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24화
기적과도 같은 힘이 몰아친다.
에반젤린은 멍하니 그것을 보며 신기해했다.
복잡한 이야기는 에반젤린의 입장에선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고 머리가 아파 신경 쓰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코오나가 그녀가 품은 차원의 진주를 깨뜨려 막대한 힘의 폭주를 일으켰다는 사실이었다.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빛으로 휘감긴 하늘빛의 잔향은 다리안을 완전히 감쌌고, 다리안의 심장 소리까지 울려 퍼지는듯한 착각이 일게 만들었다.
마치 무아지경처럼.
코오나의 힘이 다리안과 공명하고, 다리안의 안에서 무언가가 새로이 피어나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앗.”
이윽고.
숨을 거칠게 쉬던 다리안의 호흡이 서서히 편안하게 변하는 걸 보며 에반젤린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코오나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리안을 끌어안았다.
“다리안…… 다리안…….”
비록 동갑내기라곤 해도 가족이다. 남매는 사이가 안 좋다고 하는데 지금의 에반젤린에게 있어서 다리안은 말 그대로 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후에 다리안이 크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지금은 그랬다.
쌕쌕거리며 잠들어있는 다리안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감이 든 에반젤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코오나를 바라보았다.
“언니…… 고마워요.”
“…….”
하지만 코오나는 지친 건지 생각이 복잡한 건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니?”
“미안…… 지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서…….”
코오나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코오나를 번쩍 들어 올린 에반젤린이 콧김을 뿜었다.
“흠흠…… 너무 가벼워요. 좀 많이 먹고…….”
“그…… 그만…….”
부끄러운지 그녀가 시선을 돌린다.
영주성엔 빈방이 많았기에 어디든 상관없었다. 다리안을 페르세르크와 에이리아에게 맡기고 복도를 걸어가던 에반젤린의 귓가에 코오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반젤린.”
“네?”
“너도 내가 엄마가 되는 건 싫니?”
그 물음에 에반젤린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해맑게 웃었다.
“네.”
“그렇구나…….”
예상했다는 듯 쓴웃음을 짓는 그녀였다.
“언니는 아직 시간이 많잖아요. 근데 뭐가 아쉬워서 유부남하고 결혼하려고 해요?”
“그건…….”
“잘 생각해봐요. 나는 바보라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솔직히 언니와의 관계는 엄마와 딸보다는 언니 동생이 더 좋은 거 같아요.”
티 없이 해맑게 웃는 에반젤린을 보며 코오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째서일까.”
“네?”
“전보다 더 진전되고 가까워졌는데…… 근데 더 멀게만 느껴지는 이유가.”
그녀의 자조 섞인 목소리에 에반젤린은 한참 동안 끙끙대며 고민했다.
그리고는 그녀 나름의 답변을 내놓았다.
“운명이 아니라서?”
“아하핫. 슬프네, 그건.”
* * *
격리된 차원에서 한바탕 싸움판이 터지고 남은 이들은 총 셋이었다.
분노와 나태.
그리고.
의외로 음욕이었다.
질투나 탐욕의 저항은 거셌지만 가리지 않고 공격해대는 범주는 분노 이상으로 미친놈들이었던 만큼 녀석들은 결국 포화를 당하고 산화했다.
다만 남은 나태와 음욕 분노의 힘은 원죄들 중에서도 최상위에 있었다.
분노는 계속해서 쌓인 상처에 분노가 폭발해 폭주상태에 들어섰고 나태는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모조리 비틀어버렸다.
반면 음욕은 굉장히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애초에 음욕의 관심은 이놈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힘을 더 소모하면 후일을 도모할 수 없지. 적어도 나는 남성보단 여성에게 강하단 말이지.’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혀를 날름거린 음욕은 나태를 향해 미친 듯이 덤벼드는 분노와 그런 분노에게 사로잡혀 같이 나태를 압박하는 거대한 거인을 보며 한발 물러났다.
그리고는 틈을 보고 그 장소를 빠르게 벗어나기 시작했다.
“멍청한 것들. 백날 천날 싸워보라지.”
약한 놈은 도태되고 강한 존재만 남았다.
“결국은 살아남는 놈이 강한 거야.”
여타 다리안과 달리 그는 굉장히 속물적이었다.
“그보다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
그렇게 말하던 찰나.
음욕의 시야에 여기 있어선 안 될 인물이 보였다.
“어?”
그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비…… 비화 누님!!”
그의 시야에 비친 것은 다름 아닌 비화였다.
아름다운 의상에 하늘거리는 천이 그의 눈동자를 어지럽힌다.
음욕이 가장 갈구하는 인물이다. 본래라면 절대 손을 대선 안 될 관계였지만. 음욕에게는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음욕은 순식간에 기척을 죽였다.
아무리 여신이라도 비화는 아직 불안정한 존재. 접근해서 접촉만 하면 승산은 있다. 그녀를 취하기만 하면 막대한 힘을 얻을 터.
그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슬금슬금 다가갔고 비화가 하품하는 것을 보자마자 그녀의 뒤로 빠르게 접근했다.
철컥…….
“어?”
터어엉!!!!!!
하지만, 비화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새하얀 총신에 금빛 자수가 서린 예술품처럼 보이는 권총의 총구를 그의 머리통에 겨누었고.
쩌어어엉!!
그대로 음욕을 날려버렸다.
“나한테 볼일이 많아 보인다?”
“끄윽…….”
천천히 몸을 일으킨 비화의 안광이 번뜩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음욕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단칸방의 공격에 치명타가 터진 것 같은 부상이 뒤따른다.
“너 말이야. 내가 참 궁금했던 게 있는데.”
비화는 손에 든 권총을 허공으로 던져버린 뒤 긴 머스킷을 가슴께에서 꺼냈다.
빛과 함께 튀어나온 머스킷에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력이 느껴진다.
“너희는 다리안의 미래 가능성을 놓고 만들어진 가능성이지?”
“끄으…… 누님. 너무 과격한 거 아닙니까?”
실실 웃는 그의 말을 비화는 담담하게 무시했다.
“대답.”
“하…… 우리라고 알겠습니까?”
그는 분노나 나태와는 달랐다.
“글쎄요. 궁금하면 한번 확인해보시겠습니까?”
철컥!!
“으악!!”
터어어엉!!!
순식간에 다가온 비화가 도망치려던 음욕을 짓밟고 미간에 머스킷 탄환을 박아넣었다.
“끄으윽…….”
그래도 다리안의 가능성이라고 제법 튼튼하기 그지없다.
다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흐으…… 누님이 밟아주는 거…… 생각보다 좋네요.”
“이…… 미친 새끼!”
퍼억!!!
비화의 발길질에 튕겨 나간 음욕의 눈에 음심이 번들거렸다.
“그 옷…… 치맛단이 너무 길지 않습니까?”
“웃기고 자빠졌네. 난 다리 드러내는 취미 없어. 대답이나 해.”
“저를 제압하면 알려는 드릴게.”
철컥…….
“아…… 잠깐…….”
터어어엉!!!!
순식간에 접근한 뒤 그의 머리통에 탄환을 처박아 넣은 비화는 녀석의 신형이 벽면에 처박히자 그대로 복부를 걷어차듯 더 박아넣은 뒤 머스킷을 들이밀었다.
“너. 생각보다 튼튼하구나?”
“원래. 밤 일이라는 게 굉장히 체력을 많이…….”
터어엉!! 텅!! 텅!!!!
신력으로 강화된 바위는 그가 튕겨 나가지 않게 버텼고, 비화는 계속해서 놈의 미간에 탄환을 박아넣었다.
그가 어떻게든 벗어나려 해보지만, 비화의 공격은 자비가 없었다.
“난 내 동생을 누이한테 음심이나 품는 개자식으로 키울 생각이 없어.”
따라서 넌 내 동생이 아니야.
터엉!!!
비화의 머스킷엔 이상할 정도로 감정이 실려있었다.
수차례 가해진 포화에 음욕의 몸은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있었다.
비화가 탄환을 발사할 때마다 억제된 힘은 이미 그를 본래의 힘을 꺼내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와…… 이건 좀 답이 없네.”
피투성이가 된 그가 씨익 웃는다.
“누님. 궁금해요?”
“대답.”
“우리는 가능성입니다. 미래가 아니라.”
그가 억지로 힘을 가하며 양쪽 팔을 박혀있던 바위에서 빼냈다.
“우리가 겪은 미래는 하나의 가설일뿐이고, 세상에는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는 겁니다.”
다른 원죄와 달리 음욕은 조금 음습하면서도 독특한 형태였다.
“하지만. 본체가 살아가면서 겪는 것들이 가장 가까워졌을 때. 우리의 힘은 더더욱 본체에 영향을 미치며 강한 힘을 부여하죠. 뭐. 나는 본체가 어찌 되든 상관없이 누님만 있으면 되긴 한다만.”
낄낄 웃으며 그가 빼낸 손의 손가락을 징그럽게 움직이며 말했다.
“누님. 가기 전에…….”
터어어엉!!
비화의 탄환이 음욕의 숨통을 끊었다.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야 이 개x끼야. 넌 내 동생도 아니지만.”
적어도 다리안이 저런 꼴이 되는 건 반드시 막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비화였다.
쿠우웅!!!!!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폭음이 울려온다.
비화가 이곳에 왔듯. 이미 데이비 또한 이곳에 와있다.
나머지 원죄들을 모두 쳐낸 뒤 종언을 끝장내지 않으면 다리안에게 어떤 악영향이 끼칠지 알 수 없다.
비화는 빠르게 날아올랐고 이내 데이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생각 이상의 결과를 눈에 담았다.
피떡이 되어버린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두 원죄. 나태와 분노.
그리고 마찬가지로 상처가 심하지만, 아직 숨은 붙은 채 쓰러져 있는 거인이 보인다.
원죄. 음욕은 비화에게 처단당했다.
하지만 그것은 음욕이 방심한 채로 비화의 권능을 맞아 약해진 결과였기도 하고 비화가 상상 이상의 막대한 힘을 방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단순히 느껴지는 힘만 놓고 봐도 음욕보다는 분노와 나태가 일방적으로 더 강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데이비는 그 짧은 시간 안에 둘을 완전히 끝장내버렸다.
과거 교만 때처럼 그 정체에 당황해 놓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시간을 끌면 다리안에게 악영향이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나저나…… 저항이 거세지 않았어요?”
“그랬지.”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
비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을 휘저었다.
“종언도 이 차원 어딘가에 가두어놨어요. 하지만 명심해야 해요. 원죄와 다르게 종언은 정말로 위험하니까.”
“알고 있어.”
“분노만으로도 지구에 영향이 간 거 기억하시죠? 종언은 비교도 할 수 없을 거예요…….”
비화가 진지한 얼굴로 허공에 손을 그었다.
그러자 점차 공간이 비틀어지며 어떤 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있는 곳과 같지만 완전히 다른 세상. 그곳은 어떤 규칙도 없는지 혼란 그 자체였다.
하늘에 뜬 바윗덩어리들과 비틀린 지형, 공기의 배율도 엉망진창으로 어지간히 생존력이 좋은 생명체조차 잠깐도 버티지 못할 정도로 뒤틀려 있었다.
그중 무엇보다 끔찍한 건 주변의 고목들이었다.
이미 잠식되기라도 한 것일까. 허공과 바닥 곳곳이 깨지고 찢어져 있고, 그 틈사이로 검게 죽은 썩은 고목의 줄기들이 튀어나와 허공과 바닥에 들러붙어 맥동한다.
썩은 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늑대.
녀석의 공간에 있던 나무와 동일한 것이었다.
“저 나무는?”
“다리안의 내면에 있던 종언의 영역에서 봤던 것들이에요. 겉보기엔 썩은 나무처럼 보이지만…….”
비화가 가볍게 신력을 뭉쳐 날려 접촉하자 나무는 신력을 먹어치우고는 꿈틀대며 더욱 뻗어 나간다.
“어쨌든, 좀 징그러워요.”
비화의 설명에 데이비는 한숨을 내쉬고 쓰러져있던 거인에게 다가가 회복마법을 걸었다.
“그 거인이. 말씀하셨던 그 녀석이에요?”
“그래.”
이후 데이비가 한 손을 주먹 쥐고 뒤쪽 허공을 후려치자 그의 주먹이 닿은 곳을 중심으로 허공이 깨져나간다.
동시에 그 틈 안에서 붉은색과 푸른색의 검이 검집에 씌워진 채 빠져나와 데이비의 허리에 안착했다.
“갈 거죠?”
그 말에 데이비는 빙그레 웃었다.
파앙!!!!!
동시에 데이비의 손날이 비화를 노렸고, 비화는 웃는 얼굴로 양손을 들어 올려 데이비의 손날치기를 막았다.
비화의 뒷목을 가격해 그녀를 기절시키려던 시도가 무산되었다.
“어쭈?”
“내가 아빠 하루 이틀 봐왔는지 알아요? 절대 안 되지.”
“얌전히 돌아가. 생각보다 너무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위험성을 느낄 정도로 어둡고 짙으며 스산했다.
규칙이 박살 난 틈에서 이 정도의 힘이 퍼져 나온다는 건 녀석의 파괴력이 단순히 놓고 봐도 신급의 존재와 비견될 정도였으니까.
비화는 데이비에게서 가해지는 힘을 받아내며 익살맞게 웃어 보였다.
“절대 안 되지. 아빠. 잊었어요? 급으로 치면 내가 아빠보다 상사인데?”
“부하직원한테 맞고 싶지?”
“어허. 이거 엄연한 하극상이에요. 알아요, 몰라요? 나 때는 이런 거 상상도 못 할…….”
빠악!!
“악!! 때렸어요?! 엄마한테도 맞은 적이 없는데!”
눈물이 핑 도는지 비화가 씩씩거리며 데이비를 노려보았다.
“헛소리하지 마. 엄마가 안 때리면 아빠라도 나서야지. 그리고. 페르세르크에게 종아리를 맞은 기억은 어디가 팔아먹었고.”
“아 됐고!! 여기서 때려죽이던지 같이 가던지!”
“…….”
“나 아빠 보호받아야 할 만큼 어린애 아니거든요! 게다가 제가 이번에 신뢰를 얼마나 쌓았는데 이렇게 나올 거에요?”
으르릉거리는 그 모습에 데이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언제까지고 감쌀 순 없지…… 그래, 가자.”
그 말과 함께 균열 틈으로 들어선 그 순간이었다.
파앙!!!
반사적으로 데이비가 비화를 밀쳐내려 하자 비화가 데이비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비화가 조금만 긴장을 놓았어도 튕겨 나갔으리라.
그리되면 데이비는 백 퍼센트 확률로 틈을 닫아버렸을 것이다.
“하…… 포기를 모르시네요.”
“와. 영악하긴. 그걸 안 속네.”
“흐흣. 내가 한두 번 속나~”
귀엽게 웃으며 그녀가 데이비의 등을 떠밀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데이비의 행동에 비화는 또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를까 싶어 인상을 찌푸렸다.
“아빠. 또 그럴…….”
“비화야. 먼저 가라.”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장난기 하나 없는 목소리였다.
방금 전까지 비화는 함께하는 것조차 막으려던 그가 보인 행동이라곤 믿기지 않는 결단이었다.
“아빠?”
저벅…… 저벅…….
동시에. 엉망진창이 된 균열 너머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무로 된 거대한 늑대 형상을 한 종언의 발소리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