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417화 (1,417/1,559)

제 1417화

가상공간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느껴진 감촉은 다리안이었다.

녀석은 페르세르크와 나 사이에 누워 곤히 잠들어있었다.

“데이비?”

“쉿.”

많이 더웠는지 이불도 걷어차고 배를 드러낸 채 자고 있는 녀석이 퍽 귀여워 시트를 덮어주려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다리안.

분명 가상공간 내에서 본 것도 다리안이었다.

녀석이 이곳에 있는 건 우연일까.

페르세르크도 다리안의 모습에 사랑보다는 혼란스러움을 느끼는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저건…….”

그때 내 시야에 비친 것은 누가 사용했던 것처럼 보이는 장비였다.

“설마…… 다리안이 정말로?”

그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우리가 들어가 있는 동안 다리안이 몰래 따라 들어와 사고를 친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우리는, 이 아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나는 곤히 잠든 다리안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자리에서 조심스레 일어났다.

“데이비.”

“우선은. 확실한 게 없으니까.”

그리고는 뒤늦게 깨어나는 코오나를 깨워냈다.

“어?”

“쉿. 다리안 자고 있으니까 조용히.”

“아…….”

코오나는 조금 전 원시 차원을 개박살 냈던 게 다리안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우선은 자게 두자. 확실한 건 없으니까.”

하지만, 다리안이 정말로 비화의 접속장치를 이용해 안에서 날뛴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리안. 넌 뭘 숨기고 있는 거냐.”

* * *

분위기가 무겁기 그지없었다.

에이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고, 일리나는 굳은 표정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럴 리가…… 다리안은 분명…….”

“알다시피 접속장치에서 나왔을 때 다리안은 분명 내 곁에 있었어, 문제는 저거지.”

내 설명에 한켠에 앉아 접속장치를 확인하던 비화가 한숨을 내쉰다.

“아빠 말이 맞았어요. 다리안이 접속한 흔적이 있어요.”

그 말에 에이리아는 머리가 아픈지 고개를 푹 숙였다.

가녀리게 떨리는 손이 다리안을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어떻게…… 다리안이…… 다리안은 아직 어린애예요!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애가 어떻게 세상을…….”

“가상세계에서 본 다리안은 어린아이가 아니었어. 적어도 하나는 확실해.”

다리안의 안에 뭔가가 잠들어있다는 것을 말이다.

“넬타리드의 예언.”

비화가 중얼거렸다.

“아빠. 기억해요?”

“음?”

“넬타리드가 죽기 전 그런 말을 남겼잖아요.”

-꽃이 지고, 하늘이 높아질 때.

-신령의 운명을 지닌 신자(神子)가 자신의 운명을 거스를 단 한 번의 기회를 얻는다.

“아빠가 해준 이야기였잖아요.”

“그랬지.”

“어쩌면 그 신자라는 건 다리안을 말하는 걸지도 몰라요. 그리고 꽃이 지고, 하늘이 높아진다는 말은…….”

“가을…….”

마침 시기가 가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모든 게 들어맞는다.

“다만, 운명을 거스를 단 한 번의 기회를 얻는다는 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선대 넬타리드의 기억을 읽어보려 해도 그거에 관해선 볼 수가 없으니.”

“그럼 그 솔로모니아에게 물어보는 건 어때?”

너무 잘 들어맞았다.

즉. 이번 일에 솔로모니아도 관련이 있을 거라는 것이 일리나의 판단이었다.

“그렇지않아도 레이나에게 부탁했는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린다.

“찾으셨나요.”

“어우야…….”

“우선 죄송하지만, 그의 영역에서 그의 감시를 피하는 건 불가능했어요.”

“그가 남긴 말은 없어?”

그 물음에 레이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더군요. 그저 여신께서 시키신 일만 할 뿐이라고.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라고 꼭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결국, 조사는 행했으나 솔로모니아에게 들켜버린 게 문제였다.

“그놈이 범인일까?”

“아닐 거야.”

“근거가 있어?”

“감.”

지금으로선 할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비화야. 미안한데. 당분간 다리안 좀 감시해줘.”

아들을 의심해야 하는 이 상황이 거지 같긴 하지만…… 별수 없다.

“아. 그리고. 거품 세계에 당분간 진입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거품 세계에 진입하지 말라고?”

“네. 문제가 생겼다고 하네요. 자칫 차원 사이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 해결할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달라고.”

“그래…… 당분간은 다리안의 상태를 좀 지켜보자고.”

“그게 맞겠네. 거품 세계에서 본 다리안이 정말 다리안이 접속해서 보인 모습이라면 거품 세계 속의 그것들을 찾는 것보다 다리안의 변화를 확인하는 게 옳을 테니까.”

만약 다리안과 그때 만난 녀석이 완전히 다른 녀석이라면 헛다리를 제대로 짚은 셈이 되겠지만 적어도 다리안이 접속장치를 사용했다는 정황이 드러난 이상 다리안이 그때 본 그 성숙한 다리안과 동일인물이라는 쪽으로 의심이 흘렀다.

* * *

촉수를 일렁거리며 솔로모니아는 하나뿐인 눈동자를 꿈틀거렸다.

“기이하네요.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그는 그의 앞에 떠오른 다수의 거품 세계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어리고, 불안정한 차원들이다. 그렇기에 지속적인 케어가 필요하고, 안정적인 보이드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하지만 데이비가 원시 차원에 넘어간 뒤 그곳에서 만난 존재와 충돌한 뒤로 모종의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차원이 어떤 거대한 무언가에 영향을 받으며 비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그 영향력이 거품 세계를 넘어 가상공간에 퍼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즉.

자칫 그 영향이 지구에서 접속하고 있는 인간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것만큼은 피해야겠지요.”

여신은 자신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죄인에 불과한 자신들.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자신들에게 용서의 기회를 주었다.

자신들이 할 일은 여신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뿐이다.

“이런!”

그때 거품 세계 중 하나가 맹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고 솔로모니아는 황급히 그것을 간섭해 안전 지역으로 옮겼다.

하지만 그중 일부가 마치 저항하듯 솔로모니아의 몸에 상처를 남겼다.

황급히 그것을 다시 제압하려 해보지만, 솔로모니아의 힘으론 그것을 온전히 막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오래 못 버티고 사멸하겠네요,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솔로모니아의 손에서 벗어나 거품 세계가 있는 가상공간의 루트를 타고 사라져버린 불길한 무언가가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지구.

최근 신성 그룹에서 다시금 내어놓은 가상현실게임에 한창 빠져있던 박우성은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들과 잔뜩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끅! 야. 그러니까 그때 니가 치고 들어갔어야 했다니까.”

“미친. 거 들어가면 한 대 맞고 곧바로 묘비 행인데 뭔 소리냐. 개소리 그만하고 들어가서 발 닦고 잠이나 처자세요~”

술에 잔뜩 취한 친구 하나와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사내 한 명.

흔히 밤거리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야. 내일 수술이지?”

그때 술에 잔뜩 취한 친구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그를 부축하던 청년이 쓰게 웃었다.

“그래. 내일이다. 새끼야.”

“그래. 이번엔 진짜 잘 될 거다…… 내가 끅! 보증할게. 너희 부모님 반드시 쾌차하실 거다.”

“x랄 크흐흐. 그래도 고맙다. 네 덕분에 어머니 수술비도 마련했고…… 이 은혜는 절대 안 잊으마.”

“웃기지 말고 끅! 나중에 고마우면 밥이나 사 새끼야. 돈 제때 갚고.”

“걱정 마라…….”

박우성은 십년지기 친구 병철의 씁쓸한 미소를 보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비틀거리듯 홀로 섰다.

“됐다. 나 들어갈 테니까 너도 어여 들어가.”

“괜찮겠냐?”

“안 괜찮을 건 뭐야. 걱정 말고 가라. 이 앞에 집인 거 알잖냐.”

이에 병철은 실소를 흘리며 우성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고맙다 박우성. 진짜 이번 은혜는 절대 안 잊으마.”

“웃기지 말고 빨리 가세요~”

기묘한 몸동작을 보이며 손을 휘휘 젓는 그를 보며 병철은 돌아섰다.

그때였다.

“아 맞다. 박우성. 일주일 뒤에 약속한…….”

떠나기가 아쉬워 잠시 돌아보고 일주일 후에 있을 약속을 되짚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병철은 갑자기 근처 가로등에 버려져 있던 벽돌을 집어 들고 덤벼드는 우성을 볼 수 있었다.

빠아악!!!

섬뜩한 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 * *

-어제 새벽 2시경. 술을 마시고 돌아가던 안 모 씨가 친구 박 모 씨에게 피습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행인의 난입으로 살인은 미수에 그쳤지만 박 모 씨는 마치 극도로 분노한 것처럼 경찰에 붙잡힌 후에도 몇 시간이고 난동을 부린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원한 관계를 되짚고 있지만, 피해자인 안 모 씨의 증언과 두 사람이 평소 막역한 관계였다는 사실 때문에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일각에선 특수한 힘을 지닌 각성자의 소행이 아닌가 말이 나오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가상현실게임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정신착란이 온 것이라는…….

삑…….

“아…… 진짜!!”

현아는 집무실 책상에 앉은 채 비명을 지르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현아의 언니, 연희가 들어와 결재 서류를 내려놓았다.

“현아야. 무슨 일 있어?”

“어…… 있어…… 회사 주식 퍽퍽 떨어지는 일…….”

“음? 무슨 일인데?”

“살인미수 사건이 터졌는데…… 일반적인 케이스가 아니라서 문제지.”

“흐음…….”

“하…… 대체 또 무슨 일이래…… 안 그래도 각성자 범죄가 심심찮게 일어나서 말도 못 하게 피곤한데…….”

각성자가 관련되었건, 가상현실이 관련되었건 신성 그룹이 시끄러울 거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갑자기 공격했다는 거야?”

“그래…… 엄청 친한 사이라는데. 갑자기 돌변했데. 피해자는 병원에 있고. 가해자는 계속 난동부리다가 갑자기 의식을 잃어버렸고.”

경찰이 할 일이지만 이번 일로 인해 소문이 무성해지면서 괜히 신성 그룹도 피해를 본 상황이었다.

“맘 편히 가져. 경찰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랬으면 좋겠는데…….”

물론 고민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현아의 아침은 늘 있듯 조깅으로 시작된다.

늘 그렇듯 달라붙는 운동복 차림으로 새벽 운동을 나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녀에겐 제법 익숙한 일이기도 했다.

어둑어둑한 시각. 사람이 거의 없는 거리가 아니면 괜히 시선을 끌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후웁…… 후웁…….”

숨을 고르며 열심히 뛰던 그녀는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누군가가 따라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잘못 본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달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착각이 아님을 깨닫는 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녀를 따라오고 있다.

묘한 불안함이 앞섰다.

그렇지않아도 얼마 전 근처에서 살인미수 사건이 터지지 않았던가.

범인은 잡혔지만 느낌이 너무 이상했다.

천천히 내달리며 침착함을 유지하던 그녀는 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는지 빠르게 따라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확신했다.

‘재수가 없으려니…….’

이에 속도를 더욱더 올린 그녀는 순간적으로 골목 쪽으로 방향을 틀며 몸을 숨겼다.

잘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새까만 옷을 입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체격을 지닌 인물이 그녀가 있던 곳까지 뛰어왔다가 이리저리 둘러보고 사라지는 것을 확인했다.

“진짜 별별일 다 겪네…….”

한숨을 내쉰 그녀는 일회성 문제이기를 빌었다. 괜히 잘못 엮인 것이라면 귀찮아질 테니까.

하지만. 며칠 동안 그녀를 따라붙는 이가 계속되었고.

-오늘 새벽 5시경. 한강 대로변에서 50대 남성이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피해자의 복부에는 자상이 수십 차례 나 있었고 얼굴을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둔기를 내리쳐 잔인하게 훼손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이번 사건이 너무 기이하며, 흔적이 하나도 남지 않은 점을 미루어 각성자 범죄일 가능성이 크다는…….

“…….”

현아의 눈이 가늘게 뜨여졌다.

사고현장은 다름 아닌 새벽에 현아가 조깅을 하던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위치상, 인적이 드문 곳에서 운동을 하는 편인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아가씨.”

그때 문이 벌컥 열렸고 현아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새언니?”

“무슨 일이에요. 그렇게 놀란 얼굴로.”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며칠 전 거래 건으로 하인스에서 잠시 지구로 넘어와 있던 일리나를 보며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새언니…….”

“말해봐요.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그 물음에 현아는 잠시 고민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심상찮았다.

“그보다 새언니도 좀 피곤해 보이시네요. 좀 쉬시지.”

“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

“별일 아니긴요. 그 세 발 낙…… 아니 오빠도 보니까 표정이 안 좋던데. 하인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럼 다행인데…….”

“아무 일도 없어서 더 걱정이네요.”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건만. 너무 고요한 게 오히려 일리나의 심기를 불안하게 만든다는 걸 현아는 아직 몰랐다.

“네?”

의아한 표정을 짓는 현아였다.

“아. 별거 아니에요. 아가씨. 그보다. 조심해야겠어요. 뉴스를 보니 살인사건이 연달아 터진 모양이던데.”

“실은 그것 때문에 고민 중이에요.”

“네?”

“실은…….”

현아는 새벽 조깅을 할 때마다 느껴지던 불온한 기운을 털어놓았다.

“세상에…… 그렇게 위험한데 계속 운동을 했단 말이에요?!”

“보안경호팀에서 매번 따라와 주고 있어요. 다만, 그렇게 보안경호팀이 따라붙으면 거짓말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요.”

현아의 중얼거림에 일리나가 눈을 감았다.

“아가씨. 매번 같은 운동복이죠?”

“네? 아. 네.”

“으음…….”

체격도 비슷하고…….

잠시 중얼거리던 일리나가 현아의 손을 꼭 잡았다.

“그 범인. 확인해볼게요.”

일리나의 호언장담에 현아가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녀라면 든든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일리나는 현아의 운동복을 빌려 입은 채 현아가 늘 하는 것처럼 조깅을 나섰다.

사람 하나 잘 보이지 않는 거리. 누구 하나 습격당해도 바로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안개도 상당하다.

보안경호팀이 있으면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혼자 있는 모습을 보여야 움직일 것이다.

데이비가 있으면 그에게 맡겼겠으나. 데이비는 페르세르크와 비화 등등과 함께 다리안에게 정신이 팔려있다.

이것까지 신경을 쓰게 할 순 없었다.

터벅…… 터벅…….

그때였다.

일리나는 자신을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를 정확하게 감지했다.

‘사람이 있어? 한번 확인해볼까?’

일라는 가볍게 속도를 올리며 조깅을 이어나갔고. 아니나 다를까 그녀를 따라오는 발소리도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무난하게 따라오고 있어. 체력은 좋은 인간이야.’

전력으로 달리면 따돌리는 일이야 쉽지만 이번 일은 따돌리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현아를 노리는 이가 정말 있다면. 그를 잡는 게 우선일 테니까.

일리나는 지친 척 연기를 하며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고. 상대 또한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그가 움직이는 것을 보기 위해 더욱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아가씨를 노리고 범행을 저지르는 건가? 아니면…….’

뭐가 되었건 확인해봐야 알겠지.

이윽고 상대가 갑자기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고, 일리나는 겁에 질린 척 연기하며 비명을 지르고 빠르게 달렸다.

“꺄아아악!”

턱! 턱! 턱!

상당한 속도로 그녀의 뒤를 금방 따라잡는다.

일리나는 지친 척 넘어지는 시늉을 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사…… 살려주세요!!”

고개를 숙인 채 살려달라 외쳐보지만, 상대는 마치 다 잡은 물고기를 다지듯 천천히 다가왔다.

“너희는 왜 살려달라고만 해? 나는 너희들을 죽일 건데.”

“살려주세요…….”

“있잖아. 아가씨. 나도 사람을 여럿 죽여봤지만, 최근엔 참을 수가 없더라고……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는 거야. 당장이라도 마구잡이로 헤쳐서 찢어버리고 싶다고.”

“흐…… 흐흑…… 제발…….”

고개를 숙인 채 일리나는 상황을 파악했다.

상대가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턴가 힘도 넘치는 기분이고. 그러니까……. 저항하지 마…… 죽이기 어렵잖아. 안 그래? 깔끔하게 들어가야 덜 아프지…… 크흐흐흐…….”

서슬 퍼런 말과 함께 사내가 칼을 잡지 않은 손으로 주저앉은 채 몸을 웅크리는 일리나의 후드를 벗겨내려 들었다.

“아아…… 아아아!! 아아 화가나!!!”

스르륵…….

일리나의 후드를 걷어낸 뒤 그녀에게 칼을 찔러넣으려던 그였다.

그의 손이 일리나의 후드에 닿으려던 그 순간.

그의 손이 마치 잔상을 훑은 것처럼 허공을 갈랐다.

“읏?!”

“역시 이상해.”

파악!! 순식간에 그의 옆에서 나타난 일리나가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고 발로 그의 다리를 걷어차 넘어뜨렸다.

“컥!!”

생각지도 못한 반격에 쓰러진 그가 숨을 크게 내뱉는다.

사내는 자신이 쓰러졌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는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이내 일리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야 너. 너 누구야.”

“그러는 당신은 누구신데?”

“내가 묻잖아!!!”

갑작스레 급발진하듯 소리친 그가 칼날을 일리나에게 겨누었다.

“너 뭐냐고.”

일리나는 제법 얼굴이 알려져 있다. 물론, 모두가 그녀를 알아보아야 한다는 건 아니기에 새삼 이상할 건 없었다.

“새벽에 사람 찌르려는 인간이 왜 이렇게 뻔뻔해?”

“아…… 아아아아…….”

그는 안절부절못하듯 주변을 둘러보더니 갑작스레 악을 쓰며 분노하기 시작했다.

“하…… x발 화가나 죽겠는데 별것들이 다 설치네 진짜!!!”

격하게 소리친 그가 일리나에게 칼을 더욱 들이밀었다.

“너. 곱게 죽을 생각하지 마. 지금 내가 화가 나서 미칠 거 같거든?”

그가 칼을 들이밀었다.

이에 일리나는 담담하게 물었다.

“그전에 하나 물어보자. 당신. 왜 우리 아가씨를 노린 거야?”

“아가씨?”

“당신이 새벽마다 쫓아다니던 사람.”

그 물음에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년……. 맛있게 생겼잖아.”

“뭐?”

“칼로 찌르면…… 얼마나 맛있는 비명을 지를지…… 궁금하기도 하고……. 화가 나서 일단 보이는 대로 잡았는데. 생각보다 손맛도 있을 거 같아서 노렸지. 그런데. 이런 거 묻고 있을 땐가?”

“그럼?”

“도망치던지 살려달라고 빌던지.”

“내가 그래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너 죽어.”

그가 스산하게 말했다.

“너 지금 나한테 찍힌 거야. 세상 어디로 도망가도 나한테 죽어.”

그의 말에 일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 너 같은 새끼가 구제가 안 되는 놈이라.”

“크…… 크흐…… 당돌하네. 미안한데 넌 그냥 곱게는 못 죽이겠다. 살점 하나하나 발라…….”

말을 하던 사내의 눈이 순간적으로 크게 뜨여진다.

방금 전까지 그의 앞에 있던 일리나가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칼을 찌를 틈도 없이 그의 뺨을 향해 일리나의 손바닥이 날아든다.

일리나의 서슬 퍼런 금빛 눈동자가 그의 시야에 담겼다.

“이 악물지 마. 어차피 악물어도 다 깨질 테니까.”

콰아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사내의 몸이 수차례 구르며 날았다.

충격과 함께 그가 쓴 모자와 후드가 벗겨졌고 일리나는 쓰러진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 마스크를 벗겼다.

그러자 치아가 완전히 박살 나버린 채 입을 벌리고 있는 그의 흉한 몰골이 드러난다.

처음 보는 사내였다.

애초에 일리나가 지구에서 아는 인물이야 그리 많지 않지만 말이다.

“아가씨. 잡았어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일리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사내의 피부에서 흘러나온 검은 무언가가 스르륵 빠져나오더니 그대로 일리나의 손등에 닿았다.

파직!!

“앗 따가!!”

갑작스런 통증에 놀란 일리나는 반사적으로 잡히는 것을 손으로 베어버렸다.

그러자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파스스하며 흩어진다.

“이게…… 뭐야?”

* * *

거대한 핏빛의 에너지 줄기.

그 에너지 줄기 중 하나가 검은 불길에 휩싸인 다리안을 꿀꺽꿀꺽 삼켰다.

“별것도 아닌 게 오만하기는…… 아오. 망할!!”

콰앙!!

분노한 듯 검은 화염에 붉은빛이 서린 청년이 주변의 닿는 것을 박살 내버렸다.

“화가나……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그는 그의 뒤편에 멍하니 서 있는 거대한 거인을 노려보았다.

거인의 몸은 온몸이 만신창이였지만 고통스러운 신음조차 내지 않고 멍하니 있었다.

그때였다.

“아야!!”

앉아 있던 청년이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떨었다.

“뭐야. 실패했어?”

그때 자신이 내보낸 힘이 무언가 강한 힘에 의해 파쇄된 것을 느꼈다. 그로 인해 끔찍한 고통이 그의 분노를 더욱 자극한다.

그는 곧바로 격노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되는 일이 없어!! 시간도 없는데!”

* * *

같은 시각.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존재. 태초의 의지 프리아 여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본래라면 다리안으로 인해 한 아이의 운명이 종언을 맺었겠지.”

과거엔 몰랐지만, 미래에는 없는 유일한 한 존재가 있다.

비록 세계 선이 달라져 평행선이 되었어도 그 미래는 변치 않는다.

과거와 미래. 모두를 통틀어 유일하게 없어져 버린 한 명이 존재한다는 걸 데이비가 아직 깊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조용히 중얼거린 그녀는 그녀의 발치에 있는 연못에 비치는 데이비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네 막내아들이 만들어준 인도자의 변수. 넬타리드가 남긴 의지의 변수. 비록 시련이 고될지라도…….”

미래의 네가 끝없이 바랬던 것처럼 이번엔…… 반드시 지켜보렴.

그것이 신이 되어서도 너를 아끼고 사랑하려 했던 넬타리드가 남긴 마지막 보답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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