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75화
“폐하. 왜 홀로 드시고 계십니까…….”
린디스의 황태자 알버스 알 란디스는 묵묵히 독주를 들이키고 있는 데오르트의 손에 쥐어진 술병을 빼앗았다.
“불경한 놈. 감히 황제의 술병을 빼앗아?”
“후우…… 아버지. 왜 또 자책하십니까.”
“…….”
평소와 다른 호칭. 분위기. 말투였다.
하지만 데오르트는 그것을 책잡지 않았다.
“솔직히 바사스 놈의 일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그냥 재해였으니까요.”
“정말 그리 생각하느냐.”
“예? 제가 모르는 게 더 있었습니까?”
“아니. 네가 알고 있는 대로가 맞다. 하지만 바사스에겐 모르는 게 더 있다고 여겨지겠지. 그곳에서 재해가 벌어질 거라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으니까.”
“그건 그놈의 착각일뿐…….”
착각도 신념을 지닌 이상 진실이 된다. 적어도 지금 바사스에게 그날의 사고에 대해 백날 이야기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누구보다 모친을 사랑했기에 그녀의 이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불쌍한 존재.
기본적으로 린디스에 귀족파가 아직 힘을 가지고 있는 이유.
귀족파에 힘을 실어주는 황족이 아직도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총명하던 녀석이 어쩌다가 이리 되었는지…….”
알버스가 황태자가 된 것은 더 오래전의 이야기이지만 데오르트 황제나 알버스는 알버스가 황태자가 되고 바사스가 그를 보좌하는 그런 미래를 계획했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산사태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범인은 없는 재앙.
“에이리아는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겁니다. 사고 이후로 며칠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괴로워했으니까요.”
그 사고 이후로 살아남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개중엔 에이리아도 포함되어있었지만, 제국의 퍼스트레이디 중 하나인 황비는 사람들을 구하다가 토사에 휩쓸려 사망했다.
당시 에이리아는 사고의 충격으로 그때의 기억이 모호해져 있다.
그럼에도 그녀와 아랫사람들을 구하려다 변을 당한 고 황비의 죽음에 본능적인 죄책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 사고 이후 바사스와 에이리아 사이의 우애는 단번에 박살이 나버렸다.
당장 에이리아를 죽여버리겠다며 악을 쓰던 바사스와 그런 그를 제압하면서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던 그때의 기억이 데오르트 황제의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바사스는 이제 너무 많은 길을 돌아왔습니다. 그때 이후로 총기는 사라졌고요. 다만 문제는 바사스가 아닙니다.”
바사스는 총기를 잃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린디스 제국을 위한다는 마음은 아직 잃지 않았다.
하지만.
“벨류아드는. 비록 에이리아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은 아니지만 바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 녀석이 가진 수인 혐오는 원인 없는 하나의 폭거에 불과합니다.”
바사스의 수인 혐오는 에이리아라는 존재가 바탕이 되어있지만, 그의 영향을 받고 자란 벨류아드는 단순히 수인을 혐오한다. 그 안에는 어떤 대의도 이유도 없다.
바뀔 수가 없다는 소리였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바사스 이 미친놈이 황태자의 자리를 자신이 차지할 것이라 말했다더군요. 불경한 발언이긴 하지만 중요한 건 다른 문제입니다.”
너는 커서 황제가 될 것이다.
성정이 안 그래도 포악한 편에 속하는 벨류아드는 그 말을 거의 세뇌처럼 들었고 급기야 필요 이상의 선민사상이 물들었다.
가장 사람의 가치관이 흔들릴 시기에 말이다.
“그놈이 사고를 치지 않으면 좋으련만…… 만약 늦는다면…….”
“그럴 수 없다.”
“폐하!”
“내가 안일했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대처해서 황비와 그 많은 이들이 사고에 휘말렸다.”
그때의 일이 역린인 것은 바사스나 에이리아뿐만이 아니었다.
데오르트 황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여행을 추천한 것은 데오르트였다. 물론 그가 산사태를 예견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아직까지도 조금만 더 조사를 철저히 했으면 혹시라도 산사태의 징조를 발견하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전문가들이 아무리 조사를 해도 알 수 없었을 거라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하나의 재앙이었다. 원인 모를 재앙.
“아버지!!”
“그만…… 그만 나가보거라…….”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가 정말 린디스 제국의 그 절대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힘없이 축 처진 모습이다.
알버스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참담함을 느꼈다.
겉으론 단단한 척 굳건한 척을 했지만, 그의 평생에 걸쳐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자신에게도 괜히 화가 났다.
“폐하. 굳건하셔야 하옵니다. 이 제국에는 아직 폐하가 필요하옵니다.”
“알겠으니 나가보거라…….”
“참. 폐하.”
“무엇이냐.”
“요즘 제국 내에 심상찮은 움직임이 있습니다.”
알버스의 보고에 데오르트는 관심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이 와중에도 일 이야기더냐.”
“알아두셔야 할 것 같아서 보고드리는 겁니다.”
평소 이상으로 진지한 알버스의 말투에 데오르트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 * *
벨류아드가 가장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에반젤린이었다. 혐오하는 수인으로 추정되는 것은 물론 감히 언젠가 대제국의 황제가 될 자신에게 그런 태도라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정면으로 충돌하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아는 만큼 그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전부터 거슬렸던 존재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감히 비천한 수인 종족 주제에 황족의 꼬리표를 달고 있었던 존재를 말이다.
물론, 처음엔 그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지혜로는 괜히 달걀을 들고 바위와 정면싸움을 할 만한 계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어떤 기연이 내려졌다.
현재 그는 누군가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있었다.
평소의 필체도 바꾼 채 또박또박 정자체로 쓰인 편지를 스윽 훑어본 그는 불안한 얼굴로 그의 심복 중 하나에게 물었다.
“이거면 되겠지?”
“잘될 겁니다. 저하.”
바사스가 벨류아드를 따르던 질 나쁜 간신들을 모두 쳐낸 것은 사실이지만 눈앞에 있는 노령의 사내에 대해선 파악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령의 사내는 제법 신출귀몰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혹여라도 꼬리가 밟히면…….”
“걱정 마십시오. 에이리아 대공비는 그저 출처 불명의 편지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 후의 일은 어디까지나 신께서 점지하신 일일 뿐입니다.”
“좋아. 너를 믿겠다.”
“감사합니다.”
음흉하게 웃는 벨류아드를 뒤로한 채 은밀하게 창문을 통해 저택을 빠져나온 노령의 사내는 익숙하게 검은 로브를 걸쳐 썼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곳까지 이동한 뒤 통신용 아티펙트를 슬쩍 꺼내 들었다.
“오울입니다. 작전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명심해라. 절대 증거를 남기지 마라. 성공하든 실패하든. 모든 일은 벨류아드 황손과 바사스 황자가 모두 덮어써야 한다.
“알고 있습니다. 일은 잘 마무리 할 터이니 대가만 넉넉하게 챙겨주시지요.”
-성공한다면 그에 걸맞는 보상은 줘야겠지.
“한데 하인스 대공이 그렇게 안일하게 대처할까요?”
-단순 사고로 끝나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린디스와 하인스 영지 사이에 거대한 골을 만드는 것, 그리고 린디스 내의 귀족파들을 뒤흔들 명분이니까.
대상이 죽거나 다치지 않아 미수에 그쳐도 상관없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커질 문제였다.
만족스러운 듯 통신을 끊은 노령의 사내, 오울은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그가 벨류아드에게 접근한 것은 린디스 제국을 내부에서 흔들고 하인스와 충돌시키려는 목적이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행히 허영심만 가득하고 무능한 황손 벨류아드 덕분에 일이 잘 풀린 셈이었다.
“멍청한 놈. 뭐. 나는 덕분에 일이 잘 풀렸…….”
홀로 중얼거리던 그가 흠칫 놀랐다.
순간 돌아선 그의 시야에 누군가가 황급히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 저자는!’
노쇠한 사내 오울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벨류아드가 머무는 저택의 시종장. 바사스의 충신이었으니 말이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뛰어가는 모습을 보니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일 터.
어쩌면 그가 저택에서 나와 이곳에 오는 동안 미행을 한 것일지도 몰랐다.
“젠장.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황급히 도망가는 그를 놓치게 되면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다. 벨류아드는 멍청해서 계획에 동조했지만, 바사스가 안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쓰읍…….”
짧게 숨을 고른 그가 한 발 내디딘다.
파앙!!!
동시에 조금 전까지 노쇠한 몸을 이끌던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순간적으로 사라진 오울이 나타난 곳은 시종장의 앞이었고 갑작스레 나타난 오울의 신형에 그가 눈을 부른 뜬 그 순간.
푸욱!!!
섬뜩한 칼날이 시종장의 복부를 꿰뚫었다.
“비장이다. 과다출혈로 인해 금방 사망하는 부위지. 딱히 원한은 없지만 여기서 자네를 살려 보낼 수는 없지.”
“대체…… 대체 무슨 수작을 꾸미려고…….”
“별거 없네. 그냥 린디스 제국을 조금 흔들어볼 생각이라.”
바사스도 에이리아를 미워하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벨류아드와 근본적으로 다른 게 있었다.
어떤 일의 내면에 숨겨진 진의를 찾아내는 실력. 이 계획을 들었을 때 에반젤린에게 고통을 줄 수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벨류아드와 달리 바사스는 이 일의 끝이 파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이 일이 터지기 전까지 바사스의 귀에 절대로 이 소식이 전해지면 곤란했다.
“끄륵…… 끅…….”
죽어가는 시종장을 보며 오울은 차갑게 웃은 채 검을 갈무리하고 돌아섰다.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이는 법일세. 겁도 없이 홀로 쫓아오다니. 쯧쯧.”
시종장을 지나친 채 홀연히 사라지는 오울을 보며 시종장은 떨리는 손을 허공에 뻗었다.
알려야 하는데. 이대로 가다간 벨류아드는 물론 바사스도 끝장이다. 아니. 일이 잘못되면 린디스 제국이 크게 흔들릴 수도 있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하는데. 몸을 움직일 힘이 나지 않는다.
천천히 죽어간다.
마치 태양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을 때처럼 시야가 검게 변하는 느낌이 들었다.
주마등이 이런 것인가. 시종장은 십수 년 전 환하게 웃어 보이던 자신의 주군의 모습이 떠올랐다.
‘안된다…… 이대로 가면 저하가 위험해…….’
하지만 움직일 수단이 없다. 그렇게 서서히 시야가 흐려진다.
‘저하. 조심하셔야 합니다……. 도련님께 마수를 뻗치는 이자들을 반드시 막아야…….’
그의 목소리는 바사스에게 닿지 못했다.
* * *
영혼의 강을 통해 혼을 정화하는 저승이는 여러 취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영혼이 지닌 삶의 업을 지켜보는 것.
물론, 악인보다는 선하게 살아온 이의 업을 보는 것이 하나의 낙이기도 했다.
그가 레디미아 황비에 대해 알아보게 된 건 단순 우연이었다.
에반젤린이 사고를 치고 린디스와 엮이면서 제국의 과거 있었던 어떤 사고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미 십수 년도 더 된 일이기에 당연히 레디미아 황비의 혼이 남아있을 리는 없다.
윤회를 했을 테지만 그래도 기록 정도는 남아있으리라.
회랑의 영웅인 도사 우치 몰래 월권행위를 사용하는 꼴이지만 그래도 가끔씩 이렇게 스트레스를 발산해주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은데 어찌할까.
게다가 이번엔 변명 거리도 존재했다. 에이리아가 제 오라비와 불화가 있었다고 하니 괜히 신경이 쓰인 데이비가 그녀의 혼의 흔적을 한번 조사해달라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어라?”
듣자 하니 레디미아 황비는 사람이 굉장히 선한 사람이었다고 들었던 만큼 나름대로 기대감을 가지고 그녀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았으나.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 그의 앞에 들이닥쳤다.
“기록이…… 없다고?”
윤회한 기록이 없다는 말인즉슨 영혼의 강에 그녀의 영혼이 도달한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게 무슨…….”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그는 혹여라도 기록이 잘못되었나 싶어 조사했다.
영혼의 강에 영혼이 들어온다면 반드시 기록이 남는다.
하지만 레디미아 황비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기록이 전혀 없었다.
“말이 안 되는데.”
물론 혼이 영혼의 강에 오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 가능성도 있지만 사고가 있었던 곳에 직접 찾아가 봤을 때 그녀의 혼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구천을 떠도는 것도 아니고. 영혼의 강에 온 것도 아니다.
그 말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살아있을 수도 있다?”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 외엔 영혼이 소멸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데. 소멸이라는 게 그리 쉬이 일어나는 현상도 아니고 정말로 소멸했다면 그녀의 영혼기록이 완전히 사라지는 게 정상입니다.”
“그럼 뭐야. 구천을 떠돌고 있다는 건가?”
“좀 억측이긴 합니다만. 그녀의 혼이 단순히 구천을 떠도는 것이 아닌 어딘가에 억류되어있을 가능성도 생각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승이의 말에 데이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억류?”
“예. 단순히 구천을 떠돌고 있다면 그녀에게 어마어마한 원한이 쌓인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데 제가 확인한 그녀의 업에선 그렇게 원한을 품을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승이의 보고에 나는 곰곰이 침묵했다.
그때였다.
“서방님 계세요?”
“음? 아 그래.”
에이리아가 손에 과자를 든 쟁반을 내려놓았다.
“조금 드시면서 하세요. 직접 구워봤어요.”
“맛있게 먹을게.”
빙그레 웃으며 답해주자 그녀가 살짝 시선을 피했다.
“저기…… 서방님.”
“응?”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요?”
“당연히 들어줘야지. 무슨 일인데?”
“린디스의 전 황비. 레디미아 황비님이 사망했던 사고지점에…… 좀 가보고 싶어요.”
에이리아의 말에 나는 의문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곳에? 왜?”
“사실은…….”
에이리아가 품 안에서 발신인이 불분명한 편지를 한 장 내밀었다.
그 안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