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25화
대화보다는 탐색전이었다.
침을 꼴깍 삼키는 비화도 이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긴장한 얼굴이었다.
이윽고 태양조차 없으나 보랏빛으로 물든 저편에서 발소리의 주인이 나왔다.
가면을 쓴 청년.
그는 말없이 막대한 존재감을 뿜으며 걸어 나온 뒤 고개를 돌렸다.
가면에 가려졌지만,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다름 아닌 비화였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화와 데이비 모두 볼 수 있었다.
그의 손이 아주 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빠…… 내가 지금 미쳤나 봐요.”
“너도 그러냐. 아빠도 그렇다.”
비슷한 경험은 많이 해봤다.
성별이 바뀐 본인도 본적이 있고, 같은 존재에서 나와 자신이 진짜라 믿는 이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완전히 같은 존재.
서로 가짜가 아닌 진짜.
“다행이다…….”
이윽고 가면 너머에서 씁쓸한 목소리가 변조되어 흘러나왔다.
“가라.”
이윽고 그가 비화에게 먼저 가라고 말했다.
“무슨…….”
“걱정 마라. 널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으니.”
변조된 목소리로 차갑게 말한 그의 전신에 힘이 터져 나온다.
동시에 데이비에게서도 동일한 힘이 흘러나왔다.
“넌 여기서 못 지나간다.”
“누구 마음대로.”
“자식의 앞길을 가로막는 멍청한 짓을 할 생각은 집어치워라. 그 아이들이 언제고 네가 보호해줘야만 하는 아이들로 보이나.”
상대의 정체가 누군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아빠…… 어떻게…… 해요?”
“가. 아무래도 계획은 치밀한 모양이네.”
그 말에 비화는 눈치를 살살 살피다 빠르게 날아올라 그를 지나쳤다.
그렇게 비화가 그를 지나치려던 찰나.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
그녀를 움찔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씨……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녀가 그를 지나쳐 사라진다.
“쓸데없이 힘 빼지 말지.”
“누구 마음대로.”
데이비의 양손에 청단이와 홍단이가 쥐어진다.
하지만. 곧 그는 손을 놓고 맨손으로 걸어 나갔다.
“그건 쓰지 않을 건가?”
“적어도 네가 누군지 대충 감이 오는 상황에서 얘들을 쓸 순 없을 거 같은데.”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마나가 흘러나왔다.
너무도 익숙한 마나였다.
“종언은 위험한 거 아닌가?”
“적어도 비화가 네가 걱정해야 할 만큼 어린애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의 말에 데이비의 심기가 묘하게 비틀렸다.
순식간에 둘의 주먹이 충돌한다.
일반인이었다면 둘 중 하나는 주먹이 상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양측 모두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쩌어어엉!!
한순간에 수백 개의 마법이 캐스팅되었다가 동시에 디스펠 당한다.
서로가 서로의 마법에 대해 잘 알고 서로가 서로의 전투방식에 대해 너무 잘 알았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이곳은 모든 법칙이 엉망진창이 된 장소.
단순히 프리아 여신이 만든 특수공간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렇게 속 편한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많아 보이네. 여기가 왜 이런 건지 궁금한가?”
터어어엉!!!
묵직한 충격파와 함께 밀려난 데이비가 기검을 뽑아내 손에 쥐었다.
“종언인가?”
“정확히는 여신이 만든 특수한 공간에서 종언의 영향력이 시너지를 발휘한 거지. 종언의 힘은 모든 법칙의 붕괴와도 연관되어있으니까. 맨몸으로 싸우기엔 목숨을 걸어야 할 거다.”
“왜 이런 위험한 공간을 만든 건데. 멍청이냐?”
“종언에게도 이득이지만. 이공간이야말로 녀석을 끝내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이기도 하거든.”
그가 숨을 짧게 골랐다.
“그래도 세월 차이가 있는데 실력 차인 크지 않네. 어지간히도 녹슬었나 본데.”
“막상 내가 상대 입장이 돼보니까 열 받네. 서로 공유도 좀 하고 그래야지.”
지금까지는 직접 찾아가서 데이비가 직접 진실을 말해주고 변화를 일으켰다면. 이번엔 정반대였다.
“우리 서로 알 거 다 아는 마당에 말이나 해.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야.”
데이비의 질문에 가면을 쓴 남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이상으로 종언을 기다려온 이가 있다.”
“…….”
“자기만족일지라도 나는 막을 자격이 없으니 여기서 네가 난입하는 것만큼은 막아야겠다.”
그가 가면을 슬쩍 건드린 뒤 헛기침을 했다.
“믿어주는 것도 부모의 미덕 아니냐. 그러니 여기서 널 보낼 생각은 없다. 이해하지 마라. 어차피 지금 넌 이해도 못할 테니.”
대신. 지나가고 싶으면 뚫고 가봐라.
그는 그리 말한다.
* * *
데이비를 뒤로한 채 규칙이 엉망인 혼돈을 보며 비화는 문득 과거 세계의 종말이 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물론, 붉은 공허와 생명력으로 인해 생긴 완전 종말은 이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공허 그 자체일 테지만.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력이 빠른 속도로 마모되는 기분이 들었다.
“끔찍하네.”
비화는 사뿐사뿐 걸어 나아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녀석의 기척이 느껴진다.
폭주하기 시작하며 마구잡이로 힘을 증폭시키는 종언의 낌새가 더욱 강해지는 게 느껴졌다.
“저기 있구나…….”
비화가 발을 멈춘 곳은 이미 썩은 고목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데이비는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사정이 생겨 비화 홀로 온 참이었다.
이 상황에서 그녀 홀로 들어갔다가 위기에 처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할 순 없었다.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
데이비는 안 오는 게 아니라 못 오는 것이었다.
그가 올 때까지 버티는 게 상책이라곤 생각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하책에 불과했다.
“우선 녀석의 상태를 확인해볼…….”
쉬리리리리릭!!!
그때였다.
고요하게 침묵하던 숲이 요동치더니 바닥을 뚫고 튀어나온 줄기들이 일제히 비화를 향해 날아든다.
숨죽이고 기회를 엿보려던 계획이 비틀어졌다.
터어어엉!!!
하지만 비화는 침착하게 머스킷을 뽑아내 그녀의 신력을 쏘아 보냈다.
그녀가 쏜 무형의 탄환은 고목의 줄기에 닿기가 무섭게 마치 공간을 찢어버리듯 범위 안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녀의 권능은 억제와 폭주를 이용한 조율이지만 여신이 딱 그 정도의 힘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직 이해가 안 되는 것들투성이인데 진짜!”
짜증을 부리며 그녀가 빠르게 날아오르자 고목의 줄기들이 바닥과 공간을 찢고 그녀를 향해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이런 거로 날 잡을 수 있겠느냐?”
터엉!!!
빠른 공격들이지만 비화에겐 닿지 못했다.
그녀는 마치 신들린 것처럼 고목 줄기들을 피해 날아오르며 머스킷의 방아쇠를 쉴 새 없이 당겼다.
그녀의 공격 한 번 한 번에 일대 공간이 죄다 그녀의 영역으로 변하며 닥치는 대로 줄기들을 찢어버렸지만 종언 또한 힘의 한계가 없다고 말하듯 계속해서 줄기들을 쏘아 보냈다.
그나마 남아있던 대지들이 썩어들어가며 바스러진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지 튕겨 나간 바위나 흙들은 허공에 부유한 채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끝이 안 나겠는데.”
기왕 들켜버린 것이라면 데이비가 올 때까지 그녀가 최대한 길을 닦아놓는 게 상책일 터.
언제까지고 안 믿어준다며 화를 낼 게 아니라 그녀 스스로 길을 개척해나가야 할 터였다.
이윽고 그녀가 피하는 걸 너머 숲 깊은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자 고목 줄기들의 속도와 수가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숨어있다고 내가 널 못 찾을 거 같아?”
숲에는 거대한 늑대가 보이지 않았지만, 비화에겐 똑똑히 보였다.
규칙이 엉망진창인 이 숲에서도 유별나게 이질적인 공간이 있음을 말이다.
그리고, 그곳으로 향할수록 놈의 저항도 점차 거세져만 갔다.
휘리리릭!!
급기야 고목 줄기 중 하나가 황급히 비화의 발목을 휘감아 그녀의 전진을 방해했지만 제 키만 한 머스킷을 꺼내 겨눈 비화를 막을 순 없었다.
“찾았다. X새끼.”
터어엉!!!
엄청난 반동과 함께 원형으로 이루어진 충격파가 총구를 타고 퍼져나간다.
막대한 신력이 섞인 한방은 고스란히 이질적인 거목에 닿았고.
콰지지직!!!
그곳의 공간을 강제로 폭주시켜 비틀어버렸다.
-크아아아아앙!!!
뒤이어 공간이 갈라지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거대한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갈기까지 구현된 나무로 만들어진 정교한 거대늑대.
그 크기는 처음 비화가 봤던 사이즈보다 훨씬 거대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단순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움직임은 잽싸기 그지없었다.
“아빠가 있으면 든든하긴 한데. 널 끝장내는 건 결국 나잖아.”
녀석에게 제대로 된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것도, 숨어버린 녀석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오로지 비화이기에 가능했다.
그만큼 종언은 그 존재부터가 모호한 존재였다.
“이걸 종언이 사기라고 해야 할지. 다리안의 재능이 사기라고 해야 할지.”
새삼 다리안의 가능성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힘이 부족한 것도 사실인데…….”
비화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표정을 굳혔다.
막상 모습을 드러낸 녀석을 보니 여신인 그녀조차 두려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섬뜩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비화는 언제 당했는지 팔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잘못하면 진짜 위험하겠네.”
비화는 단순히 목적을 위해 무모하게 들이박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미 다리안의 내면에서 크게 당한 만큼 절대 방심하지 않았으니까.
자칫하면 여신인 그녀조차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존재.
그렇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두어야 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빠가 오기 전까지 최대한 놈의 힘을 억제해두는 것.
녀석의 힘이 위험하듯. 비화의 힘도 녀석에겐 위험하기 그지없을 터다.
철컥…….
비화는 양손에 든 머스킷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마치 탄피가 배출되듯 그녀의 총 옆면에서 무형의 파장이 터져나가며 원형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억제]
이미 억제를 맞은 만큼 녀석에겐 비화의 억제가 어느 정도 걸려있을 것이다.
-크아아아앙!!!
비화가 극도로 위험한 대상이라는 걸 확실히 인지한 것인지 녀석은 곧바로 비화를 향해 거대한 체구를 들이밀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어떻게든 그녀를 찢어버리기 위해 저돌적인 공격을 감행했지만, 비화는 공간이동을 하듯 이동하며 종언을 계속해서 농락했다.
터엉!! 텅!!
종언은 아직 제힘을 모조리 끌어내지 못하는 건지 비화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녀석의 공격을 피하거나 막아내며 계속해서 억제탄을 쏘아댄 탓일까.
녀석의 움직임이 놀라울 정도로 느려지는 게 확실히 보였다.
그쯤 되니 비화의 머릿속에 슬금슬금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 이지가 없어. 어쩌면, 아빠가 오기 전에 녀석을 끝장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녀석이 제대로 된 이성이 있었다면 그건 정말로 종말에 가까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그러지 못했다.
여유가 어느 정도 생긴 비화와 달리 종언은 더욱더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비화의 큰 그림에 가까워졌다.
-크아아앙!!!!
참지 못한 녀석이 비화를 향해 대뜸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비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멍청하긴.”
철컥.
비화는 녀석이 공격할 때마다 드러나는 입안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녀석이 가장 위협적이면서도 가장 약한 부분으로 추정되는 곳.
그것으로 충분했다.
비화의 방아쇠가 당겨지며 거대한 충격파가 신력과 뒤섞이며 종언의 입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다.
“꺄악!”
단 한 번에 일격필살을 노렸기에 비화도 자신이 현재 다룰 수 있는 신력의 대부분을 털어 넣은 탓일까.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게 되어버렸다.
“아구구…… 아프다…….”
알싸한 통증에도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무너지는 거대한 늑대. 그리고, 그녀를 향해 날아들던 고목 줄기들이 파스스 흩어지는 게 보였다.
비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녀석을 완전히 끝장내진 못했어도, 녀석이 더 이상 데이비에게 어떤 위협도 가할 수 없는 수준까지 억제하는 데엔 성공했다.
당장은 녀석도 움직이지 못할 테니 시간을 들여 힘을 회복하기만 하면…….
콰아아앙!!!
그때였다.
바닥을 뚫고 튀어나온 거대한 앞발을 보며 비화는 피식 웃었다.
발악이라는 게 고작 이 정도.
그녀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채찍질해 거대한 앞발을 피해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방심이었다.
쩌어어엉!!
분명 앞발은 피했건만.
앞발이 지나간 공간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말도 안 되는 충격이 그녀를 지면에 처박아버렸다.
“아윽!!”
끔찍한 격통에 시달린 그녀가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한쪽 시야는 붉게 물들었다. 이마에 큰 상처가 나며 피가 흐른 탓이리라.
“방금 무슨…….”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찰나.
비화는 볼 수 있었다.
방금까지 억제되어 약화하여있던 종언의 늑대가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말이다.
“아…….”
방심을 한 건 저놈이 아니고 나였구나.
다시금 힘을 끌어올려 녀석의 사정권에서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거대한 나무줄기가 마치 구체처럼 펼쳐지며 그녀가 있는 공간을 휘감았다.
직경 수백 미터에 달하는 고목 줄기들은 마치 감옥처럼 그녀를 가두었고 이내 그녀에게서 신력을 강제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건…… 포식?! 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그녀가 허공에서 경련했다.
녀석의 힘은 데이비의 포식처럼 그녀에게서 신력을 흡수했다.
‘이거…… 진짜 위험한데……. 얼른 도망쳐야…….’
비화는 그제야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음을 깨닫고 저주받은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억지로 힘을 끌어냈다.
하지만 종언은 그녀가 그렇게 두지 않았다. 마치 오랜 시간 그녀를 가두고 힘을 빨아먹으려는 것처럼 그녀의 퇴로를 틀어막았다.
“아윽!! 끄으윽!!”
마치 감전된 것처럼 파르르 떨며 주저앉은 그녀가 몸을 웅크렸다.
두려움보다 분노가 일었다.
이렇게 되면 또 결국은 아빠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겠구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그녀를 휘감는다.
하지만 의식은 점차 그녀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여기서 의식을 잃으면 아빠에게 발목을 잡게 될 거야.’
종언이 강한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힘을 숨기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쪽도 숨겨놓은 모든 것을 꺼내 드는 수밖에. 개싸움은 취향이 아니지만.
저쪽이 개싸움을 원한다면 이쪽도 응해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쉬리리릭!!! 서걱!!
얇은 금속음과 함께 무언가가 잘려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비화의 몸에 파고들던 격통들이 일제히 사라졌고. 비화는 천천히 눈을 뜨며 종언을 바라보았다.
끔찍한 고통을 호소하며 비화에게서 한 발 두 발 물러난다.
그때. 비화의 양옆으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멍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검은 로브를 칭칭 휘감은 채 머리만 드러내고 있는 한 수인족 청년과 머리에 작은 뿔이 달린 흑발의 소녀가 있었다.
청년도 청년이지만 소녀의 정체도 한눈에 알아보았다.
단 하나도 변한 게 없으니까.
처음 가면을 쓴 인물이 나왔을 때 어느 정도 그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공간이 뒤틀려도 말도 안 된다고. 그게 가능하게 하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한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모른척할 순 없었다.
착각이 아니었으니까.
“하…… 하하……. 설마 했는데 진짜야?”
“…….”
“다리안. 에반젤린…….”
그 말에 소녀는 눈가가 촉촉해진 얼굴로 비화를 바라보았다.
“언니.”
반면 다리안은 한 걸음 더 나아가며 종언을 시야에 담았다.
“이 세상에서 나만큼 널 기다려온 사람은 없을 거다.”
그중 청년이 조용히 일갈하며 한 손의 손가락을 뚜둑 소리 내며 꺾었다.
다리안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가히 폭력적이었다.
이 세상에서 종언의 존재가 다리안에게서 빠져나오기를 가장 기다린 이.
그것은 데이비도 비화도 아니었다.
비화의 희생으로 살아남아 평생 죄책감을 떠안고 살아온 다리안 본인이었다.