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379화 (1,379/1,559)

제 1379화

고요한 공동을 둘러보던 요시아가 눈을 반짝인다.

“오…… 이거 페르늄 보석 아니에요? 극히 희귀한 보석이라 진짜 비싼 건데?”

잠옷을 입은 채 팔짝팔짝 뛰어간 요시아가 산더미처럼 진열된 보석 중 하나를 집으려다가 멈칫한다.

“아…… 이거 혹시 건드린다고 문제 생기는 건 아니겠죠?”

요시아가 데이비를 향해 질문을 던지자 그는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딱히 함정도 없고 여기 주인도 소멸한 지 오래됐으니 신경쓰지 말고 챙겨.”

그리고 아공간을 열어젖힌 뒤 주변에 널린 보물이나 고급 아티펙트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이히히히…….”

“와. 이거 예쁘다! 이건 꼭 챙겨야지!”

요시아와 데이비가 눈이 돌아가 열심히 보물을 도굴하고 있자 에이리아와 레디미아 황비는 멍하니 두 사람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에이리아의 경우는 금방 상황을 이해한 듯했지만 레디미아 황비의 경우 사위가 도굴을 하고 있으니 당황한 듯 보였다.

-저…… 저기 사위? 뭘 하고 있는 건가?

“뭘 하긴요. 도굴 중이지요.”

-아니 그게…… 그렇게 당당한 일인가?

“이 무덤 주인 때문에 죽은 사람이 몇인데, 이 정도는 할 말 없어야죠.”

물론, 그것이 무덤의 주인이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무덤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는 이해할 수 있다. 무덤을 도굴하려다가 다치는 거야 지들의 운명이니까.

하지만, 그런 의도도 없이 그저 이 협곡에 발을 들였다는 이유로 죽이는 건 별개의 이야기였다.

그때 협곡 전체에 깔려있던 안개와 비스름한 것들이 관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이에 깜짝 놀란 에이리아와 레디미아 황비가 데이비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 했지만, 데이비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흰빛을 띠는 안개가 데이비의 다리를 휘감고 그러지 말라고 그만두라고 말리는 것처럼 그를 물고 늘어졌지만, 데이비는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고 아공간에 금은보화를 털어 넣었다.

“이거 하나하나가 역사적 가치가 얼마나 높은데.”

하나만 꺼내서 경매장에 출품해도 굉장한 돈을 얻을 수 있으리라.

촤르륵…… 촤르르륵!!

아주 쓸어 담는다는 게 이런 표현일까.

그리고, 그런 데이비에게 배운 요시아 또한 쇠심줄이었다.

“아! 좋은 거다! 선생님! 이거 저 가져도 돼요?”

“그거? 가져가.”

“아싸.”

어디서 꺼낸 건지 모를 주머니에 자기가 마음에 드는 것을 쓸어 담는 요시아의 행동에 백색의 안개가 이번엔 그녀의 팔과 다리를 휘감고 저지했지만, 요시아도 요지부동이었다.

“아 귀찮게! 저리 좀 가!”

파앙!!

요시아가 귀찮다는 듯 뱀파이어의 힘을 발현하여 그것을 튕겨내 버리자 볼품없이 흩어진 안개가 다시금 모여들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럴 때마다 요시아는 가차 없이 안개를 흩어버리고는 도굴에 집중한다.

묘지에 가득하던 보물들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재화들이 사라지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행동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백색의 안개는 그야말로 필사적이었지만 그 정도 수준의 힘으론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적당히 강한 존재들이었다면 영향을 충분히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개가 감당하기엔 데이비는 그야말로 불도저 그 자체였다.

“선생님. 이 관은 어떻게 해요?”

“그게 장모님의 혼을 묶어두고 있는 매개체일 거다.”

보물이란 보물을 다 털고도 뭔가 만족스럽지 않은지 데이비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 뒤 천천히 관에 다가갔다.

“그런데, 이거 무덤 주인이 뱀파이어 로드 이상급의 존재인 거죠?”

“그렇겠지.”

어떤 잔인한 진실에 저항하여 신에게 반항했고 종족단위로 저주를 받은 존재가 바로 이 무덤의 주인이다.

그런 존재가 가진 보물치고는 그리 대단할 게 없다는 건 한 가지 사실만을 알려준다.

바로 숨겨놓은 게 더 있을 거라는 의심 말이다.

어딘가에 숨겨진 추가 비밀공간이 있는가는 쉬이 찾아낼 수 없기에 관을 우선순위로 돌렸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황비님의 혼을 해방할 수 있는 데요?”

그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데이비는 이내 관뚜껑을 천천히 밀어젖혔다.

그그그그극!!!

그러자 굳게 닫힌 관뚜껑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러난 관의 내부모습에 요시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진다.

“와…… 예쁘다…….”

관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정말 아름다운 외형의 인물이었다.

“선생님. 이 사람, 남자…… 맞죠?”

“그렇겠지?”

요시아의 말대로 신체적인 특징은 관의 주인이 남자라 말해주지만 참 이기적일 정도로 예쁜 인물이었다.

“그냥 예쁜 여자 데려다 놓고 남자라고 우기는 느낌이지 않아요?”

“그렇다고 하기엔 륀느보다 더 껌딱지네.”

얼마나 오랜 시간을 잠들어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을 텐데도 마치 조금 전에 누운 것처럼 변함없는 그 모습에 에이리아도 천천히 다가와 관의 주인을 보고 옅게 탄성을 흘렸다.

“와…… 예쁘다…….”

-나, 남성이었던 겐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레디미아 황비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실은 이곳에 영혼이 묶였을 때 나는 이 무덤 주인의 모습을 한 번 본 적이 있다네…… 영락없이 여성인 줄로만 알았건만…….

그래서 그녀라는 말을 했던 것일까.

레디미아 황비는 영체인 그녀의 가슴팍에 손을 천천히 얹었다.

-그녀…… 아니, 그와 연결되었을 때 본 것은 누군가를 애도하는 슬픔이었네.

무덤의 주인이 가지고 있던 어떤 감정들이 그녀에게 흘러들어온 것일 터다.

“그때 이후로 감정이 연결된 적은 있습니까?”

-없다네. 그 후로부터는 쭉 홀로 있었지. 사실 무덤의 내부에 와본 것도 이번이 처음인지라.

이곳에 깔린 어떤 힘은 그녀의 접근을 철저하게 막아왔던 모양이었다.

영체인 그녀가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말없이 시신을 바라보던 데이비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태초의 진조.

뱀파이어의 시조인 이 존재는 오래전 사멸했다. 하지만 그에게 남아있는 힘이 아직까지 이렇게 주변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것이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이 시신의 주인은 뭔가 남기고 싶었던 의지가 많았던 것처럼 보였다.

“선생님. 뭘 봐요?”

“아니, 이거 끊을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끊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신력에 반응하기가 무섭게 이어진 끈이 옅어지는 게 보였으니까.

관의 주인에게 남아있는 신력은 특수성만 지닌 신력일 뿐 그 힘의 강도만 놓고 보면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풍화되고 고갈된 탓에 약해진 탓이리라.

다만 마냥 실험하기엔 위험요소가 컸다.

“이 시신과 연결된 연결 끈을 끊으면 장모님의 혼은 자유로워질 겁니다. 십여 년간 억류되었던 것을 보상할 방법은 없지만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영혼의 강으로 보내드릴 수 있어요.”

-하…… 하지만 바사스가…….

그렇지. 그녀가 지금 바라는 것은 변해버린 아들과 아주 조금이라도 대화하는 것이었으니까.

“어떻게 하시겠어요.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해방해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정말 문제가 없겠는가.

“문제라…… 없진 않네요.”

데이비는 팽팽하게 당겨진 영혼의 끈을 이리저리 당겨보고는 결론을 내렸다.

“고무줄.”

“고무줄이요?”

대답한 것은 요시아였다.

-고무줄이 이것과 무슨 관계인가?

“그러니까…… 정확히 진단하자면 이 시신의 주인이 장모님의 영혼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이걸 끊어버리면…….”

끊는 건 쉽지만 끊어버리면 영혼의 강이 그녀의 혼을 잡아당기는 힘과 이 끈이 저항하는 힘의 균형이 한번에 무너진다.

그리되면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는 그녀의 혼은 순식간에 영혼의 강으로 끌려가게 되리라.

“제가 막아드리는 방법도 있지만 제 방식을 쓰면 장모님의 혼이 제게 종속될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그냥 두면 뭐, 원하시는 바를 이루지 못할 가능성도 있네요.”

아마 높은 확률로 그럴 것이다.

결국, 어떤 방식이 되었건 레디미아 황비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된 셈이었다.

눈에 띄게 우울해진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주춤주춤 물러나는 그녀는 끝내 바닥에 주저앉은 모습으로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아아…….

“어…… 어머니…….”

-괘…… 괜찮아…… 괜찮단다…….“

괜찮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빠르게 사라지듯 어디론가로 가버렸다.

“요시아. 에이리아와 함께 따라가.”

“선생님은요?”

“방법을 생각해봐야지. 좀 달래드려. 난 그런 건 영 재주가 없어서.”

“수많은 여인들 본인도 모르게 홀리고 다닌 분이 그런 말 하니까 웃기네요.”

그녀가 바라는 것은 그저 아들과 다시한번 대화하는 것. 물론 그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의 영역에 가깝지만, 그녀의 혼이 영혼의 강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아직 구천에 남아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요시아와 에이리아가 레디미아 황비의 혼을 따라 밖으로 나간 뒤 데이비는 천천히 시신에 손을 가져다 댔다.

창백할 정도로 차가운 몸이다.

하지만 그 안에 그의 신력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겉보기엔 시신의 혼이 소멸하고 육신에 남은 신력의 잔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데이비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죽어서도 어떤 이유를 가지고 힘을 남겨놓았다.

물론 그 힘의 수준은 상당히 미약한 편이라 고작해야 이 협곡에 일부 영향을 끼치는 정도지만 말이다.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엔 너무도 작은 힘이고, 그렇다고 잔념이라고 하기엔 너무 노골적이다.

그렇다면 손을 좀 대봐야지.

“신력을 조금 더 짙게 해야 하나.”

고심하던 데이비는 이 시신이 신력에 상당히 유하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신체화시켰다.

신력이 육신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막대한 힘이 퍼져나간다.

동시에 예상했던 것처럼 시신에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딱히 복잡한 구조도 아니었다. 온전한 신격을 지녔다면 금방 알 수 있는 정도.

태초의 진조는 쓸데없이 수수께끼나 하는 성격은 아닌 듯 보였다.

이윽고 그의 몸에 있던 신력들이 서서히 각성하기 시작했다.

-나의 유지를 찾아낸 후손이여.

귀를 매혹하는 듯한 미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신이 말하는 게 아닌 시신의 주인이 죽기 전 남겨놓은 의지인 듯 보였다.

-나의 잔념을 깨웠다는 것은 나의 시신을 찾아낸 그대가 신격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의미할 테지.

“호…….”

오래전 사멸한 신격의 의념에 데이비는 흥미롭다는 듯 뒷짐을 지고 이야기를 들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진실이 존재하지만 그중 대부분은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혔다. 나는 죄인이오. 나로 인해 나의 동족들이 영겁의 저주를 받았을지니. 부디 바라건대, 나의 동족들이 이제는 구원을 받았기를 소망한다.

뱀파이어들은 구원은커녕 한바탕 싸움 일으키고 절반이 죽었습니다.

데이비는 굳이 할 필요 없는 이 말을 속으로 삼켰다.

어차피 말한다고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

-오래전 잊혀진 나와 내 동족에 관한 진실을 잊지 않고 세상에 널리 알려준다면 나 또한 그대에게 그만한 보상을 주리라.

그말과 함께 시신의 위로 백색의 안개들이 뭉쳐지기 시작한다.

사람의 형상을 띠기 시작한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벽면을 가리켰다.

-저곳에 나의 정수가 담긴 유물을 숨겨두었다. 사용방법은 스스로 알게 될지니…… 어린 신격이여, 부디 내가 남겨놓은 슬픈 과거를 기억해주길 바란다.

안개는 자신의 할 일을 끝마쳤다는 듯 다시 흩어졌다.

물론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흠…… 여기 보상이 있다 이거지.”

-세상은 무수한 희생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에 모여든 시신의 힘이 계속해서 말을 해왔지만 이미 데이비의 귓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 희생은 비단 피조물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태초의 신은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존재를 희생시켰다. 그리고, 그 후로도 구원받지 못할 존재들을 희생시킴으로써 피조물들을 지켜왔다. 아아 슬픈 일이로다. 그들은 원치 않게 태어났고 원치 않게 희생을 강요받았다. 나는 비록 피조물 출신이나 신격에 이른 자.

“오…… 신기하네.”

벽면에 손을 올려대고 신력으로 스윽 훑은 데이비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한때 가장 태초의 의지를 신봉하고 신실하게 믿었으나 잔인한 진실을 알고 태초의 의지에 반항한 존재.

“이걸 이렇게 열면 되는 건가?”

진조의 목소리는 개무시로 일관하며 벽면을 조작하며 신력으로 내부를 조작한 데이비가 탄성을 흘렸다.

“신기한 방식이네.”

덜컥!! 그그그그그극!!!

이윽고 데이비의 신력에 반응한 벽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진조의 잔념은 무언가 계속 말을 했다.

-비로소…….

“음? 잠금장치가 더 있네?”

신력으로 첫 번째 봉인은 풀었으나 남은 봉인이 무려 3개.

데이비는 더욱더 집중하며 봉인을 풀어헤쳤다.

-그렇기에 태초의 의지는…….

“아니 뭐가 이렇게 복잡하게 되어있어.”

절그럭! 그그그그극!!!

두 번째 봉인이 해제된다.

만족스러운 결과에 데이비는 더욱 집중하여 봉인을 해제했다.

-어린 신격이여, 부디 바라건대…….

“오. 이건 쉽게 풀리겠다.”

-부디 바라건대…….

“와 이걸 어떻게 고안한 거야. 진짜 머리 좋네.”

-부디…….

“오. 열렸다.”

-이런 개X끼가!!!!

…….

아주 짧은 침묵이 주변에 일었다.

데이비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시신에서 흘러나와 뭉쳐진 힘의 잔념은 마치 데이비를 보듯 형체화했다.

-야. 똑바로 들어라. 콱 씨 뒤지기 싫으면.

“뭐래. 사람 무더기로 죽인 놈이. 됐고 바쁘니까 방 빼 임마.”

손사래를 치며 다시 등을 돌린다.

-감히…….

어떻게 의지가 남아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방법이야 찾는다면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데이비는 그리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비와 달리 진조가 남겨놓은 잔념은 이 상황을 그냥 넘길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데이비의 주변을 휘감은 잔념은 데이비의 신력을 억누르며 힘겨루기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예의가 없는 어린 신격이로구나. 진실에 눈을 돌린 자는 성장할 수 없는 법. 비록 듣기 괴로운 진실이라도.

“아 됐다고!!”

터어엉!!!

결국, 열이 뻗친 데이비가 잔념을 털어낸다.

의지가 남은 잔념은 자신이 힘겨루기에서 그대로 밀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남은 힘이 얼마 없으면서도 자존심만 내세운 꼴이다.

“뭐. 왜. 뭘 봐. 콱 씨.”

-…….

“어이, 진조. 니가 무슨 진실을 가지고 있건 그건 나하고 상관없어. 세상이 유지되기 위해 신격들이 많이 희생된 건 이미 봐서 알고 있고,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성불이나 해. 더는 피해 일으키지 말고. 네 손에 죽은 피조물이 대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데이비의 물음에 잔념이 거칠게 흔들린다.

-진실을 알고 있다면, 어찌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피조물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신격이 희생되었는지는 알고 있는가.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어서 태초의 의지에 반항했고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 대가를 징수당해 종족단위로 저주를 받았으리라.

오래전 프리아 여신은 정말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히 효율적이었고 피조물의 감정에 공감하지 않았던 존재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피조물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일개 개인이 아닌 피조물의 존재 자체를 사랑했던 존재.

여신은 초기에 그런 존재였다.

그녀가 변하게 된 계기는 아마 1만 년 전에 있었던 여신의 강림부터였으리라.

실제로 그때 그 일이 없었다면 데이비는 여신에게 이토록 많은 힘을 허락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잘 알지. 미친 천사가 돼서 얼마나 날뛰었는데. 내가 그때 일을 생각하면 열이 뻗쳐서 잠을 못 자요. 임마.”

-하면…….

“다 해결했어.”

-뭐?

“희생된 영혼들은 넬타리드가 다 구원했고, 시스템도 이제 다 바뀌었다고. 이제와서 그러기엔 너무 늦지 않았나?”

-바뀌었다고? 세상의 시스템이? 설마! 태초의 존재가 변한 게 아닌 이상 그런 건 불가능하다!

“바뀌었어. 프리아 여신도.”

데이비의 설명에 잔념이 격하게 흔들렸다.

-그…… 무슨…….

“여신도 네 의지를 모르는 건 아니야. 다만 감정이 없는 신은 가장 효율적인 과정을 생각하기에 많은 존재가 희생당한 거다.”

-…….

“하지만 단순하게 희생된 건 아니야. 그런 시행착오 끝에 여신은 끝내 온전하게 감정을 지닌 신격을 만들어냈고, 세상도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어.”

-…….

“그러니까. 이제와서 뒷북 좀 그만 치라고, 네가 여기 만들어놓은 잔념 때문에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존재가 죽었는지 알고 있나?”

어떻게 보면 태초의 진조가 남겨놓은 힘의 잔념은 에이리아에겐 원수나 다름없었다.

레디미아 황비를 죽게 만든 원흉이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다.

그 후로도 이 망할 잔념은 의도하지 않은 채 협곡을 요새화시켰고, 접근하는 모든 일반 피조물인 생명체들을 위협했다.

“당장 마음 같아선 찢어버리고 싶은데 참는 거야. 그러니까 좀 닥쳐.”

-……변했다라…… 모든 것이 진실을 찾고 정상궤도에 들어섰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그 긴 시간 동안 나의 의지를 이어줄 신격을 기다렸는가…….

허탈하게 중얼거린 안개가 눈에 띄게 옅어진다.

헤아리기 어려운 시간 동안 하나의 일념으로 기다려온 진조의 잔념이다.

그런데 그 일념이 이미 해결되었다는 사실이 그 존재를 크게 부정시킨다.

“그보다. 왜 장모님의 혼을 묶어둔 거야. 네가 무슨 권한으로.”

덜컹!!!

마지막 봉인이 풀리며 아주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 안에는 독특하게 생긴 아티펙트가 들어있었다.

진조가 남겨놓은 최고의 신물이며, 최고의 유물. 겉보기엔 그리 가치가 높아 보이진 않지만, 본능적으로 데이비는 느꼈다.

이거 굉장한 물건이라고.

-무슨 말이지? 나는 누군가의 혼을 묶어둔 적이 없다.

하지만 이 망할 놈은 지가 벌인 일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네가 남겨놓은 힘에 사망한 한 여성의 혼이 십여 년간 이곳에 묶여 있었는데?”

지금 네 시신에서 흘러나온 힘이 누구와 연결되어있는지도 모르나?

그 물음에 진조의 잔념이 움직여 시신을 본다.

-그럴 수가…… 이런 변화는 내가 의도한 게 아니거늘…….

“뻔하지. 잔념을 유지할 힘을 빨아들이다가 그녀의 혼까지 잡아둔 거겠지.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데이비의 말에 잔념은 크게 일렁이더니 이내 레디미아 황비와 연결된 끈을 끊어버렸다.

“야…… 야!! 뭐 하는 거야 이 미친놈이!!”

-그렇군…… 희생을 증오했던 나도 결국 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지독한 회한이 서린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지만 나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레디미아 황비와 이어진 끈을 끊어버리는 순간 그녀의 혼은 오래가지 못해 영혼의 강으로 그대로 끌려가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게 묶어놓던 게 이 영혼의 끈이었건만, 그걸 이 망할 잔념이 끊어버렸으니 그 결과는 뻔하다.

“이 미친 새끼야! 영혼을 지금 올려보내면 안 된다고.”

내가 잔념을 거칠게 휘어잡아 마구잡이로 흔들자 잔념들이 찢겨 나가듯 사방으로 조금씩 흩어졌다.

“너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어차피 곧 있으면 내게 남은 모든 힘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지금 끊으나 나중에 끊으나 결과는 같을 것이다.

“그 잠깐 영혼을 잠깐 유치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데이비가 으르렁거리며 화를 내자 진조의 잔념은 의문을 표했다.

-이상하군. 성모도 있고, 영혼을 다루는 힘도 지녔으면서 왜 그런 고민을 하지?

“뭐?”

-성모는 만물을 품을 수 있는 신성한 영혼이다. 성모가 된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의 몸에 그녀의 혼을 잠시 담아두면 될 것을 왜 고민하는가.

“성모? 대체 누굴 말하는 거야. 요시아?”

-이상한 소리를 자꾸 하는군. 수인족 소녀는 성모다. 그걸 모르고 있는 것인가?

진조의 잔념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힘만으로 자신을 유지하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에이리아가 왜 성모라는 건데.”

-신격을 품은 아이를 낳은 존재. 그것이 성모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멍청한 놈. 척 보면 아는걸 모르는 걸 보니 네놈도 정상적인 신격은 아니구나.

비웃음을 던진 그가 서서히 흩어진다.

-열받아서 안 되겠군. 더 알려주고 싶었지만 알아서 해라.

“야…… 야 잠깐만!!”

급히 데이비가 놈을 붙잡으려 했지만, 잔념은 데이비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척! 하고 올린 뒤 흩어졌다.

동시에 태초의 진조의 육신 또한 빠르게 풍화되더니 이내 빛으로 산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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