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72화
린디스 제국에는 여러 황족들이 존재한다.
물론 황족이라 하여 다 같은 위세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데오르트 알 린디스의 휘하 자식은 다수 존재하지만, 황태자인 알버스에 버금가는 저력을 지닌 황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바사스 알 린디스.
황제파에 속하는 알버스와 달리 귀족파에 속하는 바사스는 오래도록 악연이 이어져 온 사이이기도 했다.
황위보다는 그 자리를 공고히 하여 린디스의 미래를 도모하는 알버스와 데오르트 황제로부터 하루빨리 황제 위를 이어받아 무력의 부강함을 꿈꾸는 바사스는 서로 간에 잘 맞지 않는 톱니이기도 했다.
서로 방식은 다르지만, 린디스를 위하는 건 진심이었다.
다만, 평화적인가. 혹은 패도적인가에 따라 달라질 뿐.
다만 바사스 알 린디스에게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망나니 아들인 벨류아드 알 린디스 때문이었다.
바사스는 알버스 황태자와 달리 굉장히 냉혹한 편이지만 그런 그조차 도저히 구제가 안될 정도로 게으르고 포악하며 잔인한 성정을 지닌 아들로 골머리를 앓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태어나길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고 그는 특별하며 언젠가 황제가 될거라는 선민사상을 주입받고 자란 그는 어릴 때부터 악한 성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아무리 수인의 대우가 좋지 않아도 길거리 한복판에서 수인을 죽이는 행동은 굉장히 어리석은 행동이다.
하지만 벨류아드는 그것을 해냈다.
아무리 정적이라고 해도 귀족파라고 해도 황제의 엄명을 무시할 정도로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곤란했다.
하지만. 벨류아드는 수인을 해치는 게 뭐가 나쁜 건지 전혀 이해를 못 하는 편이었다.
고르네오 남작은 이것을 두고 타인의 아픔에 쉬이 공감하지 못하는 성정이라 하였던가.
유별나게 아픔만 공감하지 못하는 그 행동거지로 인해 사고를 자꾸 치니 바사스는 그가 정계에 나타나기보다는 차라리 왈패들과 어울리며 황제의 시선 밖으로 돌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명령이다.
“저하?”
“저년을 제압해. 그리고 내 앞에 꿇려.”
섬뜩한 목소리로 말하는 벨류아드의 명령에 그의 심복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했고 이내 에반젤린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정이 많은 알버스 황태자가 데려온 존재라면 보나 마나 궁에서 일할 사람으로 데려온 것이겠지.
단순히 그가 반한 여자라곤 생각지 않았다.
알버스 황태자는 보기 드문 공처가로 부인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눈길을 주는 성정이 아닌 것으로 유명했다.
거기에 벨류아드의 명도 있고 감히 평민 따위가 황족에게 함부로 말한 명분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거리낄 것이 없었다.
“원망하지 마라. 수인. 이게 다 네년이 감히 벨류아드 님께 대든 벌이니.”
그말과 함께 심복 중 하나가 몸을 낮춘 채로 빠르게 그녀를 향해 덤벼들었다.
“최대한 힘 조절해서…….”
에반젤린이 긴장한 얼굴로 손을 파르르 떨었다. 그것을 본 사내는 에반젤린이 생각지도 못한 속도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와장창!!!!
“됐다. 힘 조절.”
보통 사람이라면 반응도 못할 속도로 접근했건만.
에반젤린이 휘두른 와인병은 가차 없이 사내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끄아아아악!!!”
마나로 강화된 와인병이 깨질 정도의 충격 때문인지 사내는 얼굴이 함몰된 듯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무…… 무슨?!”
심복 중 하나가 일격에 나가떨어지자 벨류아드가 벌떡 일어났다.
성품이 가벼운 사내일지라도 실력은 확실한 사내였다.
하지만 그런 그가 이렇게 쉽게 당해버렸으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이거 위험한 거 알죠?”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와인병의 깨진 부분을 들이밀며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 제가 막 날뛸 수 있는 입장이 아니거든요?”
“미, 미천한 수인 따위가!!”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 하시는데. 미안하지만 난 수인이 아니야.”
그녀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하면 마족이라도 된단 말이더냐?”
“마족? 마족이라…… 마족 봤어요?”
그녀의 물음에 벨류아드는 침묵했다.
과거 마족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그는 황궁에서 호의호식했을 뿐 그들과 마주한 적은 거의 없었다.
“안 봤으면 말을 하질 말아야지. 하아…… 내가 이게 뭐하는 짓인지…….”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됐고. 귀찮게 하지 말고 가세요.”
“웃기지 마라. 뭐 하는 거냐! 저년을 제압하지 않고!”
“하…… 하지만 저하!”
이미 동료가 순식간에 당해버린 것을 보자마자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심복이 우물쭈물하자 그는 거침없이 심복의 배를 걷어차 버렸다.
그리고는 쓰러진 그의 몸에 칼을 박아넣어 버렸다.
“커억!”
“쓸모없는 놈들! 좋다. 그렇다면 내게도 방법이 있다.”
그렇게 말한 벨류아드는 주머니에서 작은 호각 같은 것을 꺼냈다.
삐이이이이!!!!
고주파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본능적으로 그 소리에 에반젤린은 인상을 찡그렸지만 다른 이들은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다만 에반젤린을 제외한 이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하여 아무 일이 없는 것 또한 아니었다.
투두두두두두!!
철제 그리브가 바닥과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강렬하게 울려 퍼진다.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낸 린디스 제국 내의 기사들은 황족의 위험을 알리는 호각소리를 받고 급히 이곳으로 향했지만 현 상황을 보며 벙찐 표정을 지었다.
“뭣들 하느냐! 황족을 시해하려는 미친 여자다! 어서 제압해라!!”
“베…… 벨류아드 저하. 이…… 이게 무슨…….”
“에…… 에잇 뭣들 하느냐!! 어서 제압하래도!”
문제는 황실의 기사들 중 상당수가 에반젤린을 안다는 사실이었다.
벨류아드는 황궁 내에서만 생활하기보다는 거진 그의 저택에서 보내기에 에반젤린에 대해 잘 몰랐지만, 에반젤린이 간혹 린디스 황실을 찾을 때 만난 적이 있던 기사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장 법도대로라면 황족인 벨류아드의 말을 듣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제압하기엔 에반젤린 또한 황손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물론, 따지고 들면 벨류아드가 훨씬 더 황족으로서의 입지가 있지만, 문제는 에반젤린이 그 유명한 하인스의 대공. 데이비의 딸이자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딸인 에이리아의 혈육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저하. 무슨 일이십니까.”
뒤이어 별관 내부 쪽에서 시종장을 포함한 다수의 시녀들까지 나타나자 벨류아드는 인상을 찡그리며 주변에 있는 기사가 들고 있던 석궁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에반젤린을 향해 겨눈다.
“저…… 저하!!”
“안 됩니다. 저하!! 그분은!!”
“에잇! 전부 닥쳐라!! 황족만이 올 수 있는 이 태양의 별관에 침입한 미천한 평민 년을 너희들도 감싸는 것이냐! 모두 황족 모독죄로 구속당하고 싶은 것이더냐!!”
“그거 내려놔요. 후회하기 전에.”
에반젤린은 최대한 상황을 조용히 무마시키기 위해 그를 진정시키고자 했다. 여기서 그녀가 힘을 잘못 썼다가 데이비에게 들켜버리면 그게 진짜 본말전도였으니 말이다.
“아…… 안됩니다! 저하!”
“에잇!!”
투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마나가 발현된 볼트가 빠르게 에반젤린을 향해 날아들었다.
동시에 에반젤린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조금 전부터 평민, 평민. 진짜 짜증나게 하네.”
그말과 함께 에반젤린은 손에 들고 있던 병을 휙 던져버린 뒤 몸을 살짝 숙였다.
터어어엉!!!
동시에 엄청난 폭음이 일어났고…….
그 후 에반젤린의 작은 손이 벨류아드의 머리를 낚아채 대지에 처박아버렸다.
“커헉!!”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볼트를 낚아챈 뒤 그대로 벨류아드를 제압한 것이다.
에반젤린은 한쪽 손에 잡힌 볼트를 가차 없이 던져버린 뒤 물었다.
“이거 정당방위 맞죠?”
“공녀님…… 아…….”
“맞아요. 아니에요.”
“우선 진정하십시오. 자칫 대공께 들킬 수 있습니다.”
노신사의 말에 에반젤린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방해 결계도 가득하고. 저도 거의 힘을 쓰지도 않았으니까.”
“진짜니?”
“네! 저도 분간은 할 줄 알아요.”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던 에반젤린은 문득 그곳에 있던 기사들과 노신사를 포함한 시녀들이 모두 바짝 얼어있는 것을 눈치챘다.
“어……?”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에이리아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게 보였다.
“어…… 엄마가 왜 여기에…….”
“방금 왔는걸. 그보다. 에린아.”
“으…… 으아악!!!”
본능적으로 위기를 눈치챈 에반젤린이 황급히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아빠인 데이비가 린디스 제국에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렇기에 그가 의심을 풀고 돌아갈 때까지 숨어있으려 했다.
“에반젤린!! 거기서!!”
밑에서 에이리아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에반젤린은 허겁지겁 도망치기 바빴다.
물론, 그녀가 작정하고 도망친 이상 그곳에 있는 이들로썬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 * *
에이리아가 린디스 황궁으로 온건 페르세르크 덕분이었다.
지구를 이 잡듯이 뒤지던 페르세르크는 뒤늦게 그녀가 티오니스로 도망쳤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하인스 영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에반젤린이 린디스 제국 쪽으로 날아갔으며 데이비가 이미 떠났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뒤 따라온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에이리아도 함께 따라왔다.
린디스 제국에 있으면 에반젤린을 숨기려들 수 있으니 자신이 꼭 따라가야겠다는 고집이었다.
데이비와 달리 이곳에 도착한 뒤 페르세르크는 따로 에반젤린을 찾아다녔고 에이리아는 곧바로 태양의 별관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다른 이들과 달리 에이리아는 황제의 직계 혈통.
그렇기에 이곳에 진입하는 데에 약간의 잡음만 있을 뿐 문제없이 들어올 수 있었다.
그녀는 린디스 제국에 대해 잘 알았고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곧바로 이곳에 오자마자 에반젤린을 찾아낸 셈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죠? 이 아이는…….”
“예. 벨류아드 전하입니다.”
“…….”
벨류아드 알 린디스.
정확히는 에이리아의 조카뻘 되는 인물이지만 워낙에 바사스와 에이리아의 나이 차이가 커서 둘의 나이 차이는 크지 않다.
“말씀해주세요. 어떻게 된 일이죠?”
“저희로서도…… 상황이 전부 파악된 것이 아니라서…….”
“지금 이곳을 지키시는 분들이 그걸 모른다고 하시는 건가요?”
에이리아가 보기 드물게 단호한 목소리로 묻자 노신사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죽여주십시오. 대공비시여…….”
“아저씨…….”
“폐하의 명을 받았으나 공녀님을 똑바로 보필하지 못한 저희들의 불찰입니다.”
“대체 왜 에린이를 두고 자리를 비우신 건가요.”
“죄송합니다.”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이리아는 알 것 같았다.
이곳의 정원은 참 예뻐서 정신 차리고 보면 이곳저곳을 쏘다닐 정도였으니까.
아마 에반젤린도 이곳 정원에 빠져 돌아다니다가 시종 시녀들을 따돌려버린 것일 터다.
“일어나라! 황족만이 들어올 수 있는 태양의 별관에 감히 일개 용병이 드나들다니 극형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 살려주십시오!!”
기절한 두사람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던 한 사내가 파랗게 질린 채 소리쳤다.
“저…… 저는 그저 저하께서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똑바로 말해야 할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말에 심복은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여기서 대답하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이 끝장이라는 것을 판단하는 데엔 많은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토해내고 말았다.
“…….”
에이리아는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데이비를 피해 이곳에 숨어있던 에반젤린을 발견한 망나니 황손, 벨류아드가 그녀에게 위압적으로 굴다가 시비가 걸린 것이다.
“보드 경. 놈을 베시오.”
“알겠습니다.”
중후한 인상의 기사가 시종장의 말에 검을 뽑아 들자 그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엎드렸다.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감히 폐하의 명으로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대공녀에게 위협을 가하다니 이는 폐하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사……살려주!”
촤악!!!!
순식간에 검이 번뜩이더니 사내의 목이 날아갔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에이리아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시종장. 괜히 신경 쓰게 해서.”
“아닙니다. 대공비 마마. 시신을 치우시오. 이 일은 내가 폐하께 따로 보고를…….”
“이게 무슨 일이지?”
그때였다.
누군가의 차가운 목소리에 모두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보고를 받고 왔건만. 내가 지금 뭔가를 잘 못 보고 있는 것인가?”
싸늘한 시선을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들어오며 말한다.
“바…… 바사스 오라버니…….”
“…….”
말없이 에이리아를 노려본 그는 쓰러져 있는 벨류아드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멍청한 놈…….”
그리고는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일부 기사들이 다가와 기절한 벨류아드를 데리고 가려 했다.
“멈추십시오! 황자 저하! 벨류아드 님을 지금 데려가시면!”
“지금 누구에게 명령을 하는 것인가. 시종장.”
“저하.”
“시종장. 나는 내 앞길을 막는 것들을 아주 싫어한다. 자네가 폐하의 신임을 받고 있는 이가 아니었으면 지금 여기서 죽었을 터.”
스산한 살기를 내뿜는 그의 위압이 주변을 짓누른다.
린디스의 소드마스터 바사스 알 린디스.
그게 바로 그의 정체였다.
“그리고 네년이 왜 여기 있지?”
“네?”
“네년은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을 텐데?”
“그건…….”
에이리아가 침묵하며 고개를 숙이자 그는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다 말했다.
“이번 일은 불문에 부쳐주도록 하겠다. 그러니 네 딸을 데리고 내 눈에서 썩 사라져라. 더러운 것.”
에이리아를 향한 혐오를 숨기지 않는 그의 행동거지에 에이리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수인을 싫어했다. 아니 정확히는 에이리아를 혐오했다.
그리고 에이리아는 그 이유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선민사상 때문에 생긴 혐오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과거였다면 두려움에 벌벌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데이비와 함께 했고 그동안 그녀도 많은 자신감을 길렀다.
“그럴 수 없어요. 오라버니.”
“뭐라?”
“벨류아드는 제 딸인 에린이를 겁박하고, 위협했으며 모욕했습니다. 아무리 황손이라 할지라도 이 같은 모욕은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바사스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에이리아…….”
“오라버니. 벨류아드를 대신해 직접 에린이에게 사과해주세요. 그사람과 저의 아이에게 밤 시중을 들라느니 술을 따르라느니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어요.”
그 말에 바사스는 조용히 그녀를 노려보았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투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감히…… 네년이…….”
“저는 물러날 수 없습니다. 사과를 받아야겠어요.”
에이리아가 생각지도 못하게 단호한 모습을 보이자 그는 제법 혼란스러운 듯했다.
“흥. 애들끼리 있었던 단순한 문제다. 거기에 지금 네게 머리를 숙여 사과하라 말하고 싶은 거냐?”
“그게 아니라면 정면으로 하인스를 도발한 것이라 받아들이겠어요. 오라버니.”
“이년이…….”
쿠웅!!!!
묵직한 살기가 에이리아를 옥죈다.
기사들은 황자인 바사스와 황녀였던 에이리아의 사이에 끼여 어떻게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평소라면 에이리아가 파랗게 질린 채 숨을 몰아쉬며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아니 그녀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이들 모두가 그럴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에이리아는 쉬이 무너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바사스는 점차 그녀를 더욱 압박해 들어갔다.
다만 그는 알지 못했다.
에이리아가 이곳에 왜 있었는지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한 것이다.
단순히 에이리아와 벨류아드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
에이리아가 왜 이곳에 있고 이곳에서 살기를 함부로 방출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몰랐다.
툭…….
에이리아를 향해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점차 압박을 가하는 그의 행동이 극에 이르렀을 때였다.
누군가가 바사스의 어깨를 잡았다.
“누구…….”
쿠우웅!!!!
가볍게 올려진 손을 타고 상상도 못 할 중압이 그의 전신을 짓누른다.
콰드드득!!!
소드마스터에 달하는 강인한 육체는 저항할 틈도 없이 무너져 내렸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커억?!”
“바사스 황자. 미쳤습니까?”
정중하지만 너무도 서늘한 말투.
놀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볼 수 있었다.
무표정하지만 그 안에는 지독할 정도로 섬뜩한 한기를 품은 데이비의 시선을 말이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분노한 데오르트 황제와 알버스의 모습도 보였다.
그 옆에는…….
하인스의 대공비구나.
페르세르크 또한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게 보였다.
“애들 싸움은 그럴 수 있지. 망나니 같은 놈이 뭐라 말했던 에반젤린이 쥐어팬 건 사실이니까.”
이윽고 데이비가 천천히 몸을 낮춘다.
“그런데. 당신이 그러면 안 되지. 내 부인이자 당신의 동생에게 살기를 품어? 그것도 내 앞에서?”
데이비는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짓누른 채로 말한다.
“페르세르크. 에반젤린 잡아 와줘. 멀리 못 도망갔을 거야.”
“그래야겠구나…….”
데오르트 황제는 최대한 에반젤린을 숨겨주려 했지만, 바사스가 살기를 대량으로 방출하면서 더는 데이비를 막을 수단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에반젤린의 탈주극으로 인해 사고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이 사태의 원인이 된 에반젤린은 혼란을 틈타 황급히 도망치기 위해 날개를 펼쳤다. 에이리아가 뒤쫓지 않는 것은 조금 의문스럽지만 일단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단순히 돈을 썼다고 혼내는 게 아님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기감에 아주 미약하게 살기가 퍼져나오는 게 느껴진다. 대체 누가? 흠칫 놀란 그녀는 날아가던 것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살기가 짙은데 멀리 퍼지진 않는다. 마치 결계에 살기의 여파가 묻힌 것처럼 말이다.
“설마…….”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여긴 그녀가 돌아가려다가 멈췄다. 살기에 이어 어마어마한 무게의 힘이 주변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아빠다!’
파랗게 질린 그녀는 이대로 돌아가면 데이비에게 잡힌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송해요. 아빠…….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그녀가 다시 날아오른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딜 가?”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 여긴 위험해. 엄마 아빠가 전…….”
황급히 대답하던 에반젤린이 우뚝 굳었다.
에반젤린의 눈앞에 환한 금발이 흩날린다.
에반젤린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한발 물러났다.
“에린아. 많이 급해 보인다. 그치?”
“그…… 그게요…….”
“많이 썼더라?”
일리나의 물음에 에반젤린이 온몸을 덜덜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