할 터. 수인 평민을 이곳에 들여온 시점에서 명분은 이쪽이 우세하다.
그는 손짓을 해 그녀를 부른 다음 술병을 내밀었다.
“참 마음에 드는구나. 수인족들은 전부 냄새나고 더러운 것들이라 여겼건만. 이런 보석도 있었어.”
“뭐라고요?”
“물론 나는 이 신성한 태양의 별관에 수인족이 있는 것도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
“이보세요. 린디스 제국에 대해 제가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수인 천대는 중벌대상 아닌가요?”
그 말에 심복이 테이블을 쾅! 친다.
“이년이 그래도!! 네년 같은 평민이 황태자 저하의 은혜를 받아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로구나!”
“그러는 그쪽은 내가 누군지 알고 함부로 말하세요?”
에반젤린의 인상이 찡그려진다.
아아. 인상이 찡그려지는 것조차 예쁘구나. 너를 취하겠다. 너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
벨류아드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킥킥 웃었다.
“와서 한잔 따르거라.”
비어있는 술잔을 내밀며 그가 말했다.
조금만 이성적이었어도 조심스러웠을 테지만 이미 술이 들어간 벨류아드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에반젤린이 대외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모습을 알아보는 이 또한 없었다.
이윽고 에반젤린 성큼성큼 다가와 와인병을 손에 쥐자 그가 손을 뻗어 에반젤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참 곱구나. 여봐라. 네년은 지금 내게 두 가지 무례를 범했다. 첫째는 이나라의 황손인 내게 예우를 똑바로 표하지 못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감히 비천한 수인, 그것도 평민 따위가 이 신성한 태양의 별관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건 황태자께서…….”
“그래. 황태자 저하께서 허락하셨으니 아무도 막지 못했겠지. 하지만 내가 밖에서 입을 뻥끗하면? 네게 도움을 준 황태자께 누가 되지 않겠느냐.”
그가 사이하게 웃었다.
“하지만 네가 술을 따른다면 내 모든 것을 불문에 부치도록 하마, 그리고…… 어떠하냐. 내 것이 되어볼 생각은 없느냐. 그리한다면 내 너에게 모든 것을 줄 것이다.”
“모든 것?”
“그래그래. 나는 황손이라곤 하나 현재 황태자 저하는 황위를 물려받기엔 나이가 많지 즉 다음 대의 황손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 굉장히 위험한 이야기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술기운이 그를 더욱 용감하게 만들었다.
매번 그의 아버지 바사스가 조만간 황태자의 자리를 빼앗을 테니 다음 대의 황제는 황태자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가 될 것이라 하던 이야기를 듣곤 했다.
“네가 날 모시겠다면 후에 황위를 물려받을 때 너를 긴히 총애할 것이다. 산해진미에. 금은보화. 사치를 원 없이 부릴 수 있게 해주마.”
그의 말에 에반젤린은 담담하게 그를 시야에 담았다.
이윽고 벨류아드가 손을 놓았을 때.
에반젤린은 무감각한 얼굴로 와인병의 주둥이를 바닥으로 향하게 했다.
주르르륵…….
그러자 비싼 와인이 순식간에 정원에 쏟아진다.
평민이 그것도 그들이 한참 우습게 보는 수인이 이런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에 심복들이 득달같이 일어선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차가운 얼굴로 벨류아드를 향해 말했다.
“다른 나라에 이런 말이 있어요. 호부무견자.”
“음?”
“호랑이 아래 개새끼는 안 태어난다는 소리에요.”
에반젤린은 싸늘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그 말이 꼭 맞는 말은 아닌가 봐요.”
스릉!! 창!!!!
동시에 심복들이 그녀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얼굴만 반반한 평민 수인 년이 아주 겁이 없구나. 이런 발언은 네가 아무리 황태자 저하의 은혜를 입었다 할지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당장 저하께 머리를 조아려라.”
심복들의 말에 에반젤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난동부리면 아빠가 눈치챌 텐데…….”
그녀의 목소리에 짜증이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