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76화
-레디미아 황비의 마지막, 그날의 참극과 그녀가 당신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에 대해 알려줄 수 있소. 베르나르트 협곡. 그 사고가 났던 지역으로 사이러스의 밤에 홀로 오시오. 보는 눈이 있을 수 있으니 가급적 은밀하게 만나 뵈었으면 하오.
사이러스의 밤은 그믐이 뜨는 날을 의미한다.
베르나르트 협곡은 린디스 제국과 국경을 마주한 고란 왕국이 인접한 대협곡이다.
에이리아와 나는 말 없이 편지를 보다 서로를 바라본다.
“어디서 온 거야?”
“린디스 제국 내의 전서 상단에서 온 거예요. 다만 중간에서 가로채기라도 한 건지 발신인이 없어요.”
신용이 중요한 상단에서 발신인이 없는 전서구를 허가할 리가 없으니 중간에서 가로챘거나 가짜 전서구를 보냈을 가능성도 제법 높았다.
“혼자 오라고 했다고? 이거 미친놈인가? 그래서 여기에 가보고 싶다고?”
“저는 그때의 기억이 없어요. 아바마마의 말로는 그때 받은 충격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통째로 기억이 날아가 버렸다고…….”
기억상실이라는 단어 자체가 극도로 희귀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에이리아는 한번 기억을 몽땅 잃어버린 전적이 있었던 만큼 무언가를 잊고 지내는 것에 상당히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내가 에이리아의 심층의식에 잠긴 기억을 찾아보았을 때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기억상실은 아니라는 게 내 판단이었다.
“그래서 알고 싶어요. 그때 제가 뭘 잊어버렸는지.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혼자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미 오래된 일이다. 이제와서 되새겨본들 달라지는 게 있을까.
그럼에도 그녀는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내게 알린 것 때문에 그때의 진실을 듣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서방님이 걱정할 걸 뻔히 알면서 위험을 자처하는 건 서방님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했어요.”
누구 와이프인지 이렇게 생각이 깊다.
내가 그녀를 믿듯. 그녀 또한 나를 믿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일 터.
그쯤 생각이 미치니 몸이 먼저 반응한다.
“어? 꺅!”
순식간에 그녀의 가느다란 팔을 잡아당긴 뒤 빙그르르 돌려 내가 앉아있던 의자에 그녀를 밀치듯 앉혔다.
그리고는 입을 맞추고 떨어지자 빨개진 얼굴로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결혼 후 3년 가까이 되었음에도 수줍어하는 것은 천성인지 아니면 본능적인 요망함인지는 알 길이 없다.
“으으…….”
“믿어줘서 고마워.”
“서방님을 안 믿으면 세상에 누굴 믿겠어요.”
“그보다 홀로 오라고 했다라…… 이걸 보낸 게 누구냐에 따라 목적이 달라지겠네.”
정말로 진실을 알리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에이리아를 노리는 것인지.
단순 편지내용만 보면 무슨 납치범이 돈을 요구할 때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고 하는 것 같은 모양새지만 느낌만 그렇다고 뒤통수를 후려갈기기엔 시기상조인 것도 사실이다.
“우선 가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어.”
“확인해야 할 것이요?”
“저승이가 레디미아 황비의 혼의 기록을 조사를 좀 해봤는데…… 아무래도 그녀의 혼이 영혼의 강으로 올라가진 않는듯하더라.”
“네?”
그녀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야. 그녀의 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거나. 혹은 아직 죽은 게 아니거나.”
그것도 아니면.
어떤 이유로 영혼의 강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거나.
소멸의 경우 어떤 흔적이라도 기록이든 남아야 할 텐데 그런 게 없다고 했으니 그것은 아닐 터.
“뭐가 됐건 그곳에 가봐야 뭐든 알 수 있을 거야. 마침 나도 볼 일이 있으니까 같이 가보자.”
“하지만 서방님이 있는걸 알면 그쪽에서 정보를 주려 할까요?”
“걱정 마.”
그놈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있는걸 모를 테니까.
“에이미.”
“어라? 저하 부르셨나요?”
서류뭉치를 한 아름 안아 들고 복도를 걸어가던 에이미는 내 부름에 쪼르르 걸어왔다.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콘타스 제국으로 갈 채비를 해. 최대한 간단한 인원으로 꾸릴 거야. 레이나와 마리아 공주를 데리고 가.”
“마리아 공주님을요?”
마리아 공주는 내 동생인 타냐의 친구이며 현국 국왕의 딸이다.
“콘타스 대제가 이번에 회의를 주선했는데. 마리아 공주의 아버지인 현국의 국왕도 참석할 거야. 자식이 부모 얼굴을 못 본 지도 오래됐잖아.”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네가 참석해.”
“네?”
에이미의 질문에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녀의 주변으로 옅은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하? 이게…… 뭔가요?”
“고위 환상 마법이야. 다른 이들 눈에는 네가 내 모습으로 보일 거다. 넌 최대한 공개적인 루트를 이용해서 콘타스 제국으로 가서 나를 대리해서 참석하는 거야.”
“자…… 잠깐만요 저하! 지금 그런 중요한 자리에 저더러 대리 참석하라는…….”
“넌 하인스의 대리 관리인이야. 따라서 남작이라곤 해도 그만한 권한이 있다.”
에이미는 최하위 귀족 중 하나인 남작이지만 라운 왕국 내에서도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이는 없다시피 했다.
“네가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
“제게는 너무 무거운…….”
“에이미.”
다시금 그녀를 부르자 그녀가 입을 다물고 나를 응시했다.
“실수해도 좋아. 경험 쌓는다고 생각해.”
그래야 나도 쉴 때 쉬지.
내가 서부로 향했다는 위장도 목적 중 하나지만 진실된 목적은 최근 일이 너무 많아서 지친다는 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 * *
베르나르트 협곡은 십수 년 전부터 출입이 완전히 금지된 장소이기도 했다.
잦은 산사태로 인해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첫 이유였고 이곳의 마나가 심상찮게 꼬인 장소라는 게 둘째 이유였다.
일개 마법사가 잘 못 들어가면 그대로 마나 회로가 꼬여버릴 정도로 최악의 장소.
풍수지리만 따지면 명당의 정반대 편에 속하는 음지나 다름없었다.
어둑어둑한 밤안개가 보인다.
안 그래도 어두운데 안개까지 자욱하니 더욱 어둡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물론 티오니스의 하늘은 워낙에 별빛이 밝아 지구와는 달리 은은하게 비치는 편이지만 그것도 안개 속에선 의미가 없었다.
공간을 넘어 이동한 나는 에이리아를 내려놓은 뒤 그녀와 링크를 걸고 내 전신을 환각으로 뒤덮어 숨겼다.
깎아지른듯한 절벽 틈사이로 보이는 좁은 길목은 여기저기가 불안정해 보였다.
“기억나는 게 있어?”
과거 그녀는 이곳에서 사고를 당한 경험이 있었다. 확인해본 바로는 단순한 기억상실이 아니었기에 혹여라도 트리거가 있는지 물었지만, 에이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것도 떠오르진 않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슬픈지 모르겠네요.”
“진입하자. 그믐이야.”
두 개의 달 중 하나인 사이러스의 그믐.
내 말에 에이리아는 미리 준비해둔 등불을 손에 쥐고 로브를 여몄다. 그리고 정령을 불러낸 뒤 그녀의 주변에 대기시켰다.
그리고 천천히 편지에 쓰인 장소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이곳에 오기 전 협곡에 대해 조사해본 바로는 이곳이 출입금지구역이라 불리는 만큼 사고가 잦다는 것뿐이었다.
단순 협곡의 절벽이 부서져 흘러내리는 수준이 아니라 마치 폭우를 견디지 못한 흙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툭하면 산사태가 벌어지는 곳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문제가 없는지 이렇다 할 흐름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산사태라고 해도 마스터급 육신을 지니고 있으면 문제없이 피해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말이다.
침을 꼴깍 삼킨 뒤 그녀는 묵묵히 걸어 나갔다.
환각 마법으로 내 모습을 가린 채 조용히 그녀를 따라가던 도중 나는 그녀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
‘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 겁먹지 마.’
내가 갑자기 손을 잡아주자 당황한 듯 주춤거린 에이리아였지만 뭐가 그리 좋은지 헤픈 웃음을 짓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좀 전과 달리 이번에는 떨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개는 깊이 들어갈수록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생긴 어떤 마나의 흐름 현상이 이 자욱한 안개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개로 숨겨도, 밤이라고 해도 어차피 데스 로드 급 사령 안에는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흐릿한 감은 없잖아 남아있다.
이게 자연현상? 웃기는 소리. 이건 마치 뱀파이어의 안개 은신술과 흡사했다.
물론 정말 똑같냐고 묻는다면 이건 마치 자연현상이라고 말하듯 너무 깨끗하다는 차이가 있었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 들어갔을까.
얼마 가지 않아 로브를 입은 누군가가 천천히 에이리아를 향해 다가온다.
-기다리고 있었소.
검은 로브를 입은 노인의 목소리였다.
안개 속에서 등불 하나를 들고 나타난 노인은 조용히 에이리아를 직시하고는 주변을 둘러본다.
“혼자 왔겠지?”
“제 몸 건사할 능력은 있으니까요. 남편은 콘타스 제국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러 갔어요, 그러니 약속을 지키세요.”
에이리아가 침착하고 단호하게 말하자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좋소.”
그리고는 씨익 웃는다.
“하면 레디미아 황비와 당신이 사고 당시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해드리지.”
“그 전에. 당신은 누구죠? 왜 이제와서 갑자기 이런 말을?”
“궁금하시오?”
노인의 물음에 에이리아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미안하지만 들어도 별로 의미는 없을 것이오…….”
콰르르르르릉!!!!!
동시에 협곡 전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한다.
갑작스런 굉음에 깜짝 놀란 에이리아가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욱한 안개 너머로 뭔가 이상한 이질감이 들었다.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드리리다. 이 협곡에는 오래전부터 알 수 없는 산사태가 자주 일어나곤 했소이다. 이유는 도저히 불명이었지. 조사할 땐 아무런 문제도 없었건만 마치 악귀에 홀린 것마냥 사람이 소수 일정 지점까지 들어오면 마치 응징하듯 산사태를 일으키오.”
노인의 말에 에이리아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이게 무슨…….”
“그리고 지금 현재 산사태를 일으킬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완수되었지.”
콰앙!!!
거대한 바위가 떨어진다.
파편이 떨어지는 거야 문제가 없지만, 자칫 토사가 쏟아지면 그땐 중급 정령으로 답이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 보였다.
“내 원한은 없소. 그러니 가는 길 진실의 한편 정도는 알려드리리다.”
노인이 씨익 웃었다.
“오래전 이곳에서 일어난 사고는 말이오.”
그는 에이리아가 여기서 죽을 거라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데오르트 알 린디스. 그 추악한 자의 욕심 때문이었소이다.”
콰르르르르르르르!!!
결국, 토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거대한 바위 하나가 노인을 그대로 깔아뭉개버렸다.
“이…… 이봐요!!”
당황한 에이리아가 흠칫 놀라 그를 향해 달려가려 했지만 나는 그대로 마법을 해제하며 에이리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말했다.
“저거 사람 아니야. 여기 남겨놓은 잔념이야.”
에이리아가 아무 말도 안 했어도 아마 노인은 같은 말을 반복했을 것이다.
다만 이 산사태는 저 노인이 일으킨 수준이 아니었다.
“혀…… 협곡 전체가!”
“희한하네…… 일반적으로 준비 없이 이만한 산사태를 일으킬 힘이 그에겐 없었던 거 같은데.”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산사태를 일으킨 것인가 하는 의문은 들지만 확실한 것도 있었다.
결국, 에이리아에게 편지를 보낸 놈은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쩌어엉!!!
이윽고 나는 신력을 강하게 응축시켜 하늘로 쏘아 올렸다.
그러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듯한 자욱한 안개에 커다란 구멍이 잠시 생겨났다.
“아이나. 편지를 보낸 놈에 대해선 조사해봤어?”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들려왔다.
-실은 그게 말입니다. 범인은 찾았습니다.
“뭐? 벌써? 누군데.”
-벨류아드…… 전에 만났던 바사스 황자의 망나니 아들놈입니다.
그 말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놈이 보낸 건 확실해?”
-예. 일단은요. 다만 이게 좀 미심쩍네요. 마치 일부러 알리려는 듯 정보가 흘러들어와서요. 제 직감 상 이거, 누군가가 일부러 흘린 정보 같습니다.
누가 벨류아드를 이용해 에이리아를 위기에 빠뜨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다.
만약 내가 정말로 에이리아를 두고 홀로 갔고 만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겨 에이리아가 크게 다쳤다면 눈깔이 돌아가서 벨류아드를 잡아 찢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현 상황을 종합해보면 세상에 그걸 원하는 놈이 있다…….
“제법 머리 굴렸다만 사람을 너무 쉽게 봤네.”
지금 내가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 블러드 폴리스 같은 자욱한 인공안개와 도저히 자연적인 현상으론 보이지 않는 산사태뿐이다.
“꺅!”
우르르 쏟아지는 잔해들 사이에서 나는 한쪽 팔로 에이리아를 감싸 쥐고 나머지 한쪽 팔을 허공에 뻗었다.
“서…… 서방님?”
“네 남편 생각보다 능력 많아.”
쩌저저저저적!!!!
동시에 하늘에서 쏟아지던 거대한 토사가 그대로 얼어붙는다.
쏟아지던 토사는 마치 하나의 조형물이 된 것처럼 얼어붙어 버렸고 에이리아는 그저 멍하니 그것을 지켜보았다.
“저거…… 녹아요?”
“인위적인 요소가 아니면 당분간은 안 녹을걸? 꼴에 고서클 마법이라.”
“와아…….”
나를 믿고 있는 만큼 에이리아는 자신의 신변을 지켜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이후 에이리아는 편지를 보낸 범인이 벨류아드라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 아이가 저를 암살하려고……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요. 그 아이는 에린이에게 원한을 품었죠. 거기에 평소 탐탁지 않고 몸이 약한 저를 치워버리는 것으로 복수도 할 수 있었을 테니…….”
“뭐가 됐건 여기서 산사태가 일어날 거라는 걸 놈은 알고 있었다는 거야. 자연현상을 이용해 암살이라…… 굉장히 실패확률이 높지만…….”
이 자연현상이 특정 트리거를 기점으로 반드시 벌어진다면.
증거 없이 누군가를 암살하는 최고의 무기가 되기도 할 터다.
암살 시도는 할 수 있되 직접적인 정황증거가 없으니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다.
“애초에 알고 있었던 거야.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 산사태가 일어나서 다시 묻어버릴 거라는 거.”
그래서 린디스 제국에서 이곳을 봉인해버린 것일 터다.
그리고 에이리아를 암살하려 한 벨류아드나 놈에게 힘을 보태주고 있는 모종의 존재들은 그 사실을 알았다.
여기서 에이리아가 사망하면 린디스 제국은 그녀가 제국의 땅에서 사망한 사실에 대하여 사고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금실이 좋기로 유명한 나는 눈이 돌아가서 그대로 제국을 엎어버리겠지.
아니 엎진 않아도 상당히 거대한 파문을 일으킬 것이다.
물론 벨류아드는 자신이 들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래서 일부러 뒤늦게 정보를 흘린 거였어.”
벨류아드와 함께하는 이들은 이 일들의 전말을 완전히 숨길 생각이 없다.
벨류아드의 생각과 달리 그들은 벨류아드라는 황손이 이 일에 관련되어있다는 정보를 흘림으로써 자신들은 쏙 빠져나가고 하인스와 린디스의 정면충돌을 꾀할 수 있으니까.
그 멍청한 망나니 놈에게 신뢰를 얻었다면 아마 이렇게 조종하는 건 쉬웠겠지.
게다가 그 망나니는 고작 얼마 전에 하인스와 마찰을 빚는 행동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서 상당히 원한을 품었다는 사실조차 숨기지 않았다.
제법 노련한 조종이다만 산전수전 공중전 해물파전 다 겪은 내게는 그리 신박한 방법도 아니었다.
그래도 궁금한 건 있었다.
“서방님?”
“내가 린디스와 싸워서 이득을 볼 존재가 있나?”
“글쎄요…….”
그녀도 마땅한 존재가 떠오르지 않는지 의문스러워하던 찰나였다.
쩌적!!
9서클 빙결 마법으로 얼려놓은 토사들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협곡의 안에서 빛이 머금어진 흰 안개들이 마치 냉동창고의 안개가 퍼져나가듯 스르륵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에이리아!! 어찌 이곳에!
당황한듯한 여성의 목소리.
다만 에이리아는 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빛나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따라오렴! 이곳에 계속 있으면 점점 위험해질 거야!
마치 귀신이 속삭이는듯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진다. 그리고 빛나는 새하얀 안개 속에서 작은 빛무리가 나타나 에이리아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서…… 서방님? 이 빛무리는?”
“따라가자. 뭐가 됐건 목적은 이룰 수 있겠다.”
나는 눈앞의 새하얀 빛무리를 보고 확신했다.
저거. 내가 보고 있는 게 맞다면 아주 뜬금없는 존재의 혼이었다.
역시 그녀는 윤회의 강이 아니라. 이곳에서 십여 년간 존재했던 모양이다.
내용이야 어떻든 본래 목적은 에이리아가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것.
당사자에게 듣는 게 최선이겠지.
나는 저항 없이 혼을 따라 에이리아를 데리고 이동했고 빛나는 빛무리는 산사태가 다시 일어나기 전 작은 동굴로 우리를 불러들였다.
“세상에. 여기 이런 동굴이…….”
에이리아는 빛무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아아…… 역시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구나…….
안타까워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그녀의 형체가 한번 번뜩이더니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으로 변했다.
-십수 년이 지났건만 이토록 예쁘게 커줬구나…….
마치 친딸을 대하듯 소중하게 에이리아의 몸을 끌어안는 여인이다.
다만 에이리아의 시선에는 빛무리가 그녀의 주변을 맴도는 것처럼 보이리라.
문득…….
장난기가 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