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91화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숙인 맥거프는 결국 죄책감으로 인한 것인지 모를 눈물을 떨구었다.
영혼의 색이 안정되어있다.
적어도 비화가 느끼기에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은 진짜이리라.
제대로 파고들기엔 아빠가 걸어놓은 제약이 있는 만큼 더는 파고들지 않았지만, 괜히 마음이 쓰린 느낌이었다.
‘대충 상황 각이 보이네…….’
“저는 부인을 일찍 사별했습니다……. 예…… 제게 남은 것은 이 비루한 요리실력과 고향에 남아있는 아들뿐이지요. 본래라면 아들을 이곳으로 데려오려 했지만, 아들은 몸이 약한 편이라 장거리 여행이나 워프 게이트를 사용하지 못하는 몸입니다…….”
비화와 륀느는 그가 하는 말을 그저 묵묵히 귓가에 담았다.
“비록 엄마는 잃었지만, 아들 맥거핀은 제게 있어서 세상의 유일한 보물입니다. 남부끄럽지 않게 키워주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노력해왔지요…….”
애초에 맥거프가 이곳으로 온건 하인스가 떡상하기 전의 이야기였다. 즉, 그는 평범한 요리사였고, 당연히 집안 가세가 좋을 리가 없었다.
인제 와서야 월급을 제대로 받고는 있지만, 그 기간이 길지는 않았다.
덜컥!!
“소식 들었어. 비화야. 범인 잡았…… 어?”
륀느가 연락을 한 건지 유리아와 에오니샤가 벌컥 문을 열며 들어오다 눈을 크게 떴다.
점순이나 다른 영지개발부서의 인원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바쁜 일이 따로 있는 모양이리라.
“어? 맥거프 주방장님?”
“…….”
고개를 조아린 채 엎드려 그가 파르르 떨자 비화는 차갑게 말했다.
“맥거프 주방장. 계속해요.”
“……예. 죄송합니다.”
자세한 정황은 듣지 못했기에 의문을 표하던 에오니샤나 유리아였지만,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기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그를 지켜보았다.
“아들을…… 고향에 두고 이곳에 온 저는 정말 최선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언젠가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었으니까요.”
그의 말에 비화가 유리아를 슬쩍 보자 그녀 또한 어깨를 으쓱인다.
딱히 거짓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말이었다.
“맥거프 주방장이 얼마나 열심히 해왔는지는 다 알아. 지금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야.”
비화가 배신감을 담아 물었다.
“왜 배신한 거야.”
이유는 대강 알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안부를 묻는 편지였습니다. 제 동생 맥거펜 놈에게서 왔더군요. 비록 도박중독자지만 제 조카 놈까지 어떻게 해먹을 정도로 심성이 악한 놈은 아니었습니다.”
“맥거프 씨?”
“예. 유리아 미식연구회 부장님.”
“요점만 말해주시겠어요? 지금 제가 감정 조절이 잘 안 돼서…….”
생글생글 웃지만, 유리아의 미소 안에 서슬 퍼런 기세가 서린 게 보였다.
주방장 맥거프를 가장 믿은 것은 데이비도 비화도 아닌 유리아였을 것이다. 오랜 시간 같은 업계에서 협력을 해왔으니 말이다.
“편지가 왔습니다……. 맥거펜 놈이 대규모의 빚을 졌었더군요. 변변찮은 직업이 없이 용병의 일을 전전하는 맥거펜 놈이 갚기엔 너무 큰 돈이었습니다. 걱정을 담아 연락을 했을 때 놈은 큰 의뢰 몇 번을 성공시키면 갚을 수 있다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습니다.”
맥거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대금업체에서 막대한 이자를 붙인 건지 그가 돈을 갚지 않은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압박을 당한 동생 놈은…… 결국…….”
눈물을 머금으며 그가 머리를 땅에 찧었다.
“고리대금업체가 시키는 대로 제 아들놈을 납치해 숨겼습니다……. 그리고 제게 연락을 해왔더군요. 아들을 살리고 싶다면. 하인스의 기술을 하나 빼돌리라고…….”
“그래서. 지금 오라버니가 금지해놓은 기술을 빼돌렸다는 건가요? 맥거프 주방장이 어떻게?”
에오니샤가 충격과 분노를 담아 물었다.
“저하께서는 제게 연구실을 출입할 권한을 주셨습니다…… 예. 저하께서는 저를 믿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영지의 축제일을 빌미 삼아 그들에게 술과 고기를 가져다주는 척 수면 약을 탔고…….”
그 틈을 타 그곳에 있던 마법진식과 설계도를 영상구에 담아 그곳으로 보냈다.
충신이었던 맥거프가 이런 짓을 할 리도 없다고 생각했거니와 기술자나 연구자도 아닌 설마 주방장이 그것을 알아보고 유출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이…… 이이!!”
격분한 에오니샤가 그대로 달려들어 맥거프의 멱살을 잡았다.
“당신이 어떻게 그래!! 오라버니가 믿어주고 영지의 모든 이들이 당신을 가족처럼 대했어! 그런데 어떻게 그러냐고!! 그 기술이 함부로 유출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거지?! 그런 거지. 어?!”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끝나?! 잘못하면 엄청난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고! 수많은 이들이 죽는다는 말이야!”
“그래도……! 그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게 남은 건…… 아들뿐입니다. 맥거핀마저 잃게 된다면…… 돈 때문에 자기를 버리고 간 아비가 끝내 구하러 오지도 않는다면…… 그 아이에게 남은 건 절망뿐일 겁니다…….”
그는 힘없이 추욱 늘어진 채 오열했다.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본래라면 제 자리를 대신할 이들에게 인수인계를 마친 뒤 저하께 직접 자수하려 했습니다.”
“이익!”
쾅!
이를 악물고 그를 밀쳐낸 에오니샤가 씩씩거렸다.
“고모 일단 진정해요.”
“이게 지금 진정할 일이야?! 오라버니가 그 기술의 유출을 막은 이유는 단순히 욕심 때문이 아니야! 비록 사용할 수 없다 해도 흉내만으로도 많은 국가들이 기술을 얻으려 칼을 들게 뻔할 거야!”
평화를 지지한다 해도 국력을 순식간에 폭증시킬 수 있다면 선택하지 않을 멍청이가 없다.
“잘 알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지금 외부에 유출된 기술들을 전부 회수하러 가신 거잖아요.”
비록 완전히 회수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표면에 드러난 것들은 싹 쓸어 담기 위해서라도 나선 것이다.
“정말 실망이야. 맥거프 주방장…… 당신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어.”
“제 목은 얼마든지 내놓겠습니다. 하지만…… 제게 조금만의 시간을 주십시오…… 제가 아들을 구해낼 때까지만이라도…….”
“당신의 뭘 믿고 보내준다는 거지?”
“제 죗값은 반드시 받을 것입니다. 제가 만약 도망가고자 했다면……. 이리 말씀을 드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의 처벌을 잠깐이라도 유예해달라는 것이었다.
납치당해있는 아들을 되찾을 때까지만이라도.
“어떻게 할까요?”
유리아가 웃는 얼굴로 비화에게 물었다.
“아가씨가 총 책임자이시니까. 결단을 내려주세요. 맥거프 주방장의 목숨을 거두는 건 쉬운 일이지만…….”
“륀느. 저자를 감옥에 가둬줄 수 있어?”
“명령인수.”
륀느가 맥거프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끌고 그를 데리고 나간다.
“죄인일 뿐이니까. 그의 아들이 어떻게 되건 상관없다.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겠지만…… 영 뒷맛이 찜찜한 것도 사실이네. 그가 그동안 하인스 영지에 해온 것도 있는데…….”
“마냥 자기 욕심 때문에 배신한 게 아니라는 것을…….”
유리아와 비화, 그리고 에오니샤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아들에게 지극정성인 맥거프 주방장이 그동안 마음고생 한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처벌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솔직히 우연이긴 해도 완벽한 범죄는 아니었을 거랍니다. 며칠 정도 더 면밀하게 조사했다면 맥거프 주방장이 범인이라는 가설을 금방 좁힐 수 있었을 거예요.”
사실 그의 자수는 크게 의미가 없다. 그가 말하지 않고 숨어버려도 그가 범인이라는 건 얼마 가지 않아 찾아냈을 테니까.
하지만 그가 일부러 배신한 게 아닌 상황. 그리고 처벌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수한 상황을 참작해주는 게 맞지 않는가 하는 입장도 있었다.
“솔직히…… 맥거프 주방장은 몬미더 아저씨만큼 충직한 사람이야. 아까는 흥분해서 화를 냈지만…… 그가 죽는다는 건 좀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고.”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맥거프 주방장의 처벌은 그대로 진행하되…… 그 아이는 조금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에오니샤가 비화에게 말한다.
“비화 네겐 쉬운 일이잖아. 그 고리대금업자들. 아들을 납치하고 있다면 아직 있을 거야. 동생은 이미 죽었다고 하지만…….”
“지금부터는 공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거예요.”
범인을 찾은 이상 괜히 분위기가 뒤숭숭하게 들쑤실 필요는 없었다.
“맥거프 주방장의 처벌은 좀 더 생각해보되. 그의 아들을 일단 구해보죠. 그래도 몇 년이나 하인스 영지에서 직무를 다해온 사람이니까.”
“도와줘? 방법이야 찾아보면…….”
“아뇨. 륀느만 데리고 다녀올게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혹시 잘못되면 그들이 맥거프 주방장의 아들을 해칠 수도 있어.”
“잘 파고들어 봐야죠.”
비화의 결단에 에오니샤는 작은 체구를 이끌고 비화를 올려다보고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조카. 참 착하다.”
“그게 아니에요. 맥거프 주방장 이외에도 이번 일의 범인을 찾으려면 결국 맥거프 주방장의 아들을 찾아야 해요.”
“하긴.”
* * *
맥거프의 고향은 린디스 쪽이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라운 왕국으로 왔고, 데이비 올 라운이 하인스로 올 때 함께 파견되어왔었다.
맥거프의 아들 맥거핀을 납치하고 동생인 맥거펜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리대금업자들의 소재는 금방 파악했다. 이미 륀느가 한바탕 들쑤시며 찾아낸 것도 있고 워낙에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베르다륨 영지의 겔룹상단.
린디스 내의 고리대금업체 중에서도 특히 덩치가 큰 상단으로 상단주가 운영하는 대형도박장이 수십 개에 달하는 거대한 조직이기도 했다.
특히 린디스 황실과도 어느 정도 연줄이 있을 정도로 기반이 탄탄했지만 소문 자체는 좋지 않았다.
돈이 되면 뭐든지 한다. 사람을 잡아다 판다.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으니까.
비화의 입장에선 현재 겔룹상단은 그야말로 악귀의 소굴이었다.
“여기란 말이지.”
한숨을 내쉬며 거대한 도박장을 향해 걸어가는 비화의 곁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박자박 걸어오며 닭꼬치를 오물거리는 륀느가 있었다.
머리까지 뒤집어쓴 로브 때문에 그녀의 신변이 드러나진 않지만, 심장이 진화해도 자라지 않는 키 때문인지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륀느의 등에 다리안이 업혀있다는 사실이었다.
곤히 잠들어있는 다리안은 비화가 자리를 비우려는 걸 어떻게 눈치챘는지 아주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댄 탓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온 참이었다.
“후우. 좋아. 나 이런 거 한번 해보고 싶었어. 이런 느와르 같은 느낌.”
잔뜩 무게를 잡고 그녀가 선글라스를 쓰려 들자 륀느가 폴짝 뛰어 선글라스를 압수한다.
“매우 수상해 보이는 복장. 눈에 띄는 행동은 좋지 않다고 분석.”
“……그 맛을 모르네.”
투덜거려보지만 륀느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괜히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으니까.
“그럼 어떻게 하는 게 맞는지. 직접 보여주면 되겠네.”
그녀의 빈정거림에 륀느는 당당하게 가슴팍을 펴고는 콧김을 내뿜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고유능력인 입자를 뭉쳐 익숙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절그럭…….
아무렇지도 않게 묵빛의 빠루를 꺼내 드는 기행을 펼치자 비화는 선글라스를 써서 괜히 시선을 잡아끄는 것 이상으로 이년이 또X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고 눈에 띄지 말라 해놓고 뭐 하는 짓이야. 당장 안 집어넣어? 우리가 무슨 왈패도 아니고.”
“기밀을 유출시킨 장본인이라 판단될 경우. 그에 따른 대가를 징수해야 한다고 분석.”
“일단 들어가서 확인은 해야 할 거 아니야.”
“이들에게서 진실을 듣는 방법은 매우 간단. 가서 제압 후 위협할 경우 만족스러운 대답을 도출 가능.”
“아니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 난 눈에 띄면 안 된다면서.”
비화가 짜증스레 쏘아붙이자 륀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표정을 고수한 채 헛소리를 내뱉었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공구.”
“웃기고 자빠졌네. 빨리 집어넣어.”
다리안이 우웅거리며 뒤척이자 륀느가 뜨끔하더니 손에 쥔 빠루를 이리저리 움직이다 허공에 휙 던져버렸다.
파스스스…….
동시에 입자로 이루어진 빠루는 순식간에 빛의 입자로 흩어져 버렸다.
이후 몸을 이리저리 푼 비화는 로브를 벗어 야시장을 구경하러 나온 귀족 영애 같은 모습으로 이미지를 바꾸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표정관리 후 목을 한번 푼 뒤 도박장으로 들어선다.
고풍스러운 도박장은 사실 왈패들이 운영한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당연히 주 고객층은 귀족들.
그렇기에 귀족 영애처럼 보이는 비화가 들어선다 한들 이상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자. 그럼 어디 호랑이 잡으러 잠입해볼까?”
“어서 오십시오. 비화 대공녀님. VIP룸으로 모시겠습니다.”
“어?”
당혹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륀느와 눈을 마주친 비화가 인상을 찌푸리며 경계를 한다.
“뭐야. 내가 여기 올 걸 알고 있었어?”
“예 뭐…… 모를 수가 없으니까요.”
입구를 지키던 이. 지금 보니 단순한 문지기가 아니었다.
“넌?”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켈룹상단의 재무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트릭스터라고 합니다. 그나저나 무엇을 바라시고 이곳에 오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괜히 눈에 띌 수 있으니 조용히 모시겠습니다.”
“아닌데? 지금 나만큼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 말씀…… 농담이시죠?”
니들 꼴을 봐라 라는 시선에 비화와 륀느는 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비화는 외출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륀느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다.
아가씨와 호위.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호위의 등에 2~3살 된 작은 아기가 업혀 곤히 잠들어있는 이 꼴이 절대 시선을 안 모으곤 배길 수가 없다.
“다리안…… 누나를 방해하는구나…….”
“그전에 보통 영애분들은 이곳에 잘 오지 않으십니다.”
“됐고. 안내해.”
자존심이 상한 비화가 으르렁거리자 그는 떨떠름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도박장의 안쪽으로 안내했다.
“한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앞서 걸어 나가던 사내가 비화에게 물어오자 그녀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 말했다.
“너희 말이야. 사람도 납치해?”
“……무슨 말씀을…….”
“됐다. 이쯤 되면 사람도 없네.”
비화는 걸음을 멈춘 뒤 자그마한 룸 안에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리고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리를 꼰 채 말했다.
“잠깐 확인하려고 온 거야. 겔룹상단의 상단주, 데려와. 아니. 겔룹상단의 상단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거기 앉아.”
“…….”
놀란 듯 비화를 보는 트릭스터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무슨 말씀을…….”
“속이려 들지 말고 앉으라고.”
겉으론 정말로 가녀린 비화였다. 하지만 그녀가 내뿜는 기세는 이곳 곳곳에 숨어있는 은밀한 호위들이 움직일 생각조차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여신.
그녀가 행하는 모든 행동에는 호의가 깃든다. 그녀를 적대하는 것 자체부터 저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힘 빼지 말자고.”
비화가 오만한 자세를 유지한 채 트릭스터를 향해 말했다.
“맥거프 주방장의 아들, 맥거핀은 어디 있지?”
그녀의 물음에 트릭스터는 인상을 찡그렸다.
“맥거핀? 맥거프 주방장의 아들? 죄송합니다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개수작 부리지 마. 맥거프의 동생 맥거펜의 빚을 갚게 하려고 하인스의 기밀을 빼돌린 거잖아. 틀려?”
비화가 다시 한번 쏘아붙였다.
“무슨…….”
“맥거프 주방장의 아들을 납치한 뒤 맥거펜에게 편지를 쓰게 만들었거나. 맥거펜에게 직접 납치를 하게 만들었거나. 뭐 자세한 건 몰라. 하지만 이일의 뒤에 너희들이 관련되어있다는 건 네 부하를 통해 이미 들었어.”
비화가 설명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트릭스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죄송합니다만…… 저희도 미친놈이 아니라서 하인스 영지를 건드리진 않는데요.”
지금 제가 당신의 이런 행동에 극히 호의를 보이는 걸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이어지는 그의 뒷말에 비화가 인상을 찡그린다.
“하인스 영지를 건드리면 안 되는걸 아는 놈들이 기밀을 빼돌리게 만들어?!”
비화의 몸에서 심상찮은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막무가내식 압박이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자, 잠깐만요! 대공녀!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오해는 얼어 죽을! 죄다 건져서 지구의 사해에 던져버릴라!”
“지…… 진짭니다! 저희가 맥거펜에게 요구한 건 맥거프 주방장에게 연락해서 그의 연봉으로 돈을 갚아달라 부탁시킨 것뿐입니다!”
“……기밀유출을 시도한 게 아니라고?”
영혼은 한없이 안정적이다. 거짓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미쳤습니까? 저희 업계에서 하인스는 쳐다도 보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 일이면 저희도 좀 당당하게 요청할 수 있겠다 싶어서…… 맥거프 주방장의 월급으로 돈을 좀 대신 갚아달라 요청해보라고 하긴 했습니다만.”
트릭스터의 황당한 대답에 비화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맥거핀을 납치한 건 누구라는 거지?
분명 겔룹상단의 부하는 이들이 맥거펜의 돈을 갚게 하기 위해 아들을 납치하고 뭔가 계획을 벌였다고
비화가 곰곰이 생각하던 찰나였다.
“맥거프 주방장은 너희들이 맥거펜을 죽이고 주방장의 아들 맥거핀을 납치한 채로 기밀을 요구했다고 들었는데.”
“그걸 확인하러 오신 겁니까?”
“원래는 다 부숴버릴 생각이었어. 그런데 조금 신중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안도의 한숨을 내쉰 트릭스터가 고개를 떨군다.
“다행이군요. 저희가 말씀드릴 건 하나뿐입니다. 저희는 기밀을 빼돌리라 말한 적도 없고, 맥거펜을 죽인 적도 없습니다. 어느 날 그의 시체가 골목길에서 발견된 게 전부였죠.”
“너희가 죽인 게 아니야?”
“저희 돈 갚아야 할 놈을 뭐하러 죽입니까. 대공녀. 우리가 비록 왈패에서 시작했다곤 하지만 이 정도로 커지려면 최소한 선은 지키는 법입니다. 소문으로 사람 장사니 뭐니 하지만 그런 게 됐으면 린디스 황실에서 저희를 그냥 뒀겠습니까? 이미 다 끌려가서 머리통이 몸과 이혼했겠지.”
손으로 제 목을 날리는 시늉을 하며 그가 손가락을 튕긴다.
동시에 주변의 기척들이 옅어졌다.
“이렇게 된 거 다 말씀드리죠. 그 소문은 아마 저희를 음해하려는 경쟁세력의 짓이 아닐까 싶습니다.”
“경쟁세력?”
“네. 아마 맥거펜의 조카를 납치한 것도 그들의 행동일…… 커헉!!!”
트릭스터는 말을 끝내 마무리 짓지 못했다.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비화의 전신에서 묵직한 투기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네가 한 말은 믿겠어. 거짓말을 할 때마다 영혼이 이렇게 흔들릴 정도면 넌 절대 거짓을 잘 말하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커헉…….”
“나를 이용해 경쟁자들을 제거하려고?”
“사…… 살려…….”
“야. 내 눈 똑바로 봐.”
비화가 놀라우리만치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자 트릭스터는 벌벌 떨기 시작했다.
“네 눈에는 내가 단순히 의도해서 시키면 대신 처리해주는 심부름꾼으로 보였어? 내가 우습게 보였나 봐?”
“죄…… 죄송합니다. 하…… 한번…… 커헉!!”
고통스러운 듯 부들부들 떨던 트릭스터는 곧 비화가 기세를 거두나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바닥에 쓰러졌다.
“두 번은 없어.”
“죄…… 죄송합니다.”
“너희가 아니라는 건 대강 알았으니 더는 볼일 없어. 아 참. 맥거펜을 너희가 죽인 게 아니라고?”
“…….”
대답하지 않는 그를 향해 비화가 표정을 지운다.
“콱 씨…….”
“정말 아닙니다! 저희도 피해자라고요!”
이놈들을 족치면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십니까?”
“다음에 또 올지 몰라.”
“저희가 아는 건 다 말씀드렸습니다.”
그의 말에 비화는 등 뒤로 가운뎃손가락만 슬쩍 올려 보여준 후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 * *
겔룹상단을 빠져나온 비화는 오랜만에 찾아오는 허탈함에 주변의 디저트 가게를 찾았다.
린디스에서도 제법 큰 도시인만큼 있을 것은 다 있는 모양이다.
“다시 원점이네. 맥거펜을 죽이고 주방장의 아들을 납치한 놈은 기밀을 유출시킨 놈이야. 그 실마리가 겔룹상단인 줄 알았는데 그놈들은 그냥 뒤집어쓴 놈들이지 관계가 없다니…….”
“거짓을 말할 가능성을 염두.”
“진짜 어지간한 게 아니고서야 영혼의 색까지 속이는 건 쉽지 않아. 적어도 트릭스터 그놈은 정말로 모르는 듯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신력도 쓸 수 있도록 허락받아보는 건데.
그렇게 투덜거리는 비화를 보며 잠에서 깬 다리안의 양 겨드랑이를 잡아 높이높이~를 해주며 둥기둥기해주던 륀느가 말했다.
“하지만 흔적의 소실. 누군진 몰라도 제법이라는 판단.”
실제로 이만한 일을 저지른 게 개인이라곤 여겨지지 않는다. 개인이 얻기엔 정보의 한계는 명확하니까. 게다가 중요한 단서가 되어줄 맥거펜이 죽어버렸으니.
그때 가만히 있던 다리안이 누군가를 향해 아우! 아우! 거리며 시선을 잡아끌었다.
마치 그를 알아본 것처럼 행동한다.
이에 로브를 뒤집어쓴 인영이 약간 놀란 듯 움찔하더니 다가와 말을 걸었다.
“죽어버렸다라…… 그놈. 죽은 거 확실한 것이냐?”
다리안의 돌발행동에 시선을 돌린 륀느와 비화도 제법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이 본 곳에는 로브를 뒤집어쓴 익숙한 얼굴이 그녀들을 보고 있었다.
바로 이 땅의 주인이자 황제인 데오르트 황제였다.
“하…… 할아버지!”
“어이쿠!”
비화가 반가움을 담아 그대로 노인에게 달려들어 안기자 그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비화를 토닥인다.
“그래그래. 이전엔 에린이를 보고 이번엔 비화 너를 보는구나. 이야기는 네 아빠에게 전해 들었다. 조사 중이라고.”
“네! 할아버지는 왜 여기에…….”
“간단히 도시를 순방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혹여 모르니 할아버지의 정체는 숨겨주면 좋겠구나.”
그의 인자한 미소에 비화는 그의 팔을 잡아당겨 자리에 앉혔다.
인지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확인이 안 되는 인식저해 로브까지 입고 있으니 그가 이 나라의 황제라는걸 알아보는 이는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할아버지. 이것도 드셔보세요.”
“꺄우!”
데오르트를 보자마자 기분이 좋은 듯 양팔을 뻗는 다리안의 행동에 그는 세상 행복한 얼굴로 다리안을 품에 안는다.
“어이쿠. 이 요망한 녀석. 할애비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을 아는구나.”
다리안이 꺄르륵 거리며 그의 몸에 얼굴을 비비자 데오르트의 표정이 더욱 풀어진다.
“한데. 조금 전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황이 우습게 돌아가는 듯하더구나.”
“그게…….”
“비화야. 조금만 시선을 돌려보거라.”
“시선이요?”
“맥거펜. 그놈. 정말 죽은 게 맞느냐?”
“그야 죽었다고…….”
“시신은?”
“…….”
그러고 보니 맥거펜의 시신은 직접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