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20화
분노와 탐욕의 싸움은 그야말로 갑작스레 벌어졌다.
마치 하나 남은 의자를 놓고 둘이서 서로 앉기 위해 싸우는 것처럼.
서로를 먹이로 판단한 맹수들이 싸우는 것처럼.
이들은 말 대신 상대를 찢어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7죄라고 해서 서로가 같은 편은 아니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뿐. 사실상 다리안의 내면은 말 그대로 콩가루나 다름없었다.
쩌어엉!!!
다리안이 가상공간에 접속함과 동시에 빠져나온 탐욕은 말 대신 기이한 힘으로 분노를 몰아붙였다.
팅!! 달그라라라라락!!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분노의 신형이 마구잡이로 짓눌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변화가 일어난다.
당연히 분노는 막대한 힘을 일으키며 탐욕을 압박해 들어갔다.
분노가 가진 힘은 대부분 분노라는 감정에 기인하듯 그의 격노가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섬뜩한 맹수의 포효처럼.
분노의 공격에 정체 모를 화염이 솟아나며 탐욕의 몸을 빠르게 불태웠다.
상대를 찢어 죽이려는 분노와 그런 공격을 방어하며 간간이 방어하는 탐욕.
처음엔 비슷한 듯 보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탐욕이 점차 밀리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흐…… 흐흐…….”
묵묵히 싸워나가던 탐욕의 입에서 기인한 웃음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탐욕이 입을 쩍 벌리고는 무언가를 물어뜯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분노가 일으킨 정체불명의 화염이 스르륵 하며 흩어졌고.
오히려 탐욕의 양손에 분노가 일으켰던 화염이 서린다.
상대의 힘을 먹어치운 뒤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포식의 권능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포식이라고 하기엔 뭔가 많이 이질적이었다.
탐욕은 이름 그대로 탐욕스럽게 모든 것을 훔쳐 왔다.
탐욕이 지닌 기이한 힘에 이어 남의 것을 훔치는 듯한 힘.
이들이 가진 힘은 다리안의 가능성이 가진 본래 영향력에 기반하여 자신의 힘을 만들어냈다.
분노는 자신의 힘을 빼앗겼음에도 탐욕을 향한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순식간에 파고들어 탐욕을 짓누르듯 제압한다.
탐욕의 손이 튕기고 동전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분노의 육신이 또 한 번 크게 휘청거렸지만, 분노 또한 정상은 아니었다.
자신의 한쪽 팔이 불타건, 기이한 소리와 함께 비틀어지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 탐욕을 마운트하듯 잡아 미친 듯이 내리쳤다.
그럴 때마다 주변 지형이 찌그러지고 가루처럼 분해되듯 흩어져나갔다.
탐욕 또한 어떻게든 버텨내기 위해 저항했지만 처음 힘을 빼앗았을 때와 재사용에 시간제한이라도 있는지 분노의 힘을 빼앗지는 못했다.
그렇게 수차례 내리쳤을까.
계속해서 맞던 탐욕이 양손을 강하게 부딪치자 동전 다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분노의 주먹을 탐욕이 처음으로 정면으로 막아냈다.
터어엉!!
갑작스레 힘이 강해진 탐욕을 보며 분노가 당황한 듯 흠칫 놀랐다.
그리고. 탐욕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분노에게 역으로 강력한 한방을 먹인 뒤 거리를 벌렸다.
분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화염을 빼앗는 것처럼 분노의 힘을 강탈한 것은 아니었다.
대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갈망하여 얻어낸 것처럼 보였다.
“하. 어이가 없네. 남이 가진 힘이 그렇게 탐이 났나?”
“크…… 크흐……. 그러게 왜 그런 힘을 가지고 있어. 열 받게 시리.”
묵직한 분노를 심해에 깔고 있는 분노와 달리 탐욕이 내비치는 화는 그리 깊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탐욕의 안광은 가지지 못한 것을 더욱 가지겠다는 일념이 강해 보였다.
“됐고. 너는 내가 반드시 찢어 죽인다.”
“네가 가진 거…… 전부 다 내놔.”
뒤가 없는 미친 가능성들은 자신들이 하던 것조차 다 내려놓고 서로를 찢어발기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비화의 덫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왜…… 왜 니들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데?”
탐욕이 남이 가진 힘을 끝없이 갈구한다면.
지금 나타난 녀석은 남이 힘을 가지는 걸 절대 두고 보는 놈이 아니었다.
투우우웅!!!!
분노와 탐욕이 싸우는 공간에다가 막대한 공진 폭발을 일으켜버린 또 다른 다리안이 모습을 드러낸다.
막대한 힘이 서린 공진 폭발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분노와 탐욕은 동시에 범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완전히 반파된 크레이터 속에서 세 명의 검은 화염에 둘러싸인 다리안이 삼파전을 하듯 서로를 노려본다.
“쿨럭. 이 x발! 저 새낀 또 뭐야!!”
분노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내가 아니고 다른 놈이 기회를 잡는다고? 난 그 꼴 못 봐. 내가 못 들어갔는데 다른 놈들이 본체에 남아 있겠다고? 난 그 꼴 못 봐!! 전부 끄집어내 주겠어!”
탐욕이 빼앗아서 자신이 위로 올라가려 한다면, 질투는 모두를 끌어내려 같이 나락으로 빠지는 존재였다.
비화의 계략에 의해 추가로 다리안의 혼에서 쫓겨난 7죄종.
그중 일좌인 질투가 참전했다.
* * *
생각보다 원죄들이 금방 쫓겨나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분노처럼 막대한 힘을 지닌 경우엔 희생이 뒤따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원죄들은 서로 협동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적대하는 편이었다.
그것이 남은 가능성이 힘을 합쳐 저들을 쫓아내는 데에 성공한 이유이기도 했다.
서로 간에 이런 위협이 있다는 정보조차 공유하지 않은 녀석들은 하나하나 은밀하게 기습을 당했고. 쫓겨난 참이었다.
물론, 한번 쫓겨난 것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깨닫고 돌아가려 하지만.
솔로모니아가 미리 준비해둔 차원에 유인된 그들은 다른 곳으로 피하지도 못한 채 그곳 안에 모조리 갇혀 저들끼리 물고 뜯고 싸우며 서로를 방해했다.
삼파전으로 이어진 전투는 점차 결과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꼬여갔다.
그런 와중에 다리안과 이어진 통로를 통해 몇 개의 움직임이 더 발생했다.
바로 인색과 음욕이었다.
종언을 제외한 7죄 중 나태를 제외한 모두가 쫓겨난 상황에서 싸움은 개판 오 분 전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그들의 힘은 차원 전체의 유지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애초에 그들을 노리고 만들어진 거품 세계였다.
인색과 음욕. 탐욕. 질투, 분노. 다섯의 전쟁은 대지를 불태우고 하늘을 오염시켰다.
“빌어먹을! 꺼져!!!”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탐욕과 질투를 쳐내며 분노가 격성을 터뜨렸다.
“저 새끼들 있잖아! 왜 나한테 오는데!”
“나보다 강한 놈은 용서할 수가 없어.”
“네가 가진 걸 다 내놔. 다 내 꺼야!”
원죄들은 끔찍할 정도로 순수했다.
이렇다 할 심리전 따위는 이들에게 의미가 없었다.
오로지 본능에 몸을 맡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으아아아!! 이 개x끼들! 죄다 찢어 죽여버리겠다!”
그것은 먼저 나와 교만을 삼켜버린 분노도 다를 바가 없었다.
지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그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여력조차 없었다.
눈앞에 달려드는 이 미친놈들을 처리해야 했으니까.
맹렬하게 충돌하는 인색과 분노, 탐욕과 질투의 싸움은 지형을 순식간에 수십 번은 바꿔나갔다.
그 와중에도 유일하게 한 놈은 싸움에 적극적으로 참전하지 않았다.
바로 음욕이었다.
“아…… 저런 것들 말고……. 미끈미끈하고 끈적거리는 게 더 좋은데…….”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원죄와 달리 그는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본체에 돌아갈 수야 있지만 그렇게 하려면 남은 네놈의 어그로를 모조리 끌 가능성이 있었다.
의자는 하나인데 그 의자를 차지하려는 자가 무려 다섯.
끔찍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여기 있다간 나도 휘말리겠군.”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농밀한 정사였다.
저런 땀내 나는 건 그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물론, 그걸 상대가 두고 보지는 않는다.
콰아앙!!!
음욕을 향해 날아드는 신형으로 인해 막대한 폭음이 일어났다.
“어휴…… 야만적인 새끼들…….”
“넌 뭐야 이 새끼야!!”
탐욕과 질투의 공격에 튕겨 나온 분노가 격분하며 음욕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다른 원죄에 비해 이렇다 할 강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쩌어어엉!!!!
분노의 막대한 힘이 서린 주먹질을 음욕은 맨손으로 받아냈다.
“오호 이 새끼 제법이네.”
분노가 격노를 숨기지 못한 채 스산하게 말하며 다시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음욕은 다시 한번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봐. 범죄자가 사람을 겁탈할 때 피해자가 평소 이상의 힘으로 저항하는 건 알고 있나?”
“뭔 개소리야 미친놈이.”
뻐어엉!!
분노의 발길질에 음욕이 힘없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천천히 일어나며 말한다.
“그럼에도 사건은 터지지 왜일 거 같아.”
“하. 진짜 별별 것들이 다 열 받게 만드네! 진짜!!”
“겁탈을 자행하는 가해자는 7배가 넘는 힘을 보이거든.”
음욕이 스산하게 웃는다.
“난 지금 비화 누님밖에 눈에 안 들어와.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기 전까지 나는 멈추지 않아.”
끔찍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음욕이 한발 내디뎠다.
쩌어어엉!!!
동시에 분노의 신형이 음욕의 주먹에 맞고 저항 없이 튕겨 나갔다.
“나는 그래서 상시로 평소의 7배나 강한 힘을 내고 있다는 뜻이야. 멍청한 놈.”
분노를 튕겨내 버린 음욕은 다시금 관심을 끄고 바깥으로 나갈 방법을 찾았다.
여기선 본체로 돌아가기 힘들다.
하지만 사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곳에 나왔다면 독자적으로 비화를 만날 수가 있을 텐데.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본능적으로 본체에 돌아가려는 다른 것들과 달리 음욕은 가히 다른 방향으로 미쳐있었다.
“으흐흐흐…… 누님. 이 동생이 가요. 제가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내 사랑.”
섬뜩하게 말하며 그가 공간에 간섭하여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려던 순간이었다.
파직!!!
마치 공간이 단절된 것 같은 끔찍한 감각에 음욕은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공간이 잘려나갔어?”
황당한 얼굴로 차원을 간섭하려던 그가 물러났다.
이런 짓이 가능한 사람은 세상에 많이 없다.
“어머니…… 어머니군요?”
시공격검을 극한까지 익힌 존재. 일리나를 떠올리며 그가 입맛을 다셨다.
주구장창 싸우는 난장판이 더욱 심화되어 간다.
급기야 가장 먼저 인색이 나가떨어졌다.
격한 싸움 속에서 가장 힘이 약했던 인색은 자신의 소멸과정에서도 자신의 힘을 아끼고 아꼈고, 끝내 탐욕에게 힘을 빼앗기고 분노의 일격에 몸을 관통당해 증발하듯 사라졌다.
남은 원죄는 음욕과 분노, 탐욕과 질투였다.
서로가 서로의 힘을 깎아내리고 부서뜨려갔다.
그렇게 모두 비화의 계획대로 방해가 되는 원죄들을 모두 쳐내려던 비화의 계획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멍청한 것들. 지금 니들 속고 있는 거야.”
의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쫓겨났던 다른 원죄와 달리 다리안과 이어진 의식 공명에서 스스로 빠져나온 녀석은 느긋하게 걸어와 바닥에 추욱 늘어지듯 드러누운 채 말했다.
“여기서 니들끼리 치고받고 사우면 누가 제일 이득이겠어…….”
의욕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하는 존재. 나태였다.
그는 다른 원죄와 달리 스스로 빠져나왔고 남은 네 명에게 모두 말했다.
“뭐야 이 새끼는.”
나태는 다른 이들과 달리 적의를 거의 받지 않았다.
이유는 다양했다.
하찮아서.
그다지 끌리지 않아서.
질투할만한 것도 없을 정도로 나태해서.
이유는 가지가지였지만 그들이 나태에게 시선을 모은 것은 사실이었다.
“어휴. 귀찮아…… 잘 들어. 난 조용히 쉬고 싶으니까. 한 번만 말하지. 지금 여기서 너희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건 너희를 쫓아낸 다른 가능성들의 계략일 뿐이야.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건데 너희 참 멍청하구나?”
피식 비웃음을 던진 나태가 하품을 쩍쩍해댔다.
“그래서 뭐. 한 번만 더 까불면 너부터 쳐 죽이는 수가 있어.”
“힘을 합치라고. 너희는 본체에 돌아가고 싶은 거 아니야? 나야 상관없지만.”
그 말에 원죄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힘의 총량은 분노가 가장 높지만 다른 이들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먼저 희생된 교만이 약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것이 오만이었으니까.
가진바 힘은 부족한데 오만하다. 교만의 경우 그것이 그의 존재의의이기도 했다.
“음욕. 넌 비화 누님을 원하는 거 아니야? 여기서 싸우다가 죽을래? 분노. 넌 여기서 날뛰는 건 좋은데 그 후엔 어쩔 건데. 네 분노를 어디다 풀래. 탐욕 너도 마찬가지야. 여기서 빼앗으면 그다음은?”
나태의 논리에 세 원죄는 입을 다물었다.
반면 질투가 짜증스레 묻는다.
“나는 이 새끼야.”
“넌…… 하…… 됐다. 넌 너 알아서 해라.”
그의 말투는 질투의 자존심을 긁기에 충분했다.
“이 새끼가!!”
질투가 그를 향해 다가가려 할 때였다.
“잘 생각해. 너희는 그냥 지금 놀아나고 있는 거야. 멍청이들아. 그러니까 제안할게. 솔직히 귀찮지만, 목표를 위해서 조금 귀찮아지는 건 오히려 조미료에 가깝지.”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앉은 자세 그대로 말한다.
“당한 건 갚아줘야지. 내가 너희가 돌아가게끔 도와주마.”
“널 믿으라고?”
“걱정 마. 너희를 다 돌려보내는 거로 나도 이득은 있으니까. 난 아무래도 좋으니까 나태하게 놀고 싶거든.”
나태의 제안에 원죄들은 모두 돌아오는 듯싶었다.
“자. 어떻게 할래.”
나태는 멍청이들을 속으로 비웃었다. 이대로 저놈들을 돌려보내면 저놈들이 이곳에서 남겨놓은 잔재 힘을 먹고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는 나태의 파라다이스를 만들 생각이었다.
애초에 나태에게 다른 세상이나 본체는 관심 밖이었다.
극단적으로 뒤틀린 다른 케이스였다.
고민하는 원죄들을 보며 그는 느긋하게 승낙을 기다렸다. 저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남은 원죄들은 하나같이 그를 향해 다가온다.
“자. 대답은 나온 것 같으니 계획을…….”
다만 나태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서로 간에 접점이 없어 서로를 잘 모른다는 것이 첫째였고. 둘째는 이미 음욕이 싸울 의사가 없었음에도 그를 끄집어내 싸움판에 밀어 넣은 게 바로 이놈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즉. 이것들은 나태의 상상 이상으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
나태가 일부러 다리안의 몸에서 나온 것조차 의미가 없을 정도로.
“x까 이 새끼야. 네가 뭔데 열 받게 이래라 저래라야.”
“기분 나쁘네. 이 새끼?”
나태의 패착은 눈앞의 원죄들이 나태의 생각 이상으로 미친놈들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콰아앙!!!
막대한 충격파가 나태의 육신을 휘감았다.
“이런 X…… 나는 내가 쉬는데 방해하는 것들을 제일 싫어하는데…….”
나태의 몸에서 지금까지 원죄와 다른 막대함 힘이 흘러나온다.
동시에 나머지 원죄들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 근면성실은 절대 용납 못 하지.”
싸우겠다면, 전부 죽이는 수밖에.
나태가 섬뜩한 말을 중얼거리며 일어났고 잠깐이나마 협력할 듯싶었던 원죄들의 대규모 난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죽어 이 개자식들아!!”
분노의 외침과 함께 차원의 지형이 다시 초당 수십 번씩 뒤틀리기 시작했다.
* * *
원죄들을 모두 쫓아내는 것은 성공했다.
본래라면 그 과정에서 다리안의 가능성이 대량 소거되었어야 했지만, 비화의 난입으로 그것이 바뀌었다.
비화는 굳은 얼굴로 다리안의 심층의식에 잠들어있는 존재를 확인했다.
데이비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다리안의 가능성. 녀석을 쫓아내는 건 쉽지 않다.
그가 쫓겨나는 순간 마무리는 데이비의 몫이지만 그 과정은 비화가 해내야 할 일이었다.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기세가 다리안의 심층에서 흘러나온다.
대척점으로 있는 다른 가능성도 존재했지만, 너무도 미약했다.
다른 가능성의 말에 따르면 종언의 대척점에 있는 가능성은 가족애라고 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절제하고, 끝없이 발전하는.
어찌 보면 데이비와 가장 닮은 가능성.
본래라면 종언을 제외하고 가장 확률이 높은 가능성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저 가능성을 깨우고 그를 압박하고 있는 종언을 쳐내야 했다.
하지만 일개 가능성의 힘으로 종언을 쳐내는 건 쉽지 않았기에 비화는 자신의 권능. 조율을 이용해 종언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조용히 잠들어있던 종언의 가능성이 맥동하기 시작했다.
“너만 쳐내면 다리안을 지킬 수 있어.”
비화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른 이는 불가능한. 오로지 여신이며 조율인 그녀만이 간섭할 수 있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데이비에게 신뢰를 심어줄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